
황금빛 찬란한 산 마르코(San Marco) 대성당
베네치아 여행은 늘 산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에서 시작된다. 그곳이 베네치아의 정치, 종교, 문화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름 한낮의 산마르코 광장은 그야말로 불타는 듯하다. 사람들도 대부분 광장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건물의 그늘 아래로 몸을 피하곤 한다. 그래서 이곳을 보려면 해가 진 저녁 무렵이 훨씬 편하다.

게다가 밤에는 그 광장의 레스토랑에서 악사들이 경쟁하듯이 음악을 연주하여 즉석 라이브 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한다. 물론 악사들은 레스토랑에 온 손님들을 위하여 연주하는 것이지만 좌석이 대부분 밖에 있으니 광장 전체에 모인 사람들을 위하여 연주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여름밤에는 이곳에 들려 한 밤의 음악회를 감상하면 좋다. 우리는 민박집 주인이 저녁에 이곳을 안내해주어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마르코 대성당이나 두칼레 궁전을 보려면 낮에 와야지 관람이 가능하다. 우리는 낮에 대성당과 두칼레 궁전을 보고 저녁에 다시 이곳을 찾아와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구경하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광장의 동쪽에는 복음의 저자였던 마르코의 유해를 보관한 산마르코 대성당과 도제(Doge,총독)의 관저이자 정부청사이기도 했던 두칼레 궁전이 있으며 그 앞의 삼면으로는 아름다운 주랑이 광장을 감싸고 있다. 광장의 가운데는 96m 높이의 우뚝한 종탑이 광장을 굽어보며, 바다 쪽에는 오벨리스크 같은 기둥주두의 날개 달린 사자상이 베네치아를 지키고 있다.
이 날개 달린 사자상은 바로 <베네치아 영화제>의 대상인 ‘황금사자상’의 모습으로 익숙한 것인데, 곧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이자 『마르코복음』의 저자인 마르코의 문장이며 베네치아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마르코가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됐을까? 사실 최후의 만찬 당시에 예수님에게 방을 제공했던 부자의 아들이면서 베드로가 ‘내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근했던 사도 마르코는 전도를 하다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죽었다. 그런데 그의 유해는 800년경 베네치아 상인에 의해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로 위장하여 몰래 반출되어 베네치아로 오게 된 것이다.
기독교가 국교화되어 정치와 문화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막강한 위력을 떨치던 시대에 유럽의 도시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수호성인을 지정하였고 그것으로 도시의 상징을 삼았다. 로마는 이미 그곳에서 순교한 예수의 제1제자 베드로의 유해를 안치하고 그 위에 대성당을 지었으며, 피렌체는 세례 요한으로 도시의 수호성인을 삼아 ‘산 죠반니 세례당’을 지었다. 무역업을 주로 행했던 베네치아는 바로 부유한 사도였던 마르코로 도시의 수호성인을 삼기 위해 그의 유해를 이집트에서 비밀리에 빼돌린 것이다.


어쨌든 마르코의 유해가 베네치아에 도착하자 곧 그것을 안치할 성당의 건립에 착수하게 되었고 832년 마르코에게 성당이 봉헌된 것이다. 성당 안에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마르코의 유해를 옮기는 모습이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목자와 함께 하고 있는 두 명의 고위 성직자가 중앙 정문 앞으로 어깨에 진 관을 운구하고 있으며 정부의 집정관 도제와 고관들은 오른 쪽 문들 가까이에 모여 있다. 왼쪽의 문들로부터는 다른 고관들이 성 마르코의 유해를 영접하러 나오고 있다.
유교가 정치 이데올로기로 막강한 힘을 발휘한 조선시대에 우리의 서원도 공자나 주자 같은 유교의 성인들을 받들어 그 서원에 배향하고 제사를 지냈지만 그렇게 야단스럽게 유해를 훔쳐오는 일은 없었다. 그냥 그 인물의 상징으로 초상화나 위패만 모시고 배향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최초의 사액서원인 풍기의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주자학을 수입한 안향(安珦,1243~1306) 형제들을,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을 모셨으니 유해를 훔쳐오는 엽기적(?)인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우리의 서원에서는 지방의 사림(士林)들을 동질적인 이데올로기로 결집시켜줄 어떤 인물의 상징성이 중요했던 것이다.
마르코를 위해 봉헌된 성당이니 성당의 정면에 황금으로 장식된 날개 달린 사자가 복음서를 앞발로 받치고 있는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그 밑으로 아치형 입구의 위쪽에 청동으로 만들어진 네 마리 말이 두렷하게 드러나 있다. 바로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콘스탄티노플에서 전승의 기념으로 가져온 것이다. 그 전례를 따라 이곳을 점령한 나폴레옹도 네 마리 말을 프랑스로 가져갔고, 나중에는 오스트리아로 넘겼다가 다시 이곳으로 반환된 것이다. 이래저래 콘스탄티노플의 청동 말은 수난을 당해 베네치아와 그 영욕의 세월을 함께 한 셈이다. 원본은 박물관에 있고 복사본이 성당을 끄는 모습으로 입구의 기둥에 올려져 있다.
산마르코 대성당은 동방의 양식인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기에 이탈리아가 아니라 마치 동방의 어느 나라 성당 같은 느낌을 준다. 유럽의 대부분 성당처럼 고딕식으로 우뚝한 것이 아니라 목이 몸통에 붙은 모양이나 주저앉아 있는 짤막한 형상을 하고 있다. 성당의 곳곳을 황금색 모자이크를 많이 사용하여 장식을 했는데 특히 정면의 상층에 있는 4개의 대채광 천창은 저녁 석양이 질 때 붉은 노을빛이 황금색 모자이크에 반사되어 기막힌 광경을 연출한다. 정말 천국의 빛을 반사하는 것 같다.

성당의 내부도 황금색 모자이크 천지다. 이곳에 들어오면 서구의 성당이 아니라 동방의 어느 궁궐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동방박사>나 <살로메의 춤>을 묘사한 세례당의 모자이크화는 아주 이국적이며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성당 안을 걸어다니면 마치 페르샤 궁전의 황금 양탄자 위를 걷는 느낌이 든다. 왜 베네치아가 ‘동방의 관문’으로 역할을 했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대성당의 옆에 있는 두칼레 궁전은 베네치아 총독인 도제의 관저와 공화국의 정부청사로 쓰던 곳인데 고딕 양식을 주조로 하여 흰색과 분홍색의 대리석으로 외관을 장식해 화려하기 짝이 없다. 내부는 당시 청사의 공간으로 사용했던 회의실, 집무실, 문서보관소, 재판소 등 다양한 방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베네치아파 화가인 틴토레토(TintorettoJacopo Robusti,1519~1594)와 베로네세(Veronese Paolo Cariari,1528~1588)의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이탈리아는 유명한 그림이 많아서 그런지 미술관이 아닌 교회나 궁전에 걸려있는 그림 중에서도 엄청난 대작이 많은데 오히려 그림이 장소와 어울려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중에서 최고의 작품은 단연 대회의실의 벽면을 장식한 틴토레토의 대작 <천국>이다. 무려 700명이 넘는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 중심에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천사들에 둘러싸여 하늘을 오르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빛의 효과를 이용하여 극적 장면을 기막히게 표현하여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게 한다.

이곳 대회의실은 국가 최고 사법기관으로 재판을 행하던 곳이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등장했던 법정이 이곳이 아니던가. 2005년 개봉한 영화 <베니스의 상인>에서도 이곳을 무대로 법정공방이 벌어진다. 사실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일찍부터 세계화 되어서 장사에 밝고 머리 회전이 빨랐다. 그래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지독한 상술을 미워했는데 <베니스의 상인>도 그런 점을 반영한 것이리라.

대의회실 뒤로는 감옥으로 이어지는 ‘탄식의 다리’가 놓여있다. 재판을 받고 감옥으로 가면 평생 나올 수 없다 하여 그렇게 불린 것이다. 사연이 있어서 그런지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다. 그런데 이 탄식의 다리를 다시 건너 나온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저 유명한 카사노바다.

베네치아는 배를 타고 나가는 상인들이 대부분이어서 집에 혼자 있는 외로운 여자들이 많았는데 그는 모든 여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잘 해주어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카사노바가 감옥에 들어가자 수많은 여자들이 탄원서를 내서 결국 카사노바를 풀어주게 되었다 한다. 많은 문학작품에 호색한으로 등장하는 카사노바의 진실은 이러한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예, 레알토 다리 주변의 <베네치아 풍경>은 집사람의 작품입니다. 여행을 다니며 간단히 스케치 해서 집에 와 그리곤 했습니다. 한국에 와선 유럽의 도시 풍경으로 작년 여름에 개인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산마르코 광장의 여름 밤 연주회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연주됐는데 주로 세미 클래식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