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 최초의 중화동 교회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19세기의 바깥으로 밀려든 선교의 물결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 물결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이 서해의 백령도가 속해있는 대청군도이다. 대청군도와 인근해역은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해상의 중요한 교통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1816년 맥스웰(Murrey Maxwell)대령이 이끌던 선단에 클리포드(H.J.Clifford)해군 대위가 자비로 승선하여 각 지역의 언어를 수집하고 선교 가능성을 탐사하기 위해 백령도에 정박하여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 후 1832년 칼 귀출라프(Karl F.A.Gutzlaff)가 영국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동인도 회사 무역선에 통역 겸 선상 의사로 승선하여 개신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조선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그는 클리포드의 비망록을 기초로 하여 백령도에 정박해 있으면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여러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기 전 백령도에 임시 정박하여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조선의 사정을 알아보고 기다리는 역할을 했다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그 후 1898년 백령도 진의 첨사 자문역으로 참사 벼슬을 지냈던 허득이 복음의 씨앗을 받고 그 곳에 유배 되어온 김성진, 황학성, 장지영 등과 함께 한학 서당에 증화동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884년 9월 20일 알렌 선교사의 조선 입국보다도 50여년이나 앞서 복음의 씨앗이 백령도에 떨어졌고 조선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최초의 중화동 교회가 세워졌다는데 큰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백령도는 많은 빼어난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관광지로 백령 기독교 역사관을 비롯하여 허득 참사 기념비 등 여러 선교 유적지가 잘 보존되어져 있고 심청전의 인당수가 가까이 있어 심청이의 유적지 이기도 하다. 특히 백령 기독교 역사관은 군비를 들여 지어진 역사박물관으로 백령도 주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유적지이다.
중화동교회
1884년 황해도 송천에 최초의 자생교회인 소래교회를 세운 서경조 형제가 1898년 중화동교회 설립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인도했던 것도 소중한 역사다. 중화동교회는 1898년 8 월 25일(음력) 중화동의 한문서당에서 많은 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서경조 장로의 집전으로 설립예배를 드리게 됐다. 백령도는 이 중화동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가 급속하게 발전하게 됐으며, 지금은 해병대 백령교회 등 군부대교회를 비롯하여 10개 교회가 백령도 복음화에 힘쓰고 있다. 또 백령도 교회들은 힘을 모아 중화동교회 옆에 ‘백령 기독교역사관’을 설립하고, 지난 11월 20일 준공예배를 드렸다.
귀출라프 선교사
귀출라프 선교사 백령도 선교 장면, 혜촌 김학수 화백 그림,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소장
1816년 중국 대사를 수송하던 영국 함대가 서해안에서 해로탐사를 하며 접근했던 곳이 바로 백령도다. 기독교 복음전파의 시작인 셈이었다. 이후 영국 런던선교회 파송 선교사인 귀츨라프가 동인도회사 소속의 함선을 타고 들어와 통상에 실패하고 백령도에 들러 복음을 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귀츨라프는 백령도 이외에도 고대도 원산 등을 돌며 쪽복음을 전했다.
토마스 목사
1840년 9월7일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했으며 런던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 부임하였다. 1866년 한국선교를
희망하여 내한 1865년에 서북해안을 찾아와 백령도를 비롯 황해와 평안도를 순회하며 전도를 했다. 이듬해 토마스 선교사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백령도를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가 1866.9.2. 평양 대동강 양각도에서 순교했다. 토마스는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찾아와 순교당한 첫 번째 선교사였다. 그를 처형한 박춘권은 1899년 세례를 받아 영수가 되는 이적을 낳았다.
토머스 선교사와 기념 예배당
토머스 선교사 제너럴 셔먼호 기념 선교선
토마스 목사의 대동강변 순교장면,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그림
1865년에는 토마스 선교사가 서북해안을 찾아와 백령도를 비롯 황해와 평안도를 순회하며 전도를 했다. 이듬해 토마스 선교사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백령도를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가 순교했다. 토마스는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찾아와 순교당한 첫 번째 선교사였다.
알렌 선교사
중화동 교회 초대 당회장 언더우드 선교사
당시 황해도 지역의 선교를 지휘 감독하던 선교사 언더우드목사는 중화동교회의 초대 당회장이었다. 그는 성경과 찬송가 번역, 대한성교서회, 황성기독교청년회 사업 등으로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평안도와 황해도의 교회들을 순회하는 도중에 1900년 9월 26일경 평양을 출발하여 진남포, 은율, 풍천을 거쳐 소래에 도착했으며, 6주정도 지나 1900년 11월 8일 목요일(음력 9월 17일) 언더우드 목사 내외는 여전도사 김씨 부인의 안내를 받아 중화동 교회를 방문하여 언더우드 목사의 집전으로 7명에게 성례식을 베풀었다. 이날 세례자는 허 득, 허 근, 허 권, 허 륜, 최영우, 김흥보, 허간 등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
백령 기독교 역사관
경기도 옹진군 백령도에 기독교역사관이 설립됐다. 백령도는 이 땅에 복음이 전래된 최초의 ‘선택’받은 땅 중에 한 곳으로, 한국 기독교의 현장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다. 물론 북한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어 통일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지형이기도 하다. 이번에 백령도에 설립된 기독교역사관은 30평 규모의 현대식 건물로 총 3억 8000만원의 사업비가 소요됐다.특히 외부 시설보다 초기 중화동교회 모습, 최초 백령도 복음전파 장면, 서양선교사 성경전달 재현, 토마스 선교사 방문 모습, 언더우드 선교사 세례 집례 등 내부 전시물에 비중을 두고 개관하여 ‘선교현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 외에도 중화동교회 설립사, 역대 성직자 사진, 언더우드 목사 기념비 등 기독교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꾸며 학습현장으로 더없이 좋은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지역문화 발굴 차원과 관광자원 창출 일환으로 옹진군이 발벗고 나서 추진한 점도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얻고 있다. 옹진군은 총신대 양지캠퍼스 소래교회, 화성군 제암리교회 등에 직원을 파견, 현지조사를 통해 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토대로 미흡한 점을 보완하여 이번 기독교역사관을 개관시켰다. 이렇듯 백령도 기독교역사관은 군(郡)과 교회가 조화를 이뤄 설립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령도에 기독교역사관이 생겼다면 다소 의외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령도는 단순한 섬이 아니라 19세기 한국 역사의 중요한 무대였으며, 더불어 초기 기독교 선교의 생생한 현장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시말해 한국 기독교 초기 선교는 백령도를 근거지로 전개되었다는 말이다.
박물관 내부 (출처- http://blog.naver.com/djmoga )
기독교 역사관 내부
역사관 내부
내부 전시물
전시된 옛 교회 사진
교회 입구 돌 기둥
중화동교회 종
중화동교회 기념비
한국 개신교 전래 역사
개신교가 한국인에게 전도하기 시작한 것은 1832년 7월 17일에 독일인 목사 귀쯔라프(Karl F.A. Gutzlaff)가 백령도와 군산만에 기항하여 주기도문을 한문과 한글로 번역한 때부터이다. 이때 감자씨를 도민에게 주며 그 재배법을 일러 주었고, 포도주 만드는 법도 알려 주었다. 또한 1873년에 로스(Ross)목사가 만주 전도여행 중 서간도의 한국인 부락을 방문하였고, 3년 뒤에는 한국 외초의 개신교 수세자(受洗者)인 백홍준·이응찬·이성하·김진기 등이 만주 우장(牛莊)에서 머킨타이어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이수정이 1883년 4월 29일에 일본에서 역시 세례를 받았고 농정신편(農政新編)을 저술했다. 이미 1875년부터 예수 성교(聖敎) 문답서를 비롯하여 신약성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하는 일에 로스 목사와 협력하던 서상륜이, 1884년 초에 황해도 송천에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를 세워 성서를 반포하기 시작했다. 송천(솔내)교회를 일컬어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요람'이라고 백낙준 박사는 말한 바 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주재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이 인천에 상륙한 때(1884. 9. 20)보다 수개월 전에, 한국 토착민이 솔선하여 세운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