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 2014. 7. 26(토)
코스 : 낙주재~ 영화학교~ 수산제~ 곡강정~ 변계량비각~ 오방리 강동구~ 강정 고령보
시간 : 09시 출발 ~ 18시 도착,
날씨 : 맑음.
낙주재에서
전주이씨 재실을 지키시는 집안 어르신과 마주하시는 인사,
손 양 현 회장님과 미리 연락이 닿으셨다는데
연세드신 어르신분께서 손수 차리신 다과상에 죄송함과 아울러 감사함을 감출수가 없다.
낙주재는 광해조 서궁의 변에 항절하고 남하하여 은둔하던 집인데,
인조5년에 인조가 손수 "낙주재"라 써서 하사하였다. 고 한다.
강바람도 주변경관도 여름나기에 그저그만인데다,
정성스레 차려진 다과상에 또한 감사 할뿐이다.
2번째 코스는 "영화학교"다.
이 재 율 교감선생님 (010- 4441-03336) 의 말씀속에 문협회원님들의 질문에
성실한 답을 해주시는데. 현재 학생은 3명이며,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운영하고 있다고함,
밀양시 보조금은 년200만원선이며, 일년에 다녀가는 사람들은 6~7만 명정도라고 한다.
특히 딸기농사철엔 하남 딸기체험으로 인해 많은 인원이 찾아든다고한다.
그리고 우리문협 시화전을 하고 난 후,
수거해 온 실사 시 편들을 그곳에 볼거리로 만들어 주면 감사하겠다는 의견을 듣는다.
중국 베이징의 " 798 예술거리" 처럼 만들고 싶다는 의욕이 넘치시는 교감선생님의 바램 이루어지시길....
몇년전 아들과 함께했던 중국 베이징 "798 예술거리"가 아슴하게 떠오른다.
교감선생님?
대기업에서 일을 관두시고 예까지 오셨다니
그 꿈 꼭 이루어지시길요.
수산제는 1986년 발견, 1999년에 준공예정으로 있었으나 13년만에 허사로 돌아갔다고 함,
당시 정부에서(밀양인이 정부 주요 관직에 있을때 거액을 보조해 주기로 함)
그렇게 약속이 되어있었으나, 일부 내려온 보조금 마저 환불해 올려보냈던
군청 행정 담당자의 고충이나 또다른 이유가 있었겠지만
허탈하게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해설에 안타까움을 금할길 없었다.
지금의 데크난간은 밀양의 "손정태"님께서 시청에 지속적으로 요청한바에 의해
몇번의 보조금으로 인해 조금씩 이어서 지금처럼 그나마 데크길이 조성이 되었다고 한다.
제방의 길이는 728보(步)이고 둘레는 20리가 되며 벽골제·의림지와 함께 우리 나라 3대저수지로 불린다.
위치는 밀양의 속현이었던 수산현으로 현재의 하남읍 수산리·귀명리 지역과 초동면의 검암리·금포리에 걸치고 있다.
이 지역은 삼한시대에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라고 하였는데 ‘미동’은 우리말로 물동·물둑(제방)을 뜻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고적조의 기록을 보면 고려 말에
김방경(金方慶)이 제방을 쌓고 관개를 하여 일본정벌을 위한 군량미를 비축했다는 전설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제방의 길이가 728보이고 당시에 이미 제방이 무너졌지만
고쳐 쌓지 않았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5세기 중엽에는 저수지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점필재집 佔畢齋集≫에서는 1467년(세조 13)에 체찰사 조석문(曺錫文)이
밀양·창녕·청도·창원·대구·현풍·영산·양산·김해 등 9개 고을에서 장정을 동원하여 제방을 다시 수축하였다고 한다.
≪밀주지 密州誌≫·≪밀주구지 密州舊誌≫·≪교남지 嶠南誌≫ 등에서도 “못의 가운데 죽도(竹島)라는 작은 섬과
오산(鰲山)이 있고 못 안에 갖가지 풀이며 연꽃과 세모마름 등이 자생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이 지역사람들이 ‘대섬’과 ‘자라목산’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남아 있다.
1463년에 제방을 모으고 국둔전(國屯田)으로 만들었다가 200결(結)이나 되는 경작지의 반은 평민들에게 경작하도록 하고
나머지 반은 지금은 없어진 봉선사(奉先寺:밀양시 하남읍 대사리 뒷산 중턱에 ‘절티골’이라고 불리던 곳에 있었던 큰 절)에
주었다가 성종 때 다시 환속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에 황폐하여 이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수리시설을 하기 전인 1928년까지 주위에서 쉽게 이용될 수 있었던 황토흙으로 된 제방이
수산리 471-4번지에서 양동리 465-2번지에 걸쳐 약 1,040m 정도로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저수지는 논으로 변하였다.
현황
이순공 해설사님이자 전직 회장님께서 안타까운 수산제에 대한 내용을 열심히 설명하신다.
시골마을 담벼락에 저렇게 수령이 오래된 버드나무가 허리가 짤려나간 상태이다.
그 자리 어미의 몸에서 새로운 잉태를 하고, 점점 자라난 새순의 여린생명은
짤려나간 어미의 몸에서 제대로 튼실하게 자라주기를....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7월하면 이육사의 청포도 시가 생각납니다.
암울한 당시 상황에서
누구보다 이 땅의 광복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저 시를 지었을 것을 생각하니
이육사의 이름은 이원록 육사는 수인번호64번을
곡강정 이다.
벽진이씨의 성지이기도 하며, "팔문각" 엔 각 문 마다의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이씨의 후손들이 관록으로 팔문 하나하나 방면으로 대단한 후손이 태어났다 하여 팔문각이라고 한다
처음에 고강정이라고 하다가, 강을 휘돌아 굽어진 강이라고 하여 "곡강정" 이라고 함.
곡강정은 창녕 부곡에서 직선으로 내려온 낙동강이 살짝 꺾여 밀양 수산 방향으로 내려가는 곳에 있는 정자다.
곡강정 앞 바위에 서면 아래쪽으로 옛 수산대교가 보인다.
이곳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곡강정 앞뜰에는 1982년 11월 보호수로 지정된 팽나무(수령 150년, 수고 16m, 나무둘레 4.5m)가
낙동강의 주인처럼 버티고 서 있다.
회원님들의 머릿결에서
낙동강 바람은 그들이 지나가고 있는 방향을 일러주고 있다.
수령 150년된 팽나무의 특이한 근육질의 강건함을 보라.
거미줄에 걸린 참새를 박태현 부회장님께서
아기 참새의 다리와 몸에붙은 거미줄을 걷어내고 신나게 자연의 품으로 날려 보내신다.
부회장님!
혹 그도 박씨하나 물어와 부회장님 뜰앞에서 열매 맺거들랑
톱질은 저도 함께 해 주실거죵?ㅎㅎ
복 많이 받으실겁니당,ㅋㅋㅋ
세월은 우리가 말을하지 않아도 묵묵하게 흐르고 있다.
언젠가 추운겨울을 보내고 따스한 봄날에 꽃이핀다 싶더니
저렇게도 바람과 구름과 햇살이 힘을 모아
먹음직스런 한알의 열매,
영글어 가는 알몸을 부지런히 키워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