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듯 가는 세월
박 규 환
나이 든 노인들이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고 "아니, 네가 누구냐! 네가 이렇게 몰라보게 컸구나! 참, 그러고 보면 노인들이 늙지 않는 게로구나!" 하고 감탄하는 소리를 더러 듣는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한두 해 보지 못하다가 만나면 알아보기 힘들 만치 자란 걸 보고 놀라서 하는 이야기인데, 그 노인은 그 아이가 자란 만치는 자기도 늙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함일 뿐, 자기 또한 그 아이의 성장 속도만큼은 늙어 있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일 듯싶다. 내가 정년 퇴직으로 직장에서 밀려났을 때가 65세였고, 그 무렵 경로 우대증이란 게 생겨서 65세가 넘은 노인은 이 경로 우대증만 제시하면 몇 가지 우대를 받게 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시내버스를 공짜로 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그래 버스에 오를 때면 요금 대신 으레 이 우대증을 제시하게 되어 있었는데, 정년 후 얼마 동안은 어쩌다 그 절차를 잊고 그냥 오르면 버스 기사나 그밖에 승객에게서 요금을 받거나 안내를 맡아보는 차장(車掌)이라는 아가씨가(그때는 그런 게 있었다) 반드시 경로 우대증의 제시를 요청해 왔다. 실지로 65세를 갓 넘긴 노인의 얼굴 만으론 그 연령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우대증으로 확인하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 나는 성실히 우대증을 제시하고 미안한 얼굴로 차에 오르곤 했었는데, 그 뒤 어느덧 2,3년이 지나고 난 뒤엔 우대증 같은 걸 제시해도 확인하려 들지도 않고 얼굴만 보고도 아무런 군소리 없이 승차가 허용되면서 그 뒤론 우대증 같은 걸 가지고 있지 않아도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외관만으로도 그만치 늙은이임을 판단하기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의 흔적은 앞에서 말한 아이들의 성장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노인의 노화과정(老化過程)에서 조금도 다름없이 나타나는 것임을 알게 되면서 버스 기사나 차장이 나를 1대 1의 사람으로 생각지 않는 것 같은 야속함과 전혀 저항이 없는 상대자를 대했을 때처럼 가벼운 허전함을 맛보곤 했었다. 사람이 자랄 때 하룻밤 사이의 성장을 느끼지 못하듯 늙을 때도 하룻밤 사이의 노쇠를 느끼지 못할 뿐, 어느 편의 속도가 빠르고 느림을 가늠하기 어려울 뿐이다. '머무는 듯 가는 것'이 노인의 '세월'이고 '흐르는 듯 가는 것'이 아이들의 '세월'인 것을 잊고 모르는 것이 조그만 위안이었던가. 내 나이 70을 넘기고 나서도 나의 늙음의 심도(深度)를 실감하지 못할 만치 철이 들지 못했는데, 이젠 80을 넘기고 나서도 나는 모든 게 어제와 같은 걸로 착각해 왔다. 다시 말해 얼굴이나 몸에서 80의 냄새가 풍기는 걸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갑자기 나를 바라보는 눈들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내 나이를 묻는 사람이 많아졌다. 휴게소에서 만난 젊은이도 약수터에서 만난 노인도 상냥하게 인사나 하듯 나의 나이를 물어오는 것이다. 학의 천년이나 거북이의 만년 장수처럼 나 같은 노인은 희귀종(稀貴種) 동물의 일종이란 느낌의 물음엔 불쾌할 때도 없지 않지만 '너희들 장래도 무어 다르랴…' 하고 마음속으로 복수한다. "어르신 연세가 어떻게 되신가요?"는 젊은이의 물음이요, "노인장 연세가 높으신 것 같은데…"는 어지간히 늙었으되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노인의 물음이다. 어찌 됐건 예전엔 별로 나의 나이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분들이 최근 들어 갑작스레 나이를 물어오는 친절을 베푸는데 나로선 별로 고맙거나 반갑지가 않다. 나의 얼굴에 기록된 세월이 예사 노인과는 견주지 못할 정도이기 때문에, 대관절 사람의 나이가 몇 살이나 되면 저 정도의 얼굴일 것인가가 궁금해서 물어오는 경우도 있고, 저런 모습으론 거리에 나다니는 것이 마땅치 않아서 묻기도 할 것이다. 어느 경우가 됐건 나는 그런 질문이 그다지 반갑지가 않다. 언제나 늙지 않고 젊고 싶은 게 사람의 욕심인데, 80 넘긴 나이를 남 앞에 광고하는 일도 억울하거니와 나의 나이를 알고 난 그들은 예외 없이 측은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게 전혀 고맙지가 않다. 불과 한두 해 사이에 몰라보게 자란 소년을 보고 놀라면서 그 동안에 깨닫지 못하도록 달라져서 버스에 오를 때 경로증을 보이지 않아도 별로 탓하지 않게 된 사정이거나, 한두 해 전만 해도 물어오지 않던 나이를 갑자기 묻는 사람이 늘어난 것은 나 역시 소년의 성장 정도로는, 아니 그 이상 늙어 가고 있건만 겉으로 자라는 소년과 달리 속으로 위축되는 노인의 늙음이 아침마다 대하는 거울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에 뒤늦게 놀라게 되는 것인가 보다. 사람이 늙어 가는 것이 한이요, 섭섭함은 꼭 오래 살고 싶어서 만은 아니다. 아무리 행복한 노인(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일지라도 늙음이 슬프지 않을 수는 없다. 어떠한 소란 속에서도 노인은 외로울 수 있고 모든 부자유(不自由)에서 해방됐다 치더라도 마음속에 도사린 알 수 없는 짐[荷]의 부담을 한시도 털어 버릴 수 없다. 이 세상에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는 항설(巷說)이 있다. 그 첫째는 '장사 밑졌다'는 말이고, 그 둘째는 '처녀 시집 안 가겠다'는 말이며, 마지막 셋째는 '노인 죽고 싶다'는 말인데, 아무리 외관상 행복한 노인일지라도 이 셋째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닐 때가 많다. '죽고 싶을' 때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죽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 계간《수필》1997년 봄호 ♥ essay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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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전남 구례 출생 일본 중앙대학 예과 및 경제학부 졸업 조선대학교 및 전남대학교 교수 역임 1982년 전남대학교 정년 퇴임 현, 전남대학교 명예교수 수필집 <아직도 봄을 기다리며>외 여러 권의 역서와 수 편의 논문이 있음. ♥ essay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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