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麻疹奇方(原證篇) | 麻科會通·原證篇 |
— | 名謂 |
毒源 | 毒源 |
— | 運氣 |
治法 | 治法 |
時令 | 時令 |
藥戒 | 藥戒 |
脈度 | 脈度 |
日期 | 日期 |
初熱 | 初熱 |
出疹 | 出疹 |
出險 | 出險 |
形色 | 形色 |
— | 收疹 |
熱候 | 熱候 |
餘毒 | 餘毒 |
婦人 | 婦人 |
禁忌 | 禁忌 |
마과회통 여섯 권(여유당전서소수與猶堂全書所收)은 정조正祖 22년(1798)에 저술된 마진麻疹(홍역, measles)의 치료를 목적으로 한 의학서이다. 동아시아의 의학체계에 있어서는 경방經方으로 분류해야 할 책이며 실용적·임상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1) 구성
麻疹奇方·因證篇 | 麻科會通·因證篇 |
汗 | 汗 |
— | 血 |
— | 渴 |
食 | 食 |
咳嗽 | 咳喘 |
喘 | — |
咽喉 | 咽喉 |
嘔吐兼瀉 | 嘔吐 |
腹痛 | 腹痛 |
煩燥譫語狂亂驚搐 | 煩躁譫語狂亂驚搐 |
大小便 | 大小便 |
泄瀉 | 泄瀉 |
痢疾 | 痢疾 |
疳瘵 | 疳瘵 |
瘡癰 | 瘡癰 |
蛔蟲 | 蛔蟲 |
雜症 | 雜證 |
마과회통은 크게 「원증편原證篇」·「인증편因證篇」·「변사편辨似篇」 ·「자이편資異篇」·「아속편我俗篇」· 「오견편吾見篇」·「합제편合劑篇」·「보유補遺」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본구성은 이헌길李獻吉의 마진서麻疹書에 근거하고 있다. 즉, 이헌길의 마진서 마진기방麻疹奇方����은 「총론總論」·「원증편」·「인증편」·「변사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복수의 편명이 정약용서丁若鏞書와 같을 뿐 아니라 두 책의 「원증편」과 「인증편」의 항목명도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항목명의 기본적 일치에 대해서는 두 표를 참조 바람)
이헌길은,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字는 몽수夢叟 또는 몽수蒙叟라 한다. 공정왕恭靖王[定宗]의 별자別子인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이 그 선조이다. 영조英祖 51년(1775), 마진이 한양漢陽에 크게 유행했을 때 그 치료로 이름을 떨쳤다. 마과회통 자서自序에 따르면 정약용 본인도 이헌길의 치료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하며, 손수 마진서麻疹書를 엮은 이유에 대해
나는 이미 이헌길의 치료에 의해 목숨을 건진 까닭에 그 덕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이에 이헌길의 서書를 취하고, 그 원류를 거슬러 오르고 그 근본을 더듬어, 중국서 수십 종을 얻었다. 상하로 이치를 찾고 조례를 소상히 밝혔다. 하지만 그 책들은 하나같이 산만잡출한 바가 있어 고검考檢하기에 편리하지 않았다. 한편, 마진은 혹렬한 병이어서 시급을 다투어 성명性命을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며, 다른 병처럼 세월을 들여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지분유췌支分類萃하고 미렬장시眉列掌示하여 병가病家가 수색搜索을 함에 번거롭지 않도록, 책을 열면 바로 처방을 알 수 있게 하였다.[余旣繇李蒙叟得活, 意欲酬德. 乃取蒙叟書, 溯其源探其本, 得中國書數十種. 上下細繹, 具詳條例. 顧其書皆散漫雜出, 不便考檢. 而麻爲病酷迅暴烈, 爭時急以判性命, 非如他病可歲月謀也. 於是支分類萃, 眉列掌示, 使病家開卷得方, 不煩搜索.]
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과회통은 기본구성뿐만 아니라 기초이론 역시 이헌길의 마진서를 모범으로 그것을 확충한 것인데, 이는 정약용 자신의 원체험原體驗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의 마과회통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이헌길의 이론적 영향이 아니라 오히려 (1)‘수십종’(自序)에 달하는 중국의학서로부터의 인용 (2)조목으로 나누어 인용문을 나열하는 방식 (3)고열考閱의 편리를 생각해 약방藥方을 「합제편」에 모아 정리한 점 등일 것이다.
우선 첫 번째 중국서로부터의 다수의 인용인데, 서전書前에 보이는 「초촬제가성씨서목抄撮諸家姓氏書目」은 인용서의 목록으로 실로 장중경張仲景의 상한론傷寒論을 위시한 중국서 58종을 들고 있다. 본문에 인용된 중국서는 출전이 불명확한 것도 있으며 서목에 표시한 58종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마진서 중 특히 중요한 것은 서序나 발跋이 서전書前에 인용되는 것으로 볼 때, 명明 만전萬全의 세의심법世醫心法·마지기馬之騏의 마과휘편麻科彙編·섭상항聶尙恒의 치진대법治疹大法·장개빈張介賓의 마진전麻疹詮일 것이다. 하지만 조선서朝鮮書에 대해서는 서목은 불과 허준許浚·임서봉任瑞鳳·이헌길李獻吉·조정준趙廷俊·이경화李景華 등 5가家의 서書를 들고 있을 뿐이다. 이헌길 자신도 ‘기본적으로 마법馬法을 이용하고 경우에 따라 만씨萬氏를 참고로 하였다’(「吾見篇」‘古醫’)고 하는 이상, 이론 고찰에 있어 중국서가 큰 비중을 차지했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마과회통은 마진서로서 다수의 인용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인용의 방식 또한 독특하다. 경방서이면서도 유서類書와 아주 유사한 점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원증편」의 명위제일名謂第一인데, 이것은 12개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씨龔氏·마씨馬氏·손씨孫氏·장씨張氏(3개조)·왕씨王氏·대씨戴氏·이씨李氏·채씨蔡氏·오씨吳氏·허준許浚의 순으로 각각 그 주장을 인용한다. 즉,
龔氏曰, 麻卽疹也. 疹出如麻成朶. 痘出如豆成粒. 皆象其形而名也.
馬氏曰, 麻疹, 俗名糠瘡. 又曰, 麩瘡.
……
張氏曰, 疹者天地間沴戾不正之氣. 故曰疹也. 然其名目有異. 在蘇松曰沙子. 在浙江曰醋子. 在江右湖廣曰麻. 在山陝曰膚瘡, 曰糠瘡, 曰赤瘡. 在北直曰疹子. 名雖不同, 其證則一.
……
등과 같다. 정약용은 마진의 명위名謂에 대해 중요한 주장을 취사선택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반면 스스로의 판단이나 고찰 및 주의주장을 거의 밝히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마麻’는 인용에 따라 때로는 마진麻疹(正疹)을 가리키고 때로는 반진斑疹을 가리키는 등 일정하지 않은데, 정약용은 이설을 병렬할 뿐이며 그 이상의 언급은 없다. 이 점은 「오견편吾見篇」을 제외하고 모두 그러하다. 의학서로서는 조금 특이한 성격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포함한 다른 의학서는 병상病狀을 기록한 다음 바로 치료법을 지시하고 치료약과 조제법을 기록하고 있지만 마과회통은 그렇지 않다. 정약용도 특정의 병상病狀에 대해 특정의 약제를 처방하지만 그때에는 단지 ‘승마갈근탕升麻葛根湯 갑일甲一’ ‘비급환備急丸 각십角十’ 등으로 약명과 그 부호만을 부여할 뿐 처방마다 구체적인 조제법調劑法을 기록하지 않는다. 약제의 상세한 조합법調合法은 약명과 부호를 근거로 「합제편」의 해당 부분을 참조하도록 되어 있다. 「합제편」에 총 416종류의 약제 조합법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같은 약제가 다른 병증에도 사용되어 책 속의 여기저기에 자주 등장하는 점을 생각할 때, 조제법을 한군데에 모아 이용하기 편리하게 한 점은 뛰어난 기술법記述法이라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2) 내용
정약용의 마진서는 미리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치고는 있다 해도 이설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까닭에 어느 인용설이 정약용 자신의 견해인지 특정하기 힘들고 상세한 의학적 내용을 설명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본절本節에서는 내용의 개략을 기술하고 저술의 흐름을 밝히는 데 그치고자 한다. 마과회통은 7편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편명은 「원증편」·「인증편」·「변사편」·「자이편」·「아속편」·「오견편」·「합제편」의 순으로 붙여져 있다.
먼저 「원증편」인데, 마진의 명칭의 유래·병의 원인·치료원칙·증상과 치료법·금기禁忌 등을 논리적 비약 없이 담담하게 설명하고 있다. 당시의 마진관麻疹觀을 이해하는 데 있어 최적의 기술記述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마진의 명칭은 발진發疹의 모양이 마치 마립麻粒(大麻)이 떨기를 이루며 돋아 있는 것과 닮았다는 점에 유래한다.(‘名謂’) 사람이 마진에 걸리는 것은 태독胎毒, 즉 태아가 자궁 내에서 받은 모체의 예독穢毒 때문이며,(‘毒源’) 마진에 유행이 있는 것은 천행天行에 주기성이 있기 때문이다.(‘運氣’) 치료원칙은, 마진은 실열實熱의 병이므로 일반적으로는 ‘해산解散’을 주로 하여 한량약寒涼藥을 쓰지 않으면 안 되지만,(‘治法’) 한랭한 기후일 때는 꼭 그렇지는 않다.(‘時令’) 투약 시에는 병에 맞는 약제를 신속히 환자에게 투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藥戒’) 환자는 맥脈이 강하고 힘이 있으면 마진의 사독邪毒을 이겨 낼 수 있지만, 맥이 약하고 힘이 없으면 원기는 허약하고 치료는 힘들다.(‘脈度’)
이어서 정약용은 의사가 명심해야 할 본本과 표標 중에서, 보다 임상적인 표標(證候)에 대해 분석한다. 즉, 마진의 병상病狀의 경과와 그때그때의 치료법 등에 대해 일기日期·초열初熱·출진出疹·출험出險·형색形色·수진收疹·열후熱候·여독餘毒·부인婦人·금기禁忌로 항목을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그것이다. 정약용에 의하면 병상은 크게 (1)‘초열初熱’ 즉, 카타르(catarrh)기 (2)‘출진出疹’ 즉, 발진기發疹期 (3)‘수진收疹’ 즉, 회복기回復期로 나눌 수 있다.
전구기前驅期인 카타르기는 상한傷寒과 유사한 발열로 시작되며 해수咳嗽·비류鼻流·누출淚出·희수喜睡·토사吐瀉 등의 증상을 보인다. 치료약으로는 승마갈근탕升麻葛根湯이 좋고 함부로 한법汗法이나 하법下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初熱’) 발진기에는, 신열身熱이 있은 후 4, 5일경부터 진疹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出疹’) 진疹이 다 나오면 독사毒邪는 흩어지고 정기正氣는 화평和平해지지만, 숨어서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독기毒氣는 반드시 체내를 침범한다.(‘出險’) 진疹의 형색形色은 끝이 뾰족하고 길지 않으며 작고 투명한 것을 순증順症이라 한다. 적백색赤白色의 진疹은 나을 가능성이 높지만 흑자색黑紫色의 진疹은 열독熱毒이 가장 심하니 십사일생十死一生의 중증重症이다.(‘形色’) 회복기는 발열 후 7, 8일경부터 시작된다. 진疹이 출몰하다 3, 4일 만에 사라지면 순증順症이라고 한다. 마진이 사라져야 함에도 사라지지 않는 경우는 체내에 허열虛熱이 있어 표피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시호사물탕柴胡四物湯으로 혈분血分을 풀어 주면 좋다.(‘收疹’) 마진은 열이 없으면 나오지 않지만, 풍한식열제증風寒食熱諸證을 겸하면 고열을 부르고 독기毒氣가 울폐鬱閉하여 발진이 드러나지 않는다.(熱候) 발진 시, 발산發散하여 그 독을 완전히 풀지 않으면 여독이 내공內攻하여 후재後災를 부르므로,(‘餘毒’) 풍한風寒을 피하고 생랭生冷을 입에 대지 않는 등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禁忌’) 임부妊婦의 마진은 잘 다스리지 않으면 낙태의 위험이 있으므로 치료에는 청열淸熱 외에 안태安胎에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婦人’)
「인증편」은 발진시에 나타나는, ‘열독熱毒이 퍼진 결과 변이變異가 백출百出하는’ 증상에 주목한 것이다. 부위나 증상 등을 인수引數로 하여 병인病因을 확인하고 또한 치료약을 찾아낼 수 있으므로 의사나 환자에게는 긴급매뉴얼로서 유익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인수引數로는 한汗·혈血·갈渴·식食·해천咳喘·인후咽喉·구토嘔吐·복통腹痛·번조섬어광란경축煩躁譫語狂亂驚搐·대소변大小便·설사泄瀉·이질痢疾·감채疳瘵·창옹瘡癰·회충蛔蟲·잡증雜證 등이 있다.
「인증편」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신체의 저항력이 약화됨에 따라 발생하기 쉬운, 발진 시의 합병증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합병증이란 개념이 없었던 당시에 있어, 발진에 동반하여 일어나는 여병餘病의 현저한 증상에도 주의가 기울여졌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 마진으로 사망하는 환자의 대다수는 폐렴의 병발倂發에 의한다고 하고, 또 마진에 걸리면 결핵이 악화된다고도 하는데, 정약용이 인용하는
만씨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기침이 오래도록 멎지 않고, 얼굴과 눈이 붓고, 가슴이 아플 정도로 격하게 기침이 나고, 어깨를 기울여 숨을 쉬고, 입과 코에서 피가 나고, 안색이 푸르거나 붉은 빛을 띠고, 코가 마르고 눈이 침침하고, 머리를 흔들고 손을 떠는 것은, 모두 사증死證이다.[萬氏曰, 若咳久不止, 面浮目胞腫, 胸高而喘, 息則聳肩, 血自口鼻出, 面色或靑或赤, 鼻燥昏悶, 搖頭擺手者, 皆死證也(咳喘).]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잘 보여 준다. 또한 뇌염腦炎을 병발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씨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섬망譫妄의 증상, 즉 헛소리를 하고 헛것을 보는 증상은 열독熱毒이 과도하게 많아진 결과, 열이 심신心神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발진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채로 섬망하는 자는 삼황석고탕三黃石膏湯으로 치료하고, 발진이 나타난 후 섬망하는 자는 황련해독탕黃連解毒湯으로 치료하면 좋다.[錢氏曰, 譫妄一證, 乃毒火太盛, 熱昏心神而然也. 疹未出而譫妄者, 三黃石膏湯主之. 疹已出而譫妄者, 黃連解毒湯主之(煩躁譫語狂亂驚搐).]
라고 적고 있는 것은 그 증상과 치료법이라 말할 수 있다. 한편,
전씨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실음失音, 즉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증상은 열독熱毒이 폐규肺竅를 막았기 때문이다. 발진 초기에 실음하는 자는 현삼승마탕玄蔘升麻湯으로 치료하고, 발진 후 실음하는 자는 가감양격산加減涼膈散으로 치료하며, 발진이 가라앉은 후 말을 못하게 된 자는 아다산兒茶散으로 치료하면 좋다.[錢氏曰, 失音者, 乃熱毒閉塞肺竅而然也. 疹初失音, 玄蔘升麻湯主之. 疹已發而失音者, 加減涼膈散主之. 疹沒後聲啞者, 兒茶散主之(咽喉).]
라고 하는 것은 후두喉頭 주변의 염증으로 인해 공기를 충분히 들이마시지 못하는, 마진에 병발倂發하는 가성假性 크루프(croup)에 대해 기술한 것이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발진성 유행병에는 다종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마진과 유사하나 마진이 아닌 것도 있다. 정약용은 그 사실에 주목하고 「변사편」을 지어 마진과 기타 발진성 질환의 차이점을 밝혔으며, 덧붙여 기타 발진성 질환의 치료법을 제시하였다. 항목명으로는, 반진총론斑疹總論·상한발반傷寒發斑·온역발반瘟疫發斑·내상발반內傷發斑·마진麻疹·은진癮疹·단진丹疹·소진瘙疹·조두진罩痘疹·운두진雲頭疹·사좌비査痤疿·수두水痘가 있다.
정약용은 「변사편」에 이어 「자이편資異篇」을 엮었는데, 「자이편」의 주제는 천연두天然痘로, 정약용은 마진전문서에서 천연두를 논하는 이유에 대해
천연두와 마진은 속하는 바가 같지 않으나, 찰리시치察理施治와 여독餘毒의 제법制法이 아주 유사하므로, 서로 참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이편을 짓는 이유이다.[痘之與疹, 雖匪厥屬, 察理施治, 與制餘毒, 其法無二, 宜相資沃, 作資異篇.]
라고 설명하고 있다.(‘八篇總目題語’) 당시의 이론에 의하면 천연두든 마진이든 그 독원毒源은 모두 태독胎毒이며, 단지 태독이 오장五臟에 숨어든 것이 천연두, 육부六腑에 숨어든 것이 마진일 뿐이다. 항목명을 들면, 두독열痘毒熱·두허실痘虛實·두치법痘治法·두함복痘陷伏·두한혈갈痘汗血渴·두해천痘咳喘·두인후痘咽喉·두구토痘嘔吐·두번조섬어경옹痘煩躁譫語驚壅·두복통痘腹痛·두대소변痘大小便·두창옹痘瘡癰·두종창痘腫脹·두잡증痘雜證·두부인痘婦人·두회충痘蛔蟲이다.
「자이편」의 다음은 「아속편我俗篇」이다. 「아속편」에서 논하고 있는 것은 조선의 ‘속방俗方’ 가운데, 정약용 자신이 실제로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들이다. ‘속방’이란 「원증편」이나 「인증편」보다는 한 단계 수준이 낮은 이론이나 정보를 뜻하는데, 구체적으로는 허준과 이익과 이헌길을 제외한 모든 동의東醫의 의설처방醫說處方을 가리키며, 고명한 조정준趙廷俊 급유방及幼方의 의설처방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항목명을 들면, 예해豫解·원증原證·인증因證·약론藥論·주평酒評·식계食戒·분치糞治·의안醫案·잡설雜說이다.
「오견편吾見篇」은 문자 그대로 정조순잡精粗純雜한 제가諸家의 입론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기록한 것으로, 고의古醫·속의俗醫·운기運氣·연차年次·변명辨名·예비豫備·증론症論·회충蛔蟲·한약寒藥·잡론雜論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약용의 견해에 대해서는 절節을 바꾸어 상세히 분석하고자 한다.
마과회통은 「오견편」에 이몽수전李蒙叟傳이 부록附錄으로 붙어 있고 「합제편」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책의 구성을 기록한 팔편총목제어八篇總目題語에 의하면 「합제편」의 다음에는 본초편本草篇이 있고 주치主治와 약성藥性 등을 논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행 여유당전서에 실린 7편본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정약용은 의학의 기초로서 본초학 학습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므로,(‘醫說’)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본초편」의 구상에는 그러한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고 추정해야 할 것이다.
3) 「오견편」과 명청마진학明淸麻疹學
정약용은 58종 이상의 중국마진서를 인용하여 마과회통을 편찬한 것인데, 정확히는 만전萬全·마지기馬之騏·섭상항聶尙恒·장개빈張介賓 등 명청 마진 대가의 학설을 기초로 자설을 구축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명청의학과의 밀접하지만 비판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마과회통의 「오견편」을 분석하면 명백해질 것이다. 즉, 정약용은 제서諸書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먼저 명明 만전(萬全, 1495?~1580)의 세의심법世醫心法인데, 정약용은 ‘치술治術이 대단히 정교하다’고 높이 평가하고 ‘중국 두진痘疹의 종宗’이라 상찬한다. 하지만 ‘그 의안제설醫案諸說을 보면 항상 남을 누르고 자기를 높이며, 재능을 뽐내고 제 마음대로 하니’, 심한 경우에는 부친父親인 만광萬筐도 비판하고 황탄불경荒誕不經한 점도 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는 따라야 하겠지만 깊이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마지기의 마과휘편麻科彙編은 마진의 형색形色에 특히 자세하며 증상을 논함에 있어 이출미출已出未出·몰락전후沒落前後를 구별하여 방方을 세우고 있으므로 안치按治에 편리하다. 하지만 ‘그 통론본령通論本領에 이르면 도리어 지리횡결支離橫決이 많고’, 처방은 ‘한량寒涼을 순용純用하므로’, 때로는 ‘양제涼劑로써 사람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다.
적량翟良의 두과석의痘科釋意는 마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천연두 전문서이다. 천연두에 대한 기술은 정확침세精確沈細하여 깊이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마진에 대해서는 특별히 수련을 쌓은 것이 아니다.
섭상항의 치진대법治疹大法은 ‘입론立論이 명백개절明白剴切하고 기세는 대쪽을 가르듯 하다’. 하지만 과도히 양약涼藥을 금하므로 도리어 질애窒礙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다.
황렴黃廉의 두진전서痘疹全書와 손일규孫一奎의 두진심인痘疹心印 그리고 왕긍당王肯堂의 유과준승幼科準繩은 만전萬全의 치료법을 따르고 있어 특필할 만한 점은 없다.
무희옹繆希雍의 사진론沙疹論은 약성藥性을 분렬分列하여 그 의기宜忌를 변별하고 있으므로 의거할 만한 저작이다. 또한 본초학本草學에 정통하므로 새로운 처방이라도 신용할 수 있다.
장개빈의 경악전서景岳全書는 신론新論이 가장 많고 변박辨駁이 엄쾌嚴快하므로 근세 의학의 쇄신자刷新者라 할 만하다. 하지만 마진전麻疹詮의 처방은 송원의학宋元醫學의 공사攻瀉와, 과도한 한량약寒涼藥 투여의 폐해를 시정하고자 탁보托補에 의해 온열약溫熱藥을 사용하고 있다. 이 또한 지나친 교왕矯枉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이상과 같이, 마진에 관한 선행연구의 장점뿐만 아니라 학설이 지닌 단점도 빠짐없이 기술하고 있다. 부정적인 평가가 보이지 않는 것은 놀랍게도 동의東醫인 이헌길뿐이다. 즉,
이몽수李夢叟는 기본적으로는 마지기馬之騏의 치료법을 이용하였고, 경우에 따라 만전萬全의 치료법을 참고로 하였다. 그 임병활법臨病活法에 대해서는 전할 만한 자료는 없다. 더구나 그 서書는 모두 백망百忙한 중에 틈을 내어 구술한 것이므로, 전인前人의 성법成法에 있어서는 변개한 바가 없다. 다만 회충蛔蟲에 관한 일론一論은 대부분 전인前人이 아직 밝히지 못한 바를 밝혔다. 또한 동국東國 진가疹家의 종宗이라 할 만하다.[李夢叟全用馬法而參以萬氏. 其臨病活法, 非書可傳. 況其書皆百忙中口號者, 故於前人成法, 無所變更. 惟蛔蟲一論, 多發前未發. 亦東國疹家之宗也.]
라고 평가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헌길은 결국 명청마진학의 말류末流이며 따라서 선행연구에 대한 엄격한 평가는 논리적으로는 그대로 이헌길 비판에 직결된다.
이헌길의 이론은 명청마진학의 흐름을 계승한 것으로 이헌길 현창顯彰과 명청마진학 비판은 본래 서로 모순되며 양립할 수 없다. 또한 모순되는 명제命題의 경우, 논리적으로는 한쪽을 버리고 한쪽을 택해야 마땅하지만, 정약용은 양자를 모두 주장하고 택일擇一을 하지 않는다. 정약용이 양자의 모순을 해소한 방법은 바로 명청마진학의 선택적 인용이며, 유서類書와 비슷한 병론적倂論的 편찬이다. 다시 말해, 이헌길의 임상상臨床上의 결론을 자설의 기초로 하면서 ‘그 원류를 거슬러 오르고 그 근본을 더듬어’,(‘自序’) 선행연구 가운데 자설에 맞는 부분이나 이해를 심화하는 부분을 인용한다. 단, 인용문이 서로 모순되고 시비의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병기倂記한다. ‘고의古醫’ 즉 명청마진학이라 해도 ‘그 입심立心의 사정邪正·견리見理의 정조精粗·치술治術의 전잡專雜·지론持論의 통편通偏을 소상히 밝혀 이것을 선택취사選擇取舍하면,’(「吾見篇」‘古醫’) 그 양질의 지식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정약용과 동의학東醫學
정약용은 수리과학과 마찬가지로 의학도 중시해야 함을 주장하였고 실제로 중시하였다. 즉, 경세유표의 내의원內醫院·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 조條에서는 ‘의학醫學은 유국有國의 대정大政이니 ……명실名實이 상부相符하도록 해야 하며 그 쇠락衰落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醫學者, 有國之大政. … 使名實相稱, 不可一任其凋弊也.]’고 말한다. 또한 마과회통 ‘자서自序’에서는 북송北宋의 대정치가인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내가 글을 읽고 도道를 배우는 것은 천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다면 황제黃帝의 의서를 읽고 의학의 깊은 뜻을 궁구하고 싶다. 이 또한 사람을 살리는 방법이다.[吾讀書學道, 要以活天下之命. 不然讀黃帝書, 深究醫奧. 是亦可以活人.]”를 인용하여, 유학儒學과 마찬가지로 의학도 ‘활인活人’을 목적으로 하는 것임을 천명하였다.
정약용의 의학연구는 ‘가만히 또한 스스로 고인古人(范仲淹)의 뜻에 따르는[竊亦自附於古人也]’ 것으로(自序), 범중엄의 정신에 근거하여 개인의 생명은 물론 천하 만민의 생명에도 배려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관심이나 의식은 협의의 의학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정약용이 ‘수십 년에 한번 돌아오는’ 것에 불과한 마진에 대해 (1)임상기술臨床技術의 향상을 꾀하면서 (2)동시에 의학의 사회적 관계에도 유의하여 광의의 의학이론을 정비하고자 했다는 것이 그것을 잘 보여 준다.
정약용 의학연구의 제일의 목적은 경방經方으로서의 질적 향상을 꾀한 것이라 말할 수 있는데, 명청마진학에 근거한 마과회통 7편의 치밀한 기술이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다. 조선의학사 연구가인 미키 사카에(三木榮)가 마과회통을 평하여 ‘반도마진학半島麻疹學의 최고봉’이라 하고 ‘동양 제일의 전서專書’라고 한 것도, 역시 마과회통의 중후하고도 미세한 기술내용을 판단의 근거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의 마과회통은 객관적으로 명청마진학의 집대성일 뿐만 아니라, 정약용 자신도 역시 명대明代에 갑자기 수준이 높아진 중국마진학의 비판적 계승 내지 집대성으로서 자저自著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자저의 편찬 의도에 대해 ‘고의古醫(명청마진학)라고 해도, 또한 마땅히 그 입심立心의 사정邪正·견리見理의 정조精粗·치술治術의 전잡專雜·지론持論의 통편通偏을 소상히 밝혀 이것을 선택취사選擇取舍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吾見篇」‘古醫’) 때문이다.
마과회통은 명청마진학의 집대성이라 평가할 수 있는데, 정약용이 근거한 명청마진학 자체도 절충적 성격이 대단히 강하다. 명청마진학의 대종大宗이라 할 수 있는 만전萬全의 (두진痘疹)세의심법世醫心法 ‘자서自序’를 보면 그 절충적인 성격은 저절로 명백해진다. 원래 명청두진학은 송원두진학의 기초 위에 발달한 것이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약용이 송원의 마진이론을 ‘의종서론醫宗緖論’이라 소개하고 있는 것이 그 사실을 잘 보여 준다. 하지만 송원의 두진학에는 크게 두 파가 있었고 입법立法을 달리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전을(錢乙, 1032?~1113)은 한량寒涼을 주장하고 해독공사解毒攻邪를 빈용頻用하였다. 한편, 진문중陳文中은 온열溫熱을 주장하고 화중보정和中補正을 중시하였다. 송원두진학의 양사涼瀉와 온보溫補를 둘러싼 극단적인 대립에 대해 만전萬全은, 전을錢乙이 양사涼瀉를 사용하는 것은 번조煩燥하여 대소변大小便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고 진문중陳文中이 온보溫補를 사용하는 것은 설사를 하여 손발이 차가워지기 때문이라 하여, 대립을 해소하고 한쪽으로 경도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다시 말해, 허虛하면 곧 이것을 보補하고 실實하면 곧 이것을 사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인데, 그야말로 절충적 방법에 의한 대립의 해소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바, 명청마진학의 비약을 가능케 한 것은 조건의 구분에 의한 절충적인 치학방법治學方法임에 틀림없다. 대립의 지양이야말로 당시의 시대적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명청마진학의 절충적인 치학자세가 마과회통의 이론병기異論倂記를 가능케 하였고, 결국 정약용의 마진학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의 학문에 보일 듯 말듯 아른대는 것은 뜻밖에도 명학적明學的인 성격인 것이다.
정약용은 단지 순의학적純醫學的인 동기에서 마진연구에 종사한 것은 아니다. 널리 학문의 사회적 의미를 고찰함으로써 ‘수기修己’를 목적으로 한 육경사서학六經四書學의 기초 위에, 농農·직織·병兵·의醫 등의 ‘기예技藝’를 천하국가天下國家의 학學으로 인식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自撰墓誌銘·技藝論’) 정약용에 의하면 북학北學의 대상은 실로 그 기예技藝임에 틀림없다.
정약용은 기예技藝의 천하국가학적인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 지극히 실학적實學的인 학문관을 근거로 하여 동아시아 의학의 유론謬論을 과감히 비판하고 의학사상의 정비에 매진하였다. 술수학적術數學的 사고의 거부가 그것이다. 마과회통 중에서 특히 현저한 반술수反術數의 예를 들면 (1)인용문 중에 술수적 사고가 거의 보이지 않는 점이나 (2)운기설運氣說이 환골탈태되어 있는 점 등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동아시아의 의학은 오장五臟·경락經絡 등에 대한 각종의 오행배당五行配當이 이론의 근저를 이루고 있으며 오행설적인 해석을 불식하면 이론으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약용은 ‘오행五行은 만물萬物 중의 오물五物에 불과’하므로 단지 ‘오五로써 만萬을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고 전면적으로는 오행설에 찬동하지 않는다.(中庸講義補) 명청의설明淸醫說을 취사선택할 때,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오행설의 설명을 가능한 한 배제하려고 한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마과회통에서는 책의 성격상 본문에는 직접적으로 술수를 비판한 내용이 보이지 않지만, 보유補遺에 인용하는 (의종)금감(醫宗)金鑑 「종두심법요지種痘心法要旨」의 ‘오장전송지리五臟傳送之理’에 대해서는 ‘생각건대 이 또한 술가術家 구투舊套의 오장전송五臟傳送의 설이니, 본디 스스로 묘망渺茫하다.[案此亦術家舊套五臟傳送之說, 本自渺茫.]’라고 하여 일언지하에 배척하고 있다.
다음은 운기설運氣說의 환골탈태인데, 운기설이란 ‘이화二火가 천天을 관장하는 해를 만나면 반진班疹을 다발多發한다[遇二火司天, 多發班疹.]’(萬全), 즉 자오인신子午寅申의 해에는 반진이 유행한다고 주장하고, 오행과 천간지지天干地支의 제관계로써 천행天行과 천수天數를 술수학적으로 규정, 그것에 의해 질병의 유행을 미리 예언하는 것이다. 정약용은 오행설에 의심을 품을 뿐만 아니라 ‘술수術數의 학學은 학學이 아니라 혹惑’이라 하여 술수학 자체도 강하게 부정하고 있으므로,(五學論五)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운기설에 의한 미래 예언의 황당무계함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정약용은 그렇지만, 운기설을 전면부정하고 그 황당무계함을 천하에 공언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대체로 역려창진疫癘瘡疹 등 일체윤행一切輪行의 질병은 모두 운기가 발하는 바에 관계된다[凡疫癘瘡疹等一切輪行之疾, 皆係運氣所發]’라고 하여, 운기설의 유용성을 인정한 문장을 남기고 있다.(「吾見篇」‘運氣’) 하지만 정약용의 운기설은 종래의 그것과 의미하는 바가 다르며, 질병이 천행天行에 의해 주기적으로 유행함을 뜻할 뿐이다. 같은 운기運氣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정약용이 종래의 운기설과는 다른 이해를 보이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의령醫零·육기론六氣論에서 ‘청기淸氣가 대래大來하면 금金이 승勝한다. 풍목風木은 사邪를 받아 간병肝病이 생生한다.[淸氣大來, 金之勝也. 風木受邪, 肝病生焉.]’나 ‘겨울에 한寒에 상傷하면 봄에 반드시 온병溫病이 든다[冬傷於寒, 春必溫病]’ 등, 다른 종류의 운기설에 대해 ‘이치에 맞지 않는다[非理也]’고 강하게 부정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외에도 「오견편」의 연차年次에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마진유행표麻疹流行表가 있고, 「오견편」의 운기運氣에서는 만전萬全의 명제命題인 ‘이화二火가 천天을 관장하는 해를 만나면 반진班疹을 다발한다’에 대해, 실제의 마진유행년麻疹流行年에 근거하여 그것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마진유행표麻疹流行表는 ‘진행疹行’의 해로 명明 만력萬曆 계축癸丑(1613)·청淸 강희康熙 무신戊申(1668)·경신庚申(1680)·임신壬申(1692)·병술丙戌(1706)·무술戊戌(1718)·옹정雍正 기유己酉(1729)·건륭乾隆 임신壬申(1752)·을미乙未(1764)·병오丙午(1786) 등을 든다. 또한 「오견편」의 운기運氣에서는 아방我邦 근고近古의 병술丙戌·기해己亥·경술庚戌·을미乙未 등은 만전萬全의 운기설이 말하는 연차年次와 합치하지 않는다고 지적, 운기설이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음을 주장하고 있다. 더욱이 정약용이 말하는 기해己亥와 경술庚戌은 표에 보이는 강희康熙 무술戊戌(1718)·옹정雍正 기유己酉(1729)의 이듬해를 뜻하며, 표에는 마진의 유행이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고 주기되어 있다.
한편 정약용은 「맥론脈論」1~3에서 동의학東醫學의 맥진脈診기법을 비판하고 있다. 동의東醫는 맥진 시 팔의 촌寸·관關·척尺의 맥을 보고 혈기의 성쇠나 병정病情의 허실을 진단하는데, 정약용은 그 촌寸·관關·척尺의 구별을 의문시하고, 또한 좌촌左寸의 맥으로 심병心病, 우촌右寸으로 폐肺, 좌관左關으로 간담肝膽, 우관右關으로 비위脾胃, 좌척左尺으로 신방광대장腎膀胱大腸, 우척右尺으로 신명문삼초소장腎命門三焦小腸을 진단한다는 의설을 근거 없다 하여 물리친다. 단, 정약용의 맥론脈論은 동의학 전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의학이론 가운데서 술수적인 부분을 제거해야 함을 주장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분부정이라고는 해도 술수학적인 사고가 동의학의 근간을 구성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할 때, 그 의의는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실학자의 과학연구 : 결어結語에 갈음하여
정약용은 실학의 기초로 과학기술을 중시하고 전문서를 저술하였다. 구고원류 마과회통 등은 그 결과물이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실학자의 교양의 기초를 이루고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것은 성리학性理學·훈고학訓詁學·문장학文章學 등이며, 실학도 결국 강렬한 인문학적 경향을 지닌 주자학의 한 형태이다. 정약용이 자신의 연구범위를 수학과 의학에까지 확대한 점에 대해서는 일정의 평가를 내려야 마땅하지만, 아쉽게도 그 과학연구는 인문학의 범위를 조금 벗어난 정도의 것이었다.
1) 과학저작의 재평가
우선 구고원류에 대해서인데, 이 책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구고정리(피타고라스의 정리)의 응용이며 수학서로서는 그렇게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수학자가 정약용의 수학서를 보았다면, 언어대수학言語代數學에 기인하는 기술記述의 복잡함과 애매함은, 대수기호代數記號의 사용을 통해 철저히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정약용은 기중기起重機의 발명자로 이름이 높지만 수리과학數理科學의 지식은 정확하지 않았던 듯하다. 예로 「지구도설」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서구 천문학에 기원하는 지원地圓(地球)의 설명도이며 갑甲인 북극北極에 대해 병丙의 온성穩城 → 정丁의 함흥咸興 → 무戊의 한양漢陽 → 기己의 강진康津 → 경庚의 제주濟州로, 남쪽으로 감에 따라 북극출지지도北極出地之度(緯度)가 작아짐을 설명하고 있는데, 초보적인 실수를 범하고 있어 만약 이익李瀷이나 홍대용洪大容이 정약용의 그림을 보았다면 적잖이 실망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정약용의 의학지식은 그에 반해 훨씬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마과회통(1798)에 대한 평판은 집필 직후부터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순조純祖 2년(1802)에는 홍석주洪奭周가 유배 중이던 정약용의 이름을 숨기고 서명을 마방통휘麻方統彙로 바꾸어 출판한 바 있다. 즉, 원저原著의 「아속편」과 「오견편」을 생략하고 편명篇名을 「원증편」 → 「원병편原病篇」, 「인증편」 → 「잡증편雜症篇」, 「변사편」 → 「변류편辨類篇」, 「자이편」 → 「방통편旁通篇」, 「합제편」 → 「탕액편湯液篇」으로 고쳐 출판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미키 사카에(三木榮)가 마과회통을 높이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조선사학자 도널드 베이커(Donald Baker)도 마과회통을 높이 평가하여, 편찬기준은 경험이 아니라 ‘오컴의 면도날’과 같은 합리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과회통은 마진의 치료법을 설명하는 경방서이면서도, 전문의로서 마진의 치료에 종사한 적이 없는 학자에 의한 명청연구서明淸硏究書의 단순한 편찬물이다. 다시 말해 편찬작업은 이헌길의 임상경험을 취사선택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고는 해도, 문헌학적 수법에 근거하고 있으며, 기준으로 삼을 만한 스스로의 임상경험이 결정적으로 부족하다. 엄격하게 말하면 마과회통은 의가醫家가 아닌 자에 의한 검증이 없는 치료매뉴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환자의 치료에 사용하는 경방서의 경우, 생사를 좌우하는 책의 성격상,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반드시 임상경험이 아니면 안 된다. 임상실적이 부족한 부정확한 의학지식의 경방서에 대해 우리들은 어떤 이유로든 그것을 높이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약용의학서의 치명적인 결함은 임상경험이 결정적으로 부족한 까닭에 그 의학지식이 완전히는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알기 쉬운 예로는 정약용이 통설인 ‘태독胎毒’설을 믿었고 조선 속방俗方인 ‘분치糞治’를 평가한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태독설胎毒說인데, 한당漢唐의학은 마진을 천행열병天行熱病 즉 전염병으로 이해한 반면 송명宋明의학은 마진의 원인을 태독에 두고 견해를 달리하였다. 즉 정약용은 평가할 만한 한당의학의 학설을 무시하고 명청경방서의 설을 따른 것인데, 아마도 그는 제병원후론諸病源候論 등 한당의 경방서를 읽지 않은 듯하다. 이헌길은 태독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으므로 태독설을 조선에 소개한 책임은 정약용이 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또한 정약용은 「아속편」에서 조선의 분치방糞治方을 인용하고 있다. 이경화李景華 등이 마진의 내열內熱을 다스릴 때 ‘무가산無價散’을 사용한 것이 그것이다. 무가산이란 사람·고양이·돼지·개의 똥을 납월臘月(음력12월) 중에 태워 재로 만든 것으로 설탕물로 조복調服한다고 한다. 분치는 유효한 치료법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임서봉任瑞鳳이 지적하는 대로 적어도 분치를 다용하면 회충이 반드시 생기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정약용이 「오견편」에 ‘중국의 진서疹書는 연편누장連篇累章이나 끝내 이른바 회충蛔蟲 일조一條가 없다’고 적고 있는 것은, 분치는 중국에서는 그다지 행해지지 않았고 오직 조선에서 유행한 결과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임상경험의 부족에 기인하는 정약용의학의 또 하나의 결함은 최종적인 판단을 타인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정약용은 의학지식이 정확하지 않았던 까닭에 판단에 자신을 가질 수 없었고 따라서 유론謬論을 정론正論으로 강변하지도, 유론謬論으로서 배제하지도 못했다. 특히 이설異說의 시비판단에는 주저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마과회통은 임상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기술記述내용은 의가醫家의 지남指南으로 평판이 높았는데, 그 구성이 유서적類書的이 되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정약용이 ‘의지醫旨에 어두웠던’ 까닭에 ‘간택거취揀擇去取할 수 없어,’(‘自序’) 이설을 그대로 남겨 둘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료매뉴얼은 본래, 이설을 기재할 필요가 없다. 이설을 병기하는 논술법은 번쇄해도 학문의 발전을 추구하는 전문서에는 중요한 게 사실이지만, 경방서의 경우에는 도리어 위기에 처한 독자讀者를 혼란에 빠뜨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정약용의 과학저작에서는 뛰어난 아이디어가 다수 발견되지만, 구고원류도 마과회통도, 과학서로서는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신감과 창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학의 인문학성人文學性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정약용의 과학연구에 과도한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2) 정약용실학에 있어서의 과학기술의 위치
정약용의 경학經學(六經四書의 學과 一表二書의 學)은 주자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주자설과는 다른 자신만의 해석과 사상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나아가서는 주자윤리학에 근거하는 양반사회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대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선행의 실학자들이 완곡하게 주자비판을 전개한 것과 비교할 때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정약용을 일컬어 일류一流의 경학자 또는 사회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이유이다.
정약용은 또한 ‘천하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학學으로서의 ‘기예技藝’를 중시하고 과학기술의 연구를 장려하였다. 직접 과학서를 편찬한 것은 사회사상가 내지 사회제도의 조정자調整者로서 실학을 추구했기 때문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마과회통 자서自序가 인용하는 범중엄范仲淹의 말 등은 그 정신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하지만 정약용의 실제의 과학연구는 인문학적이고 철저하지 못하며 전문연구의 영역에는 이르지 못했다. 양반적인 사회제도의 조정과 백공百工에 의한 과학기술의 향상, 즉 실학의 장려와 실학의 실천은 본래 다른 차원의 사상事象에 속해 있기에 양자의 괴리는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모순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정약용은 왜 사회제도의 조정이라는 양반의 학술범위를 넘어 과학기술의 연구를 추구推究하려 한 것일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조正祖의 명에 의해 서구의 기중기起重機에 대해 연구한 것도, 마진에 걸렸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도, 그가 기술을 중시하는 시점을 획득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실학, 즉 실용중시의 기본적 아이디어 자체는 스스로 서학서西學書를 읽고 이질적인 이론에 자극받아 안출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보다는 선행의 실학자, 특히 이익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추정해야 할 것이다.
정약용은 조선실학의 집대성자이며 선행이론의 뛰어난 후계자이다. 바꿔 말하면 실학의 필요성이라는 기본 아이디어를 스스로 안출한 것이 아니라 선행이론을 학습하고 이론적으로 이해한 학자인 것이다. 흔히 후계자는 그 숙명으로서 개산開山에 비해 확고한 자신감이나 기초를 이루는 경험이 부족한 것이 보통인데, 정약용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이론의 범위는 이익에 비해 광대하고 과학의 중요성도 정확히 인식하고 있지만 과학지식의 학습이 아직 충분하다고는 볼 수 없다.
이익 등 선행 실학자들은 서구과학을 배우고 그 자극 아래 스스로의 실학이론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정약용은 그리스도교[西敎]에 마음이 끌리기는 했지만 서구과학[西學]을 둘러싸고는 가슴 설레는 경험은 없다. 패러다임을 달리하는 서학지식은 이익 등을 통해 상당 정도 흡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에 관한 지식은 그의 광대한 사상체계 안에서, 그 주변부에 가만히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즉, 정약용의 경우에는 이익 등과 달리 그 사상구축에 있어 과학기술 지식은 본질적인 작용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