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검술을 알기 위해 검도까지 배운 준비된 무술배우다.
1977년 <최후의 정무문>으로 데뷔하는데 박종찬 화천공사 사장이 작명소를 통해 거룡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이소룡을 능가하는 배우가 되라는 뜻이었다.
데뷔작 촬영 때에는 적응을 못해 김시현 감독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이미 홍콩에서 제작비를 받은 터이라 무사히 촬영을 마치었다.
<오대제자>, <정무지보>, <무림 18여걸>, <응권>, <용권사수>, <일소일권>, <18방통문>, <사형삼걸>, <월광쌍수>, <정무문 '81> <흑표비객>, <용문파계제자>, <인자문살수>, <소림사 용팔이>, <종로부르스>, <뇌권>, <매권>, <전국구>, <암흑가의 황제> 등 너무 많은 영화를 찍었는데 본인으로서는 기라성 같은 많은 분들과 작업했다. 이제 40여 년 전의 일인데 황정리 배우는 어느덧 70세를 바라보는 나이다. 그는 외롭지 않도록 모두 열심히 살아야 한다더니 드디어 한국영화배우협회의 이사장이 되었다. 이는 무술배우로서는 처음 수장이 된 사례로 한국영화 풍토에서는 경이적인 일이었따.
1982년도에는 홍콩으로 가서 5편 정도를 찍었다. 확실치 않은 것이 국내 미개봉작도 있고 제목도 바뀌어서 알 수가 없다. 당시 성룡의 코믹 쿵후영화가 대세이어서 자신처럼 이소룡 풍의 영화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에 홍콩에서 활동하던 한국배우로는 황정리, 왕호, 권영문, 타이거 양 등이 있었다. 당룡이 귀국하고 난 뒤에 그가 홍콩영화계로 갔기에 홍콩에서 만나지는 못했다.
그는 영화 사업을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극장 영화마당 1,2관을 신촌에서 오픈했다. 그리고 (주) 아태필름을 설립하여 대표이사를 했다.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일 수밖에 없었던 일인데 드디어 한국배우협회 이사장을 맡아 열심히 일하고 있다. 영화계 어느 행사장엘 가거나 그는 꼭 참석하여 인삿말을 한다. 그만큼 열정적으로 일하는 이사장은 드물다. 그는 더 큰일을 꿈꾸고 있을 듯하다. 지금까지의 활동을 보건데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그의 이런 활동으로 한국 무술영화의 위상도 달라졌다.
그에게 이소룡이란 배우는 정신적인 스승이다. 이소룡으로 인해 영화배우를 동경하고 지금까지 영화인으로 살게 되었으니 당연한 말일 수도 있다.
그는 2011년 12월 31일, 제4회 이소룡기념사업회 세미나에 참석해 자신의 걸어온 길을 피력하며 이소룡기념사업회의 일이라면 도움을 주겠다며 그의 이소룡 사랑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