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
홍정수
"그는 '개울'(Bach)이 아니라 '바다'(Meer)라고 불려야 한다." 베토벤이 했다고 전해지는 이 말에는 그가 얼마나 바흐를 존경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생각에 '개울'의 뜻을 가진 바흐라는 이름이 너무 작고 초라하게 보인 것이다. 물이라면 바다와 비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바흐에게 가장 큰 위치를 부여하겠다는 뜻이다. 베토벤이 11살 때에 『평균율』을 치는 것을 듣고 이에 관해 크라머(Cramer)가 쓴 글을 보면, "더 이상 바랄 수 없이"(Non plus ultra) 잘 친다고 기록하고 있다. 크라머는 베토벤이 도와주어야 할 아이이며 제2의 모차르트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베토벤은 자라서 제2의 모차르트가 되지 않고 베토벤이 되었다. 그는 고전 시대에 바흐를 어느 정도 자기 음악에 수용한 마지막 인물이다. 그의 전에는 하이든, 모차르트 정도이다. 고전 시대를 대표한 이 세 사람들만이 바흐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베토벤의 유품을 정리한 쉰들러의 기록에 의하면, 평균율, 인벤션, 심포니, 토카타 등의 건반 음악 악보를 한꺼번에 묶은 악보의 앞장에는 1802년에 발간된 최초의 바흐에 관한 단행본(Forkel이 쓴 것) 중의 한 부분이 인용되어 적혀 있다. 그런데 쉰들러는 이것이 베토벤의 필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 내용은 대강 이렇다. "예술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말은 바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이를 구체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단지 식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베토벤이 그 옆에 커다란 의문 부호를 그렸다는 것이다. 쉰들러는 이것이 포르켈의 높은 바흐 평가에 대한 베토벤의 상반된 의견을 잘 말해 주고 있다고 말한다. 쉰들러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베토벤은 바흐가 단지 식자들만의 음악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베토벤은 바흐를 매우 가까이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러리라고 생각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바흐는 죽은 후에 일반인에게 거의 잊혀져 버렸다. 그는 주로 베토벤이 악보로 가지고 있었던 건반 음악 속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베토벤 역시 바흐 음악을 단지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바흐 음악에 위대성을 부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말년에 바흐와 비슷한 처지에 빠진다. 말년에 그의 음악은 사람들에게 외면 당했다. 그가 음악을 숙고하면 할수록 그 외면은 더욱 심해졌다. 베토벤 당대나 그 직후의 사람들은 그의 말년 작품을 곧잘 '돌아 버린' 음악가의 작품으로 생각했다. 그는 모차르트처럼 시작하여 바흐처럼 끝을 마친 것이다. 베토벤은 바흐에게서 정신적 혈연 관계를 느낄 만했던 셈이다. 이런 관계를 파악한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베토벤과 바흐는 일반 청중에게는 "반신반의의 위대성"이라고 말한다. 이 두 작곡가의 진정한 면이 일반 청중들에게는 거북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는 베토벤이 적은 의문 부호를 지우고 포르켈의 의견을 재확인한 셈이다. 바흐와 베토벤이 나란히 비교되는 일이 또 있다. 바흐의 평균율과 베토벤의 소나타가 폰 뷸로우에 의해 구약과 신약 성서로 비교된 이래로 이 비교는 자주 인용된다. 바흐나 베토벤은 엄숙함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이들의 음악은 오락장이나 무도장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들의 음악은 고고한 성격의 것이다. 음악을 종교적 경전과 비교하는 일은 19세기 이전에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흐를 열심히 발굴한 자들은 낭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바흐에게서 음악의 긍정적 첨단을 발견했다. 이 첨단은 시대의 맨 끝이라는 상상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갈 수 있는 맨 끝에 놓였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여기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영원성을 보았다. 바흐에 관해서는 낭만주의자들이 그들의 생각을 통해 바흐를 관찰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바흐관은 상당히 낭만적인 데가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최초의 영감을 중요시했고 이것을 고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바흐에게 영감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가공 작업이 더 중요했다. 낭만주의자들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교회에서 음악회장으로 끌어내어 예배와 상관없는 음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역사적 바흐는 이들의 생각과는 먼 거리에 있었다. 바흐 당대에는 음악 자체가 낭만주의에서처럼 종교로까지 격상된 것이 아니었다. 음악은 높은 목적을 위한 봉사의 임무를 맡았다. 바흐는 교회를 위한 음악적 봉사자였다. 그는 오선지를 메우는 작업을 하여 -상당 기간- 매주 칸타타 하나씩을 써냈다. 당대의 음악가들이 대부분 그러한 일을 했다. 그래서 바로크 전성시대의 작곡가들보다 더 많은 양을 작곡한 시대는 없었다. 한마디로 음악의 '생산시대'였다. 따라서 졸작이 범람한 시기이기도 하다. 바흐가 아무렇게 작곡해도 나무랄 사람이 있을 리 없건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흐는 신비스러운 사람이기도 하다. 음악에 대한 자발적 성실성의 면에서는 바흐와 경쟁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성실성은 의도적인 것을 넘어서 음악으로 그대로 구체화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이 꼬박꼬박 기일을 지켜 작곡해 낸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작업을 일상화하여 이를 꾸준히 지탱해 나가기에는 너무나 도취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바흐를 그의 역사적 상황에서 이해하지 않고, 자신들의 처지에서 바흐를 보았다. 바흐가 낭만주의와 잘 부합하지 못한 것을 깨달은 낭만주의자는 바로 베를리오즈이다. 그는 바흐에 관해 증오를 토로한다. 그의 몽상과 엄격한 바흐 음악의 구조는 화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배우고 숙고하는 바흐의 음악과, 저항하고 고백하는 그의 음악은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 낭만주의의 음악은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열정이다. 그러나 바흐의 음악은 모든 것을 흡수한다. 바흐의 음악적 특징을 말하려면 그 때까지의 음악에 관한 전체적 특징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만큼 많은 요소를 흡수하고 있는 것이 그의 음악이다. 그러나 남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그의 폴리포니 음악이다. 연주자들이 자기의 성부가 다른 성부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각 성부들 하나하나가 다듬어져 있다. 심지어는 독일 찬송가에 화성을 붙인 호모포니 코랄에서도 각 성부들이 상당한 독자성을 갖는다. 단선율 멜로디를 중심으로 듣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음악은 우선 어느 부분이 멜로디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불과 서너 개 음으로 구성된, 빠르게 움직이는 모티브는 음악을 끝없이 움직이게 하여 일정한 주기를 감지하기 어렵게 한다. 바흐의 음악을 말할 때에는 주로 이 부분에 관한 것이지, 느린 악장의 선율적 음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흐 음악에는 뛰어난 선율적 아름다움도 있다. 이는 요즈음 대중화된 멜로디를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인류의 기쁨이신 예수>, 칸타타 147번에서) 그런가 하면 당시의 거의 모든 춤곡이 그의 음악에 흡수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정교하게 다듬어진 보석 같이 깜찍한 음악도 있다. 여기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말을 들어보자. "음악 문헌에서 보는 '가장 영원한' 곡이라면 나는 항상 바흐의 2성부 인벤션과 3성부 심포니를 생각한다. 이 음악들은 전체에 손상을 미치지 않고는 한 음표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장인에 의해 깎인 사파이어의 연결처럼 고귀하다". 그런가 하면 극적인 면이 그의 <마태 수난곡>과 같은 곳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도대체 어느 오페라 작곡가가 줄거리를 그렇게 적절하게 음악화 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를 능가할 만큼 반음계 사용에 능한 작곡가는 없었다. 그를 능가하는 푸가 작곡가도 없었다. 그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능력 앞에 사람들은 말을 잃고 '신비'나 '비밀'과 같은 말로 그를 표현해 본다. 또 어떤 사람은 바다라고 말한다. 이 불분명한 단어들은 바흐라는 구체적 사실로부터 나온 것이다. 바흐의 정신적 측면은 어느 작곡가보다 많이 거론되었다. 그가 작곡을 할 때에 어떠한 생각을 갖고 했겠느냐 하는 문제는 당연한 관심거리이다. 그러나 바흐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글이 없어 이를 탐구하는 일은 어려운 편에 속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탄원서나 공적인 기록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떠한 판단을 내리기 좋아한다. 그 결과는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루터교의 전통적 교회 음악관인 '하나님의 찬양'과 '영혼을 신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흐를 교회 밖으로 끌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바흐의 음악과 언행은 교회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가 독일성의 전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는 루터교인인 그가 가톨릭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가톨릭교회에서 바흐 연주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는 사실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온 말이다. 내가 들은 어느 천주교 신자의 이야기도 이와 흡사한 것이었다. 그는 바흐가 미사를 썼기 때문에 천주교인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교도 예배를 미사라고 말하며, 전래된 미사가 독일어화 되었을 뿐 가톨릭 미사의 골격과 거의 같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흐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되어 온 바로는 그가 가능한 거의 모든 사상들을 대표하는 꼴이 되어 있다. 특히 보수주의자, 혁신주의자, 합리주의자, 산술적 신비주의자와 같은 틀이 많이 보인다. 이러한 것들은 바흐의 생각보다는 말하는 자의 생각을 더 드러낸다. 누구나 바흐가 자기의 편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바흐를 오늘날처럼 그렇게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가 어떤 직책을 원해서 지원하게 되면 항상 제1의 후보는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과 교제할 줄 몰랐고, 주로 다른 작곡가들의 곡들을 공부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바흐는 당대의 사람들로부터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가 살던 지방 밖으로 나가 본 일이 없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 점에서는 자기가 태어난 도시를 벗어난 일이 없는 칸트 보다는 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칸트는 더 큰 대학에서 오라는 것을 뿌리친 반면에, 바흐의 경우는 가고 싶어도 오라는 데가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아들의 대학 공부를 위해 봉급이 더 많은 곳으로 옮기고 싶어 했던 것을 그의 편지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흐는 거지 왕자와 비슷했다. 아무도 그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입장을 오늘날의 한국으로 옮겨놓으면, 마치 청주 어디쯤에서 교편을 잡고,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하며, 이따금 그곳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여는 어떤 음악가와 흡사하다. 그가 시간이 날 때마다 자기 방에 박혀 빌려온 악보를 베끼고 공부하여 열심히 작곡을 하는데도 서울에서는 그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없는 것이다. 청주 사람들은 그의 피아노 솜씨가 굉장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서울에서 온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는 지방에서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으며, 부모가 일찍 돌아가서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지 못하고 과외 레슨을 해가며 그곳 대학을 졸업하였다. (실제로 바흐는 대학을 못 다녔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평생 자신을 교육시키는 데에 커다란 갈증을 느끼는데, 그 갈증은 바다를 들이 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다가 되어 간 것이다. 바흐라는 바다가 삼킨 음악은 엄청난 것이어서 그 후에 오는 음악학자들에게 막대한 양의 일을 남긴다. 이 바다로 흘러온 개울들을 확인하는 데에만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며 이 개울들이 이루어 놓은 바다를 구명하는 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 전반에 있었던 바흐 운동은 그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케 하였고, 이로 인해 바흐 협회가 결성되고 그의 작품이 연구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 대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B단조 미사(h-moll messe)에 관한 것인데, 원래 바흐가 묶어 작곡한 것이 아니라, 독립되어 작곡된 것을 후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묶은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때마다 악보들이 다른 데에서 확인된 것이다. 바흐에 있어서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오늘날의 바흐는 바흐 연구가들의 작업을 제외시키고는 상상할 수 없다. 포르켈, 슈핏타, 슈바이처 등은 거의 일생을 바흐 연구에 집중시켰다. 그래서 바흐의 영광은 음악학자들의 영광이다. 당대에 영향을 끼친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바흐는 매우 작은 작곡가이다. 바흐의 커다란 위치는 그가 이룩한 음악적 영토 확장에서 나왔다. 거지 왕자는 거대한 영토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토가 전설이나 소문이 아니고 실제로 있다는 것을 음악학자들이 증명해낸 것이다. 바흐라는 바다는 그 이후에 흐르는 물줄기에도 막대한 영향을 줌으로써 이를 규명하는 것도 엄청난 작업을 요한다. 바흐는 커다란 흡입체일 뿐만 아니라 커다란 방출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흐를 음악의 끝이라고 본 포르켈이나 슈바이처의 생각은 맞지 않다고 하겠다. 바흐를 음악 또는 음악사의 끝이라고 보는 이들의 견해는 사실의 확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외경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바흐 전후의 음악가들이 모두 그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맞지 않다. 그러나 음악사를 한 사람으로 설명하기에는 바흐처럼 적합한 사람이 없다. 그가 음악사의 중심인물로 여겨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바흐 연구가들이 그의 음악에서 가장 놀라는 부분은 당시의 미학인 감정이론 (Affektenlehre)의 구체화 방안인 음형 이론(Figurenlehre)을 매우 철저하게 지킨 점이다. 이 이론들은, 일정한 감정은 일정한 음형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음악에서는 가사와 연관된 음악이 숙고됨이 없이 음형을 받는 일이 거의 없다. 이는 직접적 효과 위주의 헨델 음악과는 큰 차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바흐는 순수하게 음악적 부분인 푸가에서도 타의 추종을 용납하지 않았다. 바흐는 질적으로 음악의 중심이다. 양적으로는 그도 방대한 양을 작곡했지만 친구였던 텔레만의 절반 정도도 쓰지 못했다. 바흐는 자신이 음악(사)의 중심인물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자신을 독일의 제일가는 음악가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가 받은 현실적 대우는 그런 생각을 갖게 하기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는 평범한 음악가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 고아가 된 불운을 겪어야 했다.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그의 칸타타는 제대로 연주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대부분 초연이자 마지막 연주가 되는 것을 늘 체험하고 살아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당시의 유행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음악을 따르는 것을 거부할 만큼 그의 음악은 당시의 상황에서 매우 구식에 속했던 것이다. 바흐는 작품을 쓸 때에, 다른 사람이 좋아하겠는가, 그렇지 않겠는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는 그의 오르간 곡을 듣고 어리둥절하던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보거나, 그의 악보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작품에 쏟았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듣고 자신이 그 음악 속에 고려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는 음악이 기분 좋게 만드는 것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더 자주 떠오를 수 있는 일이다. 음악이 무언가 심각한 것을 뜻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흐는 큰 의미가 없다. 바흐는 누구한테나 달려가서 날 좀 들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듣기 좋게 하는 것 위주로 연주하는 바흐는 가장 바흐 같지 않은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을 바흐 음악은 요구한다. 수많은 그의 작품에는 졸작이 거의 없다. 이것이 헨델과 차이 나는 점이다. 헨델에게는 숙고하지 않고 재빨리 만든 음악이 더 많다. 바흐 음악은 가공의 세련됨이 너무 심하여 당시에 그의 음악을 연주해 줄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가 이러한 상황에서도 작품을 쉽게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그의 음악을 부담스럽다고 하는 의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연주하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게 당연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하였고,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이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것은 바흐의 불행이었고, 음악의 행운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만큼 음악에 깊숙이 들어간 사람은 없었다. 바흐에 대해서 정말로 놀랄 수 있는 사람은 음악에 깊이 들어간 사람이다. 바흐에 관해서는, 남이 놀라니까 같이 놀라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간접적으로 놀라는 길은 나중에 직접적으로 놀라는 첫걸음이 된다. 그러나 노력 없이는 이 일이 쉽지 않다. 바흐에의 길은 휘파람을 불면서 가는 길이 아니다. '바흐를 좋아 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차르트를 좋아 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덜 어울린다. 모차르트는 듣는 자가 같이 콧노래 하는 것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바흐는 이렇게 말을 걸지 않고, 혼자서 끊임없이 움직여 흘러간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게 흐른다. 바흐는 개울이 아닌 바다이다. 바다의 출구는 없다. 개울은 모차르트이다. 모차르트를 낮게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고 성격적인 면을 묘사한 것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재잘거리는 개울처럼 쉽게 말을 건다. 그는 자신이 전문가를 위해 작곡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을 위해 작곡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페라 가수들이 너무 노래가 어렵다고 불평하면 즉석에서 쉬운 노래를 만들어 주었다. 그의 음악은 아마추어에게도 피아노에 좀 앉아 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바흐는 대부분의 경우 의자를 권하지 않는다. 이렇게 바흐와 모차르트는 정반대의 음악가이다. 바흐에게는 음악이 너무도 중요하여 인간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차르트에게는 음악 못지않게 인간도 중요했다. "그러면 누가 더 나은가?" 하고 물을 사람이 있겠다. 왜냐하면 베토벤, 모차르트, 그리고 특히 바흐가 곧잘 음악의 챔피언처럼 소개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숭고한 예술적 투쟁'에서는 베토벤이, '인간을 위한 음악'에서는 '모차르트'가 , '음악 자체'를 위해서는 바흐가 가장 유리한 우승 후보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부질없는 올림픽이다. 왜냐하면 이는 본인들이 경주에 참가하지 않은 채 제 삼자들만의 상상적 올림픽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실 모두가 챔피언이다. 이들 중 어느 하나가 없으면 음악은 전체적으로 가난해진다. 이 가난의 비참함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적 올림픽은 끊임없이 개최된다. 간접적으로 놀라거나 간접적으로 좋아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음악가를 좋아하느냐?"고 묻는 사람을 수없이 만난다. 부담스런 올림픽의 시발이다. 그때마다 나는 섣불리 누구라고 대답을 못한다. 망설임 끝에 나오는 대답은"바흐"이다. 나는 이 문답을 동문서답처럼 느낀다. 이는 바흐가 '좋아 한다'는 말과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외경'이란 단어가 바흐에게는 더 어울린다. 또한 나는 바흐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하기보다는 많이 듣는 편에 가깝다. 그가 많은 음악학도들에게 거의 비슷한 입장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음악학도의 애완물이 아니라 스승이다. 위대한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