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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상심(傷心)
근래에 들어 만음요화가 이토록이나 비참했던 적이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이십 년 전 무산음호에게 거절당했을 때보다도
오히려 지금이 더욱 비참한 심정이었다.
만만하게 생각했던 개방의 거지 놈들에게 총관 추접파파가 당했다.
게다가 추적을 나갔던 화금궁의 제자들은
궁 바깥에서는 되려 놈들에게 반수 이상이 전멸당하고 간신히 궁으로 돌아왔다.
그것뿐이라면 만음요화의 입맛이 이토록 쓸 리가 없었다.
결정적인 문제는 소운비였다.
자신이 애써 음경지벽의 기술까지 동원해 거의 반은 녹여 놓은 소운비가 아니었던가!
한데 그 사매인지 뭔지 하는 계집을 보는 순간부터 돌처럼 굳어 버리더니,
그 뒤로 지금까지 며칠 동안 식음도 전폐하고
한마디 입도 열지 않는 돌부처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저러다간 다 잡아 놓은 봉이 며칠 못 가서 죽게 될지도 몰랐다.
무산음호를 제압한 것처럼 혼혼옥잡으로 소운비를 중독시킬까, 하는생각도 해보았지만,
뜻밖에도 소운비의 태원옥호공은 오 성을 넘지 않은 상태였다.
순진해 보이는 놈이 자신을 속인 것이다.
'태원옥호공이 십 성을 넘어야 혼혼옥잡으로 완전히 제압이 되는데.. 지금으로서는..'
바깥에서는 일단 패배해 물러났던 개방 놈들이
하남행성 일대에 진을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게다가 색존 자리를 노리는 탐서랑이
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 오고 있었다.
'이러다가 혼음사의나 용양도인, 아니 취화비도라도 찾아드는 날에는..!'
궁의 제자들에게 엄명을 내려
화금궁으로 통하는 옥문을 굳게 폐쇄하면서 경계를 시작한 지 벌써 며칠.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무언가 방법이 있어야 한다..! 방법이!'
방문이 열리고,
어제 왔던 그 백의소녀가 또 들어왔다.
손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죽그릇이 들려 있었다.
"일공, 죽을 좀 드세요."
소운비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말라붙어 껍질이 일어난 창백한 입술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간 정말 돌아가시고 말 거예요."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정말 안 드실 건가요?"
애처로운 소녀의 물음에는 돌조각이라도 마음이 흔들릴 것 같은데,
소운비는 고개조차도 젓지 않았다.
"그럼..!"
소녀는 죽그릇을 그 자리에 놓더니 가만히 일어나 소운비를 향해 절을했다.
소운비는 그제서야 고개를 약간 움직여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백의소녀는 배시시 웃으며 서글프게 말했다.
"궁주께서는 일공께 죽을 드리지 못하면 시중들 사람을 바꾼다고 하셨어요.
오늘이 일공을 마지막으로 뵙는 날이에요."
소녀의 뺨 위로 구슬 같은 눈물 방울이 흘러내렸다.
"비록 제가 잘 모시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지만,
일공께서 꼭 건강을 회복하시길 빌겠어요."
소녀는 얼굴을 가리고 방을 나갔다.
방바닥에 놓인 죽그릇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갔다.
소운비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벌써 아홉 번째의 소녀였다.
그즈음,
개방 총타 근처에 마련된 진설영의 임시 거처에서도
또 한 그릇의 미음이 식어 가고 있었다.
마치 열병을 앓고 난 것처럼 초췌해진 진설영의 얼굴을
진파파는 안쓰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상심할 줄은 몰랐구나..'
진파파는 자신의 행동이 어쩐지 후회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창백한 제자의 얼굴에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강처럼 뻗어 있었다.
"설영아, 제발 힘을 좀 내거라."
진파파가 힘없이 중얼거릴 때,
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진파파가 내다보니 삼목신룡 무옥이었다.
"웬일이시오?"
무옥은 정중하게 말했다.
"진 낭자의 용태가 궁금해서 왔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들어오시오."
진설영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에 대한 경계가 많이 누그러진 진파파였다.
소운비의 일로 상심하는 제자를 보고,
남녀 간의 일이 인력으로 막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서일까..
아무튼 진파파는 무옥이 진설영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물론 방문은 열어 둔 채였고,
방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뜰에 서서 옆눈으로 힐끔힐끔 관찰하고 있었지만.
무옥은 침상 가에 서서 진설영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진설영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그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한참 만에 무옥이 입을 열었다.
"그대의 보검은.."
무옥은 침상 옆에 세워 둔 진설영의 검을 가리켰다.
"참으로 훌륭한 것이오. 아마 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보검일 것이오."
병 중의 여자를 방문해서 하는 말치고는 이상했다.
"진 낭자."
무옥은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진 낭자가 그와 같은 보검을 지닐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진설영의 눈이 무옥을 올려다보았다.
"또한 그런 보검을 지닌 여인은 이렇게 맥없이 주저앉아서는 안되오."
무옥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힘을 내시오. 장래의 여중제일인(女中第一人)이여!"
무옥은 몸을 돌려 방을 나갔지만,
천장을 올려다보는 진설영의 눈은 알 수 없는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잠시 뒤 진파파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들여다보았을때,
진설영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죽을 주세요, 사부님."
깜빡 잠이 들었던 소운비는 비파의 현이 퉁겨지는 소리에 눈을 뜨고 말았다.
침상 가에 놓여져 있던 소운비의 비파를 만지작거리던 백의소녀가
화들짝 놀라며 그것을 내려놓았다.
"죄송해요! 그냥 궁금해서 만져 보았어요."
소운비는 가만히 눈동자를 옮겨 그녀의 발치에 있는 빈 죽그릇을 응시했다.
죽그릇을 가져 온 것은 여태까지의 소녀들과 같은데,
어째서 빈 죽그릇일까?
백의소녀는 소운비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혀를 살짝 내밀고 웃었다.
"그것도 죄송해요, 실은 제가 다 먹어 버렸어요."
그녀는 종알거리면서 소운비의 옆에 와서 스스럼없이 앉았다.
"일공께서 식사를 안 하신다고
궁주님께서 궁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단식령을 내리셨거든요.
너무나 배가 고팠어요.
그리고 또 비지 않은 죽그릇을 가지고 나가면 혼쭐이 날 테니까요.
전 그러긴 싫거든요."
소녀는 마치 새처럼 지저귀고 있었다.
소운비가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제 이름은 혜와(惠 )라고 해요. 궁에서는 소혜라고 부르지요."
그녀는 빈 죽그릇을 들고 나가며 소운비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궁주님께 일공께서 죽을 드셨다고 말해도 되지요? 안 그러면 전 정말 맞아 죽어요."
그녀가 나가고 난 뒤에도,
방안에는 어쩐지 싱그러운 향기가 맴돌고 있었다.
소운비의 입가에 힘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설영을 닮았구나..!'
다음날도 소혜는 소운비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죽을 먹어 버렸다.
그리고는 혼자 종알종알 떠들다가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죽을뻔한 아이들을 궁주님이 사 오시기도 했지요.
남들은 바깥에서 우리 궁주님을 뭐라고 욕을 하는지 몰라도,
저는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쨌거나 굶어 죽을 뻔한 고아들에게 밥과 잠자리를 주신 분이니까요."
"신경질도 이만저만이 아니구. 이럴 바에는 차라리 나가고 싶어요!"
"비파 타는 모습은 멋있어 보이잖아요. 가르쳐 주시지 않겠어요?"
침묵에 휩싸여 있던 소운비의 세계에 소혜라는 새가 날아들었다.
그 새는 무척이나 작고, 시끄러운 새였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사랑스럽기도 했다.
소혜가 드나든 지 칠일째였다.
그날따라 그녀는 유난히 소운비를 귀찮게 해댔다.
미음을 한 숟가락 떠서 소운비의 코앞으로 내밀었다가
'안 드실래요?'하고 묻고는 제 입으로 털어넣고,
또 한 숟가락을 떠서 내밀며 묻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귀찮아진 소운비는 벽을 보고 아예 돌아누웠다.
한동안 소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비파는 낡은 것처럼 보이는데 소리는 무척 잘 나네..?
줄도 그렇게 질길까? 한번 끊어 봐도 돼죠?"
소운비는 벌떡 일어나 돌아보았다.
소혜가 날카로운 비수를 들고 막 비파의 현을 그으려는 찰나였다.
"무슨 짓이야!"
몸 어디에서 힘이 났는지,
소운비는 번개처럼 달려들어 그녀의 손에서 비파를 빼앗았다.
비파는 그에게 귀회루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런 것을 함부로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소운비의 느닷없는 움직임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던 소혜는
잠시 뒤 배시시 웃었다.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처음으로 목소리를 들었네요."
그 말투에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소운비를 멈칫하게 만드는 그런 쓸쓸함이었다.
소혜는 먹다 만 죽그릇을 들어올리더니 사뿐사뿐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방문 앞에서 그녀는 소운비를 돌아보며 애써 명랑하게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내일부터는 다른 사람이 올 거예요."
그리고 약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그 사람은 살아서 이 방을 나가게 되길 바래요."
그녀가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고 할 때,
소운비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무슨 소리지?"
억지로 돌려 세워진 소혜의 얼굴은 울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세요? 무정한 분.
벌써 아홉 명이나 이렇게 보내 놓구선..
저에게 주어진 시간도 다 끝났어요. 이젠 제 차례예요."
소운비는 가슴 안에서 얼음 덩어리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방을 나가면 죽는단 말이냐?"
"그래요."
소혜는 그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고,
소운비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모두들 그렇게 이 방을 나갈 때 슬픈 얼굴로..
미련한 소운비!
만음요화가 어떤 여자인지를 잊었단 말인가?'
소운비는 입술을 악물었다.
"만음요화가 너도 죽인다고 했느냐?"
소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소운비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설영을 닮은 아이인데.. 설영을!'
소혜의 눈이 슬프게 빛났다.
그녀는 맥없이 고개를 떨구며 등을 돌렸다.
저 문밖으로 나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까?
그토록 천방지축이고 발랄했던 소혜의 뒷모습에 짙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순간,
숱한 갈등에 시달리던 소운비는 결심을 굳혔다.
"소혜."
소혜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죽을 이리 가져 오너라. 먹겠다."
돌아보는 소혜의 얼굴에 서린 것과 같은 그런 기쁨을,
소운비는 결코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한번 문지르더니 자못 씩씩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혜와라고 부르세요!"
혜와의 간호는 극진했다.
어린 소녀 같기만 하던 그녀가 소운비를 간호할 때는
마치 어머니처럼 엄격하게 굴기도 하는 것이었다.
"몸을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돼요. 세상에 하나뿐인 몸인걸요.
자기 몸을 자기가 보살피지 않으면, 몸은 무척이나 화가 날 거예요."
훈계하듯 말하는 혜와의 모습에 소운비는 오랜만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작고 귀여운 얼굴을 오랜 시간 들여다보면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녀가 진설영을 닮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그녀는 다른 얼굴,
뚜렷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소운비가 한번 보았던
어떤 얼굴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것을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지만,
그것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소운비의 몸은 완쾌되었다.
"내일부터는 못 와요."
"어째서?"
시무룩하게 말하는 혜와에게 소운비는 물었다.
"일공의 몸이 다 회복되었으니까요. 내일 밤엔 궁주께서 오실 거예요."
소운비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죽어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진설영과 자신의 사이를 갈라 놓은 원흉이 아닌가!
소운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는 것을 본 혜와는 얼른 말했다.
"저도 그건 싫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이 궁 안에 있는 한은..!"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두 눈을 반짝이면서 목소리를 한껏 낮추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달아날래요?"
소운비에게는 귀가 트이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무슨 수로 달아날 수 있단 말인가?
한데 철없는 혜와는 일단 '달아난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걷잡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줄줄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래요, 달아나요!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예요.
일공께서도 이곳이 싫잖아요? 저도 싫어졌어요.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좋은 생각?"
"내일은 매달 한번씩 정기적으로 궁 밖으로 마차가 나가는 날이에요."
"왜?"
혜와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궁 안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사러 가는 거지요."
소운비의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여러 가지 생각들이 지나갔다.
"정말인가? 어떻게 하면 그 마차에 올라탈 수 있지?"
"그건 쉬워요. 마차를 몰고 나가는 사람은 황의 항렬의 소민 언니인데,
그 언니는 성격이 좀 게을러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지를 못해요.
그러니 오늘밤에 마차의 점검을 마쳐 놓고 내일 새벽에 바로 출발할 거예요.
오늘밤 마차의 점검이 끝난 뒤 몰래 타고 있으면 바로 나갈 수 있어요."
"요사이 궁의 경계가 엄해졌을 텐데?"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엄해진 만큼, 안에서 나가는 것에는 소홀하기 마련이지요.
어때요, 일공? 같이 나가실래요?"
소운비는 갑자기 엄한 얼굴로 말했다.
"나와 같이 탈출할 생각이라면 너는 한 가지 버릇부터 고쳐야 한다."
혜와의 귀여운 눈이 동그래졌다.
긴장한 모양이었다.
"뭘요?"
"일공이라고 부르지 마라. 소름 끼치니까."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럼 뭐라고 불러요?"
"내 이름은 소운비다. 운비 오라버니라고 불러라."
그날 밤 소운비와 혜와는 몰래 방을 빠져 나가,
소민이 점검을 끝낸 마차에 올라탔다.
어떤 곳에서는 검은 도(道)이며, 어떤 곳에서는 술(術)이라 불린다.
지금 허공에 수놓여지고 있는 검광(劍光)은 도라고 부를 수도,
술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것은 단연코 예(藝)였다.
화아앙! 화아앙!
계곡의 바람 같은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는 찬연한 검!
오랜만에 몸을 일으킨 진설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검을 들고 뜰에 나와 검무(劍舞)를 추는 것이었다.
진파파는 그 모습을 멀찌감치에서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진설영의 검무를 보고 있었다.
삼목신룡 무옥이었다.
진설영은 마치 허공 중의 그 무엇인가를 베어 내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베어 내고 싶은 것은 가슴을 에는 과거지사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정말 베어 내고 싶은 것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녀는 그 무엇인가를 베어 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마침내 멈추어 섰을 때는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휴우우..!"
진설영이 이마의 땀을 씻고 고개를 들었을 때,
삼목신룡 무옥이 가까이 와서 서 있었다.
그의 눈은 기쁨의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이구려."
진설영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도전적인 눈빛이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색마들을 치기 위한 계획을 세울 것이오."
"어떤 계획인가요?"
이번에 만음요화를 상대하면서, 그들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점이 확인되었소.
남궁세가와 우리 개방에서는 전무림에 배첩을 돌려
격색마회(檄色魔會)를 꾸릴 생각이오.
색마들은 자신들의 악행으로 인해 사방에 많은 적을 만들었으니,
이 일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오."
"그럼, 내가 할 일은 무엇이지요?"
"일단 여기 있는 사람들은 각파로 갈라져서 무림첩을 돌릴 것이오.
진낭자도 한 파를 맡아 사람을 모아 주면 고맙겠소."
진설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꼭 다문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야무지고 단단해 보였다.
무옥은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인가를 할 듯하다가
입가에 한 조각 웃음을 베어물고 돌아섰다.
"잠깐만."
불러 세운 것은 진설영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무엇이..?"
"왜 당신의 별호는 삼목신룡이지요?"
무옥의 얼굴에 언뜻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글쎄.."
그는 말끝을 얼버무리면서 돌아섰다.
삼목신룡 무옥을 만난 이래로 그가 대답을 회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언젠가는 알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오."
천천히 걸어가는 삼목신룡 무옥의 뒷모습을
진설영은 한참 동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낭패였다.
동백산의 빗줄기가 너무나 거셌던 것이다.
마차를 타고 화금궁을 나올 때까지는 좋았다.
소운비는, 내친 김에 그 마차에 계속 탄 채로 동백산을 빠져 나가고 싶었다.
하나 혜와가 반대했다.
소민은 중간에 반드시 한번 마차를 점검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차의 속력이 줄어드는 곳에서 내렸던 것인데,
그곳은 아직 동백산 중턱이었고,
비는 억세게 내리고 있었다.
소운비도 몸이 좋지 않았거니와, 혜와의 걸음도 질퍽거렸다.
그때였다.
두 사람 다 흠뻑 젖어 앞을 분간하기도 어려운 때에,
혜와가 천운처럼 동굴을 발견한 것이다.
"아유, 추워라..!"
혜와는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미리 준비해 온 방수포(防水袍)를 풀었다.
그 안에는 소운비의 비파와 몇 가지 비상식량,
그리고 화섭자가 있었다.
동굴 안의 검불을 모아 불을 피울 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혜와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자락을 쥐어짜더니
이것으로는 안 되겠다는 듯이 별안간 옷을 훌렁 벗어부쳤다.
소운비는 소스라치게 놀라 얼굴을 돌렸다.
"무슨 짓이야!"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감기에 걸릴 것 같은걸요.
운비 오라버니도 어서 옷을 벗어서 말리세요."
"어떻게 그런..!"
혜와는 혀를 삐쭉 내밀었다.
"치, 무슨 군자처럼! 보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말 그대로였다.
소운비는 혜와의 옷이 마를 때까지 돌아보지 않기 위해
모닥불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았다.
그의 등은 타버릴 것처럼 뜨거워졌지만
앞쪽의 옷은 여전히 축축했다.
하나 결코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
동굴 안에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혜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동굴 안에서는 소리가 왕왕 울렸다.
혜와의 음성은 마치 꿈속에서 들려 오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옷을 마구 벗어댔는지 아세요?"
"글쎄다."
소운비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혜와가 까르르 웃었다.
"바보! 그건 오라버니를 믿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속옷만 걸친 몸으로 별안간 소운비를 뒤에서 껴안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 앞에서는 어떤 짓을 해도 상관없어요. 안 그래요?"
그녀의 행동은 분명 농염한 애무는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럼없는 장난에 가까웠다.
하나, 그것이 오히려 소운비를 더욱 괴롭게 했다.
그는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쳤다.
"그만, 어서 저리로 가! 어서!"
다섯 명의 색마들을 만난 이후로 소운비의 몸에 닥친 운명은 참으로 괴이한 것이었다.
그것은 음양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변화였고,
강한 양기와 극히 약한 양기 사이에서 천변만화하는 기연이었다.
맨 처음,
그의 몸은 날 때부터 허약하여 양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가 만일 귀한 집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자손의 대가 끊어질 위기였던 것이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보양술이었다.
한데 그토록 허약한 그의 몸에,
진파파가 어떤 금제를 가한 것이다.
그 금제는 그로 하여금 이성에 대한 욕구를 느낄 수 없게 만들고,
만일 그가 그것을 느낄 시에는 막대한 고통이 따르게 했다.
마치 삼장법사(三藏法師)가 손오공(孫吾空)을 제압한 것처럼..!
추접파파는 그의 허약한 체질을 고쳐 주었고,
성에 대해 무지한 그를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강한 양기를 북돋우기 위해 삼녀금침회정대법을 시행했는데,
이것이 진파파가 그에게 가한 금제와 맹렬하게 충돌을 일으켰다.
그 충돌의 결과로,
그는 육체적으로는 교접이 가능하나,
정신적으로는 교접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무지한 고통이 따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만음요화는 그런 그를 뒤바꾸기 위해 무산음호로부터 태원옥호공을 익히게 만들었다.
사 성 가량의 태원옥호공을 익힌 소운비는
마음속에 두 개의 다른 심성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진파파의 금제에 의한 것으로,
교접에 대해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듯 아픈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태원옥호공에의해 생긴 것으로,
교접을 강렬히 원하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이었다.
진파파의 금제가 아무리 심오한 것이라고 하나,
소운비 스스로가 익힌 태원옥호공보다 강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 수준이 오 성을 넘지 않아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제는 소운비 자신이 무엇을 바라느냐에 있었다.
그는 여태까지 단 한번도 스스로 원해서
여자의 벌거벗은 몸과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의 원인을 자신에게 닥친 운명의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두 개의 힘이 몸 속에서 맹렬히 싸우고 있는 것 외에도,
등뒤에서 따스하게 안아 오는 혜와의 몸이 싫지 않다는 심정이
그를 더 괴롭게 하고 있었다.
일단 이 봇물이 한번 터지고 나면 그 다음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응? 오라버니, 왜 그래요?"
"아니, 아니야. 그냥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둬라."
하나 소운비가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릴수록,
혜와는 걱정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래요? 어디 괴로우세요?"
소운비는 눈을 감고 열심히 자기 자신과 분투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운비! 이것은 색마들과 다를 바 없는 욕심일 뿐이다.
나는 혜와와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 이 아이를 건드린다면 그것은 설영과의 일 때문에 저지르는 분풀이일 수도 있다..!'
소운비는 모르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정을 느끼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때로는 십여 년을 함께 지낸 오누이 같은 사이보다도
만난 지 며칠 만에 불붙듯이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 남녀 사이라는 것을..
혜와는 소운비가 불덩이처럼 뜨거워져서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보고 울상이 되었다.
그녀는 두 팔로 소운비의 머리를 힘껏 껴안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힘내세요."
그리고 그녀는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안는 것처럼
자신의 가슴에 소운비의 머리를 기대게 했다.
이어, 보드라운 입술로 소운비의 이마에 맺힌 땀을 핥았다.
그 순간,
소운비의 누르고 누르던 인내심도 바닥이 나고 말았다.
"아..!"
혜와는 별안간 소운비가 고개를 들고는 자신을 힘차게 껴안아 오자
놀라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비명이 터져 나오도록 소운비의 입술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일까..?
혜와는 눈을 감았다.
소운비도 눈을 감았다.
바깥에서는 빗줄기가 더욱 거세게 쏟아져 내렸다.
소운비는 눈을 감고 가만히 그녀의 귓불을 쓰다듬었다.
그 손은 그녀의 촉촉히 젖은 머리칼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비에 젖은 여자의 머리칼에서는 풋풋한 냄새가 풍겼다.
소운비는 크게 숨을 들이켜 그 냄새를 가득 마셨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칼의 냄새가 좋다고 하더라도,
그의 입술에 아기처럼 비벼지는 여자의 입술에서 풍겨 오는
달콤한 냄새보다 좋지는 않았다.
그는 폐부 가득히 그 냄새도 들이마셨다.
그의 손은 혜와의 머리칼에서 스르르 흘러내려 그녀의 동그스름한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빗물이 마르지 않아 촉촉히 젖어 있었다.
'꿈인 것 같구나..!'
이토록 숨막히는,
이토록 달콤한,
이토록 황홀한 순간이 어디에 있을까?
소운비는 정녕 그 속에서 빠져 나오고 싶지 않았다.
혜와의 몸이 사르르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그의 품안에 무게를 실어 기대이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여기까지만..!'
소운비는 그녀의 어깨를 으스러지게 꽉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에게서 입을 뗐다.
혜와 역시도 꿈결을 헤맸던 모양이었다.
아직도 몽롱한 두 눈이 어리둥절한 듯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여기서 멈추는가 하는 표정이었다.
소운비는 아까와는 달리 이상하게 침착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치 몸 안에 가해져 있던 온갖 금제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놀라지 않았니?"
소운비가 다정하게 물었다.
혜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그만 하도록 하자."
"왜요?"
순진하게 되물어 오는 그녀의 코를 소운비의 손가락이 살짝 건드렸다.
"더 계속하다가는 내가 너를 그냥 두지 못할 것 같구나."
혜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두 개의 흰 조약돌 같은 주먹이 그를 때렸다.
"운비 오라버니도 참.."
그때였다.
동굴 입구,
빗소리를 뚫고 한 줄기 음성이 들려 왔다.
"보기 좋구나!
만음요화에게 많이 배운 모양인데 아직 색마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어!"
소운비의 안색이 변했다.
그 음성은 귀에 익은 것이었다.
탐서랑은 그야말로 길에서 떡을 주운 격이었다.
만음요화가 소운비를 낚아채서 달아난 이래로,
얼마나 그 뒤를 쫓아 헤맸던가.
화금궁의 경계가 삼엄하여 감히 들어갈 생각을 못하고
동백산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쏟아지는 비라도 피할 생각으로 찾은 동굴에서
그토록 노렸던 소운비에다가 덤으로 꽃 같은 소녀까지 건지게 된 것이다.
'저놈은 일단 때려눕혀 놓고 먼저 몸부터 풀어야겠다.
며칠째 산에서 지내느라고 음기를 쐬지 못했더니 이거 참 뻐근해서 원..'
탐서랑은 피식피식 웃으며,
떨고 있는 혜와와 그 앞을 가로막고 선 소운비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는 원래 청성파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무공의 기초가 기이하지는 않으나 제법 절도가 있었다.
그 절도있는 손발이 칠십이파검법(七十二波劍法)을
권법과 각법으로 운용하여 소운비를 향해 작렬했다.
파바바바박!
소운비는 전신을 정신없이 얻어맞고 동굴 구석에 가서 나동그라졌다.
"오라버니!"
혜와가 비명을 짜 올렸다.
탐서랑이 그녀를 낚아채서 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는 서둘러 아랫도리를 까내리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미안하오, 낭자.
원래 나는 풍류남아로 결코 여자를 강제로 취하는 법이 없었는데,
오늘은 좀 사정이 급하구려."
그는 혜와의 전신 혈도를 점하여 꼼짝못하게 만들어 놓고는
꿈틀거리는 소운비를 향해 이죽거렸다.
"너는 만음요화에게 들어간 지 며칠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계집을 다루는 방법이 고작 그것이냐?
잘 보거라. 이 선배가 운우의 도를 가르쳐주마!"
"안 돼!"
소운비는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나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얻어맞은 곳마다 근육이 마비된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무공을 아는 사람에게 잔뜩 얻어맞는다는 것은
길거리의 싸움에서 몰매를 맞는 것과는 수준이 다른 것이었다.
작은 힘으로도 사람을 삽시에 꼼짝못하게 만드는 기술이 거기에는 담겨 있었다.
만일 사 성을 넘는 태원옥호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소운비는 단지 움직이지 못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피까지 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처럼 자신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왜 무산음호에게 단지 몇 수의 무공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지경이 되어서 혜와조차도 지켜 줄 수 없다니!'
그가 동굴 바닥을 뒹굴며 몸을 일으켜 보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
탐서랑은 혜와의 두 다리를 벌려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보라구. 이것이 처녀의 고통을 가장 덜어 줄 수 있는 방식이지. 자아..!"
탐서랑이 막 입궁(入宮)의 자세를 취할 때,
별안간 혜와가 까르르 웃었다.
겁탈당하기 직전의 여자가 웃는 것은,
아무리 색마라 해도 섬뜩하기 마련이었다.
자연 탐서랑의 기세가 주춤했다.
"왜 웃는 거지?"
"당신이 혹시 오대색마 중 하나라는 탐서랑인가요?"
"그렇다."
혜와는 다시 웃었다.
"호호..! 나는 오늘 운이 좋아 기연을 만나게 되었구나! 호호호..!"
육욕으로 불타던 탐서랑의 두 눈에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무슨 소리지, 그게?"
혜와는 똑바로 탐서랑을 쏘아보며 말했다.
"잘 들어라! 나는 화금궁 백의 제자 소혜다.
내가 궁 밖으로 나온 것은 궁주님의 특별한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대가 만음요화의 제자라면 더군다나 뒤가 구린 탐서랑이었다.
만만치 않은 색공의 소유자가 바로 만음요화 아닌가.
그 제자라면 결코 녹록치 않을 터.
어떤 사술을 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저 소 공자가 어영부영 궁을 빠져 나가게 내버려둘 우리 화금궁이 아니다.
사실 궁주께서는 여간해서 말을 듣지 않는
소 공자의 동정을 떼게 하기 위해 나를 보내 속이신 것이다.
궁주께서는 적당히 분위기를 만들어 그와 동침하고
다시 궁으로 돌아오라고 내게 이르셨다.
일단 한번만 자의로 교합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먼저 나서서 원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야."
혜와의 말은 탐서랑보다도 소운비에게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소운비는 방금 귓전에 천둥 소리가 울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아닐 거야. 혜와는 영리하니까 저자를 속여넘기려고 지어 낸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어쩐지 자신이 너무나 쉽게 화금궁을 빠져 나왔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의심이란 마치 정욕과 같아서
한번 둑을 무너뜨리고 넘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법이었다.
탐서랑은 혜와의 말에 약간 주춤했으나 곧 맞받아 쳤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너를 취하고 저놈만 데리고 이 산을 빠져 나가면 그뿐이다."
혜와는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고 쏘아붙였다.
"바보 같은 놈! 내가 왜 기연을 얻었다고 말했는 줄 아직도 모르겠느냐?
궁주께서는 소 공자의 원양진력을 내게 상으로 내리셨다.
본래 궁주께서 취하시려고 한 것인데 내게 하사하신 것이다.
원양진력을 취할 삼녀채양보음술의 구결과 함께!"
그 말을 듣는 순간,
탐서랑은 징그러운 벌레라도 본 듯이 혜와의 몸으로부터 떨어졌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이 여자를 취하는 순간
애써 길러 온 공력을 모두 빼앗기고 말 것이 아닌가?
방술을 닦는 자에게 그와 같은 낭패는 없었다.
"큰일날 뻔했군!"
탐서랑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혜와의 몸을 비켜 갔다.
"할 수 없지. 일단은 저놈이라도 데리고 여기를 빠져 나가야겠다."
탐서랑은 투덜거리면서 고꾸라져 있는 소운비의 등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소운비의 몸은 힘없이 그에게 끌려왔다.
"가자! 내가 너로 하여금 세상에 다시 없는 환락경을 맛보게 해주마."
비록 혜와에게는 낭패를 당했지만,
어쨌든 소운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며 탐서랑은 걸음을 재촉했다.
한데 그의 몸에 안기다시피 기대고 있던 소운비의 몸이
갑자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것이 아닌가!
"사내 놈이 제 발로 서지도 못한단 말이냐?"
탐서랑이 비웃으며 다시 그를 일으키려고 하는 순간,
소운비가 몸을 굴려 동굴 바깥쪽으로 피해 갔다.
"하.. 저놈이!"
소운비가 감히 도망치려 한다고 생각하자,
탐서랑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밖이라고 해봤자 바로 절벽이 아닌가!
하늘을 나는 경공을 익혔으면 모르되 도망칠 수 없는 곳이다.
하나 굴러 간 소운비가 손을 번쩍 들어올리자,
탐서랑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그 손에 잡힌 것은 탐서랑의 독문병기인 왕모선(王母扇)이었다.
"아, 아니? 저것이!"
그것은 탐서랑이 수년 간 공을 들여 만든 무기였다.
접선을 펼치면 복숭아를 따고 있는 서왕모(西王母)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왕모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사천 당문의 여자를 꼬셔서 알아 낸 암기 제조 기술로 제작한
여러 가지의 암기가 숨어 있음은 물론,
특별한 미약을 장치해 여인 앞에서 슬슬 부치기만 하면
수십 년 수도한 여승이라고 해도 스스로 옷고름을 풀게 만드는 효용이 있었다.
그로서는 여러모로 아낄 수 밖에 없는 물건인 것이다.
방금까지 자신의 품안에 있었던 그 접선이
어째서 소운비의 손 안에 들어가 있는지
탐서랑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소운비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와중에서도 침착하게 그를 향해 말했다.
"어서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당신의 접선을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리고 말겠소."
탐서랑의 잘생긴 얼굴이 분노와 당황 때문에 일그러졌다.
자신의 독문병기를 남의 손에 빼앗긴다는 것보다
더한 수치는 무림인에게 없다.
그것도 저런 나약한 애송이에게 말이다.
"어쩔 거요? 던져 버려도 좋소?"
소운비는 접선을 든 손을 절벽 쪽으로 내밀며 외쳤다.
"아니, 아니 잠깐만!"
탐서랑은 이를 갈아붙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놈..! 몇 걸음만 더 다가가면..!'
방금 전에는 방심한 상태라서 접선을 도둑맞았지만,
마음먹고 달려든다면 소운비가 접선을 놓기 전에 낚아채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거리였다.
탐서랑은 항복이라도 하듯 두 손을 쳐들며 천천히 동굴 바깥으로 나섰다.
"물러나겠네. 오늘은 할 수 없을 것 같구.. 차아앗!"
파아앗!
동굴을 나온 뒤,
소운비로부터 뒷걸음질을 쳐서 물러날 듯하던 탐서랑은,
별안간 기합과 함께 몇 장을 단박에 뛰어 소운비 앞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소운비가 접선을 내다 버리지 못하도록
제일 먼저 손을 뻗어 그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탐서랑은 큭큭 웃으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이놈! 팔목을 부러뜨려 버릴까 보다!"
한데,
그것은 바로 소운비가 바라던 바였다.
여인처럼 나긋나긋하기만하던 소운비의 손목이 살짝 도는가 싶더니
거꾸로 탐서랑의 손목을 감아 쥐었다.
'이놈이?'
그 정도라면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별안간 그 손아귀에서 밀려 나오는 막강한 힘은
탐서랑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대비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놈이 노리고 있었구나!'
탐서랑은 그제서야 소운비가 막강한 힘을 숨기고
자신을 잡을 수 있는 순간을 노려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버둥대며 절벽에서 물러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으으으으..!"
몇 발짝을 간신히 뒷걸음질쳤을 때,
소운비의 얼굴이 붉어지고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탐서랑은 서둘러 내공을 일으켜 그에 대항하려고 했으나
구척거인에게 손목을 잡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만장절벽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마치 팔씨름이라도 하듯이 서로를 당기고 있었다.
그 팽팽한 힘의 줄이 어느 한쪽으로 쏠린 것은 한 순간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소운비는 우렁찬 기합을 토해 내며
탐서랑의 손목을 끌고 절벽 쪽을 향해 질주했다.
"으아아악!"
땅바닥에 모질게 쓸려 가면서 탐서랑은 찢어지는 비명을 짜 올렸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지독스럽게도 왕모선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리고 아득한 낭떠러지를 향해 소운비는 힘차게 팔을 휘둘렀다.
"으아아아아!"
탐서랑의 몸뚱어리는 작은 조약돌처럼 그 낭떠러지 아래로 낙하했다.
그의 비명도 빗소리에 묻혀 낭떠러지 아래로 사라져 갔다.
"하아.. 하아..!"
소운비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눈은 격정 때문에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하아.. 하아..!"
무공 초식을 모르는 소운비로서는
탐서랑을 상대하여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밖에 없었다.
그의 방심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 순간을 만들기 위해 소운비는 소매치기의 기술과,
몸 안에 남아있던 태원옥호공의 힘을 이용했다.
태원옥호공을 쓰게 되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선택이었다.
"하아.. 하아..!"
그는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전신을 제압당한 혜와가 고개만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소운비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것이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 막 오 성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는
태원옥호공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묻겠다."
소운비는 숨을 고르며 가까스로 말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혜와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아까 탐서랑에게 했던 말이 사실이냐?
아니면 그를 속이기 위해서 한말이냐?"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는 혜와가 '거짓말이었다'고 말하기를 바랬다.
설령 그것이 진짜였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순간만큼은 거짓말이었다고 이야기할 만큼 혜와가 영리하기를 바랬다.
하나 혜와는 그렇지 못했다.
고개를 옆으로 떨구며 그녀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사실이에요."
"으으으.."
소운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악 다문 이빨 사이에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윽고 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신음은 포효가 되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아!"
태원옥호공 오 성의 단계에 입문하기 시작한 증거.
비 오는 산중을 우렁차게 울리는 호랑이의 울음 소리였다.
"크르르르..!"
한참 울부짖던 소운비가 으르렁거리면서 혜와를 돌아보았다.
그 눈은 야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두 손과 두 발을 이용해 그녀에게로 기어왔다.
혜와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탐서랑이 제압한 혈도가 풀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소운비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 가까이 다가왔을 때,
혜와는 절망을 느끼며 두 눈을 꼭 감았다.
한데..?
소운비가 움켜쥔 것은 그녀의 몸이 아니라
그녀의 머리맡에 있던 방수포였다.
그는 허겁지겁 그 안에서 한 개의 작은 목갑(木匣)을 꺼냈다.
그 안에는 그가 소중하게 간직한 단약이 들어 있었다.
무산음호가 그에게 주었던 단약이었다.
'운비 오라버니?'
그녀가 다시 눈을 뜨고 바라보았을 때,
소운비는 단약을 입에 털어넣고 동굴 벽에 기대어 앉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소운비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머리 위에 영롱한 다섯 개의 원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 눈에서는 이미 야수의 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태원옥호공의 십 성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이제 그는 마음속의 정욕을 다스릴 수 있었다.
다만,
태원옥호공에는 극성인 만음요화의 혼혼옥잡을 만나기 전까지는..!
소운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느새 바깥에는 비가 그쳐 있었다.
비 온 뒤의 안개가 동백산 일대를 풍요롭게 감싸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는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만음요화의 혼혼옥잡을 만나서는 안 되는 몸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 외에도 이 동백산은 그에게 상처만을 준 곳이었기에
결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갈 곳은 오직 한 군데뿐이었다.
비록 귀신이 나올 것처럼 황폐한 폐가이기는 하지만 정이 든 곳,
그가 어떻게 해서든 용서를 구하고 예전의 삶을 되찾아야 할 귀회루뿐이었다.
혈도가 다 풀린 혜와는 동굴 구석에 움츠리고 앉아 있었다.
소운비가 일어난 뒤부터는 애처로운 눈길로 그를 쳐다볼 뿐,
감히 그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다.
소운비는 고개를 돌렸다.
한쪽 옆의 모닥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옷은 다 말라 있었다.
소운비는 옷을 들어 혜와 쪽으로 던져 주었다.
그리고 비파를 들고 돌아서며 말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너는 나에게 행복을 주었었다.
아까의 인내는.. 그런 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보답이었다.
이제 피차 잊기로 하자."
소운비는 동굴을 나갔다.
그의 말이 동굴 안에 남긴 마지막 울림을 곱씹으며 혜와는 눈시울을 적셨다.
햇빛이 동굴 안에까지 뻗쳐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아까 폭우가 쏟아질 때보다 더욱 쓸쓸했다.
어차피 고아의 몸이었던 혜와.
궁주의 명령대로 소운비를 속였던 혜와.
그저 화금궁 안에서 조금씩 지위를 높이며 살기를 바랬던 혜와에게
그것은 예상하지 못한 슬픔이었다.
'나는.. 나는 이제 어떻게 하지?'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화금궁으로 돌아갈 길도 막막해져 버린 혜와였다.
그녀는 소운비가 던져 주고 간 옷에 얼굴을 파묻었다.
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갈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무엇인가 단단히 결심한 혜와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을 빠져 나갔다.
동백산 줄기를 따라 내려가는 혜와의 얼굴은 비록 초췌했지만,
단 하나의 태양을 좇는 해바라기처럼 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소운비도, 혜와도 떠난 동백산의 동굴 어귀에,
한 쌍의 길쭉하고 섬뜩한 눈동자가 나타났다.
은빛 꽃 문양이 새겨진 검은 복면으로 온몸을 감싼 사람.
바로 취화비도였다.
그의 눈은 뜻 모를 웃음을 토하고 있었다.
"일이 뜻밖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군!
저자가 태원옥호공을 익혔을 줄이야..!
그분께서 아신다면 기뻐하실 것이다."
동백산의 하늘 위에는 다시 묵직한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첫댓글 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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