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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장] 길이 아득한 인생을 살리기 위해 나를 죽여 빛을 주시려 한단 말인가
1 그 後(뒤 후)에 욥<핍박 받는>이 입을 열어 自(스스로 자)己(자기 기)의 生(날 생)日(해 일)을 詛(저주할 저)呪(저주할 주)하니라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었습니다. 입을 열고 시작된 그의 말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 욥의 말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앞에서 아들들이 생일에 모여 먹고 마시는 일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 것과는 대비되는 낳아진 날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리스도의 낳아짐은 고난을 위함이고, 그리스도로 인해 말씀으로 낳음을 받은 자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낳아진 날이기에 그리스도의 생일과 대조적으로 비교되도록 기술된 것입니다.
욥의 생일에 대한 저주 내용을 역으로 보면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었으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온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냥 보이는 대로 보면 저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역으로 읽는 것(괄호 안의 글)으로 설명하겠습니다.
2 욥<핍박 받는>이 말을 내어 가로되
2 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3 나의 난 날이 滅(멸망할 멸)亡(망할 망)하였었더라면, 男(사내 남)兒(아이 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3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날을 맞지는 않았을 텐데, 성령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남아가 잉태되었다고 하던 그 밤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의 난 날은 멸망 가운데 있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사람이다.)
# 여자는 땅에서 비롯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받은 자는 아들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잠언의 모든 말씀은 아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별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낳아진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로부터 낳아진 것이냐의 구분입니다.
4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4 그날이 캄캄하였었고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므로 온통 캄캄했으나 나의 난 날은 밝았다. 하나님의 말씀인 빛도 그날을 비추었다.)
5 幽(그윽{은근}할 유)暗(어두울 암)과 死(죽을 사)亡(망할 망)의 그늘이 그 날을 自(스스로 자)己(자기 기) 것이라 主(주인 주)張(베풀 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5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유암과 사망의 그늘도 그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할 수는 없었다. 구름이 나의 난 날 위에 덮이지도 않았고, 낮을 캄캄하게 한 사단의 세력도 그날이 오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6 그 밤이 甚(심할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數(셀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數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6 그 밤이 심한 어둠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그 밤은 어둠에 잡히지도 않았고, 해의 날수 가운데 기쁨이 되는 날이 오래전에 끝났으나 나의 낳아짐으로 인해 해의 날수 중에 기쁨인 날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달의 수에도 들었다.)
# 달의 수에 들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곧 달빛이기 때문입니다. 달의 수는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됩니다.
7 그 밤이 寂(고요할 적)寞(쓸쓸할 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7 그 밤이 적막하였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더라면,
(그 밤은 적막하지 않았고,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났고)
8 날을 詛(저주할 저)呪(저주할 주)하는 者(사람 자) 곧 큰 鰐(악어 악)魚(물고기 어)를 激(물결, 부딪혀 흐를 격)動(움직일 동)시키기에 익숙한 者가 그 밤을 詛呪하였었더라면,
8 인생의 날을 저주하는 자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가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 날을 저주하는 자는 사단입니다. 세상을 사단이 완전히 정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악어는 강에 사는 동물로 말씀이 흐르는 가운데에 살며 66개의 이빨을 가지고 입을 벌려 하나님께로 향한 자들을 삼키는 거짓 증인을 말합니다. 이들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즉 많이 해본 사단도 그 밤을 저주할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악어의 천적은 하마입니다. 악어와 하마에 대한 묘사가 본 욥기 후반에 하나님의 판결 부분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光(빛 광)明(밝을 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東(동녘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9 그 밤에 새벽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밤에 새벽별들이 있었기에 동방의 박사들이 나를 찾아왔었다. 그 밤의 날들은 광명을 바랐고, 그래서 내가 낳아진 것이며 나로 인해 동틈을 본 것이다.)
# 여기까지 욥의 난 날을 설명한 내용으로 볼 때 절대로 사람의 생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 이는 내 母(어미 모)胎(아이 밸 태)의 門(문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患(근심 환)難(어려울 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10 그렇게 되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이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않으셨고, 내 눈으로 오늘의 환난을 맞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다.
# 이는: 나의 난 날이 이러함은
# 환난을: 그리스도에게 환난이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고, 그렇게 이기시게 하려고 보내진 것입니다. 선택을 받은 모든 자에게도 당연히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맞이함이 곧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씀하신 복음인 ‘큰 환난’ 입니다.
사람의 눈은 이 환난을 두려워하여 이것이 마땅히 거쳐야 하는 과정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리스도가 다 지고 가신 것으로 끝인 줄로 알고 있으나 절대로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11 어찌하여 내가 胎(아이 밸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장 괴로우므로 내가 어찌하여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는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는지,
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乳(젖 유)房(방 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는지, 어찌하여 나에게 젖을 빨게 하였는지에 대하여 한이 들 뿐이다.
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平(평평할 평)安(편안할 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13 만약에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텐데.
14 自(스스로 자)己(자기 기)를 爲(할 위)하여 거친 터를 修(닦을 수)築(쌓을 축)한 世(대 세)上(위 상) 임금들과 議(의논할 의)士(선비 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4 그랬다면, 어쩌면 나는 자기를 위하여 거친 세상에서 자기의 터를 수축했던 구약의 임금이었던 자들과 교훈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지혜로운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
#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임금: 구약의 때에 하늘로 간 믿음의 조상을 말합니다.
# 의사: 의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하나님께 받은 지혜가 많은 자를 뜻합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아 우슬초에서 백향목까지 논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의사입니다.
# 하늘로부터 오지 않고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혜자를 예수님이 노래한 아가서에 보면 “네가 내 오라비들과 같았다면 내가 네게 교훈을 받았었을 것이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결국, 임금과 의사는 믿음의 조상 모두를 일컫는 말입니다.
욥기 없이 아가서가, 아가서 없이 욥기의 내용은 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는 증거가 나타나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물론 욥기에는 이외에도 아가서의 본뜻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씀이 또 있습니다.
이것이 아가서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대사인가를 구분하는 증명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아가서의 대사에서 누구의 말이냐를 잘못 구분하면 메시지 전체가 무논리적인 글이 되어 성경이 진리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5 或(혹 혹)時(때 시) 金(황금, 쇠 금)을 가지며 銀(은 은)으로 집에 채운 牧(기를, 칠 목)伯(일가를 이룬, 맏 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5 또 어쩌면 나는 열매 맺은 자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기의 집을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 목백: 선민 중 말씀으로 온전하여진 자들
은: 세상을 향해 내려진 하나님의 말씀
금: 사람이 생명나무의 길로 가면서 전도를 하여 사람을 얻으므로 맺는 열매
# “혹시(어쩌면)” 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이 열매는 맺을 수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뒤에라야 생명나무 열매를 맺는 자들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리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을 ‘혹시’ 하나님이 쓰셨을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육신을 입고 있는 예수님의 인간적 성정이 바탕에 깔린 대사입니다.
16 또 不(아닐 부, 불)知(알 지)中(가운데 중)에 落(떨어질 락, 낙)胎(아이 밸 태)한 아이 같아서 世(대 세)上(위 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16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와 같이 세상에 있지 않았을 것이며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되었더라면 내가 십자가에 달려 공의를 실현하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내가 입은 육신은 그냥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텐데.)
# 천국을 말할 때 사람들은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천국과 지옥의 중간 형태인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인간들의 가늠으로 가능하지 않은 범주입니다. 사람은 전혀 그것에 대하여 개의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철저하게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고 검증해야만 믿음을 갖겠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삼신이다, 삼일이다 등등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월권이며 패역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떤 방법으로 풀을 창조했는지 따지는 것과 같고, 또한 사람이 풀이 어떻게 창조되었다고 말하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17 거기서는 惡(악할 악)한 者(사람 자)가 騷(떠들 소)擾(어지러울 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困(괴로울 곤)憊(고달플 비)한 者가 平(평평할 평)康(편안할 강)을 얻으며
17 하나님과 그렇게 있었더라면 지금 나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도 만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거기에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18 거기서는 갇힌 者(사람 자)가 다 함께 平(평평할 평)安(편안할 안)히 있어 監(살필, 볼 감)督(살펴볼 독)者(사람 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18 지금처럼 갇힌 자가 되어 감독자의 소리를 들을 일도 없으므로 모두가 평안하고
19 거기서는 작은 者(사람 자)나 큰 者나 一(일)般(돌다, 돌 반)으로 있고 종이 上(위 상)典(법 전)에게서 놓이느니라
19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으로 놓인다는 것을 너희가 아는가.
# 17절부터 19절까지는 천국, 즉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19절의 말씀은 복음서의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비유와 같은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그리스도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서로 섬기는 원리’ 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 만들어진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 외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원리는 적용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를 섬기는 원리가 시행된 것이므로 욥기가 나온 구약 시대에는 아무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영원 전부터 계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는 말이 됩니다.
욥이 그리스도의 영이 아닐 수도 있다고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이 욥기에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내용만 있을 뿐입니다. 욥기의 이러한 기록은 상징이나 예표 따위도 아니고, 요한계시록처럼 ‘대언의 영’ 에 의한 말씀도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의 음성’ 인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책은 본 욥기 외에 없습니다. 그러면 혹자는 “어째서 욥기에 그리스도가 출현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욥기는 그리스도 이전에 있었던 글 아닌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답은 이미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왔으나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다. 그리스도가 출현하지도 않은 다윗의 때에 어떻게 낳아지지도 않은 그리스도를 주라 칭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욥기뿐 아니라 성경의 시작 부분인 세상을 창조하기도 전에 ‘작은 광명’ 으로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서게 될 ‘말씀’ 이 창조되면서부터 그 존재가 성경에 나타나 있었습니다. 다만,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한 것뿐입니다.
창세기에는 빛 외에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이 따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큰 광명이란 큰 산인 시내산에서 내려진 ‘모세의 율법’ 을 말하는 것이고, 작은 광명이란 작은 산인 시온산에서 치리의 기준이 되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성령의 법’ 을 말하는 것입니다.
빛이란 ‘말씀’ 을 말합니다. 태양이나 달은 ‘빛’ 의 창조로 인하여 생긴 것 또한 아닙니다. 태양과 달은 밤과 낮을 구분하게 하는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우주의 순환 과정에서 만들어진 현상인데, 사람이 그것을 보고 낮에 비치는 빛은 태양이라고 한 것이고, 밤에 비치는 빛은 달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이해의 방식대로 큰 산인 시내산과 작은 산인 시온산도 이미 예언서에서부터 언급되어 있는 상태였고, 그것을 사람이 사고하는 범위 안에서 시내산에서 내려진 법을 ‘해’ 로, 시온산에서 내려진 법을 ‘달’ 로 성경은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0 어찌하여 困(괴로울 곤)苦(쓸 고)한 者(사람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煩(번거로울 번)惱(괴로워할 뇌)한 者에게 生(날 생)命(목숨 명)을 주셨는고
20 어째서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시고,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시기로 하고 나를 이러한 상태에 빠트리신단 말인가.
(어찌하여 인생들을 위하여 나를 죽이시는가.)
# 이 말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인생에 관한 언급입니다.
곤고한 자: 죽을 인생
빛: 말씀
번뇌한 자: 삶을 고민하는 자
생명: 구원의 말씀, 복음
21 이러한 者(사람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求(구할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21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는 나처럼 고난의 길을 갈 것이며, 죽기를 바라도 죽음이 피해 가므로 차라리 엘리야처럼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甚(심할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2 무덤(온전한 자기의 부인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안식에 듦)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 이러한 자란 그리스도의 빛을 본 자입니다. 선택을 받은 자는 환난이 지나기까지 죽기를 바라도 죽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택은 구원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함이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에 흠이 있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되며, 선택은 그 흠을 지우는 길을 가게 하시기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죽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죽기를 바라는 것은 세상에 낙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잔칫집보다는 초상집에 가는 것을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자기 부인의 시작입니다. 또한, 이런 자들은 보배인 지혜의 말씀을 찾을 때도 그랬지만 말씀을 찾고 난 뒤에는 그것을 찾기보다 더욱 무덤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최종 목적인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7장]
2 初(처음 초)喪(잃을 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結(맺을 결)局(판 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者(사람 자)가 이것에 留(머무를 류, 유)心(마음 심)하리로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4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者(사람 자)의 마음은 初(처음 초)喪(잃을 상)집에 있으되 愚(어리석을 우)昧(어두울 매)者(사람 자)의 마음은 宴(잔치 연)樂(즐길 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무덤을 찾는 자의 마음이 되는 것은 처음의 순서일 뿐입니다. 이 마음을 바탕으로 세상에 속한 욕구에 대한 자기 마음을 말씀으로 깨끗이 비움 받는 과정을 가야 합니다. 사람이 죽음을 희망한다는 것의 실상은 자기 의지의 선택에 의한 버림이 아니라 포기이기 때문에 그 마음은 흠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희망하는 것은 단지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 부분에서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일 뿐인 것입니다. 또 그러한 마음의 바탕 위에서만 거룩함에 나아가게 하시는 말씀이 자기 마음에 효력을 발생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에서 진리를 구하다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말씀을 발견하고, 영생의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말씀을 통하여 깨달으면 진정 즐거운 마음으로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서를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사람이 세상의 헛됨을 인지하고 세상을 벗어날 길을 찾다가 길을 찾지 못하고 죽음만이 그 방법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 죽음도 헛됨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길을 묻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를 찾으시는 자를 찾으시다가 그를 발견하고 그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의 마음에서 진정으로 세상에 속한 것을 마음에서 지워낼 수 있는 영생으로 가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이 곧 지혜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은 죽음을 희망하던 자기 마음에 여전히 인간적인 세상 것을 향한 욕구들이 그대로 남아있음을 인지하고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지워나가는 과정을 가게 됩니다.
그 길을 가는 것은 먼저 자신의 선택으로 영이 사는 길로 가는 것이며, 그렇게 가는 발걸음을 사람이 먼저 뗄 때에 하나님이 거룩함으로 나아가게 하는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길 가는 것을 멈추면 말씀도 멈춥니다. 언제나 사람이 먼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은혜로 길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법이 행위의 율법이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마음으로부터의 행함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행함은 육신의 행함으로 그 결과가 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하나님이 제시하신 동일한 길로 가게 하여도 육신으로 각 사람이 나타내는 그 양상은 모두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전 모세의 율법과 같이 육신의 행함의 양상이 일률적으로 나타나지 않기에 행위의 율법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통한 행함과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의 행함은 다른 것입니다.
23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3 그러나 그렇다 하여도 어째서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인생을 살리기 위해 나를 죽여 빛을 주시려 한단 말인가. 진정 방법이 그것밖에는 없단 말인가.
(어찌하여 저런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나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는가.)
#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하나님의 분노에 포위당했다는 것으로 이것은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 어찌하여 빛을 주시려 한단 말인가: 빛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너희에게 보일 표적이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하신 것과 같은 맥락으로 요나가 “어찌 저런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나를 이리로 보내셨는가.” 하고 탄식하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인간들과 동일하게 인간적 성정을 가지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부분입니다.
24 나는 먹기 前(앞 전)에 嘆(탄식할 탄)息(숨 쉴 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24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25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臨(임할 림,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5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 平(평평할 평)康(편안할 강)도 없고 安(편안할 안)穩(평온할 온)도 없고 安(편안할 안)息(숨 쉴 식)도 없고 苦(쓸 고)難(어려울 난)만 臨(임할 림, 임)하였구나
26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인간이 무엇이기에 나를 이렇게 고난 받게 하면서까지 구원을 하시려는가.)
# 그리스도의 탄식의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피땀을 흘리며 십자가에 달리지 않기를 바라는 ‘나의 원’ 을 말씀드리고, 아버지의 원대로 따르기로 하시는 과정의 표현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심경을 욥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