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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7.
2021.7.2.
<수원화성 돌아보기> 1- 화홍문,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일대
화성은 어디나 다 대단하지만, 이곳은 특별히 대단하여 숨이 막힐 듯 압도적인 곳이다. 우선 아름다워 눈 호사를 하고, 자연 친화적이어서 몸 호사를 하고, 인간 친화적이어서 마음 호사를 한다. 몸과 마음이 사로잡혀 가눌 수가 없다.
찌는 듯이 더운 여름날인데 사방팔방에서 막히지 않고 불어대는 바람이 호사스럽다. 마음 속 때를 다 날려버리는 거 같이 개운하다. 산속 계곡도, 해수욕장도 강원도에서도 이보다 더한 피서를 할 수 있을 거같지 않다. 거기다 정조의 고뇌와 기상, 70만 인부의 신명과 울력, 그 역사의 바람이 자연의 바람 못지 않은 태풍으로 불어온다.
방문일 : 2021.7.2. /2021.8.30. /2023.7.7.
위치 :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일대
1. 돌아보기
*수원화성(水原華城)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백 년간 수원도호부가 있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개명(改名)하고 수원 도읍을 새 장소인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원부로 부르던 고을 명칭을 화성(華城)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줄곧 수원은 화성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나 1895년 지방 관제개편 과정에서 다시 수원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지금은 수원시로 불리고 있다.
수원부를 옮기고 정조 17년(1793)부터 화성 축조가 본격적으로 준비되어 이듬해 정월부터 시작해 2년 반 만인 1796년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성벽 전체 길이는 당초 정약용이 생각했던 4㎞보다 늘어난 5.4㎞ 정도이다. 성곽 시설에서도 적대나 누조, 공심돈, 포루 등과 같이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설이 많이 도입되었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4∼6m 정도이고 성벽 위에는 1m 정도 높이의 여장을 두고 여장에는 총안을 뚫었다. 성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배가 안으로 들어가는 규형(圭形) 쌓기를 기본으로 했다. 성벽에는 4개의 성문을 두었고 암문 5개를 설치해 통행토록 하였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앙에는 행궁이 자리 잡았다. 화성이 위치한 지세는 서쪽에 팔달산이 있고 그 반대쪽인 동쪽에도 나지막한 구릉이 있으며 이 동서 경사지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개천이 흐르고 그 주위에 약간의 평지가 펼쳐진다. 화성을 비롯해 우리나라 성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불규칙한 형태로 쌓아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가 있는데 북문이 장안문이고 반대 남쪽이 팔달문이다. 동서에 청룡문과 화서문이 있다. 남북문은 중층문루로서 도성문루에 버금가는 규모와 형태를 갖고 있다. 암문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는 출입구를 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행하고 양식을 나르는 통로이다. 화성에는 모두 5곳에 설치되어 있으며 대개 벽돌을 많이 사용했고 원여장 등의 특수한 장식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암문에는 보통 건물을 세우지 않지만 서남암문에만 예외적으로 포사를 설치했다. 이외에도 수문 2곳, 적대 4곳, 노대 2곳, 공심돈 3곳, 봉돈 1곳, 치성 8곳, 포루 10곳, 장대 2곳, 각루 4곳, 포사3곳 등의 시설이 있다.
의의와 평가
화성 축성은 정조의 개혁적 정치노선과 당시 실학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사상 및 자유시장경제체제가 만들어낸 근대적 생산방식에 의한 건축공사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화성 축성을 계기로 한국 근대건축이 시작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수원화성」은 방어 기능과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으뜸 관광 명소’, ‘CNN선정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곳 50곳’, 2012 한국관광을 빛낸 ‘한국관광의 별’ 로 선정되는 등 한국의 역사유적과 관광명소로 인정받고 있다.
*화성도 -수원박물관
화성행궁과 화성의 각 시설 그리고 성내의 길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814년(순조 14) 돌다리로 개축된 매향교梅香橋와 1831년(순조 31) 화성유수 박기수朴綺壽(1774~1845)에 의해 지어진 서호의 항미정이 표기된 것으로 보아 1831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실린 화성전도(華城全圖) 규장각 소장
1) 북수문(北水門), 별칭 화홍문(華虹門)
정식 이름은 북수문이지만 화홍문이라는 별칭이 있고, 별칭이 더 많이 쓰인다. 북쪽 수문이라는 건조한 명칭보다 화성의 무지개 문이라는 화홍문이 더 근사하지 않은가. 화홍문은 무지개 모양의 수문이 7개 위에 세워졌고, 위쪽으로 방화수류정이 보여 일대가 화성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홍(虹)'이 이름에 들어간 것도 무지개 수문과 관련이 있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5년(정조 19) 1월 13일에 완성되었다. 수원천 위에는 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의 수문이 있다.
*화홍루 뒤쪽, 용연 쪽에서 바라본 모습. 2021.8.30.
화홍루 안에서 내려다본 주변 풍광. 아래로 수원천이 흐른다. 이전 사진에는 아래 빨래하는 아낙들이 많이 보였었다. 이제 개천은 생활보다 관상의 공간이 되었다. 개천을 타고 조금 내려가면 수원우시장이 있던 지역을 만난다. 이 지역 수원갈비집이 인연 있는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화홍루 쪽에서 바라본 방화수류정
동북각루(東北角樓) 별칭 방화수류정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다. “꽃을 찾고 버들을 쫓는(訪花隨柳)” 정자,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지붕과 내부 구조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고, 들어가서도 여러 정자의 모습을 함께 즐길 수 있다. 화성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정자로 정조가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곳이다. 군사 지휘소와 정자의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시민들의 피서지와 전망대로 인기가 높은 정자다. 안에서는 가까이 바로 아래 용연과 멀리 수원 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정자의 이름은 송나라 정명도의 시구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다. 편액은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썼다고 하나 지금 걸려 있는 편액은 조윤형이 쓴 것이 아니다.' (한국고전종합DB)
방화수류정 정자 내부. 난간을 넘어 작은 마루 공간이 있어 앉아 있을 수 있다. 툭 트인 사방에서 뼈가 시린 바람이 불어댄다. 이만한 전망, 이만한 서늘함이 어디 또 있을까 싶다.
아래는 일제 때 만들어진 자개상이다. 상 위쪽에 화성의 용연과 방화수류정, 그리고 화홍문을 넓게 자개로 표현했다. 수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빼어난 경관을 생활 속의 그림으로 만들어 보관했다. 이 지역이 화성의 대표 경관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2023.7.7. 방문시 마주한 공지문. 방화수류정은 더 이상 신발 벗고 맨발로 올라가 여름에 발을 까불거리며 피서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곳 이 되었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 당연한 것임에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이제 내 것이 아닌 만인의 것인 것이다.
북경 원명원의 변화를 보는 것같은 느낌. 초기에는 맘대로 드나들면서 연꽃도 실컷 보고 문화재도 감상하고 산책도 하였으나 관리를 위해 삼엄하게 담장을 쌓고 엄청난 입장료를 징수하며 마을 사람들의 공간에서 누구나의 공간으로 격상시켜 버리는 과정을 목도했던 때의 그 느낌. 그러면서 파괴된 곳은 일부러 그대로 둬서 서양 사람들의 만행을 고발하려 하는데, 우리는 그런 만행이 아닌 선행만 있으니 보존의 의미가 명실상부하게 격상된다. 얼마나 다행인가.
*방화수류정 자개상(訪花隨柳亭貝床)
*방화수류정에서 내려다 본 주변 모습
*8월에는 용연에 연잎이 무성하고 주변 수풀이 자라나 한 방화수류정과 성벽과 어울려 한폭의 그림같다.
*용연. 용두암은 바로 앞에 수풀로 둘러 싸인 곳의 바위를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방화수류정도 용두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용연은 방화수류정 아래 용머리 바위, 용두바위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방화수류정은 용두각으로도 부른다. 용연의 물이 넘치면 흘러나가는 출수구에는 용 전단계 이무기의 상을 새겨놓았다. 용연에 비친 달을 용지대월이라 하여 화성의 아름다운 경치로 꼽는다.
*동북포루.
동북포루(東北鋪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 135보 4척쯤 되는 거리에 있습니다. 지세가 별안간 높아져서 용두(龍頭)를 눌러 굽어보고 있습니다.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鋪)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치성에 있는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치성이 성 밖으로 18척 5촌이 튀어 나왔는데, 외면의 너비는 24척이고, 현안(懸眼) 1구멍을 뚫었다. 5량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습니다. (수원시청 홈피)
*동북포루
*북암문 일대. 성벽에는 4개의 성문과 암문 5개를 설치했다. 암문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는 낸 출입구로 사람이나 가축이 통행하고 양식을 나르는 통로이다. 화성의 문(門)은 평상시에 출입하는 성문, 적의 눈에 띄지 않는 암문, 물이 흘러가는 수문으로 나뉜다.
* 소개문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水原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위치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번지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水原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는 고려 말 승려 진각국사 천희(千熙)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탑비이다.
진각국사 천희는 1307년(충렬왕 33)흥해*경북 영일군 지역)에서 태어나 13세 1319년(충숙왕6)에 화엄종 반용사로 출가하였다. 1325년(충숙왕 12)에 승과에 급제하여 김생사·부인사·개태사 등에 머물렀다. 1364년(공민왕 24) 중국 원(元)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후 1367년(공민왕 27) 국가(國師)에 봉해졌고 부석사 주지가 되어 무량수전 등을 보수하였으며 치악산과 금강산 등에 은거하다 1382년(우왕 8) 광교산 창성사에서 입적하였다. 시호를 진각(眞覺)이라 하였다. 이색이 지은 행장을 토대로 승려인 혜잠(惠岑)이 비문의 글씨를 새겨 1386년(우왕 12) 창성사 경내에 이 탑비를 세웠다.
직사각형 대석(㙜石)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우진각 지붕모양의 개석(蓋石)을 얹었는데, 대석이나 개석에 장식이 없어 간략화된 고려후기 비석의 소박함이 보이며 글씨 또한 기교를 배제하여 투박하지만 정제된 멋을 보여준다.
조선후기 창성사의 쇠락과 함께 방치되다가 비신 앞면의 좌측과 하단, 그리고 뒷면 대부분이 훼손되었다. 원래는 광교산 창성사 터에 있었는데 1962년? 매향동 방화수류정 언덕 옆의 현재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지어 관리하고 있다.(위키백과 전재)
창성사진각국사원조진각국사탑비.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水原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보물 14호.
고려 우왕 12년(1386년)에 진각국사 천희(千熙, 1307년~1382년)를 추모하기 위하여 수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건립한 탑비다. 1963년 보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광교동 창성사지에서 1965년 이 자리로 옮겨 왔다. 북암문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만난다.
* 창성사(彰聖寺) 소개
이칭 : 창선사(彰善寺), 창성사(昌盛寺)
수원시 장안구 광교산에 있었던 사찰이다.
창성사(彰聖寺)는 수원 장안구 상광교동 48번지(상광교 버스종점 주변)에 있었던 사찰인데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다. 고려 말의 문인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387)이 1340년대에 창성사에 와서 시를 읊었다는 내용이 가장 빠른 사찰 관련 기록이다. 이 시에 의하면 “불당 은행나무 옛날 그대로 있는데, 이 사원은 말끔히 수리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절의 명물인 은행나무가 고려말 당시에도 있었으며 창성사 전각이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고려의 마지막 화엄종계 국사인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 1307~1382)가 말년에 창성사를 화엄종의 본산으로 삼고자 하였다. 조선 초 태종의 불교개혁을 통해 유가종으로 이속되었으며, 세종대인 1446년(세종 28) 무렵에는 김겸광(金謙光)·강희맹(姜希盟) 등의 유생들이 독서하였던 사찰이었는데 창성사(昌盛寺)라고도 불렸던 듯하다. 성종대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18~19세기에 편찬된 지리지나 지도류 등에도 그 이름이 실려 있다.
조선 후기 문인 신경준(申景濬)의 『가람고(伽藍考)』나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 사찰조에 의하면, 창성사는 일시적으로 창선사(彰善寺)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1791년(정조 15)에 편찬된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 사찰조의 기록에 의하면 “창선사는 광교산에 있으며 지금은 폐사되어 다시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광교산에 있는데 옛날에 폐사되어 지금 보수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한, 1800년에 제작된 『동국여도(東國輿圖) 』의 수원부지도(고려대 박물관 소장)에는 창성사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 』에 의하면 창성사가 전소되어 폐사되었다고 한다. 창성사는 고려말 근기 지방 화엄종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데, 절터의 위치에 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진각국사 천희의 생애를 기록한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는 1963년에 보물 제14호로 지정되었으며, 1965년 원래 있었던 창성사지를 떠나 매향동 13-1번지의 현재 자리로 옮겨 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비문 내용
진각국사가 중국 항주에 가 휴휴암에서 몽산화상이 몸에서 빛을 발함을 꿈에서 보고, 임제종의 만봉시울(萬峯時蔚)의 법을 전해 받고 돌아온 사실. 이후 고려에 들어와 치악산과 낙산사 등에서 지냈는데, 공민왕이 국사로 추대하였으며 나옹이 공부선을 주재할 때 증명이 되었고 부석사를 중수한 사실, 다시 태어날 때로 돌아가서 화엄종으로 출가하여 승과에 급제하고 여러 사찰을 돌며 수학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음기에는 교종과 선종을 망라한 문도들과 재가신도들을 열거하였다. (위키백과 전재)
비문은 아랫부분이 마멸되어 글자가 잘 식별되지 않는다.
*생활 속의 성벽 모습을 볼 수 있다.
*수원화성 성벽. 풀을 깎는 분들이 뙤약볕 밑에서 일하고 있다. 덕분에 항상 깔끔하고 고운 모습을 보는 거다.
2. 관람 후
*《수정국역 화성성역의궤》 소개
《수정국역 화성성역의궤》는 1977년도에 수원시에서 발간한 《국역 화성성역의궤》를 새로 수정 국역하여 경기문화재단에서 2001년에 〈기전문화예술총서10〉으로 낸 책이다.
華城은 1794년(정조 18)에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에 완성한 정조 임금의 꿈이 담긴 세계에 유례가 드문 맞춤 도시이다. 2년이라는 단기간 내에 화성 행궁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6km에 달하는 성곽을 갖춘 대도시를 과학적인 설계·공법을 통하여 그러면서도 아름다움을 한껏 살려 건설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문화와 기술의 역량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고도 생생하게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화성축성 보고서 《華城城役儀軌》이다.
화성이 건설된 뒤에 정리된 방대한 공사보고서인 《華城城役儀軌》를 통해서 우리는 화성의 건설 과정과 건축 내용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卷首에는 택일 날짜와 공사 시작 날짜, 座目이 기록되어 있고, 華城全圖와 각종 건물의 圖說과 器械圖와 落成宴圖 등이 있다. 권1에서 권4까지는 화성 성역 건설과 관련한 傳敎, 綸音, 啓辭, 儀注, 狀啓, 別單, 移文, 甘結, 事目 등 행정 문서들과 관련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고, 권5~6에는 공사에 들어간 物力과 財貨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 뒤에는 附編1~3이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방대하면서도 상세한 건축보고서와 성곽의 수려함 때문에 화성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인력 동원 70만 명의 대공사를 기록하면서 石工 과 木手의 이름과 작업 내역은 물론, 거기에 들어간 못 하나까지 기록 하고 있는 것은 세계에 전무후무하다. 화성이라는 세계에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이 문화유산 앞에서 우리는 문화적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이기찬(李基璨)
* 수원 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丁若鏞)이 1793년(정조17)에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城華籌略)》을 지침서로 삼아, 채제공(蔡濟恭)의 총괄 아래 조심태(趙心泰)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조 당시 거중기(擧重機)와 녹로(轆轤) 등 신기재를 고안하여 석재를 옮기는 데 사용하였다.
2024.1.30. 재방문
화홍문
방화수류정
용연
화성어차. 화성 전체를 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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