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김씨 예의판서공파, 계림군파, 영분공파는
삼한공신 김예겸의 후손
이 글은 경주김씨 역사상 최초로 경주김씨 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 계림군파, 영분공파가 한 할아버지(삼한공신 김예겸)의 한 자손임을 밝히는 논증이다.
주지하다시피 역사적으로 경주김씨 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는 평장사공 인위(因謂)의 8세손 남기(南基)의 후손이고, 계림군파는 평장사공 인위의 12세손 조선개국공신 계림군 균(稛)의 후손이고, 그리고 영분공파는 삼한공신 예겸(禮謙)의 7세손 정숙공 인경(仁鏡, 양경)의 자손이다.
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계림군파 포함)와 영분공파는 지금까지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인 것은 맞지만 후대로 내려가면서 갈래가 전혀 다른 파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나의 연구결과 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와 계림군파, 영분공파가 삼한공신 김예겸(金禮謙)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를 밝히기 위해 연구방법으로 관련 고려묘지명인 김지우 묘지명(1152년), 김자류 묘지명(1146년), 삼한공신명단(박천식 교수 논문)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김자류 묘지명의 김예▨과 삼한공신명단의 김예겸은 동일인이며, 김지우 묘지명의 김예와 김자류 묘지명의 김예▨가 동일인이므로 삼한공신 김인윤(金仁允)은 김예겸(金禮謙)의 아들이라는 설명을 이어갈 것이다.
먼저 김예겸과 김예의 관계, 김예겸과 김인윤의 관계를 논하기에 앞서 현재 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 계림군파, 태자파, 영분공파에서 만들고 있는 족보의 계보와 김지우 묘지명(1152년)의 계보, 그리고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1154년)의 계보를 소개한다.
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1684년 숙종을축보, 1922년 병인보(丙寅普)를 따름)
은열(殷說)→태화(泰華)→정구(正矩)→계령(繼笭)→한공(漢公)→수서(壽西)→영고(永固)→순웅(順雄)→인위(因渭)→원정(元鼎)→지예(之銳)→순부(舜符)→영유(英裕)→의공(義公)→광준(光俊)→남기(南基, 봉익대부 예의판서공)
계림군파(1772년 임진시보를 따름)
순웅(順雄)→인위(因渭)→원정(元鼎)→지예(之銳)→순부(舜符)→영유(英裕)→의공(義公)→광준(光俊)→남미(南美)→수(粹)→기연(起淵)→지윤(智允)→균(稛, 조선개국공신 좌찬성 계림군)
태자파(1934년 신라삼성연원보를 따름)
마의태자(麻衣太子)→순웅(順雄)→인위(因渭)→원정(元鼎)→지예(之銳)→순부(舜符)→영유(英裕)→의공(義公)→광준(光俊)→남미(南美)
남기(南基)
영분공파(1702년 임오보를 따름)
경순왕(敬順王)→영분공(永芬公)→임흥공(林興公)→파간 억종(波干, 嶷宗)→파간 계옹(波干, 季邕)→아개공(阿盖公)→예겸(禮謙, 삼한벽상공신 내사령)→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양경(良鏡, 인경)
김지우 묘지명(1152년, 찬자 미상)
예(禮, 대광)→인윤(삼한공신 삼중대광)→신웅→인위→원황→경용→인규→지우(원성왕의 후손)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1154년, 찬자 김신부)
인위→원황→경용→이초원 처 김씨(태종대왕 김춘추의 14세손)
위에서 어느 부분이 오류인지를 한 눈에 들어오도록 오류 부분을 자주색으로 표시하였다.
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의 경우, 은열(殷說)→태화(泰華)→정구(正矩)→계령(繼笭)→한공(漢公)은 대안군파 계보이고, 수서(壽西)→영고(永固)는 영분공파 계보이다. 대안군파와 영분공파가 뒤섞여 있다.
김인위(金因謂)는 원순숙비의 아버지로 고려 제8대 현종(922~1031년, 재위기간 1009.2~1031.5, 22년 3개월)의 장인인 동시에, 계림국대부인의 아버지로 이자연(1003~1061년, 문화공 수태사 중서령)의 장인이며, 그의 아들이 김원충(수사도 문하시중), 김원정(수태위 문하시중, ~1063년), 김원황(중추원사 병부상서, ~1062년 )이다.
김인위(金因謂)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이정 묘지명(1077년),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1111년), 김지우 묘지명(1152년), 이초원 김씨 묘지명(1154년)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김인위의 이름에 관해서 경주김씨 족보와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김인위(金因渭)로 쓰였고, 이정 묘지명(1077년), 김지우 묘지명(1152년),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1154년)에는 김인위(金因謂)로 되어 있다.
강이름 渭(위) 와 이를 위 謂(위)는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르므로 3개의 고려묘지명이 동일하게 쓴 대로 因謂로 고쳐야 한다.
금산사 혜덕왕사탑비(1111년)는 혜덕왕사 소현의 외조부인 김인위(金因謂)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外祖諱▨▨ ▨▨侍郞平章事 候▨▨ ▨王室名臣守誠節以不踰歷夷險而一致出則秉旄杖鉞四方無擊柝之入則論道經邦 萬乘有垂蒙之暇基世家源系信牒文故略
외조부의 휘는 ▨▨ ▨▨시랑평장사(결락) 왕실의 명신이며 충절을 지켜 변하지 아니하고 평탄함과 험난함을 겪어도 마음이 한결 같았다.
밖으로 나간 즉 장군으로서 모(旄, 깃대)와 장(杖, 지팡이)과 월(鉞, 도끼)을 잡아서 사방이 격탁의 근심이 없고, 궐내로 들어오면 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을 논하며, 만승께서 수상할 한가로운 여가가 있었다. 그의 세가의 먼 계보는 신첩에 자세히 갖추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外祖諱▨▨ ▨▨侍郞平章事=外祖諱因謂 內史侍郞平章事
(외조부는 내사시랑평장사 인위이다)
<금산사 혜덕왕사진흥탑비 1111년,
올해 1월 15일 눈이 하얗게 덮힌 도로를 달려 김제 금산사에서 찍은 사진이다. >
김인위는 현종12년인 1021년에 상서우복야로 임명된 후 이내 치사(사임)하였다가 다시 1024년 상서좌복야로 임명된 후 식읍 300호를 받고 곧이어 치사(사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70세가 넘으면 치사(사임)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1021년에 김인위는 70세 전후의 연세였을 것이다.
김영고(金永固)는 김양경(김인경,1168년~1235년)의 아버지인데 1173년(명종3년)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의 난이 실패하자 이에 연루가 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간신히 풀려나 그 후 합문지후에 이른 인물이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 족보는 1021년 70세 전후인 김인위를 150년 후대 사람인 김영고(金永固)의 아들로 만들어 놓았으니 오류가 분명하다.
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의 족보는 그럴싸하게 숙종을축보(1684년)를 따른 족보라 하지만 대안군 계보와 영분공 계보가 뒤섞여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 인물인 김인위를 150년 후의 사람인 김영고의 아들로 만들어 놓은 계보이므로 후손들은 이 사실을 알고 하루라도 빨리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
계림군파의 경우, 선대로 물려받은 족보가 잘못되었고 김순웅이 대안군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경은부원군 김주신(인원왕후의 아버지)이 편찬사업을 시작하여 경은부원군 사후 70년 만에 완성한 계림군파의 임진시보(1772년)는 신웅(信雄)을 순웅(順雄)이라 표기한 것 외에는 오류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계림군파는 딱하게도 고려묘지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므로 아직도 여전히 1772년 임진시보 기록(원조 순웅)에 머물러 있을 뿐 김지우 묘지명(1152년)의 예(禮, 대광)→인윤(삼한공신 삼중대광)→신웅(信雄)→인위(因謂)로 이어져 내려온 계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계림군파가 순웅의 상계를 찾기를 바란다면 예(禮, 대광)→인윤(仁允 삼한공신 삼중대광)→신웅(信雄)→인위(因謂)→원정(元鼎)→지예(之銳)→순부(舜符)→영유(英裕)→의공(義公)→광준(光俊)→남미(南美)→수(粹)→기연(起淵)→지윤(智允)→균(稛, 조선개국공신 좌찬성 계림군)으로 수정해야 한다.
일부 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와 일부 계림군파가 합세하여 만든 태자파는 오류투성이의 신라삼성연원보(1934년)에 근거하여 만든 대종회인데, 이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순웅(順雄)→인위(因渭)→원정(元鼎)으로 계보를 주장한다.
그러나 공신의 후손이 아니면 출세가 힘든 고려전기시대에 사도 내사시랑평장사 김인위의 할아버지를 마의태자라고 보는 것은 고려사의 배경지식이 부족한 자들의 상상일 뿐이다.
김지우 묘지명(1152년)과 이초원의 김씨 묘지명(1154년)에 따르면 김인위의 할아버지는 마의태자가 아니다.
역사적 근거도 없이 단순히 오류투성이의 신라삼성연원보(1934년)의 기록에 의지하여 김인위의 할아버지를 마의태자로 만든 것은 직계 조상에게도 죄가 되거니와 직계 자손들에게 크나큰 해악이다. 따라서 경주김씨 태자파는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경주김씨 태자파는 경주김씨 대종회 차원에서도 문제지만 현종의 장인인 동시에 이자연의 장인인 수사도 내사시랑평장사 김인위의 할아버지를 마의태자로 만들어 놓았으니 역사학적으로 큰 문제다.
역사학은 사료의 가치를 평가할 때 오래된 기록일수록 높게 평가한다.
고인이 돌아가신 년도에 제작된 고려묘지명과 수 백 년이 지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족보의 기록을 놓고 그 기록의 신빙성을 따진다면 역사학계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고려묘지명을 우위에 둔다.
수 백 개의 고려묘지명이 학계에 발표된 오늘날에 고려묘지명의 존재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단순히 물려받은 족보만 가지고 경주김씨 계보를 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영분공파의 경우, 다음 몇 가지 이유에서 김예겸(金禮謙)의 5대조 영분공이 경순왕의 아들이 될 수 없다.
1) 영분공 6세손 김예겸(金禮謙)은 고려태조 때의 삼한통일에 공을 세운
삼한공신(936~940년)이다.
2) 삼한공신 김예겸과 경순왕(제위927~935년, 생몰년~978년)은
동시대인이다
3) 김예겸→김주정→김의진에서,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김의진이
돌아가신 년도(1070년)를 고려할 때 김예겸과 김의진의 가족관계가
성립된다.
4) 고려문벌귀족사회의 특성상, 요직을 두루 거친 김의진의 관직은
할아버지 김예겸이 삼한공신(삼한통일의 공신)임을 입증한다.
5) 성종 때 관제를 개편했으므로 파미간(파간)의 관직은 고려시대와는
연대가 맞지 않는 기록이고, 따라서 영분공 3세손 파간 억종, 4세손 파간 계옹은 고려 사람이 아니고 통일신라시대 사람이다.
6) 김양경의 시집의 서문에 수록된 경순왕에서부터 김양경에 이르는 계보는 김양경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허백당 성현이 김가구로부터 전해
받아 쓴 것이다.
7) 대안군 묘지명 발견(1785년) 이전까지 영분공파족보에 영분공의 이름이 없었고, 대안군 묘지명 발견 이후 영분공파에서 영분공의 이름을 경순왕 세째 아들 명종으로 올렸으므로 영분공은 경순왕의 셋째 아들 명종이라는 근거가 없고 그 이름을 모른다.
8) 영분공파 계보와 관련한 고려묘지명이 김자류 묘지명(1146년), 황보양처김씨묘지명(1149년), 김유규묘지명(1158년)인데, 김자류 묘지명-신라왕 후손, 황보양처 김씨 묘지명-신라왕 후예, 김유규 묘지명-언급 없음으로 되어 있을 뿐, 경순왕의 후손이라고 언급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9) 그러므로 영분공은 경순왕 아들이 아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삼한공신(三韓功臣) 대광(大匡) 시중(侍中) 김예겸(金禮謙)과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김인윤(金仁允)의 관계에 관하여 논하고자 한다.
1. 김자류 묘지명(1146년)의 삼한공신 대광 시중 김예▨(金禮▨)와 김지우 묘지명(1152년)의 대광 김예(金禮)의 관계
김자류 묘지명(1146년, 인종 24년)에 의하면 김예▨(金禮▨)은 삼한공신(三韓功臣 대광(大匡) 시중(侍中)이다.
김용선 교수는 金禮▨七世孫(김예▨7세손)로 탈자(▨)된 원문을 ‘김례(金禮)의 7세손’으로 해석하고, 밑에 각주를 달기를 ▨를 之(지)로 추정하여 ‘김례의 7세손’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을 인명으로 보고 김례▨의 7세손으로 해석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각주를 달았다.(김용선, (속)고려묘지명집성, p. 38, 각주 1) )
먼저 김자류 묘지명(1146년, 인종 24년)의 김예▨(金禮▨)는 삼한공신이다. 삼한공신 명단에서 김예▨(金禮▨)에 해당하는 이름을 찾아서 대조해 보면 탈자인 ‘▨’를 인명으로 보아야 하는지, ▨를 之(~의)로 보아야 하는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삼한공신 명단에 유일하게 김예겸(金禮謙)의 이름이 있으니 탈자인 ‘▨’는 인명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김자류 묘지명의 삼한공신 金禮▨는 삼한공신명단의 金禮謙(김예겸)으로 보는 것이 옳다.
김자류 묘지명의 삼한공신 金禮▨ = 삼한공신 金禮謙(김예겸)
김자류 묘지명(1146년)의 김예▨(金禮▨)과 김지우 묘지명(1152년, 의종 6년)의 김예(金禮)의 이름을 보면 같은 한자를 썼다.
예(禮)라는 이름의 한자(漢字)가 같다.
또한 김자류 묘지명의 김예▨(金禮▨)과 김지우 묘지명(1152년, 의종 6년)의 김예(金禮)의 관직을 살펴보면 대광(大匡)이라는 관직이 같다.
김자류 묘지명 : 김예▨(金禮▨)- 삼한공신(三韓功臣) 대광(大匡) 시중(侍中)
김지우 묘지명 : 김예(金禮)- 대광(大匡)
이와 같이 이름이 같고 관직이 같다.
대광(大匡)은 본래 궁예가 901년 태봉을 건국하고 만든 관호였는데 고려 태조는 이 관호를 그대로 사용하여 919년(태조2년)부터 대광(大匡)은 문무 구별 없이 최고의 직위였다. 그러다가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 관계를 16등급으로 정할 때 종1품, 제3등급이었다.
말하자면 태조 당시 대광(大匡)은 최고 관직 중 하나였다.
김자류 묘지명(1146년)의 김예▨(金禮▨)과 김지우 묘지명(1152년)의 김예(金禮)는 첫째 이름이 같고, 둘째 대광(大匡)이라는 관직이 같다.
두 묘지명의 이름과 관직이 같다는 공통점은 김자류 묘지명(1146년) 김예▨(金禮▨)과 김지우 묘지명(1152년)의 김예(金禮)는 동일 인물임을 말해주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2. 삼한공신 김예겸과 삼한공신 김인윤의 관계
김지우 묘지명에 따르면 대광 김예(金禮)의 아들은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김인윤(金仁允)이다.
예(禮, 대광)→인윤(仁允 삼한공신 삼중대광)→신웅→인위→원황→경용→인규→지우(원성왕의 후손)
우리는 위에서 김자류 묘지명(1146년)의 삼한공신 대광 시중 김예▨(金禮▨)는 박천식 교수의 삼한공신 명단의 김예겸(金禮謙)이라는 점, 그리고 김자류 묘지명의 김예겸과 김지우 묘지명(1152년)의 김예(金禮)는 첫째 이름이 같고, 둘째 대광(大匡)이라는 관직이 같다는 점을 근거로 동일인이라는 추측을 하였다.
우리는 삼한공신 김예겸과 삼한공신 김인윤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삼한공신 명단을 분석하였다.
삼한공신 명단을 분석해 보면, 삼한공신들을 고려태조에게 귀의한 시기와 출신지역별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가운데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삼한공신이 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삼대가 모두 삼한공신이 된 경우도 있다.
<고려건국(918년) 이전 또는 건국초기(918년~920)부터
태조와 함께한 공신그룹>
홍유(태조비 의성부원부인의 아버지, 홍주홍씨 시조, 초명 홍술),
배현경(경주인, 936년 12월 졸, 시호 무열. ),
신숭겸(곡성인, 홍유, 배현경, 복지겸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태조를 왕으로 세움, 927년 공산전투에서 전사),
복지겸(면천인),
왕평달(왕식렴의 아버지, 왕건의 숙부),
왕식렴(왕건의 사촌동생),
유금필(태조비 동양원부인의 아버지),
박술희(면천박씨 시조, 태조의 최측근 장수)
이총언(벽진군 성주(태수) ?~938년)
유천궁(정주, 신혜왕후의 아버지, 대광),
견금(청주),
흥현(청주),
태평(순군낭중을 삼음, 서책을 많이 보았음. 행정에 밝음),
김행도(김행파, 광평시중),
□명필(임명필, 순군부령),
최응(붓을 떨어뜨리면서 왕건에게 귓속말로 궁예의 말을 인정하라고 한 인물),
임희(병부령, 고려사절요 기록),
왕유(본명-박유, 왕건이 왕씨 성을 하사 광해주),
왕만세(태조 사촌동생),
근겸(김근겸, 청주인 태조 1년 918년 기록, 원증승통 덕겸묘지명(1150년)),
김락(918년 2등 공신, 927년 공산전투에서 전사),
윤선((尹瑄, 삭방 골암성, 병법을 잘 알고 있었음),
능식(마군장군),
박지윤(평주인, 박수경의 아버지, 박경산 묘지명 1158년 )
박수경(평주인 대상 936년 일리천 전투에 참여, 박경산 묘지명 1158년 )
박수문(평주인 박수경의 아들 943년 태조 임종 때 염상, 왕규와 함께 모심)
박승위(평주인, 박수경의 아들, 박경산 묘지명 1158년)
서필(이천인, 광종 때 그가 한 말을 보면 초기부터 삼한공신이었음)
강여청(김집이 쓴 강공 행장, 강궁진 아버지)
강궁진(김집이 쓴 강공 행장, 강감찬 아버지)
전종회(영광전씨 시조, 914년 김언과 함께 광주 염해연 전투에 참가)
윤봉(932년 졸한 최응 추천으로 광평시랑이 됨)
신능길(신숭겸 동생, 927년 공산전투)
유긍달(900년 경 인연을 맺음, 신명순성왕후의 아버지)
<922~936년에 귀의한 공신그룹>
922년-강릉, 명주
왕순식(김순식, 명주, 강릉김씨),
왕렴(본명 김수원, 왕순식 아들)
왕관경(명주)
왕경(명주)
왕예(王 乂, 강릉인, 佐태조유공)
홍은열(洪殷悅, 홍술(진보 성주 923년, 929년 전사) 남양인 (삼한공신)
930년-고창, 안동부
김선평(고창 성주, 김순 묘지명(1321년)에 신라왕 김부의 내손(손자)이라 기록되어 있음, 삼한벽상공신 사도 아부 삼중대광)
권행(안동부, 안동권씨 시조, 본래 김씨인데 태조가 권씨 성을 하사)
장길(안동부)
931년(931~935)-신라 양위의 공
김억렴(경주인, 태조 제 5비 신성황태후 부친)
김유렴(경주인, 김억렴의 아들)
김예겸(경주인)
김인윤(경주인, 김지우 묘지명, 김인위의 할아버지)
이금서(경주인, 후에 경순왕의 사위가 됨)
936년 9월-후백제 멸망의 공
박영규(견훤의 사위, 순천인, 936년 9월 후백제에서 사신을 보내 태조에 귀의, 후백제를 칠 때 내응하여 후삼국통일의 공을 세움)
삼한공신 명단을 그룹별로 분석해 보면 첫째 개국공신그룹, 둘째 개국초기공신그룹, 셋째 지역의 토호로서 귀의한 공신 그룹, 넷째 신라양위 그룹, 다섯째 백제 멸망에 공을 세운 공신(박영규)으로 나눌 수 있다.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는 936년 9월 뒤늦게 태조에 귀의하였지만 삼한공신이 된 이후 두 딸이 제3대 정종(923~949, 재위기간 945.9~949.3. 3년 6개월)의 왕비(문공왕후, 문성왕후)가 된다.
삼한공신(三韓功臣)이라는 공호(功號)는 아무에게나 무조건 남발했던 것이 아니고 삼한통일을 이룩하는데 공을 세운 자들에게 태조가 직접 내렸고 940년 신흥사를 중건하여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벽에 붙이게 하였다. 이를 삼한벽상공신이라 한다.
흥미로운 것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삼대가 삼한공신이 된 사례다.
박경산 묘지명(1158년)에 ‘직윤의 아들은 삼한공신 삼중대광( (三韓功臣 三重大匡) 지윤(遲胤)이고, 지윤의 아들은 삼한공신 태위(太衛) 겸 시중(侍中)인 수경(守卿)인데, 수경의 아들은 삼한공신 사도(司徒) 승위(承位)이니 공은 승위의 4대손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박지윤(朴遲胤, 태조 제24비 성무부인 아버지, 박수경, 박수문의 아버지)
박수문(朴守文, 태조 제27비 월경원부인 아버지)
박수경(朴守卿, 태조 제28비 몽량원부인 아버지, 박수문의 동생)
박승위(朴承位, 박수경의 아들)
태조 초기부터 활약했던 평산 출신 박지윤(박천식 교수가 발표한 삼한공신 명단의 박연윤은 한자를 잘못 읽고 표기한 결과로 보인다)과 그의 두 아들 박수경과 박수문, 그리고 박수경의 아들 박승위가 모두 삼한공신이 되었다.
(3대에 걸쳐 4명이 삼한공신이 된 박지윤 가문은 제4대 광종(925~975, 재위기간 948.3~975.5, 26년 2개월)의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의 칼에 무참히 몰락하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삼한공신이 된 경우는 다음과 같다.
1. 왕평달(태조의 숙부)-왕식렴(태조의 종제, 왕평달의 아들)
2. 왕순식(본명: 김순식 명주 강름김씨)-왕렴(본명: 김수원 왕순식 아들)
3. 강여청-강궁진(강여청 아들, 강감찬 아버지, 김집이 쓴 강공 행장 참고)
4. 김억렴(경순왕 백부, 태조 제5비 신성왕태후 아버지)-김유렴(경순왕 종제, 김억렴 아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삼한공신이 된 이러한 사례가 있으니 우리가 시도하는 것은 바로 삼한공신 김예겸과 삼한공신 김인윤이 부자지간(父子之間)임을 밝히는 학문적 추측이다.
김예겸과 김인윤은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는 비록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삼한공신명단에 함께 등장하고 또한 김자류 묘지명(1146년)과 김지우 묘지명(1152년)에 새겨져 있다.
김자류 묘지명(1146년)이 신라왕의 후손라고 밝힌 점에서 김예겸이 경주(월성) 출신이라는 점에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김인윤과 김예겸은 출신지역이 경주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경주인으로 태조 당시 삼한통일의 공을 세워 삼한공신이 되었다면 신라 양위의 공을 인정받은 것으로 신라왕 김부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태조 왕건은 신라와의 외교적 도리를 생각하여 경주인이나 또는 경주 근처 장군들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예로, 영천(고을부) 지역의 장군 능문이 태조 8년 925년 10월에 사졸을 거느리고 와서 태조에게 의탁하였지만 태조는 그 성이 신라의 왕도에서 가까우므로 그를 위로하여 돌려보내고 다만 그 휘하의 시랑 배근과 대감 명재, 상술, 궁식 등만 머무르게 한 일이 있다.
고려 태조는 귀의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때에도 신라와의 정치적인 도리를 지켜가면서 선별하였으므로 경주인이었던 김예겸이 독자적으로 움직여 삼한공신이 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경주인으로 삼한공신이 된 사람은 김억렴, 김유렴, 김예겸, 김인윤, 이금서이다.
김억렴(고려 태조 제5비 신성왕후 부친)은 경순왕의 백부(큰 아버지)이고 김유렴은 김억렴의 아들로 경순왕의 종제(4촌 동생)이고, 이금서는 후에 경순왕의 사위가 된다.
김억렴, 김유렴, 이금서는 경순왕과 매우 가까운 인물들이고 김예겸, 김인윤 역시 예외는 아니라고 추측된다.
930년(태조 13년)에 태조 왕건은 고창군 병산에서 후백제 견훤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2월을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고창 싸움에서 이겼다고 알렸다. 신라왕(김부, 경순왕)이 사신을 보내어 답례하고 글을 보내어 만나기를 청하였다. 그때 고려 태조는 신라왕(김부)의 청에 답장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920년~930년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신라의 동쪽 주, 군, 부락이 다 와서 고려태조에게 항복하니 명주에서 홍례부(안동)까지 모두 110성이나 되었다.
이제 신라는 이제 도성(월성)과 그 근처만 조금 남은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신라왕(김부, 경순왕)은 이듬해 931년 태수(太守) 겸용(謙用)을 고려 태조에게 사신으로 보내어 만나기를 다시 청하였다.
고려태조는 신라왕의 두 번에 걸친 청을 받아들여 신라 월성으로 내려온다.
고려사절요에는 태조가 기병 50여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갔다고 썼지만, 동사강목은 태조가 5천여기를 거느리고 경내에 이르렀다고 썼다.
태조 왕건은 4년 전(927년) 후백제 견훤과 공산전투에서 신숭겸, 김락, 전의갑 등 8명의 장수를 잃고 5천명의 군사들 중 4,930명을 잃은 참패 끝에 간신히 도망쳐서 목숨을 건진 뼈아픈 경험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혹시 모를 후백제 견훤의 침략에 대비하여 5000여 대군을 거느리고 왔을 것이다.
신라왕(경순왕)은 궁궐 정문 밖에 나아가 태조를 맞이하였으며 당제인 상국(相國) 김유렴과 잡간 김예문(金禮文) 등으로 하여금 성안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태조는 931년 2월 신해일에 신라에 내려와서 3개월가량 머물다가 5월 26일(계미일)에 돌아갈 때 김유렴을 볼모로 삼았다.
볼모로 삼은 것은 신라왕(경순왕)과 은밀히 약속했던 신라양위 이행을 위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김지우 묘지명(1152년)에 따르면 이때 김인윤((金仁允)이 태조를 따라 함께 개성으로 올라간다. 이를테면 김인윤은 김유렴과 함께 고려 태조를 따라 개성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 점에서 김지우 묘지명은 고려사, 또는 고려사절요에 등장하지 않는 사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기록에 비추어 보면 경주인으로 삼한공신이 된 김억렴, 김유렴, 김인윤, 김예겸, 이금서가 삼한통일의 공을 세운 것은 931년 경순왕이 태수 겸용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내어 태조를 만나기를 청하자 태조 왕건이 신라에 내려와 3개월가량 머물다 돌아간 바로 그 시점부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김억렴, 김유렴, 김예겸, 김인윤, 이금서는 삼한통일과정에서 후백제와의 전투에 참여한 기록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들은 경순왕의 명에 따라 신라를 양위하기 위해 준비한 공으로 삼한공신이 된 것으로 보인다.
김억렴(태조 제 5비 신성왕후 아버지)과 김유렴은 부자지간(父子之間)이고, 경순왕의 사위가 된 이금서 역시 경순왕과 긴밀한 사이임에 틀림없다.
김인윤 역시 김유렴과 함께 태조를 따라 개성으로 올라간 점을 미뤄 볼 때 이는 경순왕의 명에 따른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은 저마다 독자적으로 태조 왕건에 귀의하여 삼한공신이 된 것이 아니라 931년 태수 겸용(謙用)을 고려를 보내 신라 양위의 뜻을 전한 경순왕과 한 그룹에 속해 있다.
<계림의 숲>
935년 10월 경순왕은 시랑 김봉휴를 고려에 보내어 신라 양국의 뜻을 전하고 11월에 백관으로 거느리고 개경에 들어온다.
931년 김유렴 일행과 함께 태조를 따라 개경으로 올라간 김인윤은 4년 뒤 935년 11월 신라를 양국하기까지 필요한 일련의 준비했던 것이고, 그러한 공으로 삼한공신이 된 것이다.
김지우 묘지명에 의하면 대광(大匡) 김예(金禮)의 아들이 삼한공신 삼중대광(三韓功臣 三重大匡) 김인윤(金仁允)인데 삼한공신 분석을 통해본 바, 김예겸 역시 경순왕과 정치적인 뜻을 같이한 그룹에 속해 있고 931년 이후 신라양위의 공을 세워 삼한공신이 된 것으로 사료된다.
김지우 묘지명의 대광 김예와 김자류 묘지명의 삼한공신 대광 시중 김예겸은 이름과 관직이 같고, 또한 삼한공신 그룹 분석 결과 경순왕과 같은 그룹(김억렴, 김유렴, 김인윤, 김예겸, 이금서)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김자류 묘지명의 김예겸(金禮謙)과 김지우 묘지명의 김예(金禮)가 동일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고 삼한공신 대광 시중 김예겸(金禮謙)과 삼한공신 삼중대광 김인윤(金仁允)을 부자지간(父子之間)으로 보는 것이다.
3. 삼한공신 대광 시중 김예겸의 후손
1785년(정조 9년)의 목간본 경주김씨족보에 김예겸(金禮謙)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내사령(內史令)으로 기록되어 있고 박천식 교수가 발표한 ‘삼한공신 명단’에 김예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김자류 묘지명(1146년)에 새겨진 金禮▨(김예▨)를 경주김씨족보와 박천식 교수의 삼한공신명단을 종합하여 볼 때 김예겸(金禮謙)으로 보는 것이 맞다.
김예겸과 김인윤이 부자지간이라면 경주김씨 계림군파와 예판공파, 그리고 영분공파는 한 할아버지(삼한공신 김예겸) 한 후손인 것이다.
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와 계림군파는 김예겸(김예)-김인윤-김신웅-김인위-김원정로 이어지고, 영분공파는 김예겸-김주정-김의진-김후덕-김수지-김영고-김인경으로 이어져 내려간다.
김예겸은 삼한공신 김인윤을 비교적 이른 나이에 낳은 것으로 판단되며, 판상서병부사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평장사로 치사한 양신공 김의진이 돌아가신 년도가 1070년이란 점을 감안하면 김주정을 낳은 시기는 아마도 삼한공신이 된 이후로 추측된다.
이 외에도 김자류 묘지명을 보면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아들이 있었다.
김예겸-김인윤-김신웅-김인위(경주김씨 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 계림군파)
김주정-김의진-김후덕-김수지-김영고-김인경(경주김씨 영분공파)
김의선-김후백-김유규
( )-김은익-김성행-김공신-김관-김자류
현존하는 경주김씨족보에는 김인위-김원정만 기록되어 있는데, 김지우 묘지명(1152년)과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1154년)을 통해 볼 때 김인위의 아들은 김원정 뿐만 아니라 김원황이 있었다. 그리고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을 보면, 김원충 역시 김인위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
[김인규는 관반이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동지추밀원사 상주국이다. 김경용이 왕옹(王顒-숙종) 때 수태부 수 중서령을 지냈는데 김인규는 그의 아들이다. 왕옹의 아버지 왕휘(王徽-문종)가 김씨의 딸을 맞아들였으니 왕옹(王顒-숙종)은 김인규를 원구(元舅-왕의 외척)로 높일 분의가 있었다.]
문종이 김씨의 딸을 맞아들였다는 것은 시중 김원충의 딸 인목덕비 김씨를 가리킨다. 바로 이를 근거로 김원충과 김인규는 같은 집안으로 보는 것이고
수사공 문하시랑평장사 김인위(金因謂)의 세 아들 김원충, 김원정, 김원황으로 보는 것이다.
김예겸의 증손자 김인위(金因謂) 대에 이르러 고려문벌귀족 가운데 최고의 위치를 꽃 피운다.
김인위(金因謂)의 자손들을 보면 김인위의 가문(家門)이 어떠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사공 문하시랑평장사 김인위의 자손들》
아들-김원충(수사도 문하시중, 정종, 문종 장인)
김원정(~1063, 수태위 문하시중)
김원황(~1062, 중추원사 병부상서)
딸-원순숙비(고려 제8대 현종의 8비),
계림국대부인(인주이씨 이자연의 처)
사위-현종(992~1031년, 고려 제 8대 왕)
이자연(1003~1061년, 수태사 문하시중)
손자-김지예(군기소감, 김원정의 아들)→경주김씨 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 계림군파
김경용(수태부 문하시중, 1040~1125년, 김원황의 아들)
손녀-용절덕비 김씨(~1102년, 정종의 제4비, 김원충의 딸)
인목덕비 김씨(~1084년, 문종 제5비, 김원충의 딸)
김씨(서희 손자인 서정의 처, 김원정의 딸)
낙랑군대부인 김씨(수사공 유홍의 처, 명의왕후의 모(母), 김원황의 딸)
낙랑군대부인 김씨(최유서의 처, 김원황의 딸)
외손자-이정(1025~1077년, 판상서병부사 상주국, 계림국대부인의 아들)
이적(계림국대부인의 아들)
이석(병부시랑, 사숙태후(선종비) 부친, 계림국대부인의 아들)
이의(계림국대부인의 아들)
혜덕왕사 소현(1038~1096, 계림국대부인의 아들))
이호(삼중대광 태사 수국사 상주국, 이자겸과 장경궁주(순종비) 아버지,
계림국대부인의 아들)
이전(계림국대부인의 아들)
이인(계림국대부인의 아들)
외손녀-경성왕후(~1086년, 제 9대 덕종의 제 1비, 원순숙비의 딸)
인예왕후 이씨(~1092년, 문종의 왕비, 제11대 순종, 제13대 선종, 제15대 숙종의
어머니, 계림국대부인의 딸)
인경현비 이씨, 문종의 제3비, 계림국대부인의 딸)
인절현비 이씨(~1082년, 문종의 제4비, 계림국대부인의 딸)
흔히 고려역사에서 문벌귀족으로 등장하는 인주이씨 이자연은 1021년 장원급제하여 세가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데 그가 세 딸을 모두 문종의 왕비로 들이고 최고의 실력자가 되기까지는 그 배경에 경주김씨 가문의 대표적인 문벌귀족인 장인 김인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왕조를 보면 문종 이후 고려왕들은 모두 김인위의 외손이다.
또한 김예겸의 손자 양신공(良愼公) 김의진(~1070년)은 1047년 전중시어사, 1060년 지상서이부사, 좌산기상기동지중추원사, 1065년 참지정사 지공거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 1068년 판상서병부사를 거처 평장사에 이르렀고, 퇴임 이후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사숙(개인학교)을 세웠으니 그 문하생들을 양신공의 시호를 따라 양신공도((良愼公徒)라 불렀는데 고려 12공도의 하나였다.
4. 김예겸은 원성왕계인가, 아니면 태종무열왕계인가?
우리는 김자류 묘지명의 김예▨(金禮▨)이 삼한공신 명단의 김예겸(金禮謙)이고, 김지우 묘지명의 김예(金禮)와 김자류 묘지명의 김예겸(金禮謙)이 동일인이라고 밝혔다.
그 근거로 첫째 한자 이름(禮)이 같고 둘째 관직(대광)이 같으며 셋째 삼한공신 명단 그룹(시기-지역-정치상황)이 같다는 점을 들었다.
경주지역 출신으로 삼한공신이 된 사람은 김억렴, 김유렴, 김예겸, 김인윤, 이금서 5명뿐인데 한 가문에서 3대에 걸쳐 무려 4명이 삼한공신 된 박지윤 가문을 비롯하여 아들과 아버지가 삼한공신이 된 여러 사례는 김억렴과 김유렴이 부자지간이듯이 김예겸과 김인윤을 역시 부자지간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박지윤-박수문
박수경-박승위
1. 왕평달-왕식렴
2. 왕순식-왕렴(본명: 김수원)
3. 강여청-강궁진
4. 김억렴-김유렴
5. 김예겸-김인윤
2001년 고려묘지명집성에 김지우 묘지명(1152년, 의종 6년)이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김인위는 원성왕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지우 묘지명(1152년, 의종 6년)
김예→김인윤→김신웅→김인위→김원황→김경용→김인규→김지우(원성대왕 후손)
그런데 김지우의 고모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1154년, 의종 8년)이 소개됨에 따라 김인위가 원성왕계인가 아니면 태종무열왕계인가라는 논란이 야기 되었다.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1154년, 의종 8년)
김인위→김원황→김경용→이초원 처 김씨(태종대왕 김춘추의 14세손)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1154년)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손일환 박사가 2006년 6월 학계에 처음 발표를 하였고, 그 후 고려묘지명집성(1993년)을 펴낸 김용선 교수가 최근 (속)고려묘지명집성(한림대학교출판부. 2016년 7월)에 알려지지 않은 몇 개의 고려묘지명과 함께 묶어서 소개하였다.
<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 앞면>
<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 뒷면>
김지우는 의종 5년(1151년) 7월 26일 향년 44세로 돌아가셨고, 의종 6년 (1152년) 10월 19일에 장례 지냈으며, 김지우의 고모인 이초원 처 김씨는 의종 6년 1152년 11월 20일에 향년 74세로 돌아가셨고, 의종 8년 1154년 5월 2일 장례를 지냈다.
김지우 묘지명(1152년, 의종 6년)은 김지우를 원성왕의 후손으로 기록하였고, 그의 고모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1154년, 의종 8년)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14세손으로 기록했다.
한 집안의 조카와 고모의 묘지명을 그것도 불과 2년 사이를 두고 왜 조상의 상계를 다르게 기록했을까?
김지우 묘지명(1152년)의 찬자는 미상이다. 누가 기록했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1154)은 승천부사 합문지후 김신부(金辛夫)가 찬하였다.
김신부(金辛夫)는 임광 묘지명(1152년)도 찬하였는데 거기에는 문림랑 권지감찰어사로 되어 있고, 고려사절요 인종 공효대왕 2년(1146)의 기록을 보면, 김신부는 고려역사를 기록하고 평가하는 사신(史臣)이었다.
고려사가인 김신부가 묘지명을 찬하면서 어떤 분명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이초원 처 김씨를 태종대왕 김춘추의 14세손이라고 명시하였을 것이다.
단지 이초원 처 김씨의 3대조(김인위→김원황→김경용→이초원 처 김씨)만 기록한 점은 아쉽다.
김지우 묘지명은 김지우를 원성왕의 후손으로 썼으며 김지우의 7대조(김예→김인윤→김신웅→김인위→김원황→김경용→김인규→김지우)를 기록하였다.
삼한공신삼중대광 인윤은 태자태보좌복야 신웅을 낳고, 신웅은 사도내사시랑평장사 인위를 낳고, 인위는 병부상서 중추사 원황을 낳고, 원황은 중서령 낙랑공 경용을 낳고 경용은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공부사 인규를 낳고, 인규는 지우를 낳았다는 김지우 묘지명의 기록은 계보에 나열된 이름들이 인윤과 신웅을 제외하고 고려사에 그대로 등장하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지우의 자는 복기로 원성대왕의 후손이다. 대왕(원성대왕)은 대광(大匡) 예(禮)를 낳았다(生)는 기록은 뭔가 맞지 않다.
여기서 대왕이란 문맥상 원성대왕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고, 대광(大匡)이라는 관직은 원성대왕 당시의 통일신라의 관직이 아니고 고려의 초기의 관직이다.
김지우 묘지명의 찬자는 김지우가 원성왕의 후손이라고 명시하였으므로 대왕(원성왕)은 대광(大匡) 예(禮)를 낳았다(生)고 쓴 것은 [대광(大匡) 예(禮)는 원성왕의 후손]이라는 의미로 썼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지우 묘지명의 찬자가 고려 의종 때의 사람이므로 대광(大匡)이란 관직이 고려시대 초기 최고의 관직이란 사실을 익히 알고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광(大匡)이 고려 초의 최고의 관직이므로 삼한공신 삼중대광 김인윤의 아버지 김예(金禮)가 대광(大匡)에 오른 것으로 봐서 김예 또한 삼국통일에 기여한 공로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학문적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대광 김예(김지우 묘지명, 1152년)를 삼한공신 대광 시중 김예겸(김자류 묘지명, 1149년)과 동일인으로 보는 것이다.
김지우 묘지명은 김지우의 7대조(김예-김인윤-김신웅-김인위-김원황-김경용-김인규-김지우)를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6대조 김인윤이 삼한공신에 오르게 된 과정을 기록하였는데 이초원의 처 김씨 묘지명은 김인위-김원황-김경용-이초원의 처 김씨만 기록하였다.
그렇긴 해도 이초원의 처 김씨 묘지명은 빼어난 문장가이자 역사학자인 김신부(金辛夫)가 찬하였다는 점에서 김경용의 딸 김씨를 태종대왕 14손이라고 명시한 내용을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볼 수 없다.
김지우(원성대왕 후손, 찬자 미상)
김예→김인윤→김신웅→김인위→김원황→김경용→김인규→김지우
이초원 처 김씨(태종대왕 김춘추 14세손, 찬자 고려사가 김신부)
김인위→김원황→김경용→이초원 처 김씨
김인위, 김원황, 김경용, 김인규, 김지우 모두 고려사에 등장하는 당대 유명한 인물들이므로 김지우 묘지명의 기록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런데 김인위의 상계에 있어서 원성왕계(김지우 묘지명, 1152)와 태종무열왕계(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 1154년)의 충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틀림없이 어느 한쪽은 맞고 한 쪽은 틀릴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릴까?
원성왕계와 태종무열왕계는 내물왕-지증왕의 후손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 이후엔 갈래가 다르다.
<내물왕릉>
태종무열왕(김춘추)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말구→내물왕→복호→습보→지증왕→입종→진흥왕→진지왕→용춘→태종무열왕
원성왕(김경신)
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말구→내물왕→복호→습보→지증왕→진종→흠운→마차→법선→의관→위문→효양→원성왕
<원성왕릉>
김지우 묘지명은 찬자 미상이지만 김지우의 7대조와 특히 6대조 김인윤이 삼한공신이 된 배경을 자세히 기록하였으므로 이것은 이것대로 신빙성을 갖고 있으며,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은 찬자인 김신부의 학문적 위치를 고려할 때 이 또한 기록의 신빙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때문에 복수의 사료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가 추측한 대로 김지우 묘지명(1152년)의 대광 김예와 김자류 묘지명(1146년)의 삼한공신 대광 시중 김예▨이 삼한공신 명단(박천식 교수 학술논문)의 김예겸과 동일인이라고 볼 때 김예겸이 원성왕계인가, 아니면 태종무열왕계인가에 하는 논란과 관련하여 참고해 볼만 것으로 김부식의 손자 김군수(金君綏)가 쓴 시(詩) 동도객관(東都客館)이 있다.
(武烈王孫文烈家 鷄林眞骨得無誇)
무열왕손이요 문열공(김부식)의 집안이라 계림의 진골 자랑할 만하거늘
(故鄕尙在天東角 今幸來遊作使華)
고향은 하늘 동쪽에 있으나 요즘 다행히 사신이 되어가는구나
김군수는 동도객관에서 진골인 자신은 무열왕손(武烈王孫)이요 문열공 집안(文烈家-문열공 김부식 집안)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신라사가 신형식 교수는 김군수의 시(詩) 동도객관(東都客館)을 달리 해석했다.
“여기서 보는 무열왕손은 자신의 가문에 대한 표현이 아니다. 무열왕실(주로 성덕왕과 경덕왕)이 북방 경영할 때 세운 동도의 객관을 보고 느낀 것으로 거란 격퇴 시에 북방에서 고향을 생각하며 쓴 시라고 생각된다. 즉, 그가 머문 객관이 문열(文烈)이 세운 큰집임을 생각하며 신라(계림)시대 진골가문의 당당한 위풍을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는 무열계가 될 수 없다.
무열계는 원성왕 이후 정치의 주류에서 밀려난 지 150여년이 지난 싯점이었고, 무열계를 대표하던 김주원계가 명주로 밀려난 후 김헌창난(822년)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으므로 그의 선대가 경주 호장으로 대우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의 가계는 무열계가 될 수 없으며 경순왕계였다"(신형식, "신라통사", p.165).
그러나 신라사가 신형식 교수가 보는 것처럼 태종무열왕계가 완전히 몰락하였을까? 신형식 교수의 논리가 비약된 것은 원성왕 시대에 무열왕의 후손이 김경신(원성왕)에 밀린 김주원(강릉김씨 시조)과 그 후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김헌창만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형식교수는 신라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태종무열왕의 자손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오히려 김군수의 시에서 보는 것처럼, 무열왕손이고 문열공의 집안사람인 김군수가 신라 진골의 왕손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고향과 지금의 처지를 생각하며 쓸쓸히 읊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형식 교수의 견해와는 달리 김부식이 태종무열왕계일 가능성이 높다.
< 문무대왕암>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위에서 누차 밝혔듯이 김예와 김예겸이 동일인이라는 추측을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김자류 묘지명(1146년)의 삼한공신 대광 시중 김예▨(金禮▨)는
박천식 교수의 삼한공신 명단의 김예겸(金禮謙)이라는 점,
2. 김자류 묘지명의 김예겸과 김지우 묘지명(1152년)의 김예(金禮)는
첫째 이름이 같고, 둘째 대광(大匡)이라는 관직이 같다는 점.
3. 삼한공신 분석결과 김예겸과 김인윤은 공신그룹(시기, 지역, 정치상황)이
같다는 점
4. 부자지간에 삼한공신이 된 사례가 여럿 있었고,
경주 출신으로 김억렴과 김유렴이 부자지간이었듯이
김예겸과 김인윤을 역시 부자지기간으로 봄.
5. 김예겸-김인윤-김신웅-김인위(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 계림군파)
김주정-김의진-김후덕-김수지-김영고-김인경(영분공파)
그러므로 경주김씨 봉익대부 예의판서공파와 계림군파, 영분공파를 한 할아버지(김예겸)의 한 후손으로 보는 것이다.
2018년 7월 29일
경주김씨
http://blog.daum.net/wprkffid7/8360960
|
첫댓글 20.2.2.휴일아침
인생을 보람있게 산다는 것은
어제도 내일도 아니고
오늘이 행복해야 합니다
즐거운 휴일하루가 되세요.
안녕하세요.
보름이 다가오고 있내요.
이번 정월 대보름에는 신종바이러스를 태워버리는 대보름 쥐불놀이 였으면 합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우리모두 합십하여 화이팅 합시다.
내 생명을 물려준 부모님과 조상님은 곧 하느님이시다!
김예겸(金禮謙)은 삼한벽상공신으로 내중령(內中令)을 지냈고, 그의 손자 김의진(金義珍)은 고려 문종 때 참지정사로 인재 등용에 공헌하여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i_zLuJETbs
PLAY
https://www.youtube.com/watch?v=D-FFzcOJA_U
PLAY
https://cafe.daum.net/dobulwonin/MJRw/768?q=%EB%B2%95%ED%9D%A5%EC%99%95%EC%9D%80%20%EB%B0%B1%EC%A0%9C%EC%B6%9C%EC%8B%A0
https://www.youtube.com/watch?v=MaXtlvsTCR4&t=114s
PLAY
예겸(禮謙, 삼한벽상공신 내사령)→주정(周鼎)→의진(義珍)→후덕(侯德)→수지(壽之)→영고(永固)→양경(良鏡, 인경)
김지우 묘지명(1152년, 찬자 미상)
예(禮, 대광)→인윤(삼한공신 삼중대광)→신웅→인위→원황→경용→인규→지우(원성왕의 후손)
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1154년, 찬자 김신부)
인위→원황→경용→이초원 처 김씨(태종대왕 김춘추의 14세손)
이초원 처 김씨(태종대왕 김춘추 14세손, 찬자 고려사가 김신부)
김인위→김원황→김경용→이초원 처 김씨
김인위, 김원황, 김경용, 김인규, 김지우 모두 고려사에 등장하는 당대 유명한 인물들이므로 김지우 묘지명의 기록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런데 김인위의 상계에 있어서 원성왕계(김지우 묘지명, 1152)와 태종무열왕계(이초원 처 김씨 묘지명, 1154년)의 충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틀림없이 어느 한쪽은 맞고 한 쪽은 틀릴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릴까?
원성왕계와 태종무열왕계는 내물왕-지증왕의 후손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 이후엔 갈래가 다르다.
4. 김예겸은 원성왕계인가, 아니면 태종무열왕계인가?
우리는 김자류 묘지명의 김예▨(金禮▨)이 삼한공신 명단의 김예겸(金禮謙)이고, 김지우 묘지명의 김예(金禮)와 김자류 묘지명의 김예겸(金禮謙)이 동일인이라고 밝혔다.
그 근거로 첫째 한자 이름(禮)이 같고 둘째 관직(대광)이 같으며 셋째 삼한공신 명단 그룹(시기-지역-정치상황)이 같다는 점을 들었다.
경주지역 출신으로 삼한공신이 된 사람은 김억렴, 김유렴, 김예겸, 김인윤, 이금서 5명뿐인데 한 가문에서 3대에 걸쳐 무려 4명이 삼한공신 된 박지윤 가문을 비롯하여 아들과 아버지가 삼한공신이 된 여러 사례는 김억렴과 김유렴이 부자지간이듯이 김예겸과 김인윤을 역시 부자지간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OuCAq09bReE&list=UULP6PwdGvRs13nJFB5cMwcxEQ&index=17
P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