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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긍휼을 받은 자
2016. 11. 27(주일오전예배) 사무엘하 5:1-5
탈북자 사역하는 목사님이 중국의 작은 마을에서 옥경이 가족 만난 적이 있다. 가장인 50대 중반의 남자는 탈북해서 몇 년동안 중국에서 살았지만, 오토바이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아서 잠잘 때 신발을 머리에 두고 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탈북하여 5년동안 고생한 삶을 목사님에게 이야기 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또 좋은 날이 올 것이니 낙심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목사님은 다시 옥경이 집을 찾았다. 그때 목사님은 옥경이 가정이 평안을 찾고 기쁨으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목사님의 기대는 산산히 무너졌다. 왜냐하면 50대 중반의 남자는 목사님을 만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으로 끌려가서 지병으로 죽었고, 또 목사님이 그 집에 도착하기 2주 전에 주위 사람에 신고로 그 집 딸인 옥경이도 북한에 끌려가 버렸기 때문이다. 불과 1년전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고, 또 좋은 날이 있을 것이다고 격려해 주었는데, 가족은 뿔뿔히 흩어지고 부인만 혼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아픈 경험을 한 목사님이 탈북하여 산에서 숨어사는 신혼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불과 한 살도 되지 않는 이항이라는 아기를 낳은 그 부부의 이야기도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부인은 임신했을 때 북한에 끌려가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이항이를 낳았다. 그리고 3개월동안 감옥살이를 더한 후에 출옥한 이항이 엄마는 다시 탈북하여 남편과 함께 산에서 숨어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항이 부모는 산에 숨어살면서 먹을 것이 없어 한달에 한번 산아래로 내려와 전도원이 주는 먹을 것을 얻어서 다시 산으로 올라가 숨어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린 아이를 안고 어렵고 힘들게 이항이 가족에게 목사님은 뭐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옥경이의 집 사건을 경험한 목사님은 감히 낙심하지 말라고, 좋은 날이 있을 것이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목사님은 미국에서 사는 사람이다고 다 행복하고, 탈북자는 다 불행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만 잘 섬기고 살자고 이야기를 했다. 목사님이 이 말에 신혼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설교를 한 목사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고 한다.
만약 여러분이 그 목사님이라면 젊은 신혼부부에게 뭐라고 말해주겠는가? 저는 이번주 설교를 기다림이란 제목으로 하기 위하여 준비하였다. 그리고 서론을 기록한 후 답을 찾지 못해서 며칠동안 고민만 하였다. 처음에 설교를 시작할 때는 그렇게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라고 설교를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저도 그렇게 설교를 하면 목사님과 같이 마음이 편치 않을 것같아 설교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에 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제 마음을 보게 되었다. 지난 수요일은 저에게 아주 큰 2가지 일이 있었다. 하나는 교회 냉난방기 실외기가 고장나서 수리한 일이고, 또 하나는 교회 임직 및 은퇴식을 거행한 일이다. 이렇게 큰 일을 2가지 하고 밤에 잠이 들었다. 그리고 목요일 새벽에 알람소리와 함께 눈을 떴는데, 일어나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교회 냉난방기 실외기가 고장나서 고쳤는데, 학사관 에어컨이 또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자 말자 수리비는 얼마나 많이 나올까? 왜 이렇게 고장이 자주나는 것일까? 하는 걱정이 얼마나 심하였는지 가슴이 답답해서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교회가 냉난방기 수리할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또 내가 고쳐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전화해서 고쳐주세요 하면 기사가 와서 친절하게 다 고쳐 줄 것인데 내가 왜 그렇게 답답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더 이해가 않되는 것은 목사가 수요일 저녁에 은혜롭게 임직식을 마쳤으면 목요일 새벽에 눈을 떠서 임직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신실한 일군들을 세우셨으니 어떻게 일하실까? 하는 기대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직자들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려고 했지만 감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한숨만 쉬고 있다가 저녁이 되어서 후배목사님이 개척을 하여 설립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중에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배 중에 목사님들은 후배목사님을 격려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말씀을 하였다. 하나님이 주인된 교회를 세우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다는 권면에서부터 여러 가지 권면을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제 입으로 나온 고백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였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다. 죄인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고, 자기가 아는 것도 행하지 못하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연약함을 가진 죄인이 누군가를 위로하여서 힘을 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죄인된 저와 여러분에게도 희망이 있다. 창세기 3장에는 인간의 최초의 범죄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였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이다. 그리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실 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벗었으므로 두려워한다는 아담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셔서 아담의 수치를 가리워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러한 모습은 한번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가인에게 네 동생 아벨이 어디있느냐?하고 물었다. 그때 가인은 네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하며 하나님 앞에 시치미를 떼었다. 동생을 쳐서 죽인 가인은 하나님이 그를 부르실 때 잘못했습니다가 아니라, 뻔뻔하게 자신의 죄를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가인에게 벌을 내려서 밭을 갈아도 열매를 거두지 못하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인에게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여 살던 가인은 이제 땅의 저주를 받아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이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죽이리라는 걱정을 할 때 가인을 위하여 그 이마에 표를 주시고, 가인을 치는 자에게는 벌을 칠배나 받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은 세상을 유리하며 다닐 때 그 누구에게도 헤침을 받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죄에 대한 벌은 내리지만, 그를 불쌍히 여겨서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어 주시고, 그 아들을 죽이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어주어서 우리를 진리의 길로 걸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지금 이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다. 우리는 연약하여 내 마음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늘 답답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위로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답답한 자신의 삶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연약한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며 사는가? 대통령 8명, 노벨상 44명, 퓨리처상 30명을 배출한 미국의 하버드대학이 하버드대학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책으로 편찬하였다. 그 책의 제목이 하버드대학 쑤린이 쓴 어떻게 인생을 살것인가? 이다. 이 책에서 쑤린은 바닷가의 가난한 어부이야기를 한다. 한 가난한 어부가 바닷가에서 크고 아름다운 진주를 하나 줍게 되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 진주에 약간의 흠집이 있는 것이었다. 그 흠집만 없으면 아주 고가의 진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어부는 그 흠집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껍질 하나를 벗겨 내고, 또 벗겨 내었지만 흠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몇 번을 더 껍질을 벗겨 내었을 때 드디어 진주의 흠집을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진주의 흠집이 다 사라지는 순간에 가난한 어부의 손에 있던 진주도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쑤린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은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자신의 흠집을 가리기에 급급한 삶을 살지만, 쑤린은 차라리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저는 이 내용을 그대로 교회 안으로 가지고 오고 싶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내가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사람이 참된 신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긍휼히 여겨서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은 사람임을 인정하는가? 창세기 4장에 나오는 동생 아벨을 죽이고 이마에 표를 받은 가인을 다시 생각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은 땅의 저주를 받은 가인이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였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이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 창세기 4장 1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창 4:16-17)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가인은 유리하는 자가 아니라, 에덴의 동쪽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은 것이다. 그 다음에 가인은 성을 쌓고 그 성의 이름을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을 기념하여 에녹이라 지었다.
지금 이것은 가인이 자신의 두려움을 어떻게 해결하는 방법이다. 범죄한 가인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하여 아내와 동침하여 자신과 평생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아들을 낳은 가인은 성을 쌓고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하여 스스로 수고와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가인이 결혼을 하고, 또 성을 쌓고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본문은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와서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었다. 그리고 다윗은 15년이라는 시간을 사울을 피하여 도망다니는 고난의 시간을 보내어야 했다. 그 후 사울이 블레셋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하므로 다윗은 헤브론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유다지파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7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 통일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무엘을 통하여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은 후 22년 6개월이 지나서 참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있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백성들이 다윗을 칭송할 때 반란을 통하여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조금 무리수였다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엔게디광야로 나왔을 때 동굴안에서 사울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다윗과 함께한 자들이 사울을 죽여야 한다고 이야기 했지만, 다윗은 자기 병사가 사울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그때 허락했다면 다윗은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회는 또 있었다. 사무엘상 30장에는 다윗이 아말렉전투에서 승리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사무엘상 31장은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다윗의 승리와 사울의 패배를 나란히 기록한 이유는 사울의 군대가 무너지고, 다윗의 군대는 강성해지고 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울이 죽었으니 다윗은 스스로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다윗은 왕이 되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금식하고, 또 사울을 죽였다고 하는 아말렉 소년에게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하면서 오히려 그 소년을 죽였다.
이러한 모습은 또 나온다. 사울이 죽고 11개 지파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스보셋의 군대지휘관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목을 가지고 다윗에게 온 것이다. 이제 이스보셋이 죽었다는 말은 결국 다윗이 통일왕국의 왕이 되는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회를 제공한 바아나와 레갑에게 다윗은 상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죽인다. 그때 다윗이 한 말이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에서 죽였다이다. 다윗은 자신과 전쟁 중에 있었던 이스보셋을 의인으로 표현하고, 그를 죽인 바아나와 레갑을 악인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잡지 않았겠는가?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으니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던 다윗은 스스로 왕이 되기보다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리를 견고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왕이 되었던 다윗은 나라를 다스릴 때도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 생각해 보기 바란다. 여러분이 보기에 가인과 다윗 중에 누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아는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는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받은 스스로 자기를 세우며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의 백성된 자리를 지키며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선하게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바티칸의 베드로로 대성당에 있는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25살에 조각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면 몇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된다. 그 중에 몇가지만 말씀드리면 ❶마리아가 너무 젊은 얼굴이다. 미켈란젤로가 마리아를 이렇게 젊게 그린 것은 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천주교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아들이 죽어서 어머니가 그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❷마리아의 얼굴이 너무 평화롭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쪽 손도 아들을 부둥켜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하여 들고 있다.
이것이 미켈란젤로가 25살에 조각한 피에타이다. 천주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미켈란젤로는 아들이 죽어도 평화를 잃지 않았던 마리아의 그 숭고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피렌체 성당의 피에타는 바티칸 피에타와 큰 차이가 있다. 그 중에 가장 큰 차이는 바티칸 피에타의 중심은 마리아였는데, 피렌체 피에타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있다. 그리고 뒤에서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니고데모인데, 미켈란젤로는 니고데모의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넣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신앙이 로마천주교에서 개신교로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미켈란젤로가 죽기 전날까지 심혈을 기우려 만든 작품이 론다니니의 피에타이다. 베드로성당의 피에타와 비교해 보면 많이 투박하고 미완성인 상태이지만, 론다니니 피에타에 나타나는 한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피에타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론다니니 피에타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등에 업혀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론다니니 피에타에 부숴져 있는 팔이 누구의 팔인가?에 대한 질문은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 팔은 하나님의 팔로 해석한다. 그래서 죽음 앞에 있었던 미켈란젤로는 예수님의 등에 업혀서 하나님의 팔로 안위함을 받는 것이 참된 피에타라는 것이다. 미케란젤로는 이것이 피에타라는 말의 뜻은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학이다. 십자가의 신학이란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능력의 팔로 그를 다시 살리셨으며, 그 강한 팔로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를 돕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십자가의 신학을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함께 동행하며 사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 그 은혜로 인하여 더욱 주를 의지하고 살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