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장 제도의 감리교회를 연 연회장들
1966년 9월 20일에 개최된 제10화 감리회 총회는 계파간의 대립이 극심했던 시간이었다. 감독을 뽑기 위해서 111번이나 투표를 실시했어도 당선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파행으로 치 닿던 총회는 회의를 원활하게 진행시키기 위하여 회의진행연구위원을 선정하였다. 이에 1967년 3월 2일에 개최된 제10회 총회 위임특별총회에서 제10대 감독을 선출하는데 성공했다. 이때 연구위원들은 반복되는 감독 선거의 파행 원인을 1인 감독 중심제로 인해 감독에게 부여된 권한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꼽았다. 그래서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각 연회마다 연회장을 선출하여 감독의 권한을 분산하는 제도를 마련하여 감리교는 연회장 시대를 맞이했다. 이로써 변홍규 감독은 각 연회를 주재하면서 제1대 중부연회장으로 김광우 목사를, 동부연회장으로 윤창덕 목사를, 남부연회장으로 이강산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때 새로이 조직된 삼남선교연회 관리책임자로 윤춘병 목사를 선임하여 연회장 시대 각 연회조직을 마무리했다.
제1대 중부연회장 김광우(金光祐) 목사는 1906년 경기도 부천군 덕적면 북리 능동에서 아버지 김성모(金聖模)와 어머니 정보물(鄭寶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동김씨의 후손으로 증조부 때 대원군의 안동김씨 박해를 피하여 덕적도까지 온 것이다. 덕적도에는 사립학교로 명신과 명덕학교가 있었는데 그는 명신학교 2년을 마치고 명덕학교 3학년으로 전학하였다. 이때 김광우는 항일운동을 하다가 거주 제한을 당하여 덕적도에 온 여운일(呂運亨의 族弟)에게 일본어와 산수를, 김사민 선생에게 애국애족의 정신을 배웠다. 그의 인도로 서울에 와서 1925년 19세에 중동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명덕학교 교사로 있다가 1927년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으나 건강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고 명덕학교로 돌아왔다. 학교 여교사 박정수의 중매로 결혼을 하고 그의 인도로 이용도 목사 부흥회를 참석하여 사상적 충격을 받고 사회주의 영향에서 떠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25세에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폐가 약하여 1년 쉬면서 피터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소야도에 교회를 세우고 청소년을 지도하였다. 1937년 3월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0년 서울 원동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정춘수 감독의 혁신안에 반대하였다. 정춘수 통리자 후임인 변홍규 통리자가 교단을 독단적으로 운영하고 있을 때 교파합동 문제가 대두되자 김광우는 이규갑, 전진규, 조신일, 송정률 목사와 함께 교파합동을 반대하였다. 이 일로 인해서 재선에 성공한 친일파 정춘수 통리자는 김광우 목사를 원동교회에서 쫒아냈다. 김광우 목사는 광복의 날까지 자월도에서 새우 잡이 어업을 하며 자원 목회를 했다.
김광우 목사는 해방 후 교회를 재건한다며 감리교 재건 운동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47년에 김광우 목사는 피난민 중심의 청파교회로 부임하여 목회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다시 자월교회로 돌아와서 목회하던 중 인천서지방 감리사로 일하였다. 재건파의 실무였던 김광우 목사는 복흥파 실무인 김희운 목사와 막후 접촉을 하고 합동을 추진하여 마침내 1949년 4월 29일 기독교대한감리회 통합총회가 열려 김유순 목사를 제5대 감독으로 선출하였다. 이 때 김광우 목사는 교육국 총무로 일하면서 전도국, 사회국 총무로 1956년까지 일했다. 또한 민 씨 가문에 빼앗긴 배화여자중․고등학교를 감리교로 다시 환원하는데 참여하고 7년간 배화이사장을 하였다.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이화여고, 이화여대, 연세대학의 이사로 재직하였다. 1961년 국제대학 학장으로 일하다가 1963년에 자교교회를 담임하였다. 이때 서울북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감리교 공동묘지를 고양군 금촌면에 창설하고 묘지관리위원장의 책임을 맡았다. 1963년부터 1972년 자원은퇴하기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감리교내 정치서클 중 정동파를 이끄는 리더였다. 1967년 중부연회장에 선출되어 연회일의 실질적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목회만 전념하기 위하여 1968년 연회장직을 사퇴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은퇴 후에는 한강중앙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다가 1979년 1월 29일 미국으로 이주하여 1990년 세상을 떠났다. 김광우 연회장은 제27회 중부연회(1968년 3월 13일~17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제1대 남부연회장 이강산(李康算) 목사는 1902년 3월 2일 황해도 부민면 천상리에서 아버지 이기춘과 어머니 유선형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할아버지가 너무 기뻐 ‘천하제일의 강산이 났구나’ 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강산이 되었다. 그의 집안은 유교적인 완고한 가정이었는데 선교사들의 사회사업을 보고 예수 믿는 것이 좋은 일리라 여겨 선교사에게 마을에 교회 세워달라고 요청하였다. 최일영 전도사가 와서 옹진군 내에 처음으로 복음의 씨가 뿌려지게 된 것이다. 이강산은 어려서부터 성경교육을 받고 자란 셈이다. 해주에서 보통학교와 부기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피어선 성경학교에서 공부하고 협성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강산이 14세 되던 1916년 10월 29일 부모가 정해준 배필 두 살 연상인 장선 양을 만나 결혼하였다. 결혼 한지 10년이 지나도 자녀가 없다 부모는 목회를 그만 두고 소실이라도 얻어서 아들을 낳고 대를 이으라고 했다. 보모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고 그렇다고 따를 수도 없었던 이강산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이강산은 아들을 낳았고 그 뒤로 두 딸을 더 낳았다.
1928년 1월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해주지방의 백천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1931년 한국감리교회 제1회 중부 서부 동부 연합연회에서 양주삼 총리사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1929년에 황해도 백천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한 후 1939년 옹진교회에서 목회할 때 해주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1941년 황해교구장 겸 조선 감리교단 재무국장을 맡았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서울 한성교회를 개척하였다. 1953년부터 충남 갈산교회와 삽교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충서지방, 예산지방에서 13년간 감리사로 일하였다. 1967년 3월 12일 제14회 남부연회에서 연회장에 당선되어 2년간 활동하였다. 1970년 자원 은퇴하여 천안 에베소교회를 개척 시무하면서 천안시내 신방교회, 신부동교회, 남산교회를 개척하여 왕성한 목회활동을 펼쳤다. 이강산은 부흥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해주교회에서 개최되었던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에서 성령을 체험했다. 이후부터 1990년 별세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부흥사로 한국교회에 많은 공을 남겼다.
이강산 연회장은 제14회 남부연회(1968년 3월 12일~15일, 대전제일교회 개최), 제15회 남부연회(1969년 3월 5일~7일, 대전제일교회 개최)를 인도하였다. 남부연회는 이강산 연회장 이후에 제15회 남부연회에서 김영배 목사를 제2대 연회장으로 선출하여 제16회 남부연회(1970년 3월 18일~20일, 대전제일교회 개최), 제17회 남부연회(1971년 3월 10일~12일, 대전제일교회 개최)를 맡기었다.
한편 중부연회장 김광우 목사는 1968년 4월에 모이는 미국 감리교 4년 총회를 기하여 뉴욕 노턴 연회 감독의 초청을 받고 미국에 갔다. 귀국 후 김광우 목사는 교역자 기도회 등 연회 행사를 은혜롭게 마친 10월 4일에 돌연 중부연회장 직을 사임하였다. 변홍규 감독은 그 달 29일 중부연회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여 김광우 목사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그 후임으로 정등운 목사를 선출했다.갑작스런 사직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임인사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정치서클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1968년 10월말 정등운 목사가 제2대 중부연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자신은 부족한 사람이니 연회 실행위원들의 협조를 부탁하는 인사말을 했다. 전임자 김광우 목사의 임기를 채우고 정등운 목사는 1969년 3월 19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28회 중부연회에서 재차 선임되어 제29회 중부연회(1970년 3월 11일~13일, 정동제일교회 개최)까지 연회장으로 연회를 이끌었다. 그뿐 아니라 정등운 연회장은 1969년 임기 1년을 남긴 채 정년 은퇴한 변홍규 감독의 후임 감독으로 선택되어 연회장과 감독의 중임(重任)을 보람 있게 잘 마쳐 훌륭한 지도자 상을 보여 주었다.
정등운(鄭登雲) 목사는 1901년 10월 26일에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상룡리에서 출생하였다. 교동교회 권신일 전도사가 1908년에 설립하고 1912년에 교동읍 초기 지도자 방족신이 교장으로 있던 교동 사립동화(東化)학교를 1915년에 졸업한 후 1919년 서울경신학교, 1922년 피어선 성서학원, 1928년 일본 고베 간사이(關西)학원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 파송을 받아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전도사로 2년 간 봉직하였으며 1931년에 귀국하여 대부교회, 1932년 양덕원교회, 1933년 화도교회, 1934년 강화읍교회에서 목회하던 중 1937년 4월 2일 개성 북부예배당에서 개최된 제6회 중부연회에서 양주삼 총리사의 집례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2년부터 1955년까지 수원종로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는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정춘수 목사의 혁신교단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교무국장 직책을 맡아 정춘수의 혁신교단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 조선 기독교남부대회 부서기로 일했다. 1959년~1960년에 율목교회, 1963년!~1972년 서울 만리현교회를 담임했다. 정등운 목사는 목회 이외에도 1954년 서울신문사 사장, 1968년 중부연회장, 1970년 감독서리를 역임하고 1972년 정년 은퇴하였다.
정등운 목사는 연회장 시절 제28회 중부연회(1969년 3월 19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29회 중부연회(1970년 3월 11일~13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30회 중부연회(1971년 3월 11일~13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감독서리에 당선된 후에 제11회 총회(1970년 10월 20일~25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주재하였다.
제1대 남부연회장 이강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