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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춤추는 사회주의
김창진 外, 가을의 아침 2017.
쿠바 아바나광장의 ‘춤추는 사회주의’
아바나는 광장의 도시다. 쿠바의 역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광장이다. 광장 곳곳에는 쿠바인들의 삶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있다. 광장의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나올 때까지 쿠바인들에게는 일상이지만 외방인들에게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아바나 혁명광장과 춤추는 사회주의
아바나 신시가지의 베다도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on은 쿠반, 즉 쿠바인들의 현대사를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광장이다. 쿠바의 혁명광장은 아바나 옛 시가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식민광장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물론 옛날 원주민의 춤추는 마을 광장이 복원될 수 있다면 그 역시 오늘날 춤추는 쿠바의 사회주의를 좀 더 다양하게 표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쿠바의 혁명광장은 원주민과 흑인노예, 그리고 이주민들의 춤을 통해 현대사에서 되살아난, 쿠바의 대표적인 광장으로 남아 있다.
혁명광장은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수많은 혁명 시위와 퍼레이드가 열린 곳이기 때문에 대외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피델 카스트로가 매년 5월 1일이나 7월 26일의 기념일에 100만명이 넘는 관중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은 쿠바의 또 다른 상징이 되었다. 원래 이곳은 스페인에 저항한 19세기 쿠바의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Jose Marti, 1853~1895)의 기념비가 있던 시민광장이었지만 1959년 혁명 이후 혁명광장으로 확장된 것이다.
호세 마르티의 동상은 혁명광장의 중앙에 위치하지만, 쿠바전역에 걸쳐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보다 더 많이 설치되어 있다. 혁명광장에 109m 높이로 우뚝 솟아있는 기념탑과 그 앞에 세워진 18m의 거대한 호세 마르티 동상 역시 쿠바 역사에서 그의 위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쿠바의 독립은 콜럼버스 이후 스페인제국으로부터 벗어난 역사적인 독립이면서 동시에 쿠바 주민의 자유를 향한 염원의 상징이기 때문에 호세 마르티를 그렇게 찬양하는 것이리라. 물론 1898년의 독립과 이후 미국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혁명 역시 험난했지만 이전에 호세 마르티가 존재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했다는 인식이 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외세의 억압으로부터 쿠바의 해방은 이미 스페인의 원주민 말살 시기부터 싹트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본격적인 쿠바 흑인해방운동은 이미 17~18세기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흑인들의 거듭된 반란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의 탄압은 가혹했다. 또한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운동은 1810년경부터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마르틴 등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었고 그 영향을 받은 쿠바의 독립운동은 19세기를 통해 지속되었다. 그 상징이 쿠바의 국기에 잘 나타나 있다. 쿠바의 국기는 1850년경부터 사용되었으며 독립운동의 순수함을 흰 색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자유와 평등, 박애 정신을 삼각형으로 그려 넣었고 그것을 위해 흘린 붉은 피를 빨간색, 그들의 염원인 독립을 별로 표현하였다. 1868~1878년의 10년 전쟁을 거치면서 세스페데스의 공화정권이 수립되어 쿠바 독립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듯 하였으나 완성되지 못하고, 쿠바혁명당을 결성한 호세 마르티를 중심으로 1895년 제2차 독립전쟁이 벌어지면서 1898년 쿠바의 독립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시민광장의 상징물인 호세 마르티는 민족주의 혁명가이자 시인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895년 독립전쟁에서 죽었으나 그의 시에서 따온 ‘관타나메라Guantanamera’의 선율은 쿠바인들의 마음속에 마치 우리의 아리랑처럼 되살아났다. 그의 비타협적 독립정신은 1898년 쿠바의 독립에 이르는 400여 년간의 식민통치를 종식시킨 상징으로 남아있으며, 원주민과 크리올, 뮬라토, 흑인들에게 자유를 선사한 시인이며 민족주의자였기에 쿠바를 열광시키는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쿠바의 시민광장이 혁명광장으로 확대되게 된 계기는 아마 이러한 쿠바의 자기 정체성 확립과 독립정신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광장에 들어서면 혁명가들이 호세 마르티를 중심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으며 호세 마르티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체 게바라와 시엔푸에고스가 그들이다. 7만 2천㎡에 달하는 넓은 혁명광장의 남쪽 내무부 건물에는 체 게바라의 얼굴 초상이 커다란 철근 부조물로 설치되어 있다. 초상화 아래에는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toria Siempre’라는 체 게바라의 염원을 새겨 넣어 대대로 기억하도록 하고 있다. 오른쪽의 정보통신부 건물에는 쿠바혁명의 또 다른 영웅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얼굴 조각상이 만들어져 있다. 그 밑에는 ‘잘하고 있어 피델Vas Bien Fidel’이라는 인사말이 적혀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혁명광장 주변에는 1950년대 미국의 올드카들이 줄지어 서 있다. 1959년 혁명 전에 운행되던 승용차들이지만 근래 쿠바가 개발한 기발한 관광 상품의 하나로 다시 등장했다. 올드카만을 수리하여 매매하는 사업체도 있다기에 방문하여 그들의 손기술을 확인하였는데, 가히 놀랄만한 수준이었다. 소박한 작업장에서 쿠바 기술자들이 모든 부품을 망치 하나로 두드려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올드카 관광은 미국의 끈질긴 경제봉쇄를 겪으면서 ‘시간이 멈춘 도시’ 아바나의 상징이 되었다. 혁명광장과 쿠바의 올드카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이 올드카를 타고 혁명광장에 들렀다 파도가 넘실대는 말레꽁 해변을 달려 아바나 시내 중심지에 내리는 코스이기 때문이다. 1959년 혁명 이후 미국이 남기고 간 유산이자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진한 매연을 뿜으며 아바나 시내를 당당하게 활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쿠바광장의 또 다른 상징이 되고 있다.
아바나의 혁명박물관
방문객들은 ‘혁명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출구 쪽에서 쿠바 사회주의를 지탱하는 그들만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우스꽝스러운 풍자화를 만나게 된다. 쿠바의 혁명을 ‘성공하게 만든’ 미국의 꼭두각시 독재자 바티스타, 여전히 쿠바의 혁명을 ‘강하게 추진하게 해준’ 바보 레이건, 21세기 들어서도 쿠바의 혁명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준’ 부시 대통령 부자에게 고마운 인사를 전하는 풍자화다. 그들 ‘덕분에’ 쿠바의 해방과 혁명이 지속되고 지금까지 쿠바가 쿠바답게 이어지고 있다고 특별히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아바나의 사회주의 역사는 혁명박물관에 잘 전시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조각상이 호세 마르티이고, 2층으로 올라가면서 세 명의 인물 조각상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이다. 쿠바혁명의 주역인 이들은 이제 모두 세상을 떠났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의과대학을 다니던 청년으로 남미 여행 중 라틴아메리카의 가난과 고통을 체험하고 1956년 혁명군에 들어선 인물로 쿠바 혁명의 정신적 지도자로 남아 있다. 이후 볼리비아 무장혁명에 나섰다가 살해되어 쿠바 중부의 산타클라라에 묻혔지만, 잘생긴 그의 미소는 아직도 쿠바의 엽서에 등장하는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 이들이 만든 혁명광장은 춤추는 사회주의 광장이라고 할 수 있다.
쿠바혁명을 보여주는 영상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이 농촌혁명을 이끌면서 마을사람들과 춤으로 소통하는 장면이다. 그들은 산악지역에서 의료와 보건, 교육을 통해 근거지를 확보하면서 춤으로 쿠바 농민들에게 다가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지금도 춤을 추고 있다. 춤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2016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피델 카스트로는 게바라와 함께 쿠바의 혁명과 미국으로부터 자유를 이끌어온 인물이지만, 이제는 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 쿠바의 미래를 보여줘야 하는 과제를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혁명광장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콜럼버스의 쿠바 섬 정복과 아바나광장
그렇다면 우리는 아바나 광장에 박힌 시간과 공간을 어디에서부터 찾아보아야 할까? 1492년 콜럼버스는 처음 쿠바 섬에 도착하여 순진한 원주민들의 마을광장에 초대되었지만, 그에게는 원주민들이 알지 못했던 다른 목적이 있었다. 콜럼버스는 이 아름다운 섬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는 1492년 에스파냐의 가톨릭 통합국가를 완성한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국왕의 대리인으로서 ‘신세계’에서 에스파냐의 가톨릭 제국 건설의 임무를 맡은 대리인이었다. 즉 에스파냐 본국에서 진행된 이슬람과 유대교 축출과 동시에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장악하고 있던 오스만제국을 거치지 않고 아시아에서 향신료와 비단, 금은을 구할 수 있는 인도 항로를 찾는 것이 그의 주목적이었다. 콜럼버스의 [항해록]에는 포르투갈인들이 항해했던 길과는 거꾸로 서쪽으로 돌아 여왕이 바라던 인도에 도착했다고 보고되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 밟은 땅을 죽을 때까지 인도라고 믿었고, 또한 원주민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킬 수 있다는 점과 진귀한 보물이 가득하다는 내용으로 여왕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쿠바 원주민들의 문화는 콜럼버스가 도착한 후 100여 년 만에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침략한 후 아바나의 옛 광장은 에스파냐 본토 광장의 축소판이면서 동시에 천년왕국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공간으로 식민화되어 갔다. 아르미스 광장과 카테드럴 광장, 산프란시스코 광장, 크리스토 광장, 비에하 광장과 그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톨릭광장이 그것이다.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은 아프리카 흑인들의 싼테리아 신앙이 가톨릭 문화와 결합되면서 새로운 쿠바의 문화로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쿠바 원주민과 에스파냐 정복자들의 이주, 그리고 아프리카 노예들의 혼혈과 혼종(Hybrid culture) 문화가 그것이다.
189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쿠바의 영웅 호세 마르티와 그것을 기념하던 백인과 흑인, 그리고 그들의 혼혈 뮬라토에 의해 시민광장을 각게 되었다는 점은 쿠바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또한 1959년 그들은 자유와 평등의 광장을 건설하게 되었는데, 이는 스페인 본토 식민지로서의 차별과 미국 자본주의에로의 종속과정으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하는 혁명광장의 건설이었다.
1492년 이후 1959년 혁명에 이르는 과정의 쿠바는 야만과 문명의 갈림길에서 욕망의 실험장이 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쿠바 혁명을 통해 쿠바의, 쿠바에 의한, 쿠바를 위한 현대사 공간으로 혁명광장을 갖게 되었지만 쿠바인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미래의 광장을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까 하는 과제였다. 식민성과 근대성, 그리고 혼종성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광장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쿠바인의 역사적 정체성과 관련하여 쿠바 사회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쿠춤사82-92)
아바나광장의 쿠바, 쿠바인, 쿠바문화
아바나의 광장들을 돌아보면서 들었던 첫 번째 “과연 쿠바인은 누구일까?”하는 것이다. 그들의 문화정체성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의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쿠바의 문화는 본래 그 땅에서 살았던 원주민과 스페인 정복자와 이주민, 아프리카 흑인노예, 중국인 등의 이민자에 의해 세계 전 대륙의 이주 문화가 겹치면서−혼혈과 혼종−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설명이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쿠바인들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라는 궁금증도 생긴다. 그들은 원주민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스페인 정복자들의 400여년 지배는 쿠바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나? 그리고 이런 ‘식민지 근대’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는 무엇을 의미할까, 라는 질문이 뒤따르게 된다. 쿠바에서 원주민의 삶은 거의 사라졌고 유럽의 이식문화와 아프리카의 토속문화, 그리고 이들 간의 다양한 혼혈(크리올, 메스티조, 뮬라토, 삼보 등) 문화가 뒤섞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쿠바의 문화를 혼혈, 혼종 문화로 설명하는 방법론도 여전히 무언가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개운치 않다.
쿠바의 자유는 1959년 쿠바의 독립과 혁명을 부르짖었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혁명적으로 재탄생되었다. 나아가 그들이 안고 있었던 인종적·계급적 차별을 청산하고 새롭게 만들어낸 사회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과거의 혼혈과 혼종문화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미래의 쿠바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정해질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때마다 멈추어 그것을 되묻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될 수 있다면, 과거와 현재의 질곡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안이 좀 더 쉽게 찾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쿠바의 이같은 의문을 한 마디로 풀어주는 단서가 ‘춤추는 사회주의’가 아닐까 한다. 쿠바의 광장과 뒷골목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쿠바인들의 살사, 룸바, 차차차, 콩가 등의 춤이다. 그들은 춤추며 말한다. 그들이 만들어가는 사회주의는 춤추는 사회주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군사적으로 경직된 사회주의가 아니고 ‘쿠바식 사회주의’라는 뜻과 함께 즐겁게 춤추는 혼종 사회주의라는 것을 의미한다.94
쿠바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외부인들의 관심은 쿠바혁명 60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 쿠바에 쏠려 있다. 그들은 과연 어떻게 쿠바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을까? 살사와 차차차에 몸을 맡기고 춤추는 사회주의 쿠바에서 사람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 쿠바를 가장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용어가 ‘춤추는 사회주의’라는 표현 방식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쿠바의 광장들, 또는 광장들의 쿠바, 그 지난날과 오늘의 풍경을 둘러본다.
원주민 타이노족 마을광장과 카리브문화
쿠바섬 원주민 타이노족과 콜럼버스의 만남은 극적인 것이었다. 콜럼버스의 목적은 황금과 기독교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고 도착하는 곳마다 십자가를 세웠다. 스페인의 관리와 황금에 현혹된 무리, 사면된 죄수들로 구성된 이들 탐욕스런 유럽인들은 황금의 신화(금·은 및 사탕수수, 향신료 등)에 사로잡혀 총칼과 전염병으로 무장한 채 수탈의 서막을 올리게 된다. 16세기 초 쿠바 전 지역이 정복되고 식민체제가 확립되면서 원주민들은 사금 채취와 농장 노동 등으로 혹사당했으며, 반란과 악성 유행병 등으로 거의 전멸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초창기 타이노족의 문화에 가장 공감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한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신부는 <인디언 파괴에 관한 짧은 보고서>를 통해 원주민에 대한 가혹한 학살을 멈추지 않으면 스페인은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하였던 인물이다. 그의 노력 덕분에 원주민에 대한 스페인정복자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령이 제정되었지만, 그것도 대다수 원주민이 절멸되어가던 것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라스카사스 신부에 따르면, 타이노족 추장은 수천 명 단위의 정착촌을 다스리며, 중앙광장에는 대개 열두어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의 추장까지 참여하여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이들 공동체 생활에서 추장은 마을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사회적 의식을 집행하였으며 두호Duho라는 의식용 의자에 앉아 초자연적 조상신 세미Cemi의 세계를 맞아들인다. 또한 중요한 손님들에게도 예우 차원에서 두호를 내주는데, 1천여 명의 주민이 사는 마을에 도착하여 커다란 환영을 받았던 콜럼버스도 그 영예를 누린 존재로 남아있다.
쿠바의 첫 수도였던 바라코아Baracoa에는 한편에 콜럼버스의 반신상과 커다란 십자가가 남아있고, 성당 앞에는 그들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원주민 추장 아투웨이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그는 스페인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라고 하자, “스페인 사람들이 가는 천당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기꺼이 화형을 택했다고 한다. 그는 원주민들의 자유와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울림으로 남아있다.
원주민 문화의 또 다른 이면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아바나 옛 도심의 산 프란시스코 광장Plaza De San Francisco이다. 이 성당은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본부로서 아메리카 미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앞에는 주니페로 세라 수도사(1713~1784)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캘리포니아 주에 최초의 가톨릭 교구를 세웠을 뿐 아니라 원주민의 교회와 선교수도원 건립에 헌신한 것을 기념하여 조그만 원주민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형상으로 만들어 기념한 것이다.
현재 아바나에 남아있는 원주민 이미지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센트럴 아바나의 혁명박물관 앞까지 가야 한다. 바다가 쪽으로 조그마한 공원 안에 흰 색으로 세워놓은 원주민 남녀의 동상이 그것인데, 이상하게 그들의 피부색을 흰 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의미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원주민의 존재에 대한 쿠바인들의 생각을 전해주는 것 같다. 그것은 흰 빛으로 소멸해 버린 원주민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그들을 추모하는 뜻으로도 보인다. 쿠바 남쪽 피그만에서 가까운 섬에 타이노족의 거주지를 만들어놓고 그들의 문화를 복원하려는 시도도 있지만 관광 상품으로 개발된 것이라고 한다.
타이노족은 인근 아이티나 도미니크공화국에서 그 후예들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쿠바섬의 타이노족에 관한 기록은 비극적인 내용이 많다. 콜럼버스에 의해 스페인으로 끌려간 1,600명 정도의 노예에 관한 기록도 그 중의 하나이다. ‘최고의 남녀’ 550명을 노예로 보냈으며, 그 중 한 명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고 쿠바 전역에 알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타이노족은 콜럼버스에 의해 인디오로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아라와크족의 일족으로서 카리브해 인근에 거주하던 카리브족으로 통칭되는 존재이다. 이들은 매우 정직했고 자신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주던 사람들이었던 듯하다. 그들은 처음 보는 유럽인들에게 물과 음식을 가져다주며 “하늘에서 온 사람들을 보라”고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제 타이노족의 문화유산은 그들이 남기고 간 카누, 토바코(담배), 해먹, 바비큐, 허리케인 등의 단어를 통해 확인되는 정도이다.
다행스럽게도 타이노 축제를 복원한 연구에 의하면 부족민 전체가 모여 공동생산한 것을 나누고 기리는 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이는 원주민들의 집단적 단결력을 높이며 각자 화려한 치장을 통해 풍요를 기원하며 내일을 자축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흥겨운 음악에 맞춰 밤새도록 춤을 춘다는 것이다. 쿠바의 원주민의 춤도 현재의 춤추는 쿠바 사회주의를 만든 토대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식민광장과 가톨릭 혼종문화
스페인의 쿠바 경영은 아바나를 최고의 전략적 중심 항구로 만드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아바나의 요새화는 식민지 경영에서 최선의 선택이었고 이에 따라 아바나는 17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카리브해의 명실상부한 무역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같은 과정은 식민도시의 전형적인 탄생과정이었으며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를 잇는 삼각무역의 핵심도시로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바나 광장은 당시 스페인 지배층의 권위적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성당, 시청사, 귀족들의 저택과 성채로 둘러 쌓인 형태 그대로였지만 요새나 광장 등은 식민지 아바나에의 특성에 맞게 분산시켜 설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식민광장의 쿠바적 형태를 보여준다.
아바나는 스페인 무역의 전략적 중요성에 따라 1519년부터 현재의 아바나 항구를 새롭게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영국이나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후발 제국들은 교황의 묵인 하에 맺어진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동·서 신대륙 분할 협정인 토르데시아스 조약(1494년)을 인정하지 않고, 스페인 식민지 쿠바를 공격하였다. 스페인은 이들을 해적이라고 불렀고 카리브해의 섬을 중심으로 해적의 약탈을 막는 것 역시 아바나 경영의 핵심전략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1553년 쿠바 총독령을 아바나로 옮겨 설치하고 나아가 푸에르사 요새, 푼타 요새, 모로 요새 등을 세워 아바나를 무장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스페인 중개무역이 확대되면서 현재의 플로리다 지역과 과테말라, 푸에르토리코,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묶어 더욱 강화된 쿠바총독령으로 만들어 식민지를 확장하는 근거지로 만들어 갔다. 그 아바나는 신세계 무역의 중심지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바나는 스페인의 세비야를 연결하는 유일한 중심지로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삼각무역을 중개하게 되었고 나아가 아시아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활용되었다.(쿠춤사92-100)
아바나 아르미스광장과 카테드럴 광장의 역할
아르마스광장plaza de Armas, 군사광장은 카리브해에서 아바나 항구로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하며 올드 아바나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권력의 중심 광장이 되었다. 1519년 아바나 최초의 미사와 시의회 의회가 개최된 곳으로 야자나무로 둘러 쌓여 있으며 아바나 방어를 위한 군사 훈련이 시작된 곳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도시에서는 이같은 목적의 아르마스광장이 똑같은 이름으로 곳곳에 만들어져 있다. 아바나의 아르마스 광장으로 진입하는 해안가 입구에는 남북에 각각 푼타 요새와 모로 요새가 위치하고, 광장 옆에는 푸에르사 요새가 위치하고 있어 아바나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르마스 광장이야말로 식민지배의 중심축으로서 향후 아바나 도시건설의 핵심 역할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주변 건물들 역시 아바나의 식민지 기념물로 가득하다. 광장 앞 쪽에는 그리스신전을 축소한 형태의 건물이 세워져 있는데, 19세기 초 네오 클래식 건축양식의 엘 템플레테 신전 건물로서 1519년 최초의 미사와 시의회 회의 등을 묘사한 캔버스화와 콜럼버스 흉상을 함께 세워 아바나 도시의 의미를 보존하고자 하고 있다. 광장 서쪽에는 스페인 총독의 거처였던 카피타네스 헤네랄레스 궁전이 위치하고 있다. 쿠바 바로크 양식의 걸작품으로 꼽히며 정원 중앙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석상이 서 있으며, 현재는 도시박물관으로 개방하고 있다.
현재는 광장 정원 가운데에는 쿠바 독립 영웅 세스페데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광장 주변에는 중고 서점들이 가득하다. 군사광장은 문명의 유입 창구로서의 역할과 그로부터 자유를 되찾은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 기념품을 통해 그들만의 역사적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아르마스 광장 인근에 위치한 카데드랄광장(대성당광장)과 산 크리스토발 대성당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 바로크양식 건물로서 양쪽 두 개의 첨탑이 비대칭을 이루며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있다. 대성당에는 콜럼버스의 유해가 100년 이상 묻혀 있었다고도 한다. 콜럼버스의 관은 현재 스페인 세비야성당에 네 명의 왕들이 운구하는 형태로 스페인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콜럼버스가 원주민학살과 제국주의, 식민문화의 상징으로서 철거운동이 벌어지는 운명에 처한 것은 어찌 보면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인류의 미래지향적인 평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성당 광장으로 상징되는 스페인의 가톨릭 신앙은 쿠바 식민화의 또 다른 모습이다.
코르테즈의 아즈텍문명 정복(1519년)과 잉카제국 및 남미대륙 정복(1531~1536년), 플로리다 탐험(1538년)이 이루어지면서 스페인 식민제국의 영토는 카리브해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쿠바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가 되었으며 서인도제도로 가는 전초기지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스페인 왕실은 아메리카를 떠나 스페인으로 향하는 모든 배들은 아바나에 모여 스페인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대서양을 건너야만 한다는 플로타 칙령을 반포하였다. 게다가 신민지와 거래할 수 있는 유럽의 항구는 세비야 한 곳으로 제한했고 플로타의 출항도 1년에 두 번(4월, 8월)으로 제한함으로써 해적으로부터의 공격에 대응하는 전략을 통해 대서양 무역을 완벽하게 통제하려 하였다. 이같은 아바나무역은 원주민에게는 큰 상처로 남았지만 스페인에게는 10배 정도의 이익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광장과 요새에 새겨진 식민지 개발과 아프리카 흑인무역
아바나의 도시건설은 그들의 카리브해 지배를 위한 무역 중심지로 가닥이 잡혔지만 그들의 아바나 도시건설과 선박, 담배, 사탕수수 생산을 담당할 수 있는 노동력을 확보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쿠바의 원주민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아프리카 노예무역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남미에 진출한 다른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노예매매가 대안이었다. 이같은 과정에서 흑인노예가 수입되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혼종문화가 출현하게 되었다.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이 붐을 이룬 것은 1791년 아이티의 생도그맹(프랑스령 산토 도밍고)에서 일어난 흑인 혁명이 계기가 되었다. 아이티의 설탕생산은 유럽 소비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혁명을 계기로 유럽으로의 설탕유통이 중단되면서 그 중심이 쿠바로 이전된 것이다. 18세기 쿠바의 사탕수수 붐은 쿠바의 가장 중요한 부의 원천이 되었으며 이후 아프리카 노예 노동력이 집중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들어와 쿠바에 유입된 노예인구 기록은 전체 60만 가운데 멕시코 포토시의 은광이나 콜럼비아 카르카헤나의 금광 등으로 보내진 수를 제외하고 대강 30만 정도로 추정한다. 19세기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의 수는 100만을 훨씬 상회할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은 담배 및 사탕수수 재배의 모든 생산을 맡았지만 그 수익은 모두 스페인의 백인 정복자들 차지였다.
아르마스 광장 옆의 푸에르사 요새는 아바나의 삼각무역의 규모를 보여주기 위해 해양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에 전시된 아바나의 해양무역은 대서양과 카리브해를 주름잡던 스페인 무적함대의 위용이나 대서양을 횡단하던 갤리선 무역의 규모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100만 흑인노예에 관한 전시는 거의 없다. 영국 리버풀이나 이탈리아 제노바의 해양박물관 등의 노예무역 전시는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 형태로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노예무역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노예는 상품에 지나지 않았다. 노예 상인들은 최대한 노예를 많이 싣기 위해 족쇄를 채운 흑인들을 선창 바닥에 빼곡하게 쌓는 방식으로 3개월 이상 긴 항해를 강행했다. 다행히 살아서 도착하더라도 그들은 곧 사탕수수 농장에 즙을 짜는 인간기계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쿠바의 트리니다드 사탕수수 농장에 만들어진 45m에 달하는 노예감시탑은 1830년대 농장주와 노예 간의 긴박 관계를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쿠바 산악지역에는 노예 도망자들의 동굴유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를 찾았던 노예들의 흔적이다. 살아남은 흑인들은 자신들의 아프리카 선조들의 ‘싼테리아’ 신앙을 통해 영혼의 자유를 찾고 있었다. 그들의 신앙은 가톨릭문화와 결합되면서 자신들만의 성모마리아와 토속신을 모시는 형태로 나타났다. 춤 의식은 이들의 육체와 영혼을 달래주는 전통적인 의식으로 남아 있다. 아바나의 아멜 거리Callejon de Hamel에는 지금도 아프리카의 강렬한 색채의 벽화와 조형물, 토속신당을 통해 그들의 아프리카 문화상징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전통음악과 춤을 통해 새로운 마을광장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쿠바의 주민 구성과 혼종문화
아메리카의 비극적인 역사는 원주민들에게 인디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던 콜럼버스로부터 연유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백인들은 그들을 인디엔, 인디애너, 인디언 등으로 불렀다. 그리고 유럽인의 자손으로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태어난 혼혈인들을 크리올(크리오요)로 구분하여 백인이되 본토의 백인과도 차이를 두기 시작했다. 또한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언‧인디오와 혼혈), 뮬라토(흑인과 백인 또는 흑인과 인디언과의 혼혈), 삼보(흑인과 인디오의 혼혈) 등의 혼혈인 등의 구분을 통해 혼혈의 형태를 구분하였으며 쿠바의 경우에는 뮬라토를 중심으로 그들을 구분하고 있다. 인종차별 때문에 흑백문제에 대한 조사는 다소 예민한 문제이지만, 현재 백인 37%, 뮬라토가 51%, 흑인 11% 등으로 파악되고 있다.
쿠바의 경우 원주민과 흑인을 지배하던 백인이 식민지 사회에서 지배 집단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피부색에 따라 신분적 지배질서를 구축했던 것이다. 당연히 유럽출신 스페인 본토의 페난술라르가 가장 상위의 크리올이면서 식민정책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백인들 중에 중하위 크리올층으로 몰락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었고 이같은 차별은 뮬라토나 흑인들의 차별의식과 결합하여 좀 더 큰 사회문제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백인이면서 신대륙에서 태어난 것만으로 차별을 받게 되면서 크리올층에 스페인 본국에 대해 독립정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콜럼버스와 함께 도착한 가톨릭문화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현재 쿠바의 종교는 개신교나 아프리카의 산테리아 신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교의 형태로 발전하였고 그들은 그것을 사회주의 전통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주의 쿠바의 신앙은 다양한 주민 만큼 다양하게 혼종된 종교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들의 의례는 토속춤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양상도 보이고 있다. 쿠바인들의 춤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수용되고 있었고 혁명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108
춤추는 사회주의, 아바나 혁명광장의 미래를 기약하며
중세를 넘어 새로운 근현대 역사를 만들어온 역사 가운데 쿠바와 같이 극적인 유형이 또 있을까? 원주민의 절멸, 식민정복자의 400년 지배와 아프리카 흑인노예들의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혹사와 해방운동, 그리고 쿠바국기를 앞세운 백인들과의 독립운동을 통해 1898년 쿠바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이 그러하다. 또한 무적함대로 상징되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지 수 년 만에 다시 한 번 거대한 제국 미국의 고립정책에 포위된다. 이러한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난 계기가 1959년 쿠바의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에 의해 마련되었던 농촌혁명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쿠바의 역사가 정리된 것이 아바나 혁명광장의 현주소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서 자유 쿠바 만세Viva, Cuba Libre를 외치고 있다.108-109
쿠바인들은 쿠바의 역사를 통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삶에 대한 자존심 역시 아주 강하다. 체 게바라의 말처럼 영원히 승리하는 그날까지 그들은 사회주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미래를 만들어 갈 것 같다. 중국이나 북한, 베트남 등의 사회주의와 비교하는 경우도 있지만, 쿠바는 쿠바식이며 그들만의 춤추는 사회주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같은 쿠바의 광장문화는 쿠바에서만 확인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아닐까 생각한다.109
쿠바는 서두르지 않는 것 같다. 열대지방의 새벽은 다른 지역보다 짧다고 한다. 쿠바의 극적인 혁명 과정도 열대의 새벽처럼 짧았다. 1956년 12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 무장 게릴라 82명이 승선한 요트 ‘그란마Granma’호가 쿠바의 동남부에 도착해서 1959년 1월 아바나에 입성할 때까지 그들의 운명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쿠바혁명이 성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 사람은 거의 없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이다. 그러나 거짓말같이 그들의 혁명은 성공했고 2019년 쿠바 혁명 6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도 쿠바인들은 체게바라와 같은 턱수염을 기른다. 혁명이 완수되는 그날까지 턱수염을 기르자고 했던 혁명가들처럼... 그들은 짧은 새벽처럼 다가온 쿠바의 혁명을 조용히 지켜내고자 한다.109-110
쿠바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각자 살아온 방식만큼 다양한 것 같다. 쿠바를 들여다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 그리고 그들 동지들의 ‘혁명’을 통해 그들 문화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해명하고자 했는지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렇듯이 쿠바의 새벽처럼 성급하게 그들의 혁명을 바라본다. 쿠바는 뭐를 하고 있지? 쿠바의 시간은 왜 멈춰 있을까? 아바나의 구 시가지는 왜 폐허상태로 남아 있을까? 어떻게 복원하려고 하는 거지? 누구도 대답하기 힘든 이 같은 의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 데서 얻게 되었다.110
최근 한국을 방문한 쿠바 마탄차스대학 교수의 강연을 듣는 자리에서 떠오른 생각이 ‘춤추는 사회주의’ 쿠바라는 발상이다. 남북한의 대립적인 상황에서와 같은 대립적인 사회주의가 아니라 춤추며 즐기며 토론하는 사회주의라는 것이다. 그들 자신은 쿠바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춤추며 살고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대답하는 것은 의외였다. 쿠바 사회주의는 종교를 갖는 것을 막지 않으며, 85% 이상이 가톨릭과 개신교, 아프리카 싼테리아 토속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들은 시간만 나면 웃으며 즐기고 춤춘다. 그게 춤추는 사회주의일까? 그들은 그렇게 사회주의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110-111
쿠바를 ‘춤추는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의 쿠바와 미래의 쿠바를 설명하는 방법으로서 가장 알맞은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 자신은 자신의 역사를 ‘쿠바식’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름대로의 방법을 갖기를 원한다. 쿠바의 시간과 공간을 쿠바식으로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자부심 어린 방식의 표현이리라!111
그러나 스페인 식민지 400년 유산으로서의 식민지 광장과 그것을 일거에 극복한 획기적인 혁명광장의 건설을 통해 쿠바의 삶은 과연 ‘쿠바식’으로 불릴 만큼 행복해졌을까 하는 의문도 남는다. 아바나 중심지 일부는 거의 시간이 멈춰 있는 것처럼 스페인 시대의 건물들이 폐허로 남아 그들의 광장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바나 전체가 UNESCO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1982년이다. 그들은 아바나 광장을 역사보존과 개발의 두 길에서 고민하고 있다. 멈춰있는 것일까? 아니면 해결방안을 찾고 있는 중일까?111-112
쿠바와 쿠바인들의 행복지수가 세계 7위라는 사실은 우리를 또다시 놀라게 한다. 멈춘 듯한 시간과 시내의 폐허를 둘러본 사람들에게 이런 통계는 충격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쿠바인들은 멈춰있는 광장의 시공간 속에서 자신들의 행복을 춤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춤추는 쿠바의 모습일까?112
쿠바의 행복지수 7위라는 통계는 2009년 영국의 신경제재단(NEF)에서 조사한 순위이다. 삶의 만족도, 기대 수명, 생태발자국 등을 기준으로 조사한 결과로서 GDP(국내총생산) 등을 제외한 행복순위이다. 이런 통계는 쿠바의 삶이 나눠 쓰고 함께 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갖고 싶은 것을 모두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들고 낡은 것들을 고치고 또 고쳐서 재활용한다.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에 익숙한 우리들은 현재 쿠바의 물질적 빈곤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쿠바식 사회주의가 누리고 있는 그들의 행복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2017년 1월에 들른 아바나는 이같은 물질적 빈곤을 해결하는 방안의 하나로서 다양한 협동조합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도시의 일상과는 극적으로 대조적인 바라데로라는 관광경제특구 개방과 함께 일상의 삶을 혁신하는 방안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112-113
미래의 쿠바 광장은 어떻게 만들어 가야만 할까? 그것은 아마도 지금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던 새로운 광장이어야만 할 것이다. 쿠바의 지속가능한 행복을 담아낼 수 있는 광장이면 더 좋겠다. 그것은 미국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대립하는 사회주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창의적 공간을 만들어 돌파하는 방법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협동조합운동에서 보이는 것처럼 새로운 조합을 통해 광장을 개방하고 넓히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그곳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특구와 시장을 확대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시장이며 동시에 쿠바 식으로 운영하는 공간, 그들은 쿠바의 굴곡진 역사를 살아오는 동안 인간의 광기어린 욕망의 식민광장에서 자유를 쟁취했다. 2019년 혁명 60주년을 맞는 쿠바는 그들만의 창조적인 광장 건설을 통해 또 한 번의 혁명을 이뤄내기를 기대해 본다.113(최윤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