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고라 자손의 마스길, 교훈입니다. 그리고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표제로 되어 있습니다. 찬송을 담당하고 성전의 문을 지키던 역할을 하던 자손입니다. 오늘 시편은 하나님께 대한 강한 항의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신실한 백성과 지도자나 인도자 혹은 왕이 하나님께 신실한 그들에게 하나님도 신실하게 응답해 달라는 어쩌면 당돌한 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이 시편은 ‘우리’라고 하면서 공동체가 먼저 말을 합니다. 이 공동체는 확실히 믿음의 공동체 입니다. 이들은 이전부터 그들의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 할아버지, 증조 할머니로부터 옛날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백성들을 돌보셨는지 듣고 자란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예전에 하나님께서 그조상들에게 가나안 땅의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 약속을 땅을 주시고 그곳에 뿌리를 내리게 하셨다는 것을 늘 듣고 자랐습니다. 또 그들의 칼과 힘이 아니라 주님의 오른 손과 능력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바르게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을 들어서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공동체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에게 그렇게 하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9장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면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 것을 배경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으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에 그들을 구원하시고 보물로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언약의 말씀을 조상들로 부터 들은 것입니다.
이어서 4절에서는 ‘나’로 주어가 바뀝니다. 앞에서는 ‘우리’라고 해서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구원의 역사를 전해 들었다면, 이제 인도자, 혹은 지도자나 왕의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조상들에게 베푸셨던 것과 같이 자기와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부르면서 하나님이 구원과 능력의 근원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다시 공동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주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기만 하면 왕과 백성들 모두가 승리를 얻고 그들을 치는 자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이길 것이라고 합니다. 왕과 백성들이 모두 승리의 비결이 자신들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과믿음으로 무장한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믿음과는 반대로 상황은 흘려갑니다. 9절을 보시면 주께서 그들을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군대와 함께 나가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패배의 맛을 보게 하시고, 대적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빼앗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9절에서 14절을보시면 ‘주께서’ 백성을 버리시고, ‘주께서’ 잡아 먹힐 양처럼 원수들에게 넘기고, ‘주께서’ 여러 민족 중에 흩으셨고, ‘주께서' 헐값으로 파시고, ‘주께서’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고 비웃음 거리가 되게 하셨고, ‘주께서’ 속담 거리,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셔서 능욕과 수치가 늘 지도자와 왕에게 있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믿음의 공동체와 지도자는 도저히 이런 상황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시면 그들은 한 순간도 하나님은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믿음에서 뒷걸음 쳐 물러난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뒤로 물러 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9절을 보시면 그들을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사망의 그늘로 덮었다고 합니다. 또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잊은 적도 없고, 다른 이방 신에게 손을 들고 기도한 적도 없습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하나님은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아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신실하게 행하고, 바르게 하나님을 섬겼는데, 지금 상황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승냥이에게 먹히는 그런양과 같은 상황에 넣으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공동체가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고 도살한양같이 여김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신실한 자를 지키고 보호하시고, 보물과 같이 여겨 주신다고 하셨는데, 믿음의 공동체가 겪게 되는 현실은 어떻습니까? 완전히 그 반대입니다. 고난과 어려움과 역경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동체가 하나님께 어떻게 호소합니까? 오늘 시편의 마지막 네 구절에서 공동체와 시인은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잠에서 깨십시오. 일어나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시라고 합니다. 주의 얼굴 빛을 가리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얼굴 빛을 비추신다는 것은 완전한 보호와 인도와 하나님의 관심을 뜻합니다. 반대로 가린다는 것은 무관심과 버림받음을 뜻합니다. 그렇게 하시지 말라고 합니다. 당신의 백성의 고통과 압제를 잊지 말고 도와 달라고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와 시인의 영혼은 흙 속에 완전히 매장되어 있는 것 같고 육체는먼지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응답하실 차례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공동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아이러니와 같은 상황 속에서 끝까지 하나님께 신실합니다. 끝까지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은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인지 그렇게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이제 잠에서 깨시면 그들을 도우실것이라는 변함 없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신실하게 응답하시길 바라며 일어나 도우시라고 호소합니다. 그 호소의 근거로 무엇을 제시하는 지 보십시오. 26절에 보면,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그렇게 해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인자하심’이 또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함을 표현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실패할 수 없는 사랑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경건하게 살아가는데,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치고, 하나님께서 잘도와 주시지도 않는 것 같은 그럴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의로운 백성이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봅니다. 대표적으로 욥과 예수님입니다. 욥과 예수님은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치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승냥이에게 잡혀 먹을 양처럼 위태로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버림 바 되셨지만 신실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마침내 부활로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참으로 신실한자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헤세드는 결국 그의 백성을 돌보시고, 회복시킵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백성은 하나님께 호소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당하게 벌을 받는다고 느낄 때에도, 하나님이 버린 것 같은 때 우리들은 우리의 신실함을 점검하고 하나님께설명을 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도 안되지만, 수동적으로 그저 그런 상황을 지나쳐도 안됩니다.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왜 이렇게 하시냐고 부르짖고,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약속하지 않으셨냐고 따지기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끝내 응답하시고, 우리가 신실했음에 ‘그래, 다 알고있었다고. 잘 참았다고, 내가 다시 구원을 베풀고 회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분, 헤세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뜻 가운데 때로 침묵하시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때로 우리를 잠시 버려 두시지만, 영원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 교회에도 최근에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아프고, 사고도 나고, 가족들이 아프고 이런 어려움들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로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하나님께 신실한 믿음의 공동체도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반응해 주시고 하나님께 여전히 소망을 두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 입니다.
삶의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을 지나갈 때, 부당하게 하나님께서 벌하신다고 느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다면, 주님도 반드시 신실하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고 고통과 의문의 터널을 지날 때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일어나 도우실 것임을 끝까지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