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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베르니
모네는 지베르니를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라 불렀다. 이곳의 마을, 집, 정원에 한 발자국 발을 내 딛으면 인상파의 대가 모네의 가슴에 영감을 불어넣은 그 특별한 느낌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모네는 이 곳에서 건초더미, 포풀러, 수련 연작을 그렸다. 캔버스 위에서 색채와 빛이 춤을 추는듯한 유화, 250점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태양이 어느 위치에 떠 있던, 주변에 사람이 있든 없든, 나무다리를 천천히 거닐며 수련이 만발한 연못을 바라보면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게 된다. 뛸르리 정원, 해돋이‘ 북부 ’르브아르‘에서 그린 일출, ’우와! 넋을 놓고 잠시 쳐다보게 만들었다.
프랑스 파리의 모네 미술관=마르모탕
블로뉴 숲에 위치한, 파리의 부촌이라고 할 수 있는 16구 지역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건물 하나하나가 고급스러운 마을에 앞쪽엔 Jardin du Ranelagh 공원이 있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1층은 큰 응접실, 모네 연대기가 있고, 수련부터 모네가 그린 파리의 모습까지, ‘흩날리는 증기가 인상적인 ’생 라자르 역“ 2층은 인상주의 작품들, 또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국립 미술관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 센터가 시기 구분에 따라 소장품을 나누어 운영하고 있을뿐더러 프랑스 주요 도시에 지방 국립 미술관들이 Muswws des Beaux-Arts라는 이름으로 운영이 되고 있다. 이들 지방 미술관에는 지방 예산뿐 아니라 국가 예산으로 구입된 미술품이 나누어지고 오르세, 루브르, 퐁피두 등에서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들은 장기 대여의 형태로 나누어 전시된다. 그리고 이들 미술관 이외에 몇 개의 개인의 이름을 딴 미술관들이 있다. 예를 들어 파리만 해도 피카소, 로댕, 달리, 귀스타브 코로등 이다. 이런 미술관들은 공공 미술관이면서도 화가들이나 미술품 수집가들의 기증을 통해 설립이 되고 운영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에 가장 인기 있는 화가인 모네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없을 수 없다. 더군다나 모네의 경우 성년까지 살아있는 아들이 하나뿐이고 그 아들은 후손이 없이 죽었기에 더욱 그럴 가능성이 크다. 모네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두 개나 있다. 하나는 지베르니의 저택이 그것이고 또 하나는 파리에 있는 마르모탕이 모네의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은 처음엔 마르모탕 미술관 이었다. ’쥘 마르모탕‘이라는 사람이 파리 교외의 대표적인 공원이었던 불로뉴 숲에 있는 발마공작의 사냥터 별장을 사들였고, 그의 아들 ’폴 마르모탕‘이 아버지의 미술품 컬렉션을 확장하여 이 별장 건물과 함께 컬렉션 전부를 파리 아카데미에 기증하면서 마르모탕 미술관이 개관했다. 1934년 그런데 거기에 세 번의 큰 기증이 있었고, 비토린 드 몽시라는 사람이 인상파 작품 컬렉션을 기증. 모네의 둘째 아들이자 유일한 상속자였던 화가 ’미셀 모네‘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전체 컬렉션을 이 미술관에 기증. 넬리 뒤엠이란 화가는 후기 인상파 작품 기증, 모네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장한 미술관이 되었다.
르누아르는 젊은 시절부터 모네와 무척 친한 친구, 마네는 인상파의 큰 형님일 뿐 아니라 ’베르트 모르조‘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단다. 여류 작가라 그런지 그림에서 따뜻함과 섬세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베르트 모리조는 2층 여류 인상파 화가인 그녀의 특별관이 자리한다. 고풍스러운 샹델리에와 유럽 스타일의 인테리어, 돔 형태의 천장이라던가 높고 길쭉한 창문 그리고 촛대 장식을 보면 왠지 유럽에 온 것 같은 착각이 일게한다. 계단을 올라가 1층 전시실, 모네의 ’해돋이‘라는 작품은 인상파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만든 그 유명한 작품이기 때문, 마르모땅 모네 미술관은 작지만 인상주의 작품들을 꾹꿀 눌러 담겨져 있는 공간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미술관은 10시 이후 오픈),
빛의 사냥꾼= 끌로드 모네,
오랑주리는 한때 수련 연작만을 위한 전용 미술관이었고, 그때도 ’끌로드 모네‘ 미술관이었다. 지금도 미술관의 절반은 여전히 모네의 수련 연작을 위한 전시 공간이다. 모네의 인기도 여전하고 몇 개나 되는 자신의 미술관을 가진 화가이다. 르누아르를 비롯 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었다. , 아주 다양한 모네의 수련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빠른 붓터치로 그려낸 수련은 신 인상주의 화가들(조루주, 쇠라, 폴시냐ㄱ, 반고흐, 반 리셀베르그)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지나치게 빛에 얽메인 나머지 형태를 확산시킨다는 점에 불만을 느껴 색채를 팔래트 위에서 혼합하지 않고 캔버스에 다른 색의 점을 찍어 하나의 혼합된 색상을 나타내는 마치 지금의 픽셀 방식과 비슷하게 처리했다. 붓을 양손에 잡고 작은 북을 치듯이 빠르게 터치한 것처럼 보였다. 오랑주리의 수련 작품이 크기로 압도한다면 이곳 수련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묘사되어 그림을 하는 나로써는 많은 공부가 되었고, 여러 가지 작품을 감상하게 하였다.
오랑주리
170년 전 지어진 오랑주리 미술관은 뛸르히 가든과 콩코드 광장 중간에 위치하는 데 , 오랑주리는 ’오랜지 온실’ 이란 뜻으로 오랜지 나무를 키우기 위한 온실로 나폴레옹 3세가 만들었다가 이후 모네가 수련 연작을 기증하면서 ,여기에 인공의 빛이 아닌 자연의 빛으로 관람이 가능한 곳, 흰 벽일 것, 원형 공간일 것, 3가지 조건에 맞게 개조한 미술관이다. 모네의 바램대로 딱 알맞은 은은한 채광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고, 내부로 빛이 들어오는 모습부터가 그림이었다. 미술관은 오전 10시 오픈, 오랑주리엔 수련 작품만 250여 점, 말이 필요 없는 모네의 수련 연작, 같은 장소지만 흘러가는 구름 모양이 다르고, 떠 있는 수련이 다 다르며,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매달 관찰해 화폭에 담았다. 이때 그림은 모네가 시력을 점점 잃을 때 그린 그림이다. 비오거나 구름으로 빛이 적은 날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 진다. 가운데 의자가 놓여있고, 네 개의 기다란 작품이 네 면으로 동그랗게 둘러싸여 있다. 무심한 듯 세심한 붓 터치는 사람들의 눈낄과 발길을 사로 잡고 대부분의 작품 앞에 오래 머무르게 한다. 모네 연대기가 있고, 수련부터 모네가 그린 파리의 모습까지, 흩날리는 증기가 인상적인 ‘생나자르 역’ 공간과 은은한 자연광이 주는 오붓함, 모네의 수련 빛 아니라 다른 작품들 또한 전시되어 있다, 영원한 뮤즈 카미유와의 결혼 생활과 죽음부터 백내장으로 눈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던 모네의 이야기는 그의 그림처럼 잔잔하고 따뜻하면서도 슬프다.
피카소 미술관
바로크 양식의 우아함과 화려함이 깃든 건축물로 17세기에 지어진 호텔 살레 저택이었다고 한다. 세계에 널려있는 피카소 미술관 중 대표작이 가장 많은 곳이라기에 기대감에 가슴이 한껏 부풀었다. 피카소는 스페인 말라가 태생으로 1900년도 파리로 건너와 생활하며 여러 부인들을 모델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림만 250여점, 스케치, 조각, 책, 사진까지 합해 500점이 넘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올해는 피카소 서거 50주년인 해로 피카소 관련 행사가 파리 여러 곳에서 열리고 있다고 한다.
짧은 생을 살다 간 천재 화가=빈센트 반 고흐
파리 북쪽 27km 떨어진 작고 조용한 마을 ‘오베르 쉬즈’ 고흐가 죽기 전 두 달간 머물면서 무려 70여 점의 작품을 남긴 곳으로, 그림 속의 실제 배경과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파리에서 아를로, 정신 병원으로, 오베르로 거처를 옮길 때마다 동생 테오는 그의 모든 생활을 도왔다. ‘가세 의사의 집과 가까운 곳, 작은 2층 방을 얻어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하루에 2-3점을 그렸다. 테오도 6개월 후 병사했다니 슬프고 아름다운 형제애에 감동을 받는다. 테오의 아네 요한나’는 고흐의 무덤 옆에 테오의 무덤을 옮기고 아이비를 심어 형제애를 기렸다고 한다. 고흐가 묵었던 작은 침실과 작업실, 의자, 유일하게 밖을 볼 수 있는 천장의 작은 창문, 그 작고 허술한 그곳에서 그의 궁핍한 삶이 막막함으로 전해 진다. ‘오베르의 성당’,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 가세의 집, 너무나 익숙한 그림들의 배경을 확인하고, 그가 걸었던 길들을 따라 걸었다. 고흐의 마지막 숨결이 깃든 오베르 쉬루우아즈와 함께 가장 좋았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반고흐는 네델란드에서 목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9년 아를에 머무는데, 그 15개월 동안 200여 점의 그림을 그리고, 100점의 스케치를 하고, 300통의 편지를 쓴다. 일반적으로 그의 전성기라고 인정되는 시기이다. 반고흐는 1888년 프로방스에 왔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으며 그림을 시작한 지는 불과 8년이었다(27세 시작). 그전에는 교사, 사제가 되려고도 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프로방스로 오기 전에는 2년 동안 파리에서 동생 테오와 함께 지냈다. 화상이었던 테오는 형을 경제적으로 도와 주었다. 고흐는 화가로서 교육을 받은 적은 거의 없지만 프랑스 화가들을 사귀어 그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하기도 했다. 고흐는 농담의 배합 기술을 버리고 캔버스에 원색을 듬뿍 발랐다. 빨간색과 녹색, 노란색과 자주색, 파란색과 오랜지색 등, 늘 원색들의 대조가 극대화되는 방식으로 색을 배치 했다. 강렬한 색채와 격렬한 필치로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했다. 현대 미술사의 발전과 함께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의 인생과 작품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고흐와 테오의 편지는 모두 668통 이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나는 그림 속에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고마움, 나의 사랑을 집어넣고 싶어“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풍부하고, 가장 강렬한 파란 색으로 아무런 무늬 없이 배경을 깔아버릴 거야, 이렇게 환한 머리와 풍부한 파란색 배경을 단순하게 결합하여 신비한 효과를 얻어낼 거야, 짙푸른 하늘에 걸려있는 별을 보는 느낌이 들도록...,“지금의 반고흐를 만든 이는 그의 제수 ‘요한나’ 였다. 고흐가 죽고, 그의 남편 테오 역시 6개월 뒤 죽는다. 아직 갓난아기를 키우고 있는 요한나는 고흐의 그림 수백 점과, 남편과 고흐가 주고받은 편지 수백 점을 가지고 고향 네델란드로 돌아간 뒤 예술가 마을인 암스테르담 동쪽 교외 ‘부숨’에서 하숙집을 차린다. 생전에 그림 한 점 팔지 못했던 불운의 회가, 그리고 무명의 화가였던 고흐의 회고전을 열어 그를 알리는 데 힘썼다. 편지를 책으로 출판했고, 사람들은 두 형제의 우애에 더욱 감동하게 된다. 그녀는 고흐보다 더 뛰어난 고흐의 큐레이터였다.
루앙 대 성당
아름다운 성당이야 많지만 한 화가의 애정이 묻어나는 성당은 다르게 보인다. 화가들은 이곳의 항구, 센강 위를 다니는 돛단배, 좁은 골목길, 그리고 산업 혁명 이후 생겨난 도시 노동자들의 삶을 그렸다. 인상파 화가들이 사랑하던 루앙은 지붕이 없는 아뜰리에의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었다. ‘피사로’ 고갱, 시슬레 등 많은 작가들이 이곳에 머물렀다. 모네는 특유의 집념으로 루앙의 대성당 연작을 그리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공기의 색채를 표현했다. 그렇게 28점의 루앙 대성당의 모습이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고딕 예술의 정수를 느껴보라, 화폭에 모네가 빛을 세심하게 담고자 했는지를..., 모네가 빛의 작용으로 어떻게 성당이 다르게 보이는지를..., 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루앙 성당의 모습, 파란 하늘 아래 루앙 대성당이 가장 아름다웠다. 루앙은 1030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짓기 시작하여 1053년에 정복왕 윌리엄이 참석한 자리에서 봉헌 되었다. 1185년에 재정적 지원을 해준 이는 ‘노르망디 공작 ‘존 ’이었다. 성당이 고딕으로 완성되었을 때, 노르망디를 빼앗은 프랑스 ‘펠레페 2세’ 가 축성식 때 참석했다. 성당 안엔 노르망디 공작의 석관과, 사자왕 ‘리차드 1세’의 석관이 있다. 리차드는 심장만 루앙에 묻히고, 영국령 임에도 무덤이 프랑스에 있는 이유는 노르망디 공작과 아키덴 공작 작위를 둘 다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에 영지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동안 프랑스에 더 오래 머물렀고, 모국어도 프랑스어를 사용했단다.
오를레앙의 처녀 =잔 다르크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 전쟁이 진행 중이던 1426-1431 농부의 딸로 태어나 13세 때 성 미카엘의 계시를 받고 프랑스에 승리를 안겨줬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종교재판을 통해 화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나이 19세, 1920년 수호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오늘날 잔 다르크는 서구 문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가은데 하나이다. 깃발을 들고 백마 위에 올라 탄 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나폴레옹은 민족주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잔 다르크를 프랑스의 국가 상징으로 선언하면서 그녀를 대중들에게 부각시켰다. 1920년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그녀를 성인으로 시성, 잔 다르크는 마녀에서 성인으로 변신한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었다. 카톨릭 교회 내에서는 잔 다르크를 라틴어식 명칭인 ’아르퀴의 요안나‘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잔 다르크가 화형을 당한 루앙 옛 시장 광장에는 잔 다르크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져 1979년 완공했다. 프랑스 성당 치곤 매우 역사가 짧다. 하늘로 솟아있는 지붕 구조가 독특했다. 잔 다르크가 화형당한 불길을 묘사한 것 같은 느낌 같았다. 이른바 Long ship 이라 불리는 바이킹의 배를 뒤집은 모양이고 전통적인 노르망디 성당 건축 방식이었다.
루앙 시내는 잔 다르크 성당 맞은편에는 1345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여관 ‘라코론누’가 있고, 루앙 대 성당괴 잔 다르크 성당 사이를 잇는 길은 ‘대시계 쥐 뒤 그로오를로즈)거리’ 라고 부른다.
목조 건물이 조금 남아있어 중세 루앙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폭격이 없었다면 루앙은 좀 더 옛 스러운 도시가 아니었을까?..., 쁘렝땅 백화점이 있고, 1층은 여러 상점들은 현대적 건물들이고, 2-3층은 옛 목조 건물이 남아 있다.
루앙은 센강으로 바다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해산물이 유명한 도시로 해산물 요리가 일품이다. ‘라 페스리(La Pe^cher’c) 낙시터, 또는 어장‘ 이란 뜻, 식당은 유명하다.(평점 4.6)
에트르타 절벽.
파리에서 약 200km 떨어져 있는 프랑스의 북부 해안, 파리에서 에트르타 까진 3-4시간 거리이다, 노르망디 해안의 도시로 몽플뢰르, 몽셀미셀, 도빌등은 파리에서도 가까워 또 워낙 작아서 한 시간 정도면 모두 둘러볼 수 있다고 한다. 사진만 봐도 힐링이 되는 곳이다. 해수욕, 절벽하이킹, 에트르타 정원 시내 구경, 해변을 산책하며 절벽과 바다를 감상하고 절벽 위에 올라 멋진 경치를 즐기는 것이 에트르타에서 즐길 수 있는 전부다, 지붕과 벽의 색감, 푸른색과 주변의 조화, 푸른 초원, 내려다보이는 망망대해, 노르망디의 푸른 바다가 감탄사를 지르게 한다.
① 절벽 위에 올라 경치구경,
② 정원에서 바닷바람을 쐬고,
③해변으로 내려와 물놀이, 식사, 에트르타 해변은 몽동자갈이 많아서 수영하러 물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파도도 세개 쳐 파도가 밀려오고 쓸려 갈 때마다 둥근 자갈이 내는 소리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자갈은 절벽 침식을 막고, 홍수를 막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단다. 해변의 자갈은 프랑스 정부의 보호를 받는 귀하신 몸, 가져가다 적발될 당시 벌금형이다, 이곳에선 코끼리 바위가 가장 인기가 많다. 하얀색의 코끼리 모양의 절벽과 너무나도 한적하고 아름다운 마을, 그리고 연이어 있는 2개의 절벽에 생성되어 있는 코끼리 바위는 제주도도 있고, 대만에도 있지만 이곳만의 특별함은 두 개의 절벽에 연이어 생성 되어있는 게 아주 드문 경우이다, 엄마,아빠,아기 총 3개의 코끼리 바위, 코끼리 가족 바위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아침 햇살을 받은 그 풍경이 인상적이다. 아기 코끼리 바위는 그 위에 세워진 그 교회(노트르담 드 라가르) 때문에 더 특별해 보인다. 일반인 관람 금지, 교회 뒤엔 에트르타 마을의 역사를 알수 있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바위의 웅장함에 압도 된다., 모네는 이 코끼리 바위가 사진보다는 비교도 안되게 예쁘다고 말했단다. 작가 ’모르스 르블랑‘ 이 사랑한 도시 에트르타, 뤼팽, 기드 모파상은 에트르타를 배경으로 ’여자의 일생을 썼고,(모파상은 10대 시절 에트르타에서 자랐다고,) ‘코끼리 바위라고 이름 붙인 사람도 모파상이란다.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웠던 노르망디 해안마을, 구스타브 쿠르베‘ 는 폭풍우가 지나 간 에트르타 절벽’을 그려 ‘오르세 미술관 소장.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도 유명하다. 만일 친구에게 처음 바다를 보여줘야 한다면 누구나 서슴없이 ’에트르타로‘ 데려 올 것이다.
몽플뢰르
모네의 해돋이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지금은 아름다운 작은 항구도시이다. 몽플뢰르로 들어서자 화려한 대관람차와 회전목마가 아이들을 유혹하며 힘차게 돌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이전에는 군사적 요충지로 상공업으로 번창했지만, 주위에 다른 항구도시가 생기며 예전의 영광을 잃었다. 여긴 바람도 세고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라 물류 이동이 편하게 두 개의 항, 구항과 신항을 두고 있다. 또 다른 지역에 비해 포도 재배가 적합하지 않아 사과주(시드르)와 증류주(칼바도스)가 지역 특산물이다. 일본인들이 이 시드르를 가져다 알코올을 빼고 만든 게 ’사이다‘란다. 또 홍합요리 (뮬mules)sms Rho ) 는 신선하고 비린내 하나 없어 감칠맛이 났다.
14세기 백년 전쟁의 종식 후 돈을 모아 15세기 지워진 목조 건축물 ’생트 카트린 성당‘ 은 배를 뒤집어 엎은 지붕으로 지어졌는데, 항구도시이다 보니 조선업이 발달하였고, 바이킹의 후예들이라 건축지식은 부족하고 오직 배 만드는 기술만 뛰어나 교화 천정을 만들기 너무 어려워 배지붕으로 짓게 되었단다. 성당 기둥은 울퉁불퉁, 건축 당시 도끼로 작업한 것이라고, 은근 리얼 핸드메이드이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고 계시는 듯 보였다. 예전에 성당 중앙에 세워진 종탑은 나무가 오래되고 부식되어 옆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원래는 한데 붙어 있는 게 정석, 지금은 화장실 겸용이다.
프랑스 북부 센강에서 르아브르와 몽플뢰르 두 항구 도시를 잇는 다리는 2km, 강을 건너는데 고가다리라 의아했지만 정말 길고 눈 가득 시원함을 선사했다.
벽을 공유하면서 서로 다닥다닥 붙은 중세 건축양식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가옥들의 모습은 완전 무지개 색, 창틀 위에 옹기종기 올려놓은 화분들이 싱그러워 보였다. 교회 뒷모습을 보며 걸어가면 광장도 나오고 본격적인 마을 투어가 시작되는 곳이다. 작아서 더 정겨운 곳이었다.
몽쉘미쉘
드넓은 들판에 수 많은 양들 장관이다. 몽쉘미셀이 잘 보이는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창 넓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몽쉘은 프랑스 남쪽 연안에 위치하며, 작은 바위섬에 세운 성당은 유네스코 유산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성안은 정말 경이로웠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독특한 건축양식과 웅장함에 압도된다. ’라메르베유‘ 경이로운, 이란 뜻, 내부를 보면 영혼의 세계에 저절로 빠져든다. 13세기에 지워진 127개의 돌기둥 회랑은 성직자들의 발걸음을 맞춰서 기둥을 배열했단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니 확 트인 공간이 나타났고 수도원의 역사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백년 전쟁 때는 영국군에 대항하는 요새로, 나폴레옹 시대에는 정치범들의 감옥으로, 오늘날엔 수도원으로 역활을 하고 있다. 708년 아브라스의 주교인 세인트 오베르의 꿈속에 미카엘 대천사가 세 번이나 나타나 바위 위에 성을 쌓으라는 계시를 받고 오늘날의 모습이 갖춰졌다. 이 좁은 바위 위에, 육지도 아닌 바다 가운데에다 이렇게 멋진 성당을 짓다니 경이로움이다. 여수에 있는 ’향일암‘이 떠 올랐다. 그 좁은 바위 사이사이 그렇게 예쁜 절집을 지을 수 있다니! 주변은 모두 드넓은 갯벌이다. 갯벌의 색은 너무 무궁 무진해서 신이 그린 멋진 그림일 수 밖에. 이곳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 많은 순례자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단다. 그 넓은 갯벌엔 포장마차 하나 없다. 관광 선진국이다. 갯벌 체험 코스가 있는데 반바지는 필수고, 남녀노소는 물론 유치원생들이 단체 체험을 한다. 고사리손들이 노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었다. 골목도 하나다 보니 북적, 130년 넘게 이어져 온 식당은 골목만큼 북적인다. 이곳의 유명 요리는 달걀을 부풀려 만든 오믈렛이다, ’클라르’란 여성이 개발한 비밀 레시피로 먼 길을 걸어 온 순례자들을 위해 따뜻한 오믈렛을 대접했던 것, 마음이 예뻐서 더 유명하지 않았나 싶었다. 해를 거듭하며 이어지는 전통도 따스했고, 특히 새끼 양고기는 소금치지 않아도 먹음직스러웠는데, 짭쪼름한 풀을 먹고 자라 풍미가 살아 있다 한다.
바르비죵
파리에서 차로 1시간 정도, 퐁텐블로 숲에서 북서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조용한 시골 마을이 반긴다. 19세기 중반 파리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 혁명, 왕정 복고, 콜레라 까지 겹쳐 그중 카미유 코로, 밀레, 테오도르 루소 같은 화가들이 파리를 떠나 바르비죵에 찾아오면서 이곳은 화가의 마을이 되었다. 그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귀족들이 좋아하던 그리스 신화 내용을 그림 소재로 삼기보다 자신들이 사는 농촌 마을과 퐁텐불로 숲의 풍경들을 야외에서 그려냈다.이를 ‘바르비죵 학파’라 부르고, 이들 숫자는 150명이 넘었다. 당시 실내에서 제작하던 일반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농민들의 생활상, 자연과의 친밀한 교감을 화폭에 담았다. 자연주의 풍경화에 몰입, 이후 그들의 그림은 모네, 르누아르 등으로 대표되는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Geand rue 라고 불리는 거리는 백년 전과 별로 달라진 점이 없이 한적했다. 마을 중심거리는 끝까지 걸어도 30분 정도이다. 길 양옆엔 생활에 필요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프랑스 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마을에 하나뿐인 야외 테라스가 있는 카페는 만남의 장소, 거리 곳곳에는 바르비죵 학파에 속했던 화가들의 그림들이 모자이크 타일로 남아있었다. 밀레의 . 만종, 이삭줍는 여인. 육체의 피곤함을 따뜻한 색체로 두텁게 덮어 줬다. 멀리 한 무리의 농부들이 추수한 밀을 마차에 가득 싣는다. 풍년인가 보다..., 낟알 하나라도 더 주으려 허리를 깊이 구부린다. 햇볕에 타고 갈라진 손, 묵묵히 생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의 모습은 순교자처럼 경건하다, 존 컨스터벌의 작품등, 마을 전체가 거의 미술관이다. 그 곳 사람들과의 대화는 껍질이 없는 듯한 그들의 일상을 느낄 수 있었다.
밀레 박물관은 마을 중심에 있었다. 생전에 밀레가 썼던 작업실, 콩알 만 했다. 200년이 넘은 밀레의 파레트, 스케치들이 무심하게 걸려있다. 편지등 다양한 개인 소장품 전시, 작가들의 작품 판매도 하고, 한쪽엔 김종필 씨의 사진도 붙여져 있다.
보르미 꽁트성.
파리에서 버스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보르미꽁트성은 17세기 최고의 호사가였던 ‘니콜라 푸케’의 성이었다. 화려한 내부 장식과 천장화는 물론 바깥에서부터 비주얼이 다른 미적 감각을 보여주었다. 이 성에 초대된 태양왕 루이 14세는 자기 성보다 더 화려함에 질투를 느껴 푸케를 옥사했다. 이후 이 성은 ‘베르사유 궁전’의 원 모델이 되었다.,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50km 떨어진 보르비 꽁트성은 17세기로 떠나는 시간 여행이다. 1656년 루이 14세 통치 시절 재무장관을 맡고 있던 ’니콜라 푸케‘가 지었으며, 1641년 그의 아내의 지참금으로 지금의 성이 위치한 땅을 구입, 5년에 걸쳐 성을 완성했다. 2500 제곱미터에 100개의 방, 세 층으로 건설 되었다. 당시 최고의 건축가와 조경사, 화가, 조각가(건축가=루이 르 모, 조경가 =앙드레 르 노트르, 화가 =샤를 르브랑, 11살 최초 국비로 애탈리아 유학생,천재) 동원해 5년에 걸쳐 화려한 성을 완성하고 축하연을 열러 루이 14세를 초대하여 융숭한 대접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억수로 운없는 사내인 푸케는 멋진 성을 가진 죄로 죽게 된다. 푸케는 뛰어난 능력을 인정 받아 높은 자리까지 올랐지만, 푸케는 연회가 벌어진 지 3주 만에 체포돼 종신형을 받게 된다. 이때 푸케를 체포한 사람이 ’뒤마‘의 소설 ’삼총사‘ 에 나오는 ’달타냥‘ 이었다니 놀랍고 흥미로웠다. 루이 14세는 푸케가 왕실의 돈을 횡령했다며 종신형을 선고,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들은 외곽으로 쫓아냈다. 푸케는 굵직한 예술가들을 후원했고, 타고난 미적 감각과 세련미를 갖춘 인물이었단다. 푸케의 조상이 살던 지방의 언어로 푸케= 다람쥐’란뜻, 때문에 가문의 문장도 ‘다람쥐’ 다람쥐는 부지런하기도 하지만 나무에 잘 오르는 동물 하지만 ‘푸케’는 어떤 곳이라도 오르고 싶어 한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성 위에서 본 정원 모습이 매우 멋지다, 좌우 대칭으로 조성된 아름다운 기하학 무늬 장식이 눈 앞에 펼쳐졌다. 프랑스 정원 튈리르 정원, 뤽상부르 공원 같은 프랑스식 정원은 모두 바로크 양식에 속한다. 역동적인 형태, 빛과 어둠을 극대화 하는 바로크 양식이다.
안뜰 쪽엔 세 개의 앞마당이 있고, 정원을 바라보는 중앙 정면 홀, ‘경비병의 방’이라 불리는 중앙 거실은 프랑스 건축 역사에 중요한 작품, 그 이유는 이곳이 특이한 타원형 모양이기 때문, 파티를 위한 호화로운 살롱, 1층 정원에는 2개의 방, 왼쪽은 왕만을 위한 것, 루이 14세 방 앞에는 호수에 왕관 장식의 조각품을 놓았다. 안뜰 쪽에는 채색 벽화와 금도금, 조각 천정화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예배당이 있고, 정원 쪽 부인 방은 지금‘루이 15세의 방’으로 바뀌었다. 프랑스의 역사 이야기 중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철가면’의 주인공이 ‘푸케’라는 설도 있다. 철 가면은 전설 속 수수께끼 정치범으로 감옥에서 철가면을 강제로 착용 했었다. 원래는 벨벳이었음,
지하실은 매장된 형태, 부엌, 사무실, 장교 방이 위치, 주방은 식당 맞은편에 있지만 복도로도 이용 가능, 나중 2개의 측면 복도가 추가되었단다, 우리는 루이 14식 점심을 먹었다.
이 성의 정원은 프랑스식 정원의 시초가 되었다. 이 성 앞의 좌우 대칭은 당시 최고의 선진국이던 이탈리아와 같은 곳에서만 있었던 것, 프랑스는 평지가 많아 이탈리아와 같은 입체적인 정원의 느낌을 구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상록수를 주로 심는 이탈리아식에 화려한 장식 무늬로 바꾸고, 화려한 꽃을 심어 물길을 첨가 해 프랑스식 정원의 기틀을 잡았다.
언덕 위에 우뚝 선 헤라클레스‘상과 더불어 이 언덕에 오르면 비운의 성, 보르비 꽁트를 멀리서 관망하는 색다른 경험을 느낀다. 성 투어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침실, 침대는 높고, 길이는 짧고, 왜? 프랑스인들은 최근까지도 누워서 자는 것을 몹시 꺼렸다고 한다. 누워서 자는 것은 죽은 자들이나 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 그래서 침대마다 등을 받칠 배개가 여러 개 필요했던 것, 지금도 유럽 호텔에 가 보면 필요 이상으로 배개가 여러 개 놓여 있는 것은 이 때문이란다. 키가 작은 게 아니라 앉아서 잤던 것.
지금 성 주인은 ’알프레드 소비어‘ 설탕 정제 업자이다, 5월-10월 매주 토요일 밤엔 2000여 개의 촛불로 성을 밝히는 ’촛불의 밤‘ 로맨틱한 이벤트가 열린다.성 안 잔디밭에선 가족이나 친지들과 함께 피크닉을 즐길 수 있다.
문화재를 잘 보존하는데 만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성과 정원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 본받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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