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지은이:벌마로(김윤식)
3년 전 부산 여행 중 알게 된 재진이 한테서 전화가 왔다. 사실 잊고 있었던 이름이라 처음에는 기억을 더듬는데 살짝 어려움이 있었다. 영우가 잠시 머뭇거리며 기억을 찾는 사이 그 쪽에서는 서운하다는 표현을 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영우에게는 많은 사연이 있었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찌 보면 여행 중에 잠시
스쳐간 인연까지 기억하고 살만큼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살아온 것 같다.
영우는 지난 세월 역동적인 삶을 살아왔다. 스치듯 지나간 인연도 많았고 가슴
시린 이별의 아픔도 있었고 현재는 군에 가 있는 영머가 몸성히 제대할 날만 기다리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더구나 지금도 아버지 회사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잠깐 기차여행 중에 마주 앉았던 사람을
금방 기억해 내는 건 무리라는 것을 상대방은 알리가 없을 터이다.
상대방이 부산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이라는 말을 꺼내고 나서야 누군지를 알아
차렸다. 영우가 전화번호를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다. 재진이는 미경이한테 전화를 했는데, 미경이는 결혼을 해서 임신 중이라 외출을 하기엔 무리라서 영우의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단다. 재진이가 얼굴 한번 보자고 했다.
잠깐 뜸을 들이며 궁리를 하는데 저쪽에서 사정하듯이 애원했다. 결국은 상대방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만날 약속을 했다. 다행히 요즘 회사도 안정권에 들어왔고 퇴근 후에는 저녁이 여유로웠다.
영우와 재진 뚱이 이렇게 셋이서 서울 변두리의 번화가 이층 다방에서 만났다.
재진이 혼자서 나올 줄 알았는데 뚱이도 같이 나와서 단둘이 만나는 것보다 영우는 오히려 부담이 덜 했다. 재진이는 외국생활을 하다가 일 년 전에 귀국해서 회사에 복귀했는데 모든 게 바뀌어 있어서 생소하게 보였다고 한다. 회사의 시스템은 확 달라져 있었고 적응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오자마자 영우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회사일이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바람에 그럴 겨를 없이 일 년이
후딱 지나갔다고 한다.
영우에게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 하며 재진이가 물었다.
“영우 씨는 그동안 더 예뻐진 거 같은데 좋은 일이 있었나 봐요?”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영우는 자신의 사연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 그다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도 않는 남자를 상대로 시시콜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게 자존심에 상처가 될 거 같기도 하고 가볍게 만나서 부담 없이 대화하고 헤어지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억제하며 입을 다물자. 재진이의 외국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고 생소한 외국의 이야기는 영우에게 흥미롭게 들렸다.
그날 이후로 재진이의 데이트 신청은 계속되었고 그럴 때마다 의미 없는 만남이라고 치부하며 거절을 했지만 전부다 거절을 하지는 못했다.
영우는 지나온 세월 경험을 통해 자신이 사랑의 감정에 쉽게 빠지게 되는 성정의 소유자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때때로 상대방이 너무 친밀하게 접근하도록 방치하다가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았음을 뒤늦게 알게 돼도 연애감정의 늪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겉으로 표현을 못한 채 쉽게 끊어 내지를 못했었다. 이것은 아마도 제어되지 않은 낭만적 감정의 힘이 매우 큰 것이 분명했다. 영우는 그런 모습을 보였던 것 같았다.
아버지 주택사업은 날로 성장했다. 여기저기 주택을 지어서 팔았고 영우의 경영
능력은 실적으로 나타났다. 큰돈을 벌었고 아버지는 수익금 중 일부를 영우 몫으로 주셨다. 영우는 그 돈을 엄마에게 맡겼다. 첫사랑 병휘오빠와의 실패에 가장
큰 원인을 영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적어도 준비부족으로 실패한
첫사랑의 전철을 밝고 싶지 않았다. 실패한 첫사랑을 교훈 삼아 결혼 자금을 벌기로 마음을 다 잡았던 거다. 통장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결혼자금에 흐뭇한 행복을 느끼며 지내는 사이 유난히 길었던 겨울이 물러가고 어느덧 봄이 오고 있었다. 파릇하게 돋아나는 새싹이 봄비를 맞으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개울가 수양버들가지에는 꽃몽우리가 맺혀있고 무게를 견디지 못한 가지는 길게 늘어져 있다.
봄 날씨 탓인가?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어느 날 왠지 모를 한가로움이 영우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이런 날씨는 여자에게는 바람나기 딱 좋은 날이다.
재진이가 궁금해졌다. 만나지 않기로 마음먹고 처음 몇 번 걸려오는 전화도 회피했던 영우였건만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건가 아니면 외로움인가,,, 재진이와는 술 마시며 내용 없는 수다를 떨었고, 가 본 적도 없는 다른 나라 이야기만 들었던
기억뿐인데, 듣고 또 들어도 너무나 신기했고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는 영우를 즐겁게 해 주었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진 걸까?
사랑의 감정이 있어서 만나고 인연을 맺은 것도 아닌데, 괜시리 보고 싶어지는
것은 무얼까? 어쩌면 보고 싶은 마음보다 궁금하다는 표현이 맞는 거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 이유였고 너무 냉정하게 만남을 거절했던 것이 미안한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라도 얼굴 보면서 마무리를
지으려는 의도가 더 강하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그동안 한 번도 소식을 전해오지 않은 재진이한테 심통이 났다. 물론 전화하지
말라고 냉정하게 거절했던 그녀였으면서 오히려 상대방에게 원망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오지 않는 전화를 마냥 기다리느니 차라리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기로
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재진이 어머니 느낌이다. 재진이의 소식을 묻는 영우에게 뜻밖의 대답이 들렸다. 급작스럽게 해외 파견을 가게 됐다는 거다. 이번에는
재진이 스스로가 돈을 벌기 위해서 신청을 했는데 신청하자마자 바로 결정이 났단다. 아무리 급하게 결정된 일이라지만 전화 한번 없이 떠난 것이 서운했다. 뜨거운 열대의 나라에서 사고 없이 잘 지내고 있는지 돈은 원하는 만큼 많이 벌고
있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뚱이가 생각났다. 생각난 김에 뚱이에게 물어보기로 하고 곧바로 뚱이네 회사로 전화를 돌렸다. 뚱이는 뜻밖에 걸려온 영우의
전화를 받고는 반가움과 놀라움에 어리둥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뚱이와 김포공항 근처의 다방에서 만났다. 영우는 뚱이를 보자마자 재진이 소식부터 물었다. 뚱이 말에 의하면 재진이가 해외로 나가기 전에 영우네 회사에 몇 번 전화를 했었는데, 그때마다 영우가 자리에 없어서 소식을 못 전하고 급하게 떠나게 됐다고 한다. 영우는 괜한 오해를 했던 재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유치한 순정에 얽매이는 것이 거추장스러웠고 지난 일로 마음 쓰기엔
청춘이 아까웠다. 재진과는 잠시 바람처럼 스치는 인연이었다고 치부해 버리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난 뚱이는 의외로 오묘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자유분방한 성격에
야릇한 성적매력도 영우의 호감을 사는데 충분했다. 영우는 남자를 보면 성적매력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내가 어느새 이렇게 변했나’ 하고 의심해 본다.
초저녁부터 시작한 두 사람의 대화는 지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긴 시간 이어진
술자리 때문인지 평소보다 많은 양의 술이 들어간 영우가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취했다. 뚱이는 술을 더 이상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서 조금만 더 마시자는 영우의 요구를 자제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우도 뚱이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몸을 일으켰다.
거리의 풍경이 흐릿하게 영우의 눈에 들어왔다. 슬금슬금 다가온 어둠이 어느덧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청춘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억압이라도 하려는 듯 밤은
깊어갔고 밤의 어둠에 대항이라도 하겠다는 듯 유흥업소의 간판들이 경쟁적으로
빛을 밝히고 있었다.
몇 해 전 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유흥업소가 그리 많지 않았었다. 이곳의 거리는
어린 시절 영우가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보러오던 곳이었다. 영우가 부평으로 회사를 다니며 이곳을 찾을 일이 별로 없었는데, 그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나 보다.
몇 년 사이에 룸살롱, 디스코장, 술집들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경쟁적으로 생겨났고, 유흥업소의 숫자에 맞춰 여관이나 여인숙이 한 집 건너 한 집씩 덩달아 생겨
났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욕망을 배설하고, 청춘들의 원초적 본능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 되어 있었다. 도로와 골목을 사이 두고 벌집처럼 밀집된 네온사인 간판들은
울긋불긋 화려하게 불빛을 깜빡이고 있었고, 그 불빛들은 서로에게 느끼는 사랑의 크기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연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다음 코스를 정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꼭 붙어 걷는 연인들과, 술기운에 붉게 물든 얼굴로 휘청이는 취객들은 최종 목적지를 결정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 무리 속에 영우도 있다. 술에 만취한 영우의 눈에 비친 여인숙 불빛은 낯설지 않았고, 거리의 풍경도 그랬다. 오히려 이런 풍경이 익숙하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밤늦은 시간이지만 걱정이 된다거나 두렵거나 하지 않았다.
충분히 혼자 걸을 만큼 정신이 살아있음에도 어쩐지 비틀거린다고 판단했는지 뚱이가 영우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부축했다. 좁은 골목을 지나 큰 길가로
나온 뚱이가 길가에 죽 늘어선 택시 앞에서 영우를 바로 세우며 집 위치를 물었다. 영우를 집에까지 데려다줄 요량이다. 뚱이는 영우네 집이 부천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디쯤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부천 무슨 동이야?”
뚱이의 물음에 영우가 대답했다.
“집에 안 가”
“집에,,, 뭐라고?”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들은 뚱이가 재차 물었다. 영우는 얼마나 취했던지 말을
해도 어물어물 입안에서 맴돌았다.
“집에 안 간다고,,, 오늘 너랑 같이 있을 거야”
말을 마친 영우가 뚱이의 볼에 입을 맞추며 손가락으로 후미진 골목 끝에 보이는
여관 간판을 가리켰다.
이번에도 영우의 목소리만 커졌지 확실하게 전달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영우의 손끝은 분명 여관 불빛을 가리키고 있었다. 뚱이는 그제 서야 영우의 의도를 조금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집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여관에서 잘 생각이니 여관까지만 데려다 달라는 의도로 받아들였다.
발길을 돌려 골목 안으로 들어선 뚱이의 눈에 여기저기 여인숙 간판이 보였다.
생소하게 느껴졌다. ‘여기에 여인숙이 이렇게나 많이 있었던가?’ 이곳 유흥골목이 뚱이에게는 놀이터와 같은 곳이다. 바로 옆 동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술래잡기를 하며 자란 곳이기도 하고 그동안 유흥가로 변모해 온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요즘은 거의 매일 친구들과 만나서 당구치고 술 마시고 어울려 노는 곳이기도 하고,,, 김포공항 근처에 사는 젊은이들에게 놀이 문화의 성지 같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곳에 여인숙이 이렇게 많은 것은 오늘 처음 알았다. 뚱이가 이곳에서 친구들과 만나서 어울려 놀 때는 여인숙을 관심 있게 염두에 둘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몰랐었다.
영우를 부축한 뚱이는 걷는 게 버거웠지만, 눈앞에 여인숙을 그냥 지나쳤다. 여인숙 간판을 몇 개쯤 지나치고 골목 맨 끝에 희미하게 보이는 여관 간판 불빛을 보며 걸었다. 인적이 끊긴 골목에 때지난 찹쌀떡 장사의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울렸다.
“찹쌀떡 찹쌀떡”
영우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찹쌀떡 장사와 마주칠 때 뚱이의 등뒤로 얼굴을 숨겼다. 골목 끝에 양 옆으로 비슷비슷한 여관이 몇 개 더 있었다. 눈에 보이는 여관 중에서 겉보기에 깨끗하고 화려해 보이는 곳을 골라서 들어갔다. 여관은 입구부터가 넓고 산뜻했다. 여관주인이 정해준 방에 들어간 뚱이가 영우를 침대에 눕힌 다음 창문을 열고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모든 불빛이 꺼져 있었고 여관 간판 불빛만 여전히 밤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잠든 영우의 모습을 보았다. ‘예쁘다’ 창문을 닫고 방문을 나서려는데 영우가 불렀다.
“어디가? 나랑 같이 있어” 잠든 게 아니었나 보다.
“응?”
“아까 내가 같이 있자고 했잖아”
이제야 영우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차린 뚱이가 방문을 잠그고 창문을 커튼으로
가렸다. 뚱이가 잠시 고민에 잠긴 듯 망설였다. 그러나 고민도 잠시 자신의 주량을 넘겨 마신 술기운에 판단력도 잃었고 영우의 유혹은 뿌리칠 수 없는 마력처럼 느껴졌다. 뚱이는 그대로 영우 옆에 몸을 눕혔다. 희미하게 비치는 천장의 무드등이 두 남녀의 욕망을 더욱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이 밝았을 때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어색했다.
영우가 또 한번 후회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변명도 한다.
‘외로운 걸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