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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잉태하신 메시야
2018. 12. 16(주일낮예배) 마태복음 1:18-23
이솝우화로 유명한 이솝은 기원전 620~564년경에 살았던 실제인물이다. 노예였고, 말은 더듬거렸으며 원숭이처럼 못생긴 얼굴 때문에 이솝은 늘 외톨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솝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솝은 굉장히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솝의 지혜는 온 나라에 퍼져서 결국 왕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이솝을 불렀다. 그리고 이솝에게 내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을 내일 아침까지 가지고 오면 자유의 몸이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말을 들은 이솝은 집으로 돌아가 밤새 고민을 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크로이소스 앞에 선 이솝은 왕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을 보여 주겠다고 하면서 종이 한 장을 내어 놓는다. 그 종이에는 왕이 이솝에게 금 3천 달란트를 빌렸음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차용증을 보는 순간 크로이소스는 노발대발하면서 내가 네 놈에게 금 3천 달란트를 빌렸다는 말은 내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왕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빙그레 웃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그가 바로 이솝이었다. 이솝은 왕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차용증을 가지고 가서 결국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예수님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부활하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를 찾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여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 주님의 시체가 어디있는지 알려 달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이것은 마리아만의 모습이 아니다. 엠마오로 가는 2명의 제자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했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인 줄 알았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는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겠는가?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있으면서도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거나, 근심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가 예수님의 승천하심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동안 부활하심을 증거하시다가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다 보는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워 가셨다. 그때 천사들이 한 말이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고 하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알려 주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승천할 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 자리에 여러분이 있었다고 생각해 보기 바란다. 예수님이 하늘로 들리어 올라가실 때에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래서 놀라움에 와~ 하면서 놀라면서 하늘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서 천사의 음성이 들리는 순간 두려워 떨었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승천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승천의 모습은 눈으로 보고 있어도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그렇게 충격을 받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 있다. 아니 그 전에 누가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은 나인성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려주었다. 이렇게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도 마찬가지이다. 열왕기하 2장에는 엘리야의 승천이 나온다. 엘리야는 엘리사와 함께 요단을 건넜다. 그때 홀연히 불말과 불병거가 두 사람을 떼어 놓았고, 엘리야는 회리바람과 함께 하늘로 올리워져 갔다. 그런데 이것이 성경의 처음장면은 아니다. 엘리야보다 훨씬 이전인 창세기 5장을 보면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 그랬던 에녹은 하나님이 데려가시므로 그가 세상에 있지 않았다(창 5:24)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을 히브리서 11장은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히 11:5)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부활과 승천은 예수님 외에 다른 사람들도 경험하여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충격을 받아야 하는 사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다. 동정녀 탄생은 성경의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나오는 유머있다. 연예인 교회(현 예능교회)에서 목양하시던 하용조목사님이 주일오후 연예인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날 성경공부 주제가 동정녀탄생이었는데, 목사님이 열정을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때 뒤에서 한 젊은 연예인이 손을 번쩍 들더니 목사님 농담하지 마세요. 어떻게 처녀가 아들을 낳아요? 하면서 자기는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목사님은 당황하였고, 결국 성경공부반의 분위기는 이상하게 되고 말았다. 그때 구봉서 장로님이 벌떡 일어서더니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고함을 쳤다고 한다.
야! 임마 마리아 신랑 요셉도 믿었는데 네가 뭔데 안 믿어!
이것이 구봉서장로님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방법이었다. 구봉서장로님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믿었으니 우리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가? 학자들이 이 사실을 교리적인 설명한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듣는 설명이 아담의 범죄 이후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를 가지고 태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정녀 몸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에 죄는 없으시다는 것을 가르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동정녀 탄생으로 우리가 정말 깨달아야 할 것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35문은 알려주고 있다. 함께 읽어보기 바란다.
35문 :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 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여전히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성령의 사역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또한 다윗의 참된 자손이 되고, 모든 일에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니 죄는 없으십니다.
쉽게 설명하면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은 참된 하나님이시고, 또한 참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하나님시며,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심으로 완전한 중보자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동정녀 탄생을 설명하는 교리적 측면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중보자가 되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런데 저는 오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언약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 싶다. 오늘 본문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성경을 보면 앞에 관주가 붙어 있다. 그리고 그 관주를 따라서 아래 표기를 보면 이사야 7:14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이사야 7:14절을 인용하였다는 말이다. BC 735년 북이스라엘의 베가왕과 아람의 르신왕이 연합하여 남유다를 공격하였다. 그때 극심한 두려움에 빠져 있는 유다왕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실 것이다고 그 징표를 구하라고 한다. 그런데 아하스가 징표를 구하지 않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의 징표로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하였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서 반드시 유다를 구원하여 주실 것이다고 약속하여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순히 아하스왕의 두려움을 해결해 주는 언약의 말씀이 아니었다. 죄악으로 인하여 고통과 두려움에 빠져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언약하신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하게 하심으로 언약을 성취하여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겠다고 한 그 언약을 성취하는 일이 쉬운 일로 보이는가? 제 아내의 친구 중에 절대 딸은 낳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대학교수의 딸이었는데, 가난한 의학도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둘은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에 친정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시댁으로 갔다. 그때 대학교수였던 아버지는 가난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께 연거푸 고개를 숙이면서 우리 딸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준비해 온 이바지 음식을 내려놓고 그냥 집으로 가시는데, 그 아버지의 어깨를 보는 순간 제 아내의 친구는 대문 뒤에 숨어서 하염없이 울면서 나는 절대로 딸을 낳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한다.
왜 울면서 아들만 낳겠다고 다짐했겠는가? 교회에서는 장로님이고, 학교에서는 교수님인 아버지는 어디를 가든지 당당하고 멋있는 분이었다. 그런데 시집간 딸을 시어른께 맡기는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 애잔하였다. 아니 그렇게 딸을 가난한 집안에 시집보내고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속이 상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절대로 딸을 낳지 않을 것이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야 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그 아들과 함께 천지만물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아들을 다스리는 자리가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자리로 내려보낼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아니 그 아들이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당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신다는 그 언약을 어렵게 성취하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아픈 가슴으로 언약을 성취하였는데, 우리는 그 언약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가? 미국의 크리스챤 투데이에서 교회다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습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감리교 60%, 장로교 50% 침례교, 40%가 믿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믿지 못하겠는가?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을 놓고 실험을 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골수 지지자인 이 사람들을 한자리에 두고 공화당후보와 민주당후보의 공약발표 연설을 텔레비전으로 보게 하였다. 그리고 지지자들의 뇌를 CT촬영 했더니 정말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텔레비전에서 공화당괴 민주당 후보가 공약발표 연설을 듣는 지지자들의 뇌는 이성과 합리적 판단에 사용되는 부분은 조용하고, 주관적 정서를 담당하는 뇌만 크게 활성화되는 것이었다. 쉽게 설명하면 이성적 판단과 논리로 후보자들의 공약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서 지지하고, 또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성과 논리에 합당하면 그것을 믿고, 이성과 논리에 합당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맹구 빼고 다나와 하는 유머이다. 옛날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영구와 맹구가 친한 친구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성실한 영구는 평생 일을 해서 모은 돈을 어디에 숨길까 고민하다가 항아리에 넣어서 집 뒤 땅에 묻어 두었다. 그리고 거기에 여기 돈 안 묻었음 하고 푯말을 붙여 놓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똑똑한 맹구가 영구집 뒤를 걷다가 여기 돈 안묻어 놨음이라는 푯말을 보고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서 땅을 파보니 항아리 안에 돈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었다. 맹구는 기분좋게 그 돈을 자기 봇따리에 다 넣었다. 그리고 빈항아리를 다시 땅에 묻은 후에 푯말 뒤쪽에 맹구가 안가져 갔음 하고 써 놓았다.
그리도 또 며칠이 지났다. 어느 날 영구가 돈이 잘 있는지 궁금하여 땅을 파보니 돈이 없어진 것이었다. 놀라고 화가난 영구는 그때서야 푯말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마을로 뛰어와서 이렇게 고함을 쳤다. 맹구 빼고 다 나와
영구가 왜 맹구 빼고 다 나와 하고 고함을 쳤겠는가? 어리석은 영구는 자기의 친한 친구 맹구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푯말에는 맹구가 가져가지 않았다는 확증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었을 때 영구는 어리석고 편협적인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어리석고 편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2천년 전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오실 줄 알았다. 그래서 로마로부터 유다를 구원하고, 유다백성에게 참된 평화를 주실 줄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화려한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울 곳이 없어서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로 오셨다. 그리고 로마에서 유다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빌라도의 법정에 초라하게 앉아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은 절대로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왜 메시야가 될 수 없는가? 자신들의 생각과 달랐다는 것이다. 그랬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에도 이런 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의 구원자 되신 하나님은 나의 삶을 형통케하고, 또 속썩이는 아들이 신실한 크리스챤으로 변화되는 예수님의 임재를 기다린다. 그런데 만약 내 삶이 형통케 되고, 또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기쁨으로 믿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 삶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음으로 예수의 탄생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이다. 그러나 초림의 예수는 너무 초라하게 오셨다. 왜 그러한 모습으로 오셨는지 팀켈러 목사님은 팀켈러의 예수 예수라는 책에 이런 말씀을 한다.
하나님이 이번에는 왜 불꽃이나 회오리 바람이 아니라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을까? 이번에는 심판하러 오신 게 아니라 심판을 당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그 분은 우리의 죄 값을 치르고 인류와 그분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 우리와 함께 계시러 오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재림의 예수는 저와 여러분이 기대하는 심판주로 이 땅에 오실 것이다. 그런데 초림의 예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멋진 모습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팀켈러 목사님의 말씀처럼 초림의 예수는 심판주가 아니라, 심판을 당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값을 치르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하여 심판받으러 오신 예수님은 화려하고 멋진 만왕의 왕이 아니라,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초라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는 어떤 자세로 서야 하는가?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목자와 동방박사들이 경배하였던 것처럼 경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메시야의 탄생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는 영생을 선물로 받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