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의 다짐 / 이미옥
“또 사게요?” 나온 김에 문구점에 들렀다 가자는 내게 작은아이는 포켓몬 카드 사 모으는 아이를 보듯 하며 묻는다. “응, 아직 마음에 드는 걸 못 찾았어.” 작은아이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가게로 들어갔다. 블로그에서 캡쳐한 사진을 보며 같은 걸 찾으려고 일일이 펜을 꺼내 확인했다. 똑같은 게 없다. 하는 수 없이 비슷한 디자인의 펜을 몇 개 꺼내 손에 쥐어 보기만 했다. 예전에는 필기구 코너에 작은 메모지가 있어서 펜을 사기 전에 간단히 써 볼 수 있었다. 요즘은 메모지도 붙여 놓지 않거니와 필기구 끝에 펜을 보호하는 작은 투명 덮개가 씌워져 있어서 계산이 끝나기 전까지 성능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감을 믿기로 하고 두 개를 골랐다. 며칠 전 다른 문구점에서 산 펜은 실패였다. 너무 굵게 써지는 데다 약간 번지기까지 했다. 인터넷 검색으로 필사하기 좋은 펜을 여러 개 찾았다. 그렇다. 나는 필사용 펜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 문제는 동네 문구점에 같은 게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온라인 쇼핑몰에는 있다. 하지만 이천 원 남짓한 펜을 택배비까지 내고 사는 게 아까웠다. 결국은 그게 그거인 셈이 되었지만.
올해는 필사를 꾸준히 하기로 결심했다. 글 좀 쓴다는 작가들이 다들 필사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내 늘지 않는 글쓰기가 꼭 필사를 하지 않아서인 것만 같았다. 또한 좋은 문장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책을 읽다가 좋은 글을 만나면 밑줄을 긋고 사진을 찍어 둔다. 하지만 휴대폰에 저장된 그 문장을 찾는 일은 뒤죽박죽인 서랍을 뒤적이다 옷핀을 발견하는 것과 같았다.
뭐든 하려면 준비 기간이 길다. 그래서 시작도 전에 금방 지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일단 필사 관련 유튜브를 이것저것 봤다. 유튜브 동영상에는 사소한 일에 진심인 사람이 참 많다. 그들이 집요하게 찾아낸 발견 덕분에 도움을 받는 일이 종종 있다. 사례도 간단하다. '좋아요' 버튼만 클릭하면 된다. 필사 고수들의 조언에 따르면 일단 독서대, 공책, 펜이 필요하다. 집에 있는 낡은 나무 독서대를 치우고 추천한 아크릴 독서대를 샀다. 산뜻하니 좋다. 공책은 종이 질뿐만 아니라 제본 상태도 중요하단다. 100년을 보관해도 될 만한 공책이라야 한다니 다소 과하다 싶다. 추천하는 외국 제품에 혹하긴 했지만 공책치고 좀 비싸다 싶은 국산 제품을 샀다.
이제 쓰기만 하면 된다. 독서대에 책을 고정하고 공책을 펼쳤다. 필통에서 즐겨 쓰는 볼펜을 꺼내 글자를 베껴 써 내려갔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랜만에 쓰는 손글씨라 그런지 글씨가 제멋대로다. 캘리그래피라도 배워 둘걸. 자책하며 한 단락을 쓰고 공책을 덮었다. '음, 아무래도 펜이 문제야. 독서대와 공책은 추천한 것들인데 펜만 아니잖아.‘
그렇게 내 필사(必死)의 펜 찾기가 시작되었다. 필사하고 싶은 문장을 찾는 일보다 펜을 사러 다니는 일이 더 잦을 즘 '일상의 글쓰기' 단톡방이 울렸다. 책을 읽고 잘 기억하는 방법이 있는지 묻는 백 선생님의 질문이었다. 다들 선생님들만의 비법을 올렸다. 밑줄 긋기, 색인 붙이기, 파일로 정리하기. 이제 막 시작한 내 필사까지.
그리고 교수님의 댓글, '난 잊어먹는 걸 당연하게 여기며 편하게 삽니다.' 그 댓글을 보는데 웃음이 나왔다. 무림 고수가 툭 던지는 한마디 같았다. 칼만 열심히 갈다 세월을 다 보낼 뻔했다. 일단 많이 읽는 것으로 올해 목표를 바꿨다. 물론 산 장비들이 아까우니 필사도 가끔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