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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보다 나은 것 / 신 6:1-9, 막 12:28-34
출 34:32절을 보면 감사절기의 기원이 나와 있다.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보리를 거두어들일 때는 맥추절을 지키고, 가을이 되면 수장절 곧 오늘의 추수감사절을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배경은 미국의 추수감사절에 있다.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새 땅에 이른 다음, 갖은 고생 끝에 추수를 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3일 동안 즐거운 잔치를 열어 주변의 인디언들과도 함께 즐겼다. 이것이 미국의 감사절의 기원이 되었는데 이를 우리도 본받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풍성한 수확의 때인 추석에 맞추어 감사절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늘어가고 있다. 우리 민족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감사를 드리자는 높은 뜻이 들어 있다. 어느 때에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든지간에 중요한 것은 왜,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가 하는 감사의 내용이다.
여러분은 지나온 모든 삶의 경험에 대해서 또 지금의 현실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가? 우리의 생활 환경은 물 한모금조차 마음놓고 마실 수 없도록 급속도로 오염되고 있다. 잘못된 교육의 피해자인 청소년들은 그 돌파구로 탈선과 비행을 서슴치 않아서 자녀를 둔 부모는 늘 불안하기만 하다.
농민들이 지금 흥농종묘 앞에서 데모, 생산비도 안되는 수매가, 정치인은 국민의 안녕과 복지는 뒷전이고 싸움질을 한다. 노정권의 비자금으로 구속, 전 정권뿐만 아니라 지금 김영삼 대통령도. 믿어 줄 사람이 없다. 지구촌 이곳저곳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무엇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모든 일 가운데서 감사하라’는 뜻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풍족할 때나 헐벗었을 때나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 모든 삶의 자리에서 감사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모든 일ㅇ[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라고 믿고 있는 사람은 어떤 일에 있어서나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제대로 되어갈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또 내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이야말로 모든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감사의 조건인 것이다. 성서는 감사의 마음을 구체적인 실천으로 생활화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나눔의 삶이다. 신 26:11절은 토지 소산의 맏물을 하나님께 바친 다음 그 예물을 가지고 레위인과 나그네, 고아와 과부와 함께 즐거움의 잔치를 벌이라고 한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이웃과 함게 나눔으로 넓혀야 한다. 진정한 감사는 모두의 감사가 될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참 감사인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참 감사, 이것은 현실이 아무리 험해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이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제공한 이웃을 기억하고 기꺼이 우리 가진 것을 나눌 때 그 풍요를 맛보며 누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넉넉히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한 주간에 되기를 바란다.
제물이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상의 예물로써 하나님께 대한 경배, 감사, 속죄를 의미하며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간의 곡식과 함께 소나 양이나 염소나 산비둘기를 제물로 사용했다. 제사가 이스라엘 종교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제물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의미 때문이다. 그래서 성전에서는 연중 무휴로 제사가 봉헌되었고 제사장들은 반렬에 따라 교대해 가며 제사를 집례하고 있었다. 백성들이 그만큼 열심히 제물을 봉헌해 왔기 때문이다. 사실 제사를 제외하고서는 이스라엘의 종교를 이해할 수 없으리만큼 제사는 유대교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사가 이럼 성행되고 있는 반면에는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1) 제사 의식을 종교의 전부로 착각하므로 중교적인 의무를 다했다고 하는 안일한 생각에 빠지게 되었고, 2) 제물을 종교 생활의 척도로 삼아 제물의 분량과 봉헌 회수에 따라 종교적인 의가 상승되는 것으로 오인했고, 3) 제물 수요자의 편리를 도모한다는 구실 아래 성전 경내가 시장화되어 가는 한편, 제사장들이 종교 모리배로 전락해 가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신약시대의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러한 의식적인 제사와 소나 양 같은 제물보다 나은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거듭 천명하신 것이다. 그러면 제물보다 나은 다른 무엇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살펴보자.
1. 하나님께 대해서는 순종을
삼상 15:22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최초에 수행해야 할 과업은 아말렉을 진멸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적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울왕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는 구실로 그들의 소와 양을 끌고 왔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키고 말았다. 사람이나 짐승이나를 막론하고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엄명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명령을 거역해 가며 일방적으로 드리는 제물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인가? 사실 그 대답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보다 자아를 나타내려는 욕망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점이 있다. 하나님을 최고의 주제로 삼고 힘을 다하여 경외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며 목숨을 다하여 순종하는 것으로 최상의 선을 삼아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고 하나님을 객체로 삼아 자기의 선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호응하시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께 대한 큰 불경이며 오만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할 뿐이다. 하나님이 요구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 10:12)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하거늘 사울왕은 감히 순종을 버리고 제물 쪽을 택한 것이다. 이것은 자아를 하나님보다 우위에 올려 놓는 방자한 행위로써 하나님의 격노를 피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이 사건은 사울에게 결정적인 패인이 된 것이다.
혹시 자기가 생각하는 선을 하나님께 강요하여 그를 끌고 가려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라. 간절한 기도와 오랜 묵상과 깊은 영적 겨ㅛ제를 통하여 주이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분별하기에 힘써야 하고, 그리고 자ㅓ기를 부인하며 주이 뜻에 순종하기를 또한 힘써야 한다. 사도 바울은 전도광이엇지만 그러게 즐겨하는 전도가지도 성령께서 허락하지아니하시는 자ᅟᅥᆼ소에서는 그활동을 보류하고 새로운 지시를 기다렷던 것이다. 하나님게 대한 최서ᅟᅡᆼ이 선은 곧 하나님게 대한 순종이기 때문이다.
2. 이웃에 대하여는 자비를
마 12:7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어느 목사님께서 6.25 사변 중 대구 근방의 농촌교회에 피난 길에 들렀다. 좀처럼 피난민을 상대하려 하지 않던 담임목사가 결국 자기 교인들의 설득으로 양보는 했지마는 교회당 마당에서의 노숙을 허용했을 뿐, 예배 시간 외에는 피난민이 예배당 안에 들어오는 것을 끝내 엄금했다. 하는 수 없이 피난민들은 교회당 마당에서 밤이슬을 맞아가며 팔공산 쪽에서 울려오는 인민군의 포성 속에서 공포의 밤을 떨며 지새우곤 했다. 그 목사님께게서 1.4후퇴 때의 피난은 제주도로 갔다. 제주 시내의 교회는 밀려드는 피난 교우들을 우선 교회당 안에 수용해 주었다. 앞의 교회와 대조적이었다. 교회당의 신성을 끝까지 지킨 앞의 교회 목사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당을 개방해서라도 환란 당한 형제들을 돌보아 준 후자의 경우는 훨씬 더 잘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요구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생기는 걸까? 기후의 차이만은 아니다. 앞의 목사는 가령 피난민들이 노숙을 하다가 동상을 입는다고 해도 좀처럼 교회당을 개방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리 신조의 차이는 더구나 아니었다. 이 두 교회가 다같이 장로교에 속한 교회였기 때문이다. 교양의 차이엿다. 전자는 후자에 비해서 학식과 문견이 많이 뒤져 있었던 것이다. 두려운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무식을 정통으로 착각하고 독선을 보수로 오인하기 쉽다. 교회당은 교회보다 더 신성한 것이 아니며, 종교 규례는 인간의 생명보다 더 존귀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장로의 유전과 규례를 준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항상 백안시 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야말로 율법을 어기는 자들로서 종교에 대해서는 형식적이요 신앙에 대해서는 맹목적이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무지한 자들이었다. 옛날 다윗이 아히멜렉을 찾아와 왕명에 의한 급한 길이라면서 먹을 것을 요청했을 때 아히멜렉은 진설병을 내준 일이 있었다. 진설병이란 안식일마다 여섯 개씩 두 줄로 성소의 떡상에 진열해 놓은 떡으로서, 물려낸 떡은 제사장이 회막 뜰에서만 먹어야 하는 ‘거룩한 떡’이기 때문에 외인에게는 분배할 수 없는 음식이지마는 워낙 사정이 긴급하고 때가 절박한지라 이것을 다윗에게 내준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아히멜렉 자사장을 율법 위반자라고 정죄하지는 않는다.
하루는 예수님의 일행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몹시 시장했던 제자들이 밀 이삭 몇 개를 잘라 먹었다. 이러한 일은 그 사회에서는 공인된 풍습으로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시비를 걸어온 자들이 있었다. 밀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일종의 추수이며 추수는 안식일 규례에 위배되는 노동행위라는 것이다. 이쯤되면 이것은 종교가 아니며 종교하라 하더라도 필요없는 종요교다. 예수님의 마음은 노엽다 못해 슬프셨을 것 같다. 이때 주님은 위의 다윗의 실례를 들어 대답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셨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는 분이시지 제사를 원하시는 분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단과 사설에 대해서까지 사랑과 자비를 무제한 방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우리가 정통 신앙을 유지했을 경우에라도 에베소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신음하는 병자를 보시면 안식일일지라도 고쳐주셨고, 원한다면 세리와도 함께 기꺼이 음식을 나누셨고, 창기와 강도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를 묻지 않고 쾌히 받아주셨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사랑을 원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3. 자신에 대해서는 통회를
시 51:16-17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일을 다 잘 이행했을 경우라 할지라도 결코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나는 하였다고 말할만큼 하지 못했고, 되었다고 만족할만큼 되지 못했고, 도달할만큼 도달하지 못한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부족을 부끄러워하며 또 아파해야 한다. 이것을 상한 심령이라고 하며 하나님은 제사보다 상한 심령을 더 기뻐하신다고 다윗은 그의 참회의 기도에서 고백하고 있다. 이를 입증하는 실례를 신구약 성서에서 한가지씩 들어보겠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간으로 각기 제사를 드린 일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 열납된 것은 아벨의 제사뿐이었다. 가인의 제사는 단순한 감사제인데 반하여 아벨의 제사는 희생의 제사였으므로 감사 이상의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아벨은 그의 부모로부터 그들 부모가 입고 있는 가죽옷의 유래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그때 아벨은 자기를 위해서도 희생될 양이 있어야 하겠다고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자기 자신도 그의 부모와 똑같은 죄인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아벨은 희생의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이며, 여기에는 통회와 대속과 헌신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감사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통회요, 소제보다 앞서야 할 것은 희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느날 한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멀리 서서 얼굴도 들지 못한채 ‘하나님이여, 긍휼히 여겨주욥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의 기도는 바리새인의 화려한 기도에 비하여 너무 초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은 이 세리의 기도였던 것이었다. 여기에는 통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통회하는 심령이다.
하루 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보자. 그럴지라도 자녁기도를 드릴 때는 항상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엎드리자. 한주간 동안 성실하게 봉사하자. 그럴지라도 주일 예배에 나아와서는 언제나 세리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자.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열납될 것이다. 나는 겨우 사울의 제사를 반복하고 있지나 않는가? 여전히 장로의 유전과 규례만을 능사로 하고 있지나 않는가? 아직도 바리새인의 오만한 기도를 드리고 있지는 않는가? 주여, 이것들보다 주님이 진실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주님게 드리게 하옵소서. (1995-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