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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 시 126:1-6, 히 4:1-11
현대인들은 피나는 경쟁 속에서 살아간다. 남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그런데 그 노력은 끝이 없다. 이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노력한 후의 값진 결과와 평안이 아니라 계속되는 스트레스이다. 얼마 전에 아는 사람의 친척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 48세인데 서울에 있는 외국인 회사의 잘나가는 지점장이었다고 한다. 명문대를 나와 100평 아파트에 사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업인이었다. 그런데 그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 회사에 들어간 20대 후반부터 밤낮없이 뛰었다고 한다. 일요일도 골프장으로, 이름난 음식점으로 거래처 사람 대접하기 위해 쉴 날이 없었다 한다. 건강을 위해 골프를 친다면 좋지만, 사업을 위해 골프를 친다면 그것은 스트레스일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먹는다면 건강에 좋겠지만, 접대하기 위해 먹는다면 그것도 곤욕일 것이다. 회사에서 주는 판공비(공짜돈)로 골프치고, 최고 음식을 먹는다고 부러워했지만 그는 나이 48세에 이 세상을 떠났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제대로 쉬었으면 죽지 않았을텐데...’라며 흐느끼는 부인의 모습을 보며 참 가슴아팠다고 한다. 그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었다면...하는 생각을 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에게 찾아오기 쉬운 병이 바로 머리가 쑤시는 두통이다. 나도 요즘 머리가 가끔 쑤신다. 그냥 단순히 욱신욱신 아플뿐만 아니라 심할 때는 멀미 같은게 느껴지기도 한다. 신문을 보니 이같은 통증은 편두통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이라고 한다. 최근 서울대 병원이 2천5백 명을 조사한 결과 68%가 두통을 앓았고, 20%가 편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통증은 두개골을 싸고 있는 근육이 스트레스 등으로 과도하게 긴장하면서 수축하기 때문이다. 두통이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은 것은 할 말이 있어도 참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와 휴식(안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러분들도 거의 다 두통 때문에 고생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이 세상에 살면서 알게 모르게 받는 스트레스 때문인 것이다.
신문을 읽어보고 나에게 어떤 스트레스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전주에 와서 교인이 많아져야 한다는 욕심 때문인 것 같다. 다른 교회 행사 포스터를 우리 교회에 와서 붙이고 가면 우리는 언제 저런 것을 해보나 하는 부러움이 생긴다. 다른 교회는 새벽기도를 교인들이 많이 모여 한다는데 우리는 많이 나와야 4명, 이것도 어쩌다가 한번씩, 그렇지 않으면 2명, 어떤 때는 나 혼자 할 때가 많은데, 이렇게 교인들이 기도도 않는데 다른 교회와 어떻게 똑같을 수있나 하는 생각, 기도도 않는데 누가 이 교회를 찾아와서 빈자리를 채울까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를 않는다. 다른 교회는 교인들이 평일에도 지나가다 와서 교회를 둘러보고, 치울 것 있으면 치우고 정리한 후 기도를 하고 간다는데, 왜 우리 교회는 그런 교인이 한 사람도 없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두통이 생기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쉬고 싶다고 말하지만 인간은 쉴 수 없는 존재이다. 쉰다는 말은 육체적 노동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의 안식이기 때문이다. 왜 쉬지 못하는가? 세상의 욕심 때문에 쉬지 못한다. 남들보다 좋은 집, 배부르게 먹고,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학교, 좋은 직장, 똑똑한 자식 등, 끝없는 전쟁과 욕망 때문에 인간은 진정한 마음이 평안이 없다. 좋은 것을 향해 달려가려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짓밟아야 하고, 자기보다 잘난 사람은 끌어내리든지 잘못되기만을 바라야 한다. 그 속에 사랑이나 용서나 겸손이나 섬김의 자세가 있겠나?
인간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왕도 이렇게 탄식했다. 전 2:22-23절 ‘사람이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세계의 정복을 꿈꾸던 나폴레옹이 센트헤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유럽을 정복하고 세계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했지만, 나에게는 일주일도 안식할 날이 없었다. 오대양의 넘실대는 바람 소리는 세상 사람들의 한숨소리 같았다’고 탄식했다.
창 2:3절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이 이 날을 복 주셨는데 안식을 주셨다는 말이다. 하나님도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휴식, 안식). 하나님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도록 우리에게 잠을 주셨다. 그러기에 밤이 되면 우리의 눈꺼풀을 덮어 주신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은 밤에도 쉬지 못하고 있다. 천국은 쉴 수 있는 곳이요, 지옥은 쉴 수 없는 곳이다. 가정은 쉬는 곳이다. 교회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려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축복은 안식으로 초대한 것이다. 마 11: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에 대한 초청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실존의 근본문제의 해답을 선언하신 것이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오늘도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지고 쉬지 못하는 우리 인간을 향해 두 손을 벌리고 계신다.
본문 1, 3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안식처에 들어가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 살아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인간이 욕심으로 말미암아 안식을 잃어버렸으나 그 약속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안식을 회복하여 주시려고 역사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도 안식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를 방황했다. 하나님이 가나안의 안식을 약속해 주셨으나 이들은 애굽을 뒤돌아보면서 불평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야했다. 결국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믿지 못한 자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안식의 약속이 남아있다.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말씀의 약속은 창세기의 말씀의 약속을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안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처음 창조 때부터 약속된 것이다. 4절부터 자세히 읽어보면 안식에 대한 세 가지 내용이 나온다. 창조 후의 하나님의 안식이 있고, 모세 때의 실퍄패 안식이 있다. 그리고 장차 받을 성도들의 안식이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실패를 교훈삼아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후 그들에게 준 가장 큰 계명은 ‘안식일을 지키라’이다. 다같이 찬송가 뒤 십계명을 펴고 4번째 계명을 읽어보자. ‘제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것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십계명이다. 신 5:15절을 다같이 찾아서 읽어보자.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에서 자유를 얻어야 하며, 생각과 마음이 완전한 자유를 누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한다. 여기에 안식이 있고 자유가 있으며 미래의 안식도 하늘나라의 약속도 보장받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일할 때는 한마디로 우리는 세상의 노예이다. 직장에 매여 있고, 일터에 매여 있고, 사람에게 매여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안식일을 통하여 우리는 자유하는 것이다. 이 날이 없다면 우리는 노예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안식일을 지킬 때 자유인의 선언이 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후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과거를 회상하며 모세는 설교한다.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 여기 나와서 너희에게 자유를 주었는데 안식일은 그 약속이라’고 선언한다. 자유는 진정한 축복이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안식할 수가 없다. 또 안식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없다.
여러분, 돈을 많이 가졌어도 돈 때문에 내 마음에 평화가 없고, 잠시 쉬지도 못하고, 그 마음에 안식을 잃어버렸다면 이는 불행한 것이다. 여러분,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라고 했던 사람을 아는가? 이주일이죠. 이 사람이 처음에 무명시절 금호동 판자촌에서 아주 어렵게 살았다. 그런데 생긴 것이 좀 웃기게 생기고, 누구와 비슷하다보니 인가가 올랐다. 업소 계약 1억원 수표, 베게 속, 이불을 얹어놓은 사과궤짝 밑에도. 그래도 잠이 안오더라. 돈이 없을 때는 잠을 잘 잤는데, 돈이 생기니까 잠이 안오더라. 사람이 쉰다고 해서 안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참 안식은 세상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므로 얻을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모든 속박에서 나의 자유를 선언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며 믿음의 은총인 것이다. 성자 어거스틴은 ‘주님 안에서 내가 안식할 때까지는 참 평안이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시 127:2절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그렇다고 에배 시간에 잠을 자면 안된다. 여기서 말하는 잠은 밤에 편안히 잘 자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신다. 그때 바다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파선이 위기를 맞이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물을 베개하고 세상 모르고 주무신다. 안식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절망 중에 살 길이 없어 예수님을 깨운다.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으니 우리를 살려주십시오.’ 주님께서 일어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책망하시고 ‘바다야, 잠잠하라. 바람아 고요하라’ 할 때 풍랑은 그쳤다. 우리는 분명히 이 사건 속에서 한가지 계시를 받는다. 역사도 하나님의 손에 있고, 풍랑도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문제는 우리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는 자는 문제가 없는 것이고, 믿음이 없는 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네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 그러기에 주님은 바다 가운데서 풍랑 속에서도 안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몇 친구가 여름 해수욕장에서 건너 편에 있는 작은 섬에 도착하려고 수영을 하며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도에 휩쓸려 힘이 다 빠져 바다 가운데서 죽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살아남을 길이 없다. 마침 작은 고기잡이 배가 지나간다.
누군가 큰 소리로 외친다. ‘배를 잡으시오.’ 그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배가 왔기에 두 손으로 힘껏 배를 잡았다. 그는 배에 매달렸다. 그때 사공은 ‘배에 오르시오’라고 외쳤다. 그래서 그 사람은 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친구에게도 밧줄을 던져 살릴 수가 있었다. 연약한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험한 바다는 건널 수가 없다. 모두 물 속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사는 길이 있다면 구조선을 만나서 매달리는 것분이다. 그러나 계속 매달려도 안된다. 졸면 죽는다.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방법은 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의 진리를 배우게 된다. 구원선에 매달려 있는 스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빨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때 다른 사람도 돕고 구원의 자리로 인도할 수가 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는 신앙에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안식에 이르러야 한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평안이 있다. 하나는 아무 일도 없고 걱정거리도 없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수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는 평안이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평안은 아무 일이 없는 평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기는 평안은 수많은 어려움과 염려를 이기고 승리한 평안이다. 운동 선수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면, 선수는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무척이나 긴장을 할 것이다. 어쩌면 피를 말리는 듯한 초조와 불안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없는 선수들은 경기를 미리 포기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일시적으로 평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자 평안은 그런 긴장을 이기고 경기에서 승리했을 때 주어진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염려와 걱정은 90% 이상이 쓸데없는 부분에 대해 갖는 것이고, 필요없는 상상력이 동원된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가 생각한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생각해 내지 못했던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신다.
어떤 큰 어려움을 앞두고 마음 속으로 염려하고 불안해 하다가 믿음으로 그 불안을 이기고 하나님께 맡겼을 때 참으로 마음이 평안하다. 그런데 실제로 그 어려움이 믿는 그 순간을 기점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제로 중요한 싸움은 모두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마음에서 이기면 현실에서도 반드시 이기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뿐만 아니라 마귀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불신하게 하고 우리의 믿음이 소용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그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부족한 사람의 특징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아무 말이나 믿어버리는 것이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믿음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일으키는 도화선이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되는 것들은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 마음을 지켜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아직도 참 안식이 그대로 남아있다. 안식할 때가 어디에 남아있나? 그 안식은 하나님 나라에 남아있다. 하나님은 하늘 나라의 안식을 약속하고 있다. 하늘의 안식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축복을 받아서 좋은 집에 살고 성공하고 재물을 많이 소유할 수는 있으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안식과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이 없고 늘 부족을 느끼고 있다면 이는 안식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삼으시고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도록 하셨다.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덮어 화목하게 하는 것이 지성소요, 그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곧 안식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므로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인간의 허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으셨다.
주일 예배 한번 참석하고 일주일 내내 세상적인 방법으로 샇려고 하지 마라. 이것은 고달픈 방법이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사모하여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주일날 교회 빠지고 어디 놀러가 보니 안식이 있는가? 주일날 이집 저집 잔치하는 곳 찾아다니니 마음에 평인이 있는가? 옛날같이 못 먹던 때나 진치집 가면 먹 게 있지, 요즘같이 먹고 살만하기 때문에 잔치집 음식도 별거 없다. 저는 잔치집보다 집에서 식사하는 것이 훨씬 좋따. 가뵈야 음식은 잔뜩 장만했는데 실상은 입맛당길 정도로 막을 것이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안식이 있음을 믿기 바란다. 여러분, 우리 모든 성도는 주님 안에서 안식을 회복하기 바란다. 그리고 안식하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자. (200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