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 한정숙
오늘도 이른 시간에 운동하러 나갑니다. 9월이 되면서 해가 더디 떠서 새벽 5시 반은 아직 어둡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그녀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빨리 걷습니다. 10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 담장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까치발을 하고 운동장을 훔쳐봅니다. 트랙을 걷고 있을까? 아니면 스탠드에 앉아서 쉬고 있나? 하며 고개를 길게 늘여 샅샅이 훑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활짝 열린 교문을 힘없이 들어갑니다.
8월이 시작되자 더운 낮 시간을 피하여 해 뜨기 전부터 운동을 합니다. 트랙을 걷고 뛰기를 반복하고 운동기구가 있는 학생들의 놀이터 주변으로 펼쳐진 모래 바닥을 맨발로 걷습니다. 제법 넓고 거칠거칠하여 걷는 맛이 있습니다. 스스로 한 약속 중에 날마다 잘 지키는 것은 만보 이상 걷기입니다. 그 중 절반은 맨발로 걷습니다.
그이를 만난 지는 한 달이 되었습니다. 8월 초 그날도 이른 새벽에 운동장에 들어섰는데 몸집이 큰 아가씨가 걷고 있었습니다. 몸은 무거워 보였고, 걸음은 느렸습니다. 물병을 들고 걷는 내내 숨은 턱까지 차올라 쉭쉭 소리가 났습니다. 스탠드 앞에 다다르자 털썩 주저앉아 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고 물을 마십니다. 숨을 고르는 동안 나는 운동장을 두 바퀴 뜁니다. 다시 일어나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걷는 그녀에게 “어? 건강해지는 소리네요?” 하고 말을 건네자 잠시 당황하는 것 같더니 슬며시 웃습니다. 몇 바퀴 돌고 쉬느냐고 묻자 “아직은 한 바퀴 돌고 쉬어요.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요.” 하며 목소리를 낮춥니다.
나는 날마다 같은 시간에 운동장에서 만나 지원군이 되어 줍니다. 무더운 여름날을 선택하여 운동을 시작한 그녀의 결정에 8월은 땀을 많이 흘릴 수 있는 때이니 체중이 금방 빠지리라는 칭찬 일변도의 응원을 보내며 엄지를 치켜세웁니다. 텔레비전 에서나 봤을 법한 큰 체격으로 오지랖이 넓은 내 관심을 끈 그녀는 첫날 “내일 봬요.”라는 인사로 마음을 잇는 웃음을 보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하고 싶은 일을 막는 엄마와 크게 싸우고 수년 동안 가족과도 멀리하고 방안에 들어앉았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몸은 불기 시작했고 걷잡을 수 없는 몸집에 부모님의 걱정과 채근이 계속되었으나 본인은 전혀 의욕이 없었고 급기야 가족들도 포기하였답니다. 그런데 최근에 너무나 많이 늘어난 체중을 모른 체할 수 없어 어머니와 직장에 얘기하고 협조를 구했다고 합니다.
병원에서 일한다는 그이에게 물리 치료실이냐고 묻자 깜짝 놀랍니다. 지나치게 큰 몸으로 병원에서 근무한다면 아무래도 움직임이 덜한 곳이 적당할 것이고 임상 병리과나 물리 치료실 중 더 행동반경이 적은 곳을 골라 말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9월까지의 목표가 140킬로그램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입 밖으로 “네?” 소리가 나올 뻔 했지만 숨을 한 번 고르고 웃으며 곧 그렇게 되리라며 지금도 땀으로 체중은 빠져 나가고 있을 거라고 응원합니다. 2주 후 그녀는 10킬로가 빠졌고, 이렇게 계속하면 8월 말까지는 150킬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얘기로 나를 또 깜짝 놀라게 합니다. 도대체 운동 시작 전 몸무게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체중이 너무 많이 나가면 몸 이곳저곳이 아프고 자기 관리가 안 되는 게으른 사람으로 볼 수 있어서 억울할 테니 마음을 다져 실천하라고 독려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체중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앞으로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싶은데, 듣자하니 뚱뚱하면 아기 갖기가 힘들고 무거운 몸으로 아이랑 노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다행히 성인병은 없지만 무릎도 아프기 시작한다는 걱정도 내놓습니다. 그러다가도 10킬로그램 내려간 체중이 희망을 주었는지 환하게 웃으며 앞으로 결혼하여 아이가 생기면 보육교사 자격도 준비하고 싶다고 합니다. 출생률이 0.7명인 세계적인 저출산 국가에서 서른 안팎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이런 꿈을 꾸다니 매우 반갑고 뿌듯했습니다.
그녀는 8월 중순 일주일간 운동장에 나오질 않았고, 빈 운동장을 빙빙 돌며 걱정했던 나에게 오랜만에 가족끼리 제주도로 휴가를 다녀왔으며 “맛있는 것 많이 먹고 푹 쉬다 왔다.”는 얘기로 놀라게 하더니 조심스럽게 “체중 조절은 잘 했지요?” 하는 물음에 2킬로그램이 늘었으나 금방 줄일 수 있다고 큰소리쳐서 괜스레 나만 우스워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운동을 시작한 그녀는 가끔 더 멀리 걷기도 하고 장소를 바꾸기도 하며 운동량을 늘렸지만 나와 같은 곳에서 걸을 때는 트랙 두 바퀴를 이어서 돌진 못합니다. 대신 걷는 속도도 빨라지고 발걸음도 더 가벼워졌으며 숨소리도 차분해져서 내 칭찬을 들었습니다.
옷가게 앞을 지나다가 맘에 드는 원피스 보이거들랑 사서 걸어두고 다시 의욕을 불태우라고 조언을 했는데 그이의 어머니께서는 “원피스는 적어도 80킬로를 넘지 않아야 입을 수 있다.”며 현실을 바로 보도록 하셨답니다. 큰 몸에 큰 눈과 흰 피부가 가려서 그렇지 예쁜 아가씨인데 마음이 애잔합니다.
그이를 1주일 이상 운동장에서 만나질 못합니다. 잠깐이라도 보고 응원해 줘야지 하며 새벽이면 운동장을 찾았으나 허탕입니다. 돌아올 때마다 “제발 원하는 만큼 체중을 줄여 그녀가 나비처럼 훨훨 날게 해주세요.”하는 바람만 남기고 옵니다. 물론 나는 내일도 같은 시각이면 까치발로 학교 담장을 넘어다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