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是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둘러 꽂히는데, 마땅히 (바퀴통의 가운데) 그것이 (가득 찬 바를) 가지는 바가 없어야, (물건을 싣는) 수레로서의 공능功能을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찰흙을) 이기고 치댐으로써 그릇을 일삼는데, 마땅히 (그릇의 가운데) 그것이 (가득 찬 바를) 가지는 바가 없어야,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공능을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문과 창을 뚫음으로써 방을 일삼는데, 마땅히 (문과 창의 가운데) 그것이 (가득 찬 바를) 가지는 바가 없어야, (사람을 머물게 하는) 방으로서의 공능을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이것이 까닭이다. (무위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가 이로움을 일삼게 되고, (유위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가 공능을 일삼게 되는.
輻, 輪轑也. 轂, 輻, 所秦也. 考工記曰, 共一轂, 以應一月之日. 轂與輻, 皆有也. 轂之中, 空者, 無也. 以其, 空也. 故能受軸以輾輪. 此, 則車之用也. 或曰, 車之用, 在於載物. 所謂無者, 指輿中空處. 亦通.
복輻은 (바퀴테 안쪽과 바퀴통 바깥쪽 사이에 둘러 꽂는) 바퀴살이다. 곡轂은 바퀴살을 둘러 꽂는 바퀴통이다. (『주례周禮』의 제6편인) 「고공기考工記」는 일컬었다. “(바퀴살은) 하나의 바퀴통을 더불어 한다. 한 달의 날 (수인 서른 개가 바퀴통 바깥에 둘러 꽂히는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를.” 〔하나의 바퀴통 바깥에 서른 개의 바퀴살을 둘러 꽂힌다는 뜻이다〕 바퀴통과 바퀴살은 모두 (수레의 공능功能을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이다. (그런데) 바퀴통의 가운데는 (뚫어져) 텅 비어 있는 바, (가득 찬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이다. (바퀴통) 그것은 (가운데가 뚫어져) 텅 비어 있는 바이다. 따라서 (바퀴통은) 바퀴축을 받아들이고, 바퀴를 굴릴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바퀴통의 가운데가 뚫어져 텅 비어 있는 바) 이것이 수레는 공능(功能; 用)을 일삼게 된다. 어떤 사람은 주석했다. “수레의 공능(功能; 用)은 물건을 싣는 데 자리한다. (당기무當其無에서) 무無는 수레의 (짐칸) 가운데의 텅 빈 공간을 가리킨다.” (이것) 또한 (뜻이) 통한다.
和土, 曰埏, 黏土, 曰埴. 皆陶著之, 事也.
흙을 물과 더불어 어우러지게 하는 일, 일컬어 연(埏; 이긴다)이라고 한다. 흙을 찰기 있게 하는 일, 일컬어 식(埴; 치댄다)이라고 한다. 모두 질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일삼는 바이다.
穿壁以向明, 曰牖.
(방의) 벽을 뚫어, (밖을) 바라보게 하고, (안을) 밝아지게 하는 바, 일컬어 창(窓; 牖)이라고 한다.
器之用, 在於受物. 室之用, 在於居人.
(질)그릇의 공능(功能; 用)은 물건을 받아들이는 데 자리한다. 방의 공능(功能; 用)은 사람을 머물게 하는 데 자리한다.
皆其空, 處. 故曰, 無之, 爲用. 固也.
(수레의 바퀴통, 질그릇, 방은) 모두 그 (가운데) 텅 빈 바가 자리한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有·有爲를 텅 비운 채,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 無爲)는 (수레, 그릇, 방이 물건을 싣고, 음식을 담으며, 사람을 머물게 하는 바와 같은) 공능(功能; 用)을 일삼는다.” 그렇다.
然非有, 以爲之地, 則亦無所措其用矣. 故曰, 有之以總利.
따라서 (가운데 텅 빈 바) 그것이 자리하는 바를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 無爲)가 아니게 되면, 그 (수레, 그릇, 방이 물건을 싣고, 음식을 담으며, 사람을 머물게 하는 것과 같은) 공능功能·用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수레, 그릇, 방과 같이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無爲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 無爲)는 (물건을 싣고, 음식을 담으며, 사람을 머물게 하는 바와 같은) 이로움(利; 用)과 (더불어) 어우러지게 된다.”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홍석주의 입장은 독창적이다. 첫째, 홍석주는 유有와 무無를 동일한 의미로 해석했다. 홍석주에게 있어서, 유有는 무위無爲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이며, 무無는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이기 때문이다. 둘째, 따라서 이利와 용用 또한 동일한 의미로 해석했다. 이利는 무위無爲인 유有가 일삼는 ‘이로움用’이고, 용用은 무위無爲인 무無가 일삼는 ‘공능功能·利’으로서, 수레, 그릇, 방의 물건을 실음, 음식을 담음, 사람을 머물게 함을 감안하면, 의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덧붙여, 노자는 유지이위리有之以爲利로 기술했지만, 홍석주는 유지이총리有之以總利로 주석했는데, 위爲와 총總은 의미 차이가 없다〕
譬之於人, 則耳, 欲聰, 於聽. 目, 欲明, 於視. 手指. 足行. 各, 連其能者. 有之利也. 方寸之, 中湛一虛靜, 而順應乎萬變者. 無之用也.
그것을 사람에 비유하건대, (이른바) 귀가 (무위無爲로써) 밝게 듣고자 하게 되면, (저절로 그러하게 밝게) 듣게 된다. 눈이 (무위無爲로써) 밝게 보고자 하게 되면, (저절로 그러하게 밝게) 보게 된다. 손이 (무위無爲로써 밝게 가리키고자 하게 되면, 저절로 그러하게 밝게) 가리키게 된다. 발이 (무위無爲로써 나아가고자 하게 되면, 저절로 그러하게 밝게) 나아가게 된다. (귀, 눈, 손, 발이 모두 무위無爲로써, 듣고, 보고, 가리키고, 나아가고자 하게 되면) 모두 그 (저절로 그러하게 밝게 듣고, 보고, 가리키고, 나아가는) 공능(功能; 用·利)과 (더불어) 어우러지게 된다. 이것이 (무위無爲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 無爲)의 이로움(利; 用)이다. 이른바, (귀, 눈, 손, 발의) 한 치(寸; 3cm)가 (무위無爲의) 가운데 자리하게 되고, (따라서 무위無爲를) 즐기게 되며, (따라서 무위無爲에 대해) 오롯하게 되고, (따라서 유위有爲가) 텅 비게 되고, (따라서 유위有爲가) 조용해지게 되면, (만물의) 온갖 변화와 (더불어) 어우러지고, 아우러지게 된다. (이것이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 無爲)의 공능(功能; 用·利)이다. 〔일촌一寸은 손가락 한 마디를 가리키는 말로서, ‘조금이라도’라는 뜻이다〕
譬之於國, 則百官, 有司. 各, 勤其職者. 有之利也. 穆然恭己於上, 而民, 自化之者. 無之用也. 然君子之道, 當有而有, 當無而無, 唯其可而已. 未嘗有所輕重貴賤也.
그것을 나라에 비유하건대,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여러 관리는 (무위無爲로써) 사안을 처리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 (무위無爲로써) 직무를 수행하는 데 부지런했다. (이것이 무위無爲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 無爲)의 이로움(利; 用)이다. (아주 먼 옛날의 여러 임금은 백성의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한 바(然; 自然·性·命)와 (더불어) 어우러지고, (따라서) 자신(의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백성의) 위에 자리했는데, 따라서 백성은 저절로 그러하게 (그러한 임금의 모습) 그것과 (더불어) 어우러지게 되었다. (이것이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 無爲)의 공능(功能; 用·利)이다.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는) 군자(君子; 임금과 관리)의 이치는 마땅히 (스스로 무위無爲를 가지는 바가) 있음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무위無爲를 가지는 바가) 있게 하는 바여야 하며, (스스로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음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하는 바여야 한다. 오로지, 그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군자인 임금과 관리의 이치로서 마땅한 바가)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임금과 관리 중에서, 스스로 무위無爲를) 가볍게 여김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유위有爲를) 무겁게 여기게 하거나, (스스로 유위有爲를) 귀하게 여김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무위無爲를) 천하게 여기게 한 사람은 일찍이 (한 사람도) 없었다.
老子曰, 天下萬物, 生於有, 有生於無. 又曰, 生之以爲利, 無之以爲用. 老子, 固未嘗廢有也. 而其意, 則已偏矣.
노자는 (제40장에서) 일컬었다. “천하 만물이 생겨난 바,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한 음陰·양陽의) 기氣이고,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한 음陰·양陽의) 기氣가 생겨난 바, 도(道; 性·德·命)이다.” 또한, (노자는 이 장에서) 일컬었다.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 道)는 이로움(利; 用)을 일삼고,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 道)는 공능(功能; 用)을 일삼는다.” 노자는 따라서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유위有爲한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道와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한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 道)를 (일삼는 바) 그만 둔 적이 일찍이 (한 번도) 없었다. (도道를 일삼는 바를 그만 두지 않고자 했던 노자의) 그러한 마음은 (이 책의 곳곳에) 자리할 따름이다.
及其, 流也. 夢幻天地. 糠粃品物. 而天下, 始大亂. 不可禁矣. 故張子曰, 大易, 不言有無. 言有無, 諸子之, 陋也.
(그러나 지금의 세상의 풍속) 그것이 (유위有爲를 위로 높인 채, 유위有爲의 아래로) 흐르는 데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하늘과 땅을 (도道·無·有를 가지는 바가 없는) 도깨비나 (이로움利을 일삼는 바가 없는) 허깨비로 여기게 되었다. 사물을 (도道·無·有를 가지는 바가 없는) 쌀겨나 (공능功能·用을 일삼는 바가 없는) 쭉정이로 여기게 되었다. 따라서 천하는 크게 어지러운 바를 비롯하게 되었고, (그것을) 멈출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 송宋나라 때) 장재(張載, 1022~1077)는 (『근사록近思錄』 제13권 「변이단류辨異端類」에서) 일컬었다. “(아주 먼 옛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상 사람들이 받들어 높이는 바가) 큰 『역경易經』은 (도道·自然·性·德·無爲·命를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 有爲)나, (무위無爲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 有爲)로 일컫지 않는다. (따라서 도道를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나, (무위無爲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로 일컫는 여러 학자들은 비루하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