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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
신라의 제28대 국왕.
즉위 전 이름은 승만공주.
진평왕의 둘째 남동생 국반(國飯) 갈문왕의 딸로 어머니는 월명부인 박씨였다.
연호는 '태화'(太和).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과 월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므로 제26대 진평왕의 조카였으며, 제27대 선덕여왕의 사촌 자매였다.
신라 3대 여왕들 중 1명이다.
다른 두 여왕과 마찬가지로 진덕여왕도 삼국사기에서는 '여(女)' 자가 빠진 '진덕왕'(眞德王)이라고 기록되어있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막론하고 역사상 여왕은 예외적인 사례이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 여왕이라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가 즉위한 것은 마지막으로 남은 성골혈통이었기 때문이며 그녀가 사망하면 더이상 성골이 없으므로 진골에게 왕위가 넘어갈 것이 암묵의 규칙으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던 상황이었으므로 진덕여왕 재위 기간의 정치적 실권은 비담의 난 토벌로 비담파 귀족세력을 제압한 김유신과 차기 왕위 계승의 유력한 후보였던 김춘추가 주도하는 세력이 사실상 잡고 있었다.
아직 알천을 중심으로 한 알천파 귀족들이 남아 있었지만 이들도 김춘추파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신라 사회를 전기와 후기로 나눠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개혁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차기 국왕이 거의 확실했고, 섭정에 해당하는 김춘추의 의도대로 진행된 것으로 보이며 많은 연구서들이 진덕여왕이 왕으로서 실질적인 통치는 거의 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김춘추와 김유신의 이른바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삼국유사》에서 음갈문왕과 혼인했다고 하는 선덕여왕 및 김위홍과 혼인했다고 하는 진성여왕 달리 진덕여왕의 국서(남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진덕여왕이 즉위한 시점에는 더 이상 성골 남성이 근친까지 다 포함해도 없기 때문에 혼인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했다는 연구도 있다.
김서현과 만명부인, 김춘추와 문희의 일화에서 나오듯 같은 골품끼리도 가문의 격이 차이가 나면 역사기록에 남을 에피소드를 만들 정도로 특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 혼인하기가 어려웠는데 성골과 하위 골품 간의 혼인은 어려우면 어려웠지 쉬웠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동경잡기》 간오(刊誤)에 '진덕여왕의 남편은 갈문왕(葛文王) 김기안(金基安)이다.'라는 기록이 있지만 《동경잡기》는 19세기 기록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부족하다.
신라 중고(中古)기 왕가 인물들이 그렇듯 진덕여왕의 이름 '승만'(勝曼) 역시 불교 세계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불교에서 승만부인은 석가모니로부터 장차 성불해 보광여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은 여성으로 불경인 《승만경》의 주인공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흥왕부터 시작된 신라 왕가=석가족(샤카족) 관념과 그에 바탕을 둔 성골 관념을 배경으로 즉위했으며 그렇게 즉위한 마지막 왕이다.
참고로 가까운 시대 사람인 진평왕의 후비 승만부인과는 다른 사람이다.
성도 승만부인은 손씨이고, 한자도 승만부인은 '승만'(僧滿)이며, 진덕여왕의 휘는 '승만'(勝曼)으로 다르다.
'젊고 아름다운 여왕'에 대한 로망 때문인지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도 당시 30세였던 손여은이 진덕여왕 역으로 출연했는데 사실은 진덕여왕이 즉위 당시에 30대 초반 이하의 젊은 여성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덕여왕은 국반 갈문왕의 딸인데 국반 갈문왕이 형인 진평왕과 몇 살터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인 김동륜이 572년에 사망했으므로 국반 갈문왕을 김동륜의 유복자라고 가정하더라도 진덕여왕이 즉위한 647년에는 살아있었다
치면 76세가 된다.
그러므로 그런 국반 갈문왕의 딸인 진덕여왕도 즉위할 당시에는 아무리 적어도 40대 후반~50대 전반의 중년여성 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고 10대 중후반이 결혼 적령기였고, 빠르면 30대 정도에 손자, 손녀를 보기도 했던 시대에 이 정도면 할머니로 불릴 연령대였다.
연령대로는 선덕여왕도 마찬가지였는데 대한민국 역사상 확실하게 젊어서 즉위한 여왕은 제51대 진성여왕 1명뿐이다.
기록에 의하면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는 7척에 이르러 팔이 무척 길어 무릎밑까지 닿았다고 한다.
물론 이런 기록은 전임자에 이어 후임자도 여왕이라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진덕여왕을 보살과 같이 묘사해서 그녀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였다는 해석이다.
선덕여왕에 대한 긍정적인 외모 묘사가 없었던 것을 보면 빼박또한 "팔이 길다"는 것은 덕있는 이의 상징적인 클리셰이기도 하다.
《삼국지》의 촉한 소열제유비도 키가 7척 5촌에팔이 무릎까지 내려간다는 묘사가 있다.
다만 체격이 크다는 묘사 자체는 사실일 수도 있는게 지증왕 이나 법흥왕, 진평왕 , 경덕왕, 진성여왕, 효공왕 등 경주 김씨 신라 왕가는 체격이 크다는 묘사가 있는 인물이 실제로 많은 편이다.
647년 1월 비담의 난 와중에 1월 8일날 선덕여왕이 붕어하고 뒤를 이어서 국왕이 되기는 했지만 애당초 선덕여왕이 진덕여왕을 후계자로 지명한 것 같지는 않아 보여 일각에서는 선덕여왕이 난리통에 죽고 김춘추와 김유신이 진덕여왕을 국왕으로 추대한 게 아닌가라고 보기도 한다.
훗날 김춘추 본인 역시 진덕여왕이 후계자로 직접 지명받은 것이 아니라 화백회의의 추대로 즉위했다고 말했다.
아니면 진덕여왕을 후계자로 지정하고 가뜩이나 여왕에 반대하던 비담 세력은 또 여왕이 즉위한다는 점에 거부감을 느껴여 주불능선리를 내세워 진덕여왕의 즉위를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석도 가능하다.
비담의 난 발발 직후에 선덕여왕이 사망한다는 점에서 이미 반란 직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비담의 난 진압으로 반(反) 김춘추 세력이 숙청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진덕여왕의 치세에서 실권은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천이 상대등이 되고,대아찬수승을 우두주의 군주(軍主)로 임명하는 등 비담의 난으로 야기된 혼란을 수습하고 치세를 시작했다.
선덕여왕 때처럼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김유신의 활약으로 공격을 막아내고 역으로 20여 개의 성을 점령하기도 하며 선덕여왕 때보다는 백제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당시 일본에서도 신라를 우습게 볼 정도였다.
즉위 직후인 647년에는 김춘추가 외교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일본은 이미 백제와의 동맹관계가 굳건한 나라였기에 잘 되지 않았다.
당시 신라 최고의 거물인 김춘추가 직접 바다를 건너갔다는 점에서 신라가 대충 찔러본 게 아니라 상당히 기대를 갖고 갔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정세를 살펴보면 김춘추가 건너가기 직전인 645년에 친백제계 가문인 소가씨가 몰락하는 다이카 개신이 일어나는데 김현구의 견해에 따르면 이때 소가씨를 몰락시키는데 큰 활약을 한나
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후지와라씨의 시조)가 상대적으로 친신라파였다고 보기도 한다.
즉위 이듬해인 648년에는 당나라에 감질허, 김춘추등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당 태종은 감질허를 사신으로 보낼 때만 해도 까칠했지만 김춘추가 오자 반갑게 맞아들이며 여러 가지 요구도 들어주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예전 선덕여왕 때 신라는 여자가 왕이니까 그 꼬라지라고 무례하게 행동했던 것과 다른 모습인데 결국 김춘추와 회담결과 적극적으로 동맹을 체결하여 나당 동맹의 기초가 이뤄졌다.
당 태종이 나당 동맹에 적극적으로 임한 것은 645년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패퇴했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 번 실패를 겪은 당 태종이 고구려 재침략을 위해서는 고구려의 후방을 노릴 수 있는 신라와의 협공이 꼭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645년 고구려 침공 당시 당 태종은 동맹국이었던 백제, 신라에게 모두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는데 신라가 당나라의 요청에 응해서 원군을 파병했지만 백제는 이전부터 당나라가 고구려를 친다면 지원군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말을 바꾸어 지원군을 파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당나라를 지원하고 있던 신라의 옆구리를 빈집털이했다.
백제의 태도에 큰 분노를 느낀 당 태종은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았고 당나라의 목표인 고구려멸망에 백제가 걸림돌이 되니 고구려를 치려면 방해가 되는 백제를 먼저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라 역시 당나라를 제외한 모든 주변국(고구려, 백제, 일본)이 신라를 적대하는 외교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당나라와의 외교 강화로 반 신라연합에 대응하고자 했다.
진덕여왕은 직접 비단에 수를 놓고 시를 지어 당나라에 바쳤는데 바로 <치당태평송>이다.
아첨이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라서 일각에서는 진덕여왕이 무슨 치어걸이라도 한 거냐고 비판하기도 한다.
당시 신라의 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지금에 와서야 굴욕적으로 보이겠지만, 백제와 고구려라는 강력한 외세에 나라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외교를 통해 국가와 왕조를 보전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지 결코 치욕이 아니다.
그리고 현대인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비굴해 보이는 이런 어법은 현대 이전의 동아시아에서 강대국인 중국과 교류할 때 다들 하는 관행에 가까웠다.
지금의 기준으로 역사를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기에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 없는 대화'라고 하지 않았는가!
《삼국사기》와 《수서》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의 영양왕이 수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후 화해를 요청할 때 스스로를 '요동똥 땅의 신하'(遼東糞土臣某)라고 자칭하면서까지 사죄하는 문서를 보냈고, 《위서》에 전문이 실린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할 때 보낸 국서에서는 '백제 공주를 (북위에 보내)후궁을 청소하게 할 수도 있다'라고까지 했다.
이는 당대의 사정을 보지 않으면 굴욕 외교로 보이겠지만 고구려나 백제가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서 나오는 표현들도 <치당태평송>의 구절들의 수위에 못지않았다.
특히 전후 사정을 보면 세 나라 모두 진심 따윈 없이 중국에게서 외교적 이득을 얻기 위해 말 뿐인 외교적 수사였을 뿐이다.
아니 나라가 망할 판인데 뭔 짓을 못하겠는가?
굴욕적이라고 해도 말로만 굴욕을 겪는 것이 진짜로 적 앞에서 무릎 꿇고 조아리는 것보단 낫다.
당장 동시대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서 박쥐놀음 하다가 망한 백제가 있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서 그렇지. 당시 신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이미 선덕여왕 시기에 대야성이 무너져 압량주가 최전선이 되었는데 이것을 현대 대한민국에 비유하면 연천군, 철원군 다 뚫리고 동두천시가 최전방이 된 격이다.
그나마 진덕여왕 시기에는 김유신이 20여 개의 성을 빼앗는 등 신라의 숨통을 트였지만, 김춘추가 즉위한 직후 고구려와 백제, 말갈이 연합한 대군의 침공으로 신라는 30여 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당시 김유신은 수도인 경주가 위협받을 때마다 필사적으로 싸워 개별 전투에서는 승리해 지켜냈지만 양면전쟁에서 신라의 한계는 분명했다.
일본에 대해서도 김춘추가 직접 건너간 것 이후, 적극적으로 사신을 파견해 외교를 통한 상황 타개를 노리기도 했다.
652년 6월, 653년 4월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조정에서는 "어차피 신라는 곧 망할 나라인데 우리가 도와줘서 뭐합니까?
우리가 전력을 안 써도 먹을 수 있습니다.
상황을 보다가 신라가 망할 때가 되면 우리가 낼름 먹어버리죠"라는 반응이었기에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사실 당시 일본의 판단은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았는데 신라는 당나라가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 백제와 고구려 연합 공격에 30여 개의 성을 잃었다.
어떻게 봐도 신라는 외교적 고립과 군사적 공격에 무너져 가고 있었던 것이 맞다.
문제는 예상과 달리 당나라가 방침을 바꿔서 고구려보다 백제를 먼저 멸망시키기 위해 10만명 단위의 대군이 황해바다를 가로질러 참전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도박과도 같은 카드가 통한 것이다.
기왕에 비담의 난으로 귀족세력이 약화된 이상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중국의 제도를 대거 도입해 왕권을 강화하게 된다.
진지왕의 폐위에서 알 수 있듯 진덕여왕 이전의 신라는 국왕과 귀족의 관계가 뚜렷한 상하 관계가 아니었고 상호 견제가 강했지만, 이 시기부터 진골귀족에게 신하의 상징물인 아홀(牙笏)을 갖고 다니도록 했고(650년) 새해에 국왕에게 충성서약을 하는 신정 하례를 시작하기도 한다(651년).
시랑(侍郞)이라는 벼슬이름을 처음 사용한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이런 제도들이 고려, 조선까지 천 수백 년을 계속 이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진덕여왕 시대에 바뀐 부분들이 한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셈이다.
진덕여왕은 비록 존재감이 약했지만 그녀의 시대는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그뿐만 아니라 신라 중앙집권 체제의 기반이 되는 집사부가 설치된 것도 진덕여왕 때이다.
물론 이런 개혁 대부분은 사실상 실권을 쥐었던 김춘추의 주도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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