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은혜의 하나님
2024. 12. 8(주일낮예배) 베드로전서 5:8-10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기쁨이 있는가? 정호승 이라는 시인이 쓴 지푸라기라는 시가 있다.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정호승 시인은 바람이 불면 날아다니는 지푸라기가 길에 버려진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호승 시인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이 잡고 싶어하는 마지막 희망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아니 지푸라기는 삶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사람의 진흙에 들어가서 그 집을 튼튼하게 세우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지푸라기도 자신이 해야 할 막중한 일이 있다는 것이다. 지푸라기도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역할이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미디안 광야에 있는 모세를 찾으셨을 때 모세는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라고 말한다. 애굽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즐거워하였던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한다. 그리고 40년이 지나 하나님이 부를 때 거절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모세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 850명과 기도대결을 펼쳐서 승리한 엘리야는 광야로 나가서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한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최악의 왕이었던 아합이 다스리는 북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선포하던 엘리야는 이제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 낙심한 것이다.
지금 제가 설명한 모세, 엘리야가 왜 이렇게 낙심하여 아무 것도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는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수고하였지만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이다. 갈멜산에서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면 이스라엘이 새로와질 줄 알았다. 그래서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과 기도대결하여 불로써 응답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었는데, 그 결과는 이세벨이 죽이겠다는 말밖에 없었다.
무슨 말인가? 열심히 해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낙심하고, 나는 아무 것도 못한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가? 카일 데일리가 쓴 근심이여 안녕이라는 책에 메리큐스 마네 부인의 이야기도 있다. 마네 부인의 남편은 사업을 부도내고 도망을 가 버렸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고 하루 아침에 길거리로 나 안게 되었는데, 어린 아들이 문방구에서 연필을 훔치다 들켜 학교에서 쫓겨났다. 가난과 두려움과 배고픔 그리고 우울증과 외로움과 불면증에 시달리던 마네 부인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미웠고, 또 결혼을 허락한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깨끗이 죽자는 결심을 하고 아이들을 재우고 가스밸브를 열었다. 그리고 아이들 옆에 누었는데, 그때 이웃집에서 잔잔한 찬송소리가 들려왔다. 가스로 인하여 정신은 몽롱하고 이제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아이들과 함께 죽어야 하는 그러한 상황이었는데, 옆 집에서부터 잔잔하게 찬송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마음 속에 근심있는 사람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슬픈 마음 있을 때에라도 주 예수께 아뢰라
마네 부인의 마음에 네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왜 나에게 맡기지 않느냐?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렸다. 그래서 마네 부인은 벌떡 일어나 가스밸브를 잠그고, 아이들을 깨우서 바깥으로 보내고, 또 창문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마네 부인은 이렇게 기도한다.
주여 저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죽을 마음은 가졌으면서도 기도할 마음은 갖기 못했습니다. 저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후 마네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로 가서 빈집을 찾아 새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네 부인은 이런 말을 한다.
죽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들이여!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용기로 바꾸어 보십시오. 백번의 탄식보다 한 번의 기도가 당신에게 기적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백 번의 절망보다 한 번의 믿음이 당신의 운명을 바꾸어 줄 것입니다.
어떻게 마네 부인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었는가? 하나님은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보낼 만 자를 보내소서 라고 말하는 그 모세를 설득시킨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설득하는 것은 연봉이나 복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고 하나님을 알려 주시고, 또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던지라 하여서 뱀이 되게하고, 또 뱀의 꼬리를 잡아라 하여서 다시 지팡이가 되게 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한 것이다.
이것은 모세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에 있는 엘리야를 먹이신다. 그리고 40주야를 달려서 호렙에 서게 하신다. 브엘세바에서 호렙산까지의 거리는 350Km 정도이다. 우리교회에서 서울역까지의 거리가 300km 정도이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그 보다 50Km나 더 먼 거리를 40주야로 달려서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달릴 때 엘리야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왜냐하면 갈멜산에서 브엘세바까지의 거리는 200Km정도이다. 엘리야는 이세벨이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어떻게 하나님이 불로써 응답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가? 하는 낙심과 내가 어떤 열심을 내어도 안돼! 하는 좌절에 빠져서 200Km를 달렸더니 번아웃이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먹고 350Km를 달렸는데, 지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호렙에 섰다. 그때 하나님이 엘리야 곁을 지나가시는데, 바위를 가르는 바람으로, 또 산을 흔드는 지진으로, 그리고 모든 것을 삼키는 뜨거운 불로서 임하신 것이다. 그때 엘리야는 40주야를 달리게 하신 하나님을 찾았지만 찾을 수없었다. 그 후 하나님이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셨을 때 엘리야는 순종의 길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하였던 엘리야는 엄청난 바람과 지진과 불이 임하였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졌을 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찾아야 하겠는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루 종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과 싸웠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창가로 가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이 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것입니까? 이 교회가 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것입니까? 당신의 세상이요, 당신의 교회라면 그것을 친히 돌보십시오. 저는 잠자러 가겠습니다.
루터가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하루 종일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된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을 외치고 싸운 것이다. 그랬던 루터가 밤이면 평안히 쉴 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평안히 잘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저와 여러분도 시와 때에 맞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이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8절)고 하였다. 여기서 대적(ἀντίδικος), 마귀(διάβολος)는 고발하는 자, 거짓으로 송사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거짓으로 고발할 자를 찾아 마귀는 두루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마귀가 삼킬 자를 두루 찾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욥기 1장 6절은 하루는 이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왔다. 그때 하나님은 사탄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 라고 물었을 때 사탄은 땅을 두루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말한다. 그때 하나님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라고 물었다. 하나님의 그 말씀에 사탄은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하고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자녀와 재산을 다 잃는다. 그래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로 고백한다.
그 후 욥기 2장 1절에 또 하루는 이 나온다.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그때 하나님은 사탄에게 또 네가 어디서 왔느냐?하고 물었을 때 사탄은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하고 대답한다. 그 대답에 하나님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하고 질문한다. 그 말에 사탄은 욥이 자녀가 죽고, 또 재산을 다 잃어도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라는 팩트를 말해야 한다. 그런데 거짓으로 고발하는 자인 사탄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 가죽으로 가죽을 대신 하리이까?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찬송하므로, 이제는 그의 뼈와 살을 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온 몸에 욕창이 나서 재 위에 앉아서 기왓장으로 가려운 곳을 긁적거리는 인생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대적이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다니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런데 교회는 거짓으로 고소하는 대적의 능욕과 박해를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오늘 본문 10절을 읽기 바란다.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베드로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모든 상황과 사건 속에서 충분한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또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영원히 들어갈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가 힘이 되고 있는가?
목회가 즐겁지만 때로는 이 모든 게 피곤하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고 답할 수 없는 질문들, 죄 그리고 오해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만두고 싶습니다. 좀 편하게 살고 싶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글이다. 유진 피터슨도 목회가 쉽지 않았던 것같다. 그런데 유진 피터슨이 계속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목사가 목회를 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성도가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 어렵고 힘든 삶 속에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함께하고 있음을 믿기 바란다. 그래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승리의 그 날을 향하여 오늘도 인도하고 있음을 믿어서 승리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