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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태복음 2:1-18
제목: 기쁨과 통곡의 갈림길에서
일시: 2011. 12. 18. 하늘사랑교회 주일강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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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토요일 저녁은 성탄 전야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은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이미 교회의 절기를 넘어서 세상의 연인이나 장사꾼들이 더 기다리는 날인 듯합니다. 이미 11월 말 부터 길거리에는 성탄 트리가 세워졌고, 성탄 캐롤이 울렸습니다. 극장에서는 성탄절에 맞추어 개봉을 앞둔 영화들이 여러 편 준비되어 있습니다. 장기간 경기침체를 맞고 있는 지역 유통업계는 이번 크리스마스와 2012 임진년(壬辰年)의 설 명절을 대비하기 위해 오래 전 부터 마케팅 작전에 돌입했다고 합니다. 신문을 보니까 지역 유통업체들이 성탄절을 맞아 자녀와 연인을 타켓으로 완구류, 보석류, 제과·제빵류 등의 특가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대전의 모 백화점에서는 연인들에게 사연을 공모해서 성탄절 전날 정문 LED 전광판으로 프러포즈를 할 수 있는 깜짝 이벤트를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이번 성탄절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려는 사람들도 있고, 그 틈을 타서 경제적으로 한 몫 잡아보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성탄절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성탄절의 모습이 그것만은 아닙니다. 이번 성탄절을 뜻 깊게 맞이하기 위한 행사들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난 6일 서울의 정도 주교좌 성당에서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가 주최하는 제1회 ‘성(聖) 니콜라 축일 기념 사랑 나눔 행사’가 열렸습니다. 성 니콜라는 270년 소아시아 리키아의 파타라시 출생으로 훗날 대주교(大主敎)가 되어 남몰래 많은 어린이와 노인들에게 선행을 베푼 사람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성 니콜라이의 자선행위는 훗날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져 우리에게도 친숙한 산타클로스의 유래가 됐다고 합니다.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들을 계획하고, 평화와 안녕을 구합니다. 그러나 인류최초의 성탄절도 그랬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동방박사들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성경에서는 동방박사들이 몇 명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이 드렸던 예물이 세 가지 인 것을 착안해 일반적으로 세 명의 동방박사들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동방은 일반적으로 바벨론을 가리키고, 박사들은 별들을 연구하는 점성술사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별을 주의 깊게 연구하다가 유대인의 왕이 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태어나신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롯왕과 유대인들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성경에 보니까,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하였다(3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크리스마스는 지금처럼 평안하지고, 거룩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혼란과 소동함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왜 일까요? 왜 인류 최초의 크리스마스는 평안함 대신 소동함만이 있었을까요?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그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왕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헤롯은 기원전 37년에 로마제국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의 왕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헤롯은 기원전 4년까지 나라를 점령하고 강력하게 유대를 통치했습니다. 헤롯의 통치기간은 크게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 시기(기원전 37-27년)는 주로 자신에게 반대하던 내부, 외부의 적들을 숙청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기(기원전 27-13년)에는 주로 대규모 건설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는 북 왕국의 옛 수도 사마리아를 재건하여 옥타비아누스에게 경의를 표했고, 팔레스타인 지중해 연안에 새로운 항구도시를 건설하여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하였습니다. 헤롯왕은 예루살렘 성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서쪽 지역에 자신의 궁궐을 화려하게 건축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헬레니즘 식으로 크게 개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헤롯왕의 대대적인 건축사업 때문에 유대 백성들은 상당히 많은 세금을 내야 했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과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시기는 헤롯왕의 세 번째 통치 시기(기원전 13-4년)로서 후계자 선정을 위해 가족 내에서 피의 숙청이 이루어지던 때였습니다. 헤롯은 자신이 죽기 전에 후계자를 세우려고 했고 그의 두 아름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을 대역죄로 몰아 기원전 7년에 사마리아에서 처형하였습니다. 그 후에 헤롯왕은 첫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장자 안티파테르를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나 그가 왕이 되기도 전에 왕의 행세를 하는 것이 미워서 그의 장자마저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언장을 통해 세 명의 아들들(아르켈라우스, 헤롯 안티파테르, 필립푸스)에게 유대 땅을 분할하여 나누어 주었습니다. 기원전 4세기에 헤롯왕이 죽자 유대 왕국은 헤롯의 세 아들들과 총독들과 같은 작은 분봉 왕들에 의해서 다스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크고 작은 힘의 경쟁들이 벌어졌습니다.
여러분, 힘의 경쟁이 있고 강한 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이 세상에 과연 참된 평화가 존재합니까? 언제든지 자신의 정적이 나타나면 여지없이 숙청하던 헤롯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러 왔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이 어떻게 들렸겠습니까?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지요? 헤롯왕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는지를 물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미가서 5:2의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작은 고을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헤롯왕은 아무도 모르게 박사들을 불러 가서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자신에게도 그 아기 있는 곳을 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도 그 아이에게 경배하고 싶다며 자신의 본심을 교묘히 속인 채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에게 경배한 후 자신을 피해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은 헤롯왕은 어떻게 행동하지요? 군사들을 시켜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무참히 죽이지요? 아마도 이 때 죽은 아이들이 당시의 인구 상황을 감안하면 족히 20명은 될 것입니다. 헤롯왕 한 사람의 분노가 두 살도 안 되는 어린 것들을 무참히 죽인다?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세상의 논리이고 힘의 논리입니다. 마태는 헤롯의 유아살인 사건을 예레미야 31:15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18절).” 메시아 탄생을 전후해 이 땅에는 큰 슬픔과 통곡의 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과연 이 세상에 참된 평화가 있습니까?”, “만약 참된 평화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평화를 구합니다. 우리 삶이, 우리 가정이, 우리교회가, 우리 사회가 평화롭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서 참된 평화를 만날 수 있습니까? 경찰청이 펴낸 한국의 범죄시계를 보면, 9시간 4분에 한 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강도는 1시간 36분에 한 번, 강간은 1시간 16분에 한 번씩, 절도는 3분에 한 번꼴로 발생합니다. 서울에서만 하루 957건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이런 곳에서 아무 일 없이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게다가 최근 한 주간 우리의 시선을 끌었던 국제뉴스는 단연 미국의 이라크 전쟁 종결선언이었습니다. 미국은 지난 15일(현지시간) 9년 가까이 진행돼온 이라크 전쟁의 종결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미국과 이라크군 수뇌부는 바그다드 인근 공항에서 전쟁 종결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리언 패네타 미국 국방장관은 이라크를 전격 방문해서 “이제 미군은 이라크를 떠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미군들을 향해 “여러분들의 희생으로 이라크 국민들이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면서 “미국은 앞으로도 이라크의 친구이자 파트너로 남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 명분이었던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WMD)는 이라크 영토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대량살상무기를 9·11테러 보복을 위한 침공 구실로 삼았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유엔 동의도 받지 못한 무리한 전쟁이었고, 진보 진영에서는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12일 기자회견 장에서 밝힌 대로, 이제 이라크 전쟁은 훗날 역사의 판단에 맡겨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미국이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지만 그 방법 면에 있어서는 무력을 이용해 또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을 사용하였다는 점입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무력에 의존한다. 앞뒤가 안 맞는 논리이지만, 이것이 이 세상이 평화를 지키는 방식입니다. 마치 헤롯왕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들들을 포함한 자신의 정적들을 무참히 숙청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힘의 논리 말고 다른 선한 방법은 없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힘의 논리 말고 그 이상 현실적이고 확실한 방식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힘이 있어야 나라를 지키고, 힘이 있어야 평화를 지킨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탄절의 참된 의미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성탄절의 참된 메시지는 이 세상의 힘의 논리를 지양하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평화의 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으론 안 된다! 참된 평화는 힘으로 얻을 수 없고, 힘으로도 지킬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평화를 얻어내고, 평화를 지켜낸다는 말입니까? “단 하나의 방법이 있지! 그것은 바로 사랑이야! 사랑… 사랑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야!”
아기 예수의 탄생을 들은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은 소동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부터 약 30년 후에 예루살렘은 또 한 번 크게 소동하게 됩니다. 그것이 언제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나귀타고 입성하실 때의 일입니다. 같은 마태복음 21:10-11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물론 이 때는 헤롯왕이 죽고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us: 26-36년 유대통치)가 다섯 번째로 유대의 총독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빌라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를 처형한 사람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뇌물수수, 폭력, 약탈, 불법, 재판 없는 사형집행 등으로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서 악명이 높던 사람이었고, 그로인해 36년에 로마로 송환되어 자살로 일생을 마감했던 사람입니다. 헤롯왕 때나 본디오 빌라도 때나, 예나 지금이나, 이 세상 힘의 논리로 참된 평화를 지켜나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사랑의 힘만으로 참된 평화는 이루어집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삶은 출생부터 죽음까지 오직 사랑 한 가지로 일관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가장 작은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헤롯왕의 핍박을 피해 그의 부모에 의해 애굽으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33세의 장년 예수님은 볼품없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무기력하게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무기력 해 보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한없이 실패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스미트 목사와 5-6명의 생존자들이 거꾸로 뒤집힌 배 안에서, 화염과 수마를 뚫고, 숱한 난관을 극복하며 탈출구를 찾아가는 스토리가 이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바다 위의 호텔이라고 불리는 초호화 여객선 포세이돈 호. 이 배가 해일을 만나 대서양 한 가운데서 침몰합니다. 배가 뒤집히면서 배에 물이 차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승객들이 하나 둘씩 죽어갑니다. 마침내 물이 가슴까지 차오릅니다. 머리 위는 강철로 이루어진 배 밑창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배 안에서 그 밑창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심장은 뛰고 있습니다. 숨도 쉽니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절망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침내 뜨거운 스팀 밸브에 매달려 스코트 목사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 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등이나 돌리지 마십시오. 얼마나 더 피를 흘려야 됩니까? 얼마나 더 죽어야 됩니까? 더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저를 거두어 가십시오.” 목사의 입에서 이런 절규가 나왔습니다. 절망 그 자체입니다. 뒤집힌 배 밑에서 이들은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았습니다.
그렇게 외쳤지만 그들은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여전히 배 안이라고 하는 동질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 배 안에서, 배라고 동질 안에서 구원은 없습니다. 화면은 헬리콥터 한 대가 뒤집힌 배 위로 내려앉고 구조원들이 용접봉을 갖고 거대한 배 밑창을 뚫어내는 장면으로 연결이 됩니다. 밖으로부터 생명이 주어진 겁니다. 밖으로부터의 구원!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이질로부터의 구원이 주어진 겁니다.
성탄은 이 세상의 힘의 논리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질이라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라는 동질세계 안으로 뚫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결국 배 밑창 안의 몸부림으로는 구원이 없습니다.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탄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 하늘이라는 이질로부터 이 땅이라는 동질의 세계로 내려오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세상의 힘의 방식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으로 살도록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탄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의 과제를 부여하신 날입니다. “네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 것이냐? 세상의 힘의 논리에 따라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겸손히 사랑의 원리에 따라 살아갈 것이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한없이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의 숙제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방식과 힘의 논리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말 그 힘이 너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진정한 힘이더냐?” 하고 물으시는 사건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연약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듯이, 우리들도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이 세상에 참된 평화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남을 위한 사랑의 실천으로만 가능합니다. 그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무기력해 보이고, 터무니없어 보여도 그것만이 우리를 구하고 이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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