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있는 포석정(鮑石亭)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포석정을 적어도 한 번은 직접 가보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이야기라도 들었을 것입니다.
포석정과 관련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잔치를 벌이다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는 신라 55대 경애왕(재위기간: 924~927)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임금이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 가서 잔치하며 즐겁게 놀던 때라 적병이 닥침을 알지 못하였다.(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賊兵至)"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포석정과 관련된 또 다른 기록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신라 49대 헌강왕(재위기간: 875~885)이 포석정에 가니 남산의 신(神)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곁에 있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왕에게만 보였다. 왕 자신이 춤을 추면서 그 형상을 보였다. 남산의 신 이름을 간혹 상심(詳審)이라고도 했으므로 이 춤을 사람들은 어무상심(御舞詳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 한다."라고 했습니다.
포석정은 중국의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에서 유래됐습니다.
유상곡수연은 굴곡진 수로 위로 물이 흐르게 하고, 그 위에 술잔을 띄운 후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 시를 한 수 읊는 놀이를 말합니다. 이런 목적으로 만든 도랑을 곡수거(曲水渠)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상곡수연은 지금은 중국에서조차 유적이 거의 없어 포석정이 매우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포석정에 남아 있는 것은 유상곡수연에 사용된 곡수거(曲水渠)입니다. 그 모양이 마치 전복을 포(鮑) 뜬 것과 같습니다.
이곳에 흘렀을 물이 언제부턴가 흐르지 않게 되어 옛날과 같은 유상곡수연의 모습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어렴풋이 그 모습을 상상해볼 수는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포석정의 형태가 지금까지 비교적 온전한 것은 그동안 나름대로 보수하며 관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일제강점기에 마음대로 보수해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일부가 파손되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이곳에 물을 채워 흐르게 하면 옛날처럼 술잔이 천천히 한 바퀴 돌며 흘러갈 것만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