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安朱門의 人物
한국의 신안주씨는 주자의 증손인 청계공 주잠(朱潛)이 중국의 환난을 피해 1224년 고려조에 망명하여 전남 화순 땅에 안착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주잠은 여러 차례 고려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직접 벼슬길에 오르지는 않았다.
주잠의 아들 주여경(朱餘慶)은 고려 고종 때 은사과(恩賜科)에 올라 좌승상을 지냈고, 손자 주열(朱悅)은 문절공(文節公)의 시호를 받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고려 원종 때 병부낭중(兵部郎中)으로 충청 경상 전라도의 안찰사(按察使)로 나가 크게 치적을 올렸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고 검소한 생활로 왕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뒤에 한림학사(翰林學士)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역임하고 충렬왕 때는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에 이르러 능성군에 봉해졌다. 주열의 세 아들 중 인장(印長)은 예부상서(禮部尙書) 인원(印遠)은 경상도 안렴사(按廉使) 한림학사 병부상서 삼사좌윤을 역임하였고, 인환(印還)은 첨의부사(僉議府使)를 지내는 등 신안주씨 문중이 명문가를 이루었다.
고려시대에 문과에 급제한 자는 모두 76명인데 이것은 족보에 근거로 한 것이며, 국조방목에 게재된 명단은 제외한 숫자이다(명단 별첨).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어 이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 말 유신(遺臣)의 포섭에 나섰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킨 주흥득공(朱興得公)과 주능득공(朱能得公)이 있고, 두문동(杜門洞)사건의 72인 중에 주순정공(朱淳精公)이 있다. 조선 개국공신은 의정부좌찬성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義禁府事)의 벼슬을 하고 웅성군(熊成君)으로 봉해진 주자정(朱子精: 문간공의 현손)과 훈일등개국공신(勳一等開國功臣)으로 제수 받은 안천군(安川君) 주인(朱仁)이 있다. 안천군의 안천은 오늘날의 안변 땅이다. 주인의 벼슬은 공조전서(工曹典書: 건설부장관 현 국토교통부장관)로 한양((漢陽: 현 서울))에 조선의 도읍을 세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즉,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이씨조선을 개국하여 왕위에 올라서 나라의 도읍을 결정코자 할 때 여러 신하들은 한결같이 이태조의 고향인 함흥으로 도읍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당시 공조전서 주인(朱仁)은 이를 반대하면서 “나도 본시 함흥 사람이다. 함흥에다 도읍하자는 것이 어찌 북쪽 백성의 소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함흥은 물이 얕고 들이 거칠고 넓어 토질도 좋지 못하여 도읍자리가 못 되니 한수(漢水:현 한강)가 뻗친 한양으로 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여 이성계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끝내 한양으로 도읍을 결정하게 되었다.
조선조의 주문은 고려조에 대한 충절로 기인하여 초기에는 벼슬길에 거의 오르지 않았으며, 주로 주자학(성리학)을 전파하며 후학과 인재를 양성하는데 전념하였다. 조선시대에 총 31명[명단은 국조방목(國朝榜目) 과방고(科榜考) 한국과거사(韓國科擧史)에 등재된 자료 참조하고 명단은 별첨]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은 하였지만 대부분의 벼슬은 거의 지방 현감 군수, 중앙의 응교와 같은 정3품의 벼슬에서 그치고 주만리(朱萬篱)만이 종2품인 참판(현 차관급)에 올랐다. 이러한 인재등용 현상을 보고 주문의 선조들은 주문부등용(朱門不登用)이 조선조의 원칙이라 칭하여 주문의 자손들에게 과거를 보지 말라는 ‘포과훈(抛科訓)’까지 내린 일이 있다. 즉,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는 보되 벼슬을 하려는 목적으로는 과거를 보지 말라는 뜻이다.
사마시에 합격한 선조는 총 74명이다. 사마방목(司馬榜目: 생원 진사시 합격자 명부)은 총 230회 시행되었으나, 현전하는 사마방목은 186회 뿐이다. 이밖에 과거에는 급제하지 않았으나 학문의 실력과 지혜가 뛰어나 나라의 요청으로 벼슬을 한 사람이 834명이나 되어 이는 과거에 합격한 31명(이 중 22명이 주인환의 후손 즉, 계파손)보다 많은 엄청난 숫자가 된다. 그중에서 역사 기록상 나타나는 29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명단 별첨).
이밖에 주문의 선조들은 국란을 당했을 때 목숨을 돌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항쟁하거나 순절한 구국충신(救國忠臣)과 애국지사(愛國志士)가 타 문중보다 남달리 많았다. 몇 사람을 살펴 보면 몽화(蒙禍)를 해결한 구국재상 문절공(주열), 의병장 무열공(주몽룡), 가배양 권관(權管: 주대청), 애국지사(주진수・주용규・주석환・주기철)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약관도 못 되어서 향시에 합격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주택정(朱宅正)은 우암 송시열이 덕원에 유배되어 오자 그를 찾아가 학문을 배웠고 1679년(숙종 5년) 식년 문과에 올라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이성현감(利城懸監)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화를 입자 그의 문인이라 하여 삭직되었다가 노론이 다시 집권하면서 복직되어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그 외 중종 때 전적(典籍)을 지낸 주양우(朱良佑)와 선조 때 군수(郡守)를 역임한 주덕원(朱德元)의 부자가 유명했고, 주정(朱精)은 숙종 때 개성교수(開城敎授)를 역임하여 경원부사 주표(朱杓)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주몽룡(朱夢龍)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金山)군수로 의병장 강덕룡 정기룡 등과 함께 거창 우지현 싸움에서 용전하여 왜군을 격파하자 영남 3룡으로 불렸다.
한말에 와서는 고종 때 주문에서 가장 높은 벼슬인 군부대신(軍部大臣: 대한제국 군부의 으뜸 벼슬) 및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종1품 벼슬)을 하고, 주문의 본관을 신안(新安)으로 복관통일(復貫統一)을 주도한 주석면(朱錫冕)공과 고종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주인섭(朱寅燮)이 이름났다. 주진수(朱鎭洙)는 신민회 강원 대표로서 만주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 모집에 공헌하여 대한청년단 모검부장을 지낸 주석환(朱錫煥)과 함께 신안주문을 충(忠)과 의(義)의 가문으로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앞장섰던 주원(朱源) 건설부 장관을 비롯하여 대법원 판사를 지낸 주재황(朱宰黃),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주돈식(朱敦植)과 시인 언론인 정치가로서 4・19 혁명 후 부흥부장관・상공부장관을 역임한 주요한(朱耀翰) 민선 충북도지사를 지낸 주병덕(朱炳德),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을 지낸 주광일(朱光逸) 등이 관계(官界)에서 주문을 빛낸 선조들이다. 학계에서는 세종대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평생을 바친 주영하(朱永夏) 종로, 충북대학교 총장을 지낸 주자문(朱子文) 등이 있으며, 사업가로 성공한 이는 일신제강을 창업한 주창균(朱昌均) 회장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신안주씨는 전국에 18만여 명이다. 앞으로 나라에 이름을 떨치는 분, 대사업가로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분, 학문으로 크게 명성을 올리는 분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 주문의 집성촌은 아래와 같다
① 대한민국(남한)에는
경북 울진군 일원 전북 완주군 구이면 중인리
전남 여수시 돌산읍 금성리 전남 여수시 삼일면 화치리
경남 사천시 서포면 금진리 충남 홍성군 일원
전남 고흥군 도양읍 신양리 경남 창원시와 김해시 일원
② 조선민주주의공화국(북한)에는
황해도 벽성군 추화면 신왕리 평남 대동군 남형제 산면 일원
평북 정주군 남서면 보산동 함남 함주군 주지면 구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