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질문 5: 본질은 가능태로 실존은 현실태로 이해해도 무방한 것인지?
교수답변 : 엄밀히 말해서 무방하지 않습니다. 현실태(actus)라는 말은 ‘가능태(potentia)'에 대립하는 용어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가능태와 현실태의 합성으로 이루어져있다”는 명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오는 명제인데, 중세철학자들이 이를 존재를 설명하는 요긴한 명제로 사용한 것입니다. 말 그대로 현실태란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가능태란 아직 어떤 것이 완성 혹은 최종점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있겠는데, 이 채워 넣을 수 있는 혹은 실현할 수 있는 무엇을 가틍태라고 하지요. 즉 ‘아직 실현의 가능성이 있는 여지’를 가능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신이 아닌 모든 존재는 지금현재 현실적으로 실현된 국면(현실태)과 아직 실현할 수 있는 무엇(가능태)을 동시에 지니고 있지요. 그런데 본질이란 어떤 것을 분명하게 규정할 수 있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나는 인간으로서의 본질, 동양인으로서의 본질, 교수로서의 본질, 남자로서의 본질 등 다양하게 말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최종적인 본질이란 ‘나의 이름이 지칭하는 개별자로서의 본질’이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본질이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또한 무엇인가 다양한 가능성을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본질’ 자체가 ‘가능성과 현실성’을 지닌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실존은 가능태와 현실태의 개념과는 다른 차원에서 말해지는 것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은 하나 같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로 출발하는데, 그 이유는 실존이란 내가 ‘나 자신을 누구라고’ 분명히 규정하기 이전에 나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존에서 부각되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곧 나의 실존인 것은 아니지요. 가령 내가 부잣집 아들이라고 해도 내가 갈망하는 것이 ‘예술’이며, 돈이나 부는 전혀 관심 밖이라고 한다면 ‘경제적인 것’은 나의 실존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따라서 실존을 곧 ‘현실태’로 볼 수도 없지요. 다만 실존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의 줄인 말로 사용한다면 실존을 ‘현실태’로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