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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조선말기 시대적 배경과 복음전파 과정
외국선교사들에게 비춰진 조선은 “은둔의 나라”로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존재는 물론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조차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을 방문하였던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조선이 중국의 한 변방국가이거나 도시로 여겼습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였을때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국의 한 도시로 여겼을수도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외국인들에게 있어서 조선은 아주 생소하고 지도에서 조차 잘 드러나지 않은 복음개척지였습니다.
금강산과 백두산과 한라산과 천혜의 자연을 목격한 외국인들의 눈에 조선은 “푸른 숲의 나라”,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4계절의 경계가 분명한 에덴동산의 모델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다에서 배를 타고 항해하던 사람들은 서해안과 제주도를 바라보며 그 풍광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종류를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운 꽃들로 인하여 조선은 “꽃의 나라”로 불리워 지기도 하였습니다.
➀ 조선의 문화와 환경문제
그러나 도시생활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조선의 수도로 알려진 한성을 바라본 외국선교사들은 비천함과 불결한 위생 상태로 인하여 참혹한 주거 환경에 경악하였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과 아시아 조선인을 비교하며 동일한 맥락에서 관찰하였을 것입니다. 외국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였을 때, 조선에는 양식 가옥이 단 한 채도 없었습니다. 숙박업소는 물론 외국인에게 맞는 시설은 전혀 없었고, 특히 재래식 화장실 시설은 외국인이 도무지 사용 불가능한 처지에 있어서 이로 인한 질병과 에피소드가 끝없이 발생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본국 선교사와의 교신에 사용되는 유일한 우편물은 언제 발송되고 언제 도착 가능한 것인지 기약이 없었습니다. 도로는 우기(雨期)만 되면 말 안장까지 물이 차오르거나 흙투성이가 되어 통행이 전면 중단되었습니다. 왕이 거주하는 경성(서울)의 환경이 이 정도였으니 지방은 더 이상 논할 것도 없었습니다.
조선에 온 선교사들은 수년 동안 진흙집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화장실은 구더기로 가득하였고 쥐들이 동네를 아주 쉽게 돌아 다녔습니다. 문에 방충망이 없어서 하절기에는 모기와 파리떼들로 잠을 이룰수 없고, 겨울에는 바람이 들어와 살을 에는 듯한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천연두, 이질, 설사병, 장티푸스, 발진 등이 자주 발생하여 몇 명의 외국인들이 생명을 잃어야 했습니다. 1886년에는 콜레라가 창궐하여 한성을 비롯하여 경기지역까지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당시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가 하루에 천명에 달할 정도로 전염상태는 심각하였지만 뚜렷한 치료법 조차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1886년, 알렌이 본국에 보낸 선교보고에는 7월15~9월까지 일반 사망자 940명 등 7,092명이 사망하였고, 하루에 460구의 시체가 운반된 적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독과 치료를 통하여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환경개선 미비 등으로 이러한 질병은 계속 창궐되고 있었습니다.
조선에 파견된 초기 선교사들은 언어습득과 복음전파의 목적앞에서 열악한 환경과 먼저 싸워야만 했습니다. 특히 무당과 조상숭배와 굿판 등 우상숭배 사상이 만연한 악령의 역사들로 인하여 선교사들의 행보는 초기부터 힘겨운 싸움에 지쳐 있었습니다. 조선은 나라 전체가 유교, 불교, 샤머니즘(Shamanism)과 토테미즘(Totemism)에 혼재되어 있어서 서로 다른 종교가 조선인들의 정신세계를 동시에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수도 한성은 인구 20만명의 대도시였습니다. 한성에는 조선왕실이 거주하는 왕궁이 있고, 대신들의 주거지가 4대문 안에 위치하는 정치,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주한 외국공관들과 행정기관들이 한성안에 위치하게 되었고, 선교사들의 선교지도 당연히 서울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외국인으로서 조선의 타지역을 여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신뢰할만한 통역사를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문화권의 정부와 조정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선교사의 환경은 복잡다단하였습니다.
➁ 외국인연합교회 설립과 복음전파의 시작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1885년 4월10일(고종22년), 알렌에 의해 광혜원이 설립되었습니다. 언더우드선교사와 아펜젤러가 입국한 후 1885년 6월21일, 알렌과 스크랜톤과 헤론 부부가 “최초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4개월 후인 8월에는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培材學堂,현,배재중고등학교)이 개설되었고, 10월11일, 아펜젤러, 스크랜톤가족, 언더우드, 알렌, 헨리 루미스, 마리온호 함장 밀러, 회계주임 트레일리치, 의무관 크레이그 등 12명이 참석한 조선 “최초의 기독교 성찬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한성(서울)에서 정기적인 예배가 진행되는 “외국인연합교회”가 설립되었고, 1886년 4월25일 부활절, 스크랜톤의 딸 “마리온 스크랜톤”과 아펜젤러의 딸 “앨리스 아펜젤러”가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당일 1885년 일본공사관 직원으로 부임해 외국인 집회에 참석한후 결신자가 된 “하야가와 데츠야”가 아펜젤러에 의해 “최초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1886년 11월6일, 협소한 장소로 인하여 미국대사관 공관으로 예배처소를 옮긴 외국인연합교회는 “아펜젤러를 담임목사로 추대”한 목사위원을 선출해 교회조직을 구성하였습니다.
조선 조정의 공식적인 입장은 기독교가 불허되었습니다. 그러나 외국 공관에서의 종교생활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강대국 공관을 힘으로 제압할 능력과 의지가 미약하였고, 이미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땅을 획책하며 조선 공권력을 무력화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인에 대한 종교적 탄압은 전후 변화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조선인들은 가족과 형제와 이웃으로 부터 외면당하고 사실상 집에서 쫓겨나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➂ 최초의 조선인 세례자 노춘경
알렌의 조선어 선생이었던 “노춘경”이 어느날 알렌의 서재에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자기 집으로 몰래 가져 가서 밤새도록 읽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노도사로 알려진 노춘경이 알렌에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알렌은 언더우드 목사를 소개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양육을 받은 노춘경은 1886년 7월11일, 아펜젤러와 길모어의 축하속에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례로 최초의 세례자가 되었습니다. 노춘경의 세례는 극도의 보안속에 진행되었고 조선인은 단 한명도 참석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알렌선교사가 입국한지 20여개월 만에 최초의 신앙인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경의 힘이었습니다. 노춘경은 알렌과 스크랜톤의 어학선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어도구를 통하여 사람과 성경을 만나게 하고 그리스도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1887년 1월23일,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등 3명이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아 조선인 세례자는 4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중국선교의 개척자 모리슨 선교사는 중국선교 7년만에 첫 번째 세례교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1월의 강한 바람과 추위가 계속되는 한성, 언더우드의 집안에서 세례식이 거행되는 동안 헐버트 선교사는 밖에서 망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 만큼 당시 조선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생명을 담보할 수 없는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노춘경 등 세례를 받은 조선인 네 사람이 조선에서 금지된 새로운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위험까지 담보한다는 측면에서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7월24일, 배재학당 재학생 “박중상”과 10월2일, “한용경”이 아펜젤러에 의해 세례를 받는 등 세례자가 점점 늘어나 세례자가 11명에 이르렀습니다.
➃ 새문안교회(서대문교회) 설립과 최초의 장로 피택
1883년, 평안도 의주출신의 인삼무역상 서상륜이 중국 만주의 고려문에서 영국인 선교사 존 로스 목사를 만났습니다. 서상륜은 로스 목사의 전도로 결신자가 되었고 성경번역사업에 참여하였습니다. 그후 1883년 5월16일, 조선인 최초로 조선인 서경조, 서상륜 형제에 의한 “소래교회”가 황해도 장연구 대구면 송천리 소래마을에 설립되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인 평신도로 구성되었고 성경을 깊이 알지 못하였지만 성경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신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최초 초가집에서 시작된 소래교회는 1895년 8칸의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며, 이듬해인 1896년에는 다시 8칸을 증축하였습니다. 이후 소래교회는 신임 서양선교사의 한국어 교육원으로 사용되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 황해노회가 소래교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총신대학교 양지캠퍼스에 소래교회를 재현하였습니다.
1885년 4월, 조선에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듬해인 1886년 5월11일, 고아와 빈곤계층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아원 형태의 “언더우드학당”을 설립하였습니다. 그후 언더우드학당은 영신학교로 개편되고 훗날 연세대학교로 발전하였습니다. 조선의 어린이들은 물건취급을 당하는 듯한 인상을 받은 언더우드는 어린이를 그리스도의 자녀로 교육하려는 목적을 희망으로 품고 있었습니다. 그 결실과 열매가 맺히는 순간을 보기까지 언더우드의 신념과 신앙은 결코 변함이 없었습니다.
1887년 9월27일 화요일 저녁이었습니다. 광화문 서편의 돈의문내에 위치한(서울 정동 예원학교)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채에는 언더우드 목사와 존 로스 목사, 그리고 서상륜 등 세례교인 14명이 참여한 가운데 새로운 교회의 설립기념예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국 장로교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새문안교회”의 설립예배였습니다. 제 1대 담임목사로서 언더우드 목사가 취임하였고, 서상륜과 함께 2명이 장로로 선출되었으며, 또 한사람의 교인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 이후 교세는 급격히 성장하였고, 남녀가 분리된 예배당이 협소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는 최초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1893년, 곤당골에 “숭동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1894년, 연못골에 “연동교회”, 1896년, “서교동교회”, 1906년, “노량진교회”를 각각 연이어 설립함으로서 교회에 의한 최초의 개척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경이로운 것은 최초의 새문안교회 예배자 14명 가운데 13명이 서경조, 서상륜 형제가 전도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가지는 열매의 증거였습니다.
1885년, 로스의 보고에 의하면 서울에 70명, 의주에 18명, 송천에 20명의 세례지원자가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조선국 내의 복음전도는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에 의해 전도되고 훈련 되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랜 유교적 전통과 무당, 굿판 등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사상에 젖어 있는 조선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선교사들은 날마다 기도에 매진해야 했고, 조선의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 굳건한 신앙을 날마다 다짐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한 인내와 고난을 극복한 열매가 세월의 흐름속에 빛나고 있었습니다.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숭동교회는 부흥사경회 장소로 유명하였습니다. 연동교회는 인근의 경신학교와 정신여학교를 기반으로 청년세대들을 복음화하는데 매우 기여하였습니다. 1890년 이후, 교회의 설립은 가속화 하였고, 급속한 성장에 대응하기 위해 서울을 중심으로 남부, 중앙, 동부, 서부지구등 4개의 지구를 조직하여 선교사들이 각각 순회선교를 하였습니다.
➄ 감리교회 최초의 정동교회 설립
1887년 10월9일, 성경공부를 위해 구입한 집에서 감리교 최초의 “벧엘예배당”이 설립되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한 “벧엘예배당”(정동교회) 설립기념예배에는 만주에서 온 매서인 최씨, 장씨, 배재학당 학생 한용경, 박중상, 일본인 하야가야, 스기바시, 권서인 최씨부인 등 7명이 참석하였습니다. 10월16일, 매서인 최성균의 아내가 조선여성 최초로 세례를 받았으며, 10월23일, 최성균, 장점화, 강씨, 한용경, 최성균의 아내가 참여한 감리교 최초의 성찬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부속물이었던 조선의 중심에서 세례받은 최성균의 아내가 다른 세례받은 남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성찬식에 참여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경이적인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봉건주의 사고에 의한 남녀차별이 엄격한 조선에서 남녀가 한자리에 함께 앉아 예배드리는 그 날은 요원하였습니다. 정동교회 주변으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위치하여 남녀 청년세대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센터로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11월9일, 아펜젤러의 자택에서 조선인 대상의 예배를 시작하였습니다. 예배당을 가득 메운 추수감사절에 이어 12월4일, 배재학당 학생 “유치겸”, “윤동규”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1887년 성탄예배를 드리는 정동교회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김명옥의 세례를 시작으로 찬송, 스크랜톤 박사의 기도, 마태복음 2장 성경봉독과 누가복음 2장 성경봉독을 한 스크랜톤 박사,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태복음1:21~)는 제목으로 설교하신 아펜젤러 목사, 주기도, 찬송가 내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축도“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예배속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1888년 12월, 서문밖 애오개교회(현,아현교회)가 설립되었고, 1889년, “감리교 지방회”가 조직되었으며, 1890년, 동대문교회, 중앙교회가 설립되는 등 감리교는 165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1887년 4월13일, 아펜젤러는 조선세관 직원 헌터와 함께 경기 고양, 장단, 송도, 금천, 평산, 서흥, 황주, 평양으로 순회전도를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지방사람들이 자신들에 대하여 무시하거나 관심이 없었지만 아펜젤러는 씨앗을 뿌린다는 마음으로 흔들림없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해 가을, 언더우드는 송도, 소래, 평양, 의주로 전도여행을 가서 의약품과 서적을 나누어 주고, 귀경길에 소래에서 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후 소래교회에서 20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소래교회가 자립하기 까지 그 토대를 굳건히 하였습니다.
스크랜톤의 부인인 스크랜톤 여사는 조선의 여성이 겪는 고통에 대하여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부관계는 수직관계의 전형적인 구조로서 남편과 아내는 명령과 복종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부녀자와 아이들은 남자 어른들에 의해 방치되거나 폭력으로 유린되고 과부들의 안전은 매우 위험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최씨부인의 세례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스크랜톤 여사는 1888년 1월, 이화학당에서 12명의 처녀와 3명의 부인들을 회집하며 “주일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2월에는 주일저녁 예배후 35명의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성경반을 조직하고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어에 능통하지 못한 스크랜톤 여사가 남자 통역사를 성경반 성경교사로 채용했을 때, 부녀자들은 남자 통역사로 인하여 교회오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그래서 부득불 휘장을 설치하여 목소리만으로 성경공부를 하였으며 이러한 장면은 1925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남녀 차별로 인하여 평양 장대현 교회는 V(브이)자 형태로 교회를 건축하여 중앙 모서리에 강대상을 두는 코메디같은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였습니다. 복음은 오직 헬라인과 야만인과 자유인과 종과 남자와 여자와 신분과 지위와 성별을 초월하여 평등하게 하나되는 것이지만 조선인들의 마음과 문화속에 정화되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➅ 조상제사문제와 첩 문제
조상제사문제는 조선인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매월 제사가 있고, 설날과 추석에는 몇 회의 제사가 하루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조선의 제사는 기독교 신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으로 점진적인 수용이 불가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상제사를 금하고 굿판과 같은 유사행위도 일절 금함으로서 엄격한 신앙을 고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제사와 달리 설날과 추석명절은 조선의 고유명절로서 점진적인 수용이 불가피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내에서도 이러한 제사 문제를 고민하는 가운데 신앙을 떠나는 사람이 발생하였으며 최초에 세례를 받고 중직자가 된 사람들 속에서도 이탈자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가 교회적으로 큰 문제로 대두되었으나 선교회는 “제사 문제”에 관한 원칙을 준수해야만 했습니다. 제사문제를 계기로 선교회는 세례 기준을 높이고 일정기간 동안 신앙생활을 하여 신앙심이 깊어진 사람을 대상으로 세례를 주었으며, 세례후에도 바로 입교인으로 허락하지 않고 일정기간이 지난 후 입교인으로 허락하였습니다. 초기 해외선교사들은 설날과 추석명절이 성경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하여 엄격한 중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인 신앙인들은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는데 주저하였습니다. 자칫 이러한 문제로 조선선교가 벽에 부딪히고 수많은 신앙인들을 이탈하게 하는 요인이 될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제사 문제에 관한 선교사들의 단호한 입장과 달리 조선인 교역자들은 유연한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해외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조선인 교역자들은 설날과 추석에 행해지는 문제와 관련해서 권고와 권면으로 하고 점진적인 탈피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인 교역자들은 설날과 추석 명절을 옹호하였고, 이들 또한 설날과 추석 명절을 지내는 등 조선의 전통을 중시하였습니다. 전통 명절을 고수하려는 조선인 교역자들에 의해 결국 신사참배로 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을 반복하였습니다.
조선에는 본처 외에 첩을 두는 경우가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인 남성은 여자에 비해 우월적 지위를 갖고 있었으며 부인을 동등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여자와 겸상을 하지 않았고, 가정 경제권도 남자가 가지고 있어서 여자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남자들은 본부인 외에 첩을 두는 관례가 보편화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첩을 두고 있어도 아내인 여자가 그것에 대하여 이혼을 제기하거나 문제를 크게 삼을 수도 없는 것이 조선후기의 생활문화였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인에게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조선인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정당성을 주장할 뿐 회개와 반성을 거부하였습니다. 1895년, 감리교는 제사와 첩에 대하여 엄격한 규칙을 선포하고 비록 교회 출석자라도 출교할 것이라고 명하였습니다. 장로교 선교회 역시 오랫동안 이 두가지 문제를 숙고한 끝에 이것을 금지하여 세례교인 자격을 강화하되 그들에 대하여 출교 조치는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➆ 기독교 전교 금지결정
1888년 4월28일, 조선의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현,외무부장관) “조병식”이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3국 공사에게 기독교 전교를 금지하라는 조회문을 통보하였습니다. 미국 공사 “휴딘스모어”는 조선주재 선교사들에게 “기독교 신앙전파 전면금지, 기독교식 예배금지, 조선인 성례금지”를 요청하는 공문을 공지하였습니다. 조선에서의 선교가 이제 본궤도에 오를 무렵에 조치된 기독교 전교 금지령에 대하여 미국 선교본부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조정의 칙령은 “장소를 불문하고 어떤 종류의 종교교육도 불허”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전교금지는 천주교에 대한 제재가 주된 목적이었으나 기독교도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천주교는 “명동성당”을 궁궐과 왕들을 모신 종묘보다 높은 위치에 건립하려는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였습니다. 천주교 프랑스 주교는 이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 권력을 이용하는가 하면 러시아의 정치적 지원까지 받으려는 행위를 가속화 하였습니다. 고종의 건축중단을 무시하고 서방권력을 이용하려 하였던 천주교의 무례함에 대하여 고종황제는 금교령을 선포하였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금교사태는 기독교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선교사업은 중단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1888년 5월, 선교학교 아침 경건회를 비롯하여 주일예배와 조선인 종교활동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고, 지방에서는 기독교 문헌들을 강제 소각하고 종교의식을 전폐시켜 수년간 쌓아 올렸던 신앙의 토대가 모래성처럼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언더우드학당과 배재학당에서도 찬송가가 일시적으로 중지되었고, 미국공사관에서도 예배 소리가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기도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핍박이 개시되자 선교사와 조선인 신앙인들은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였고,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부르짖었습니다. 그 결과, 10월이 되면서 그 빗장은 다시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복음이 일시 중단되었을 때, 좌절과 실망보다는 “기도”로서 일치단결된 마음을 모으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경험한 사례가 되었습니다.
➇ 영아소동
1888년 5월, 기독교 전교 금지령 이후 뜻하지 않은 “영아소동”이 발생하였습니다. “외국인들이 조선인 악인들을 매수하여 조선인 어린 아이들을 꾀어 잡아 먹고, 눈알을 빼어 약용과 사진현상할 때 사용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무지와 무식이 가져온 헛소문이었지만 이 일로 9명이 처형되는 등 수많은 피해자가 나왔습니다. 외국공관과 의료선교의 중심인 외국인 병원에서 아기들의 심장과 눈을 잘라 외국관리와 선교사들의 요리로 사용한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이것을 믿는 조선인들의 수가 급증하여 곳곳에서 데모가 발생하였습니다. 길에서 자기 자녀를 데리고 가는 것 조차 위험한 상황에 이를 정도로 소문은 마치 사실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해군들이 서울로 긴급 출동하고 자국민 보호를 위해 조선민중과 대치하는 상황까지 일어났습니다.
진상조사에 나선 조선 조정이 근거없는 헛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후에야 진압에 나섰습니다. 길에서 이러한 헛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도 체포하는 등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자 사태는 진정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의 금교령과 영아소동에 대하여 미국 본국 선교부는 조선선교의 위축을 고려하여 선교사업에 대한 예산을 삭감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기도와 지혜로서 모든 조치는 4개월만에 복원되었고 선교사업은 정상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천주교는 강대국 권력을 등에 업고 결국 명동성당 건축을 강행하였지만 기독교는 정부조치와 맞서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지혜를 구함으로서 조선 조정과 우호적인 관계가 정립되었고, 영아소동까지 잘 해결되어져 기독교 선교사업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갖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