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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가 있는 풍경
박 덕 규
나는 군 복무 시절에 두 번 정도 도둑질을 한 것 같다. 첫 도둑질은 내가 신병으로 전방 부대에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고참병 두 사람과 다른 중대 내무반에 들어가 모포 몇 장을 훔친 일이었다. 이 년에 한 번 실시하는 군 재물 조사에 임하게 된 날 이른 아침이었다. 십여 일에 걸쳐 남는 보급품을 땅에 파묻거나 모자라는 것과 바꾸고 해서 모든 것을 정량대로 맞추어놓았다 싶은 전날 밤 점호 때 재점검해본 결과, 그때껏 내무반에 멀쩡하게 자리해 있던 모포와 베개, 야전 삽, 판초 우의 등이 몇 개씩이나 비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훈련병 티를 못 벗은 신병한테는 그런 궂은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였지만 워낙 사태가 급박했다. 상병급부터 시작해서 최말단 신병인 나와 내 동기생들까지 모두 보급 투쟁조에 편성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작전이 정작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의외로 싱겁게 성공을 거두었을 공산이 크다. 재물 조사 결과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기억도 나지 않았다. 두번째 도둑질은 내가 상급 부대에 전출 간 후의 일로, 사병 식당에 보관중이던 우리 내무반 식기함에서 무려 다섯 개의 식기를 도난당한 것을 만회하려고 저지른 일이었다. 일석점호를 마친 밤중에 소주와 안줏거리를 사든 우리 내무반 고참병들이 사병 식당에 근무하는 말년 병장과 취사장으로 들어간 뒤, 식기조 상병들인 우리는 역시 사병 식당에 보관중인 다른 내무반 식기함을 뜯어 여유 있게 식기를 꺼내왔다. 다음날부터 각 내무반 간의 식기 도둑질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동안, 우리 내무반만은 식기를 보관함에 두지 않고 내무반으로 옮겨 보관했었다. 그 뒤로 그 도둑질이 언제 어떻게 다 끝나서 우리 내무반 식기가 다시 사병 식당으로 옮겨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외에 내가 저지른 도둑질이 꽤 더 있기는 했을 터였다. 이를테면 명절 때 배급되는 부식 중에서 외박 나가거나 출장 간 병사들의 것을 보관하겠다고 하고서는 내가 먹어치웠다거나, 야간 근무를 서러 초소까지 오가다가 주운 수통이나 탄띠 같은 걸 내 것으로 써버렸다거나, 낡은 군화를 하급병의 새것과 바꿔 신고 지내다가 잊어버리고 그냥 제대를 한 일 같은 것들이 그랬다. 그러나 내가 저지른 이런 류의 도둑질은 따지고 보면 어른이 되면서 누구나 거치고 지나는 일종의 통과제의 과정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것에 비하면 군대 시절에 내가 도둑을 당한 경우는 비교적 기억 속에 소상하게 남아 있었다. 역시 처음 자대 배치를 받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일요일 오전에 전투복을 말끔하게 빨아서 빨래 건조대에 널어두었다가 저녁을 맞았다. 저녁식사를 하고 동기생들과 함께 열을 맞춰 구호를 외치며 내무반으로 돌아오다가 무심코 빨래 건조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마침 빨랫줄에 널린 빨래들이 석양빛에 물들어 특별한 조명을 받고 있는 연극 무대 장치처럼 기이한 색채를 뿜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야, 신병! 하고 나를 불러서 얼른 돌아서며 관등성명을 대려고 하던 차였는데, 갑자기 한 떼의 바람이 미친 듯이 몰아쳐서 건조장의 빨래들이 일제히 허공에 수평으로 눕는 모양을 보고 나는 얼이 빠져버렸다. 마치, 그 빨래들이 건조대 기둥을 뽑아버리고서라도 황급히 서쪽 하늘 속으로 날아가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길을 걷다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채였고, 주위는 어느새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관등성명을 제때 못 대 순간적으로 주눅들게 했던 야, 신병! 하는 소리가 실은 나와 동행하던 내 동기생이 뒤에서 장난질을 한 것이었음을, 내가 아침에 전투복을 세탁해서 널어놓았던 그 자리가 휑 하니 비어 있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한 허공의 여백으로 느껴지고 난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상급 부대에 전출 가서는 야전 상의를 도둑맞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되찾은 일도 있었다. 내가 처음 배치 받은 최전방 부대에서는 윗옷의 왼쪽 가슴에 달린 명찰 위에다 별도로 민정경찰이라고 쓴 명찰과 또 그 위에 독수리 마크를 달아 철책선에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부대 소속이라는 뜻을 표나게 드러내는 것이 관례였다. 그게 별것 아닌 듯싶은데도 어쩌다 거울 속에서 그 모습을 보게 되는 때면 공연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느낌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게 졸병일수록 더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첫 휴가를 나와서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까지 군복을 입고 나가서 남의 시선이 내 명찰 위에 집중되는 것을 즐기곤 했고, 전출 가서도 일부러 그 마크들을 떼지 않고 버텨보려고 궁리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묵혀둔 옷을 한 벌씩 꺼내 입을 때마다 윗옷의 명찰과 마크가 하나씩 뜯겨나갔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뜯겨나간 자리에 그것들이 붙어 있던 자국이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 위안거리가 되었다. 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옷 중의 한 벌인 야전 상의가 없어진 것을 안 것은 전출 간 그해 여름 어느 날이었다. 야전 상의는 전투복과는 달라서 복무 기간 중 단 한 벌만 보급되는 동절기 옷이라 누가 계획적으로 훔쳐가는 일이 아니라면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일과시간 중에 내무반에 보관되어 있던 그런 옷이 없어졌다면 그건 분명히 다른 내무반원이 들어와 훔쳐간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며칠 동안 나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해, 군대 가기 전부터 그때까지 배운 모든 욕설을 마구잡이로 쏟아내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억울해도 별수 없었다. 그런 류의 도난 사건쯤은 아무것도 아닌 부대였으며, 그것을 공적인 문제로 부각시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유치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는 부대원들이었던 것이다. 가을부터 입고 다녀야 하는 옷인데 입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으니, 추위에 떨면서 외투 없는 겨울을 그냥 지나거나 아니면 복장 불량자로 낙인 찍혀 군기교육대로 가거나 하지 않으려면 결국은 다른 데서 훔치거나 사제품을 사서 입고 다녀야 했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추석 연휴가 지나자 본격적인 가을이 왔고, 모두들 하절기 때 팔꿈치 위로 접어 올렸던 전투복 소매를 펴 내렸으며, 그 위에 야전 상의를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동료의 야전 상의를 빌려 입고 야간 초소 근무에 나가면서도 눈에 불을 환하게 켜고 있었다. 늘 옷을 말끔하게 다려 입고 근무를 서야 하는 탓에 남의 새옷을 도둑질하는 버릇이 붙어버렸다는 이웃 내무반 경비소대 대원들 중에서도 키가 큰 친구부터 관찰 대상이었다. 전역할 때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온전한 보급품을 지니고 나가려는 말년 병장들도 대상이 되었다. 나는 내 눈과 의지를 믿었다. 아무리 옷을 변형시킨다 해도 민정경찰 명찰과 독수리 마크가 놓여졌던 선명한 자국을 지울 만큼의 기술을 가진 사람은 적어도 부대 안에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인내는 긴 만큼 썼다. 10월이 다 가도록, 겨우 마지막 하나 남은 여자친구한테서도 편지 한 장 안 왔다. 인사계나 선임하사들한테 복장 불량이라고 머리가 쥐어뜯기거나 허벅지를 꼬집혀 시뻘겋게 피멍이 드는 데도 신물이 났다. 컵라면 한 번 안 사먹고 모아둔 군대 봉급을 떨어내 사제품을 사느니, 차라리 나도 훔치자, 이런 생각이 절로 났었다. 그럴 즈음이었다. 참모 차를 타고 사단 의무대로 외출을 가게 된 과장을 따라, 사타구니에 생긴 습진을 치료할 양으로 따라나선 날이었다. 그곳에서 기어이, 그 선명한 특수 임무 수행군의 마크 자국을 보고 말았다. 내 예상이 빗나간 게 아니었다. 상대는 경비소대 소속이 아니었다. 본부 행정반 소속의 사단장 당번병으로, 일병 때부터 아예 사단장 숙소에 가서 살아온 말년 병장이었다. 평소에 내무생활에서 열외되어 있어서 내 눈에 띄기가 어려웠던 것인데, 제대를 앞두고 의무대에 있는 친구한테 포경 수술을 받으려고 왔다가 나와 부딪쳤던 것이다. 내 옷은, 흔히 그러는 대로 안감을 뜯어내고 겉을 다리미로 잘 다려 몸매가 날씬하게 드러나 보이면서도 노티가 적당히 서려 있도록 만들어놓아서 제 옷처럼 참 잘 어울린다 싶은 그런 상태였고, 그래서 나까지도 무심코 지나칠 뻔했다. 도둑은 내가 명찰 자국 쪽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따지는데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화도 내지 않고 그저 어이없다는 표정이어서 이 사람도 원래 철책선에서 근무하다 전출 온 사람인가 생각하고 걸음을 뒤로 뺄 뻔했다. 그날 밤에 법무부 소속 병사인 내무반 고참병에게 부탁해 도둑한테 전화를 걸게 했더니 그제서야 누가 갖다준 걸 고쳐 입은 거라고 둘러댔다. 고소당하지 않으려면 알아서 하라, 하는 식으로 최후 통첩을 했다. 이튿날 낮에 내무반에 와보니 명찰과 계급장 자리가 비어 있는 내 야전 상의가 내 관물대 안에 쑤셔박혀 있었다.
군대 시절 도둑 얘기라면 참으로 빼놓을 수 없는 아찔한 일이 하나 있다. 내가 속해 있던 첫번째 부대에서 나는 일시적으로, 휴가 간 동기생인 군수 담당 사병을 대신하면서 중대 군수 창고를 관리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휴가병이 돌아왔고 나는 곧바로 전출을 갔다. 그 창고는 더이상 나와는 아무 인연이 없게 되었지만, 바로 그 창고에서 뒤에 벌어진 사건 때문에 자주 악몽에 시달려야 했었다. 모든 게 내가 전출 간 뒤에 벌어진 일이라 사건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잘 알 수는 없는데도, 나는 제대 후에도 한동안 혼자서 그 일을 추리하고 종합해보며 치를 떨다가 서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했다.
그 무렵, 우리 사단만 그랬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사단장 명의로 전 사병의 외출 외박 금지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병기류 보관 상태가 총점검되었는지, 곧 내가 있던 전(前) 부대의 그 창고에서 M16 소총 한 자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보안대와 헌병대가 즉각 출동해 총기 분실 경위를 수사하게 되었고, 그 부대원 모두가 수사 대상이 되어 수난을 겪게 되었다. 특히 그 창고 담당 군수계 사병부터 시작해서 이미 전역한 전 군수계 사병들이며, 그 창고와 연이어지는 다른 중대 창고들의 담당 사병들이 주된 표적이었다. 또 일반병들뿐 아니라 당시 순번제로 중대 일직 사관이나 대대 일직 사령 근무를 한 소대장이나 중대장까지도 모두 조사를 받아야 했다. 사단 헌병대에 끌려간 군수계 사병들에게 가해지고 있던 고문 얘기를, 나는 우리 부대에 며칠에 한 번씩 다녀가던 그 부대 문서 수발병에게 직접 들었다. 헌병대에 연행되어가지 않은 일반 병사들에게는 부대 연병장 전체가 일종의 고문장이 되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는 다리를 걷어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쪼인트 까인 거 좀 봐라, 이거. 일시적으로 그 창고를 관리한 나까지도 수사 대상에 들게 된 것 같더라는 얘기까지 그 사람이 했다. 하, 그래요? 뭐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겠어요? 하고 여유를 부렸지만, 그때의 쭈뼛한 느낌이라니!
문제의, 개머리판 없는 소총으로 무장한 은행 강도 사건이 발생한 것은 내 전 부대의 총기 분실이 확인되기 전인 것 같다. 이치를 따져보면, 소총을 든 은행 강도 사건이 먼저 있었고 그것 때문에 총기류 점검이 시작돼 그 부대에서의 소총 도난 사실이 밝혀지는 순서라야 맞겠는데, 실제로 그랬는지는 기억을 곰곰 더듬어봐도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어쨌든 은행 강도 사건은 발생 얼마 뒤에 범인이 검거되어 곧 망각의 세월 속에 묻혀버렸지만 그 무렵에는 정말 나라 전체가 시끌벅적한 사건이었다. 부대 내의 수사는 범인이 잡힌 후에 저절로 종결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범인이 조금이라도 늦게 잡혔다면 상급 부대에 와 있던 나까지도 끌려가 고문을 당했을 것이었다. 실제로 범인은 내가 배치되기 전에 그 부대에서 복무하고 제대한 전역병으로, 내가 잠시 관리를 맡기 몇 달 전에 옛 부대에 면회를 가서 그 군수 창고에서 M16 한 자루를 훔쳤다. 개머리판을 떼어내 부대 뒤 야산에 버리고 총신을 개조해 범행에 사용한 것이었다. 범인의 자백에 따라 소총을 훔친 경위가 소상히 밝혀지게 되었고, 그게 일간 신문에 그림으로까지 그려지면서 기사화된 걸, 나는 부대 안에서 텔레비전 뉴스와 신문 기사로 보아서 알았다. 또 범인이 소총을 훔친 날의 일직 사관과 말년에 집으로 모포와 군화를 빼돌린 전역병 몇이 영창에 갔다는 후문을 듣기도 했다. 말 마라, 니 억시기 운 좋은 놈이다! 그때 내게 소식을 전하던, 전 부대에서 내게는 몇 달 상급자였던 문서 수발병이, 내가 상급 부대로 전출을 간 것도 빽 좋은 집안 덕인데 거기에다 그런 액운까지 절로 피해갔으니 얼마나 행운아인가 하고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짓던 야릇한 표정이 그 뒤까지 생생했다.
군대 시절의 도둑 사건을 떠올리게 된 것은 뉴스에서 그 시절의 사단장 얼굴을 본 것 때문이 아닌가 했다. 어젯밤에 분을 삭이느라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누워서 뒤척거리며 통 잠을 못 이루다 새벽녘에 살짝 잠이 들긴 한 모양이었다. 아침에는 누군가 자꾸 벨을 누르는 듯한 소리에 깨어나 리모컨으로 텔레비전까지 켜놓고 있었으면서도, 내내 빈속으로 누워 그 모양이었다. 내 군대 시절 동안의 사단장은 이제 3선 국회의원, 그것도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중이었다. 군 출신들이 정치권을 장악하던 때에 줄곧 야당 자리에 있었던 여당 구성원들이고 보면 국방위 쪽을 맡을 사람으로는 누가 봐도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 사람 얼굴이 정오 뉴스에 잠깐 비치고 나서부터, 어제 도둑맞은 일로 떠올릴 것이 군대 시절 일 외에도 많을 법한데도 웬일인지 잡념의 꼬리가 그런 식으로만 물고 물리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오늘은 원래 딸아이가 오는 날이었다. 떨어져 산 지 반 년, 이 주일에 한 번 딸아이가 올 때마다 내가 해준 일이라고는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놀이공원이나 강변 둔치 따위에 데리고 가서 함께 놀거나 뷔페나 피자집 같은 데서 딸아이가 즐기는 음식을 사 먹이는 것이 전부였다. 딸에게 해줄 게 이것뿐인가 싶은 내 자괴감도 갈수록 커져서 그게 내 표정에도 자주 나타나는 걸 느끼겠더니, 바로 딸아이가 슬슬 심심하고 따분하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 입에서, 우리 다 같이 한 집에서 살면 안 돼? 하는 소리가 다시 나오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생각해낸 것이, 지금 집에 이사 올 때 뒷 베란다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자전거였다. 이 년 전에 누나 집 식구 모두가 교환교수로 캐나다로 가는 매형을 따라 이사를 가게 되는 바람에 중학생인 질녀가 몇 번 안 써본 새것을 넘겨준 것이었는데 키가 맞지 않아서 한두 차례 타보다가 말았었다. 실은 보통 자전거보다 훨씬 값이 비싼 기어변속식이어서 어린아이로서는 더 익히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지난주 일요일, 그걸 꺼내 거실 한가운데 세워놓고 어디를 어떻게 손봐야 하나 곰곰 궁리하며 오전을 보냈다. 운 좋게도 오후에 이동식 자전거포가 집 바로 앞에 와 있는 걸 보게 되었다. 타이어를 새것으로 갈아 끼우고 기어와 변속기에다 기름을 듬뿍 칠하게 했다. 한참 동안 자전거포 앞에서 땀을 흘리며 녹이 슨 데마다 사포로 닦아내고 겉을 기름걸레로 잘 닦아서 윤이 반짝반짝 나게 하는 나를 주인으로 오해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아이도 몇 있었다. 마지막으로 성능 시험도 하고 키도 가늠해볼 겸 일부러 지나가는 초등학생을 불러 세워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돌고 오게 하는 동안까지 이동식 자전거포 주인을 붙들어두기도 했다.
그 자전거를 도둑맞은 걸 알게 된 것이 어젯밤이었다. 내일 딸아이가 온다, 하는 조바심에 약속된 밤 모임에 불참을 통보하고 난 뒤, 딸아이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를 며칠 당겨 일요일에 하기로 해서 이번에는 딸아이를 보낼 수 없다는 아내의 전화가 걸려왔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내가 참석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빛이 조금도 묻어 있는 말투가 아니라는 데 더욱 화가 난지도 몰랐다. 약속이 틀리잖아! 나는 나지막이 소리를 질렀고, 재미있게 해주지도 못하면서 뭘 그래, 라는 투로 아내는 맞받아쳤다. 나는 뭐라고 꽥 소리를 칠 뻔했는데, 그 순간 잠깐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고, 내가 타고 달리는 자전거에서 바퀴 하나가 옆으로 튀어나가 저 혼자서 언덕 아래로 굴러내려가는 모양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어 또다른 장면이 스쳐갔다. 전날 밤, 아니 그 전날 밤, 집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에 시건 장치를 단단히 해서 세워둔 자전거가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선명해졌다. 전화는 어느새 끊어져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어젯밤 들어와보니 자전거는, 튼튼한 시건 장치째로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경비원이 있기는 했지만, 이미 경비가 허술해질 대로 허술해진 조합 아파트였다. 오토바이를 부르릉대고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면서, 누굴 의심하고 누굴 탓해야 할지 그 대상을 끝내 찾아내지 못해 속으로 몸부림치며 울었다. 경찰서로 달려가 신고를 해버릴까 하고 생각했다가 군대 시절 야전 상의를 도난당하고도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던 때를 먼저 얼핏 떠올렸던 게 아닌가 싶었다. 집에 돌아와 팬티 차림으로 냉장고에 남아 있는 국산 포도주를 꺼내 비우는 동안 비디오도 오디오도 작동시키지 않고,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이어 거실에 그대로 드러누워서 무슨 생각인가를 골몰히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앉았다. 뉴스에서 사단장을 본 게 시작이 아니었다. 밤을 꼬박 새운 듯했지만 실은 도둑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도둑 중에는 내가 신문에서 보긴 했지만 결코 기억해낼 수 없는 그 소총 도둑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도둑이 식기 도둑떼를 이끌고 사병 식당으로 잠입하는 달 밝은 밤의 연병장 풍경이 펼쳐졌다. 그 연병장을 완전 군장을 하고 혼자 뛰고 있는 친구의 얼굴이, 교도소에서 탈출해 이 년여를 숨어 돌아다니다가 최근 붙잡힌 한 신출귀몰한 탈주범이었다. 탈주범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도둑들을 검거하기 위해 뿌린 전단이 마구 짓이겨졌다. 그 전단에는 모진 고문을 당해 멍청해진 것 같은 사내들의 몽타주 사진들이 게재되어 있었다. 그중에 마약 환자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얼굴도 있었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뭐라고 말을 하려다 그냥 입을 꾹 다물고 백치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아버지 얼굴도 포함되어 있었고, 또 내 야전 상의를 훔쳐갔던 당번병도 있었다.
당번병, 야전 상의 도둑, 그자였다! 나는 오싹 소름이 끼치는 느낌 속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달려갔다. 그 야전 상의 도둑이 지난주 일요일 오후에 집 앞에 온 이동식 자전거포 주인을, 분명 그대로 닮아 있었다. 상대방 말귀를 얼른 알아듣지 못한 척 되물을 때의 얼굴이 꼭 그랬다. 바로 그자였다. 그자는 지난 일요일 오후, 일을 마무리하고 떠나려 했다가 무엇 때문인지 남아서 내가 아파트 상가 철물점에서 사온 시건 장치를 자전거에다 시험 삼아 장치해보는 걸 옆에서 지켜보았었다. 나는 세수를 하고 변기에 앉아 배를 쥐어짜 누르다 말고 뒤 베란다로 나가 밖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 이동식 자전거포가 바로 밑에 내려다보였다. 어, 거기요! 하고 소리치다가 나는 부리나케 바지를 입고 아래로 달려내려갔다.
화물형 승합차를 개조해서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전거 수리를 해주는 이동식 자전거포는 마땅히 개점 위치와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비정규적인 점포였다. 지난주에는 일요일 오후에 왔었고 오늘은 오전에 와서 일하다가 막 전을 걷고 어디론가 장소 이동을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사층 계단을 뛰어내려갔을 때 자전거포는 시동을 걸고 차를 몰아 우리 동을 벗어나고 있었다. 손을 저어보았지만, 돌아보려 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사층까지 뛰어올라가 헬멧과 오토바이 키를 가지고 내려왔다. 경비실 옆에 주차시켜둔 오토바이를 발차하고 보니까, 이제 자전거포 주인은 영락없는 내 딸아이 자전거를 훔쳐간 도둑이었고, 그 옛날 군 복무 시절 내 야전 상의를 훔쳐간 이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온 상습 절도범이었다. 마찬가지로, 그 이동식 자전거포 안은 자전거 수리 시설이 갖춰져 있는 게 아니라 실은 며칠 새 훔친 자전거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오토바이로 그 자동차를 추격하는 동안 나는 조금씩 냉정해져갔다. 그 자전거 도둑이 내 야전 상의를 훔친 그 친구가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주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옛날의 일을 들먹여 가중 처벌하는 식의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게도 되었다.
나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자전거를 전혀 탈 줄 몰랐다. 집에 자전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워낙 내가 활동적이지 못해서 친구 자전거나 아니면 자전거 대여점 것을 빌려서 타볼 엄두를 내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넉넉한 시대는 아니라 해도 3남 2녀의 중산층 가정이라면 집에 자전거 한 대 정도는 있을 만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자전거를 사오신 적이 있기는 했다. 그 시절, 뒤에 짐칸이 있는 둔중한 여느 자전거에 비하면 안장이 위로 솟아 있고 핸들 부분이 밑으로 조금 처져 있는 아주 세련돼 보이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아버지가 형들한테 명령하셨다. 얘 자전거 타는 것 좀 가르쳐줘라. 누가 할래? 여동생이, 머슴애가 자전거도 못 타냐 하고 놀리다가 내 주먹으로 팔을 얻어맞았다.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곳이기도 하고 내가 다니는 곳이기도 한 집 앞 학교에서 나는 고교생인 큰형이 시간이 자유로운 일요일에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게 되어 있었다. 설렘 이상으로 두려움이 컸다. 뭔가 남자답게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형들에게 늘 퉁바리맞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 멍청한 놈아, 너 가르치다가 날 새겠다, 큰형이 이런 식이 되더라도 이번만은 절대로 아버지한테 이르지 않고 견뎌야 정말 남자답게 씩씩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을 것이라고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토요일 아침이 되었을 때, 나는 더이상 그런 걱정 그런 각오를 할 것도 없게 된 현실을 알게 되었다. 간밤에 큰형이 과외 선생 집에 자전거를 몰고 나갔는데, 과외 공부를 마치고 나와 보니까 자전거가 없어졌다는 얘기였다.
내가 비로소 자전거 타기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 무렵 아버지는 관용차를 타고 다니는 직위에 올라 있었다. 우리집이 관사였고, 관용 자전거 한두 대씩은 당연히 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나는 다리가 제법 길어졌으므로, 굳이 자전거 위에 오르면서 미리부터 앞으로 몰고나가는 탄력을 이용하는 방법을 취하지 않고도 쉽게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나이가 된 셈이었다.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자 뚜렷이 어디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아버지가 행사를 하나씩 치를 때마다 집에 가져오는 체육모자 같은 걸 쓰고 틈만 나면 자전거를 몰고 밖으로 나돌아다녔다. 그렇지만 몇 년을 그랬어도 내 자전거 타는 솜씨는 결코 남자다워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 위에서 엉덩이를 번쩍 들고 일어선 채 달리는 것도 못 했고, 두 손을 놓고 탈 수도 없었으며, 달리는 자전거에서 뛰어서 내리며 멈추게 하는 방법도 몰랐다. 그러면서도 집 식구들 누가 보기라도 하면, 동네에서 제일 잘 달리는 사람처럼 급하게 페달을 밟으며 질주하는 흉내를 내곤 했다. 어느 날 나와 함께 마을 뒷산으로 산책을 갔다 내려오시던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너 산길 내려가는 것 보면 다 안다. 내려가는 발이 땅을 딛는 모양을 보고도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겁이 많고 모험심이 적은지를 다 짐작하고 계셨던 것이다.
나한테 비하면 내 딸아이는 적극적인 편이었다. 그런 점은 제 엄마하고 닮았다. 또래 아이들이 세발 자전거를 탈 때 이미 두발 자전거를 가리키며 졸랐고, 누구보다 먼저 보조 바퀴를 떼고 탔다. 하기야 그것도 운동 신경이 그만큼 뛰어나다기보다, 욕심이 앞서는 편이라고 볼 수 있었다. 딸아이가 보조 바퀴 없이 두발 자전거를 제대로 타려고 애쓰는 얼마 동안은 내가 꽁무니를 양손으로 붙들고 따라서 달려가주느라 참 애를 먹었다. 마침내 원피스를 입고 묶은 머리를 달랑거리며 까르르 웃음소리를 내며 보조 바퀴 없는 두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던 딸아이의 뒷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지던 날이 생각났다.
거기, 거기 서요! 이웃에 있는 대단지 아파트 지역을 벗어나는 사거리 지점에서야 달리는 자전거포는 내가 줄곧 거칠고 힘차게 보내온 수신호를 알아챘다. 나는 내가 자전거포를 추격하면서 너무 심하게 팔을 흔든 게 아닌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청에서 주민들에게 제공한 주말농장이 푸르게 펼쳐져 있는 녹지대 쪽으로 머리를 들이대면서 자전거포가 멈춰 섰고, 곧 내 오토바이가 자전거포의 사이드 미러를 들이받을 듯이 미끄러지면서 운전석 옆에 가 섰다. 무슨 일입니까? 말보다 표정으로 먼저 묻는 그 얼굴이 야전 상의 도둑보다는 확실히 검었고, 십여 년이란 세월을 고려해서도 더 늙어 보였다. 혹시, 하고 나는 말꼬리를 내리며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조수석에 놓인 기름때 묻은 수건 위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조립식 장난감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걸 보고는 나는 더욱 말문이 막혔다. 언제 또 우리 동네에 옵니까? 내가 헬멧 속에서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내가 조금 더 큰 소리로 같은 말을 하자 그 사람은 무슨 말로 알아들었는지 별 망설임도 없이 차의 시동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차 뒤쪽으로 가면서 따라와보라는 손짓이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오토바이를 인도 가까이 붙여 세우고 차 뒤로 걸어갔다. 사내는 차 꽁무니에서 트렁크식으로 여는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누가 버렸길래 주워다 고쳐놓은 건데 필요하면 저걸 사 가시든가. 싸게 줄 테니까. 내가 다가가기를 기다렸다가 사내는 차 안으로 고갯짓을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내가 중고 자전거를 찾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 같았다. 시치미 떼기가 완벽해서일까, 그 표정이 정말 내가 꿈속에서나 상상 속에서 만난 어떤 도둑의 그것도 결코 아니었다. 차 안 짐칸에 여러 공구들 위에 기대어 누워 있는 자전거는 내 딸아이 것하고는 전혀 모양새가 다른 성인용 자전거였다. 사내는 내가 원한다면 꺼내 보여줄 수도 있다는 듯이 허리를 굽혀 안으로 손을 뻗어 보였다.
조금은 어색하고 미안한 심정이 되어, 이동식 자전거포가 달려가는 길 반대편을 표나게 택한다는 것이 주말농장을 끼고 돌아 오르는 야산길이었다.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개간중인 공사장 입구 가게에서 생수 한 병을 샀다. 몇 끼나 굶은 속으로 거침없이 흘러 들어가는 생수에 당혹스러워하는 내장이 느껴졌다. 금세 아랫배가 싸하게 아파왔다. 코에서 쉰내가 뿜어졌다. 흙을 가득 실은 트럭이 한길 쪽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와 내 오토바이 곁을 지나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결국 그 길이었다. 나는 생수 한 병을 온전히 다 비우고는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 헬멧을 썼다.
공사장 뒤는 개떼들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마을이었다. 딸아이 표현이 그랬다. 몇 번은 지날 때마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구역질을 해대곤 하던 딸아이가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개들 표정이 왜 저래 하더니, 너무 슬픈 것 같아, 엄마 하고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아이에게 아주 많은 말을 들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듯했다. 너, 자전거가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굴러갈 수 있는지 아니? 나는 딸아이한테 그런 질문을 하리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방울토마토 밭을 지나면서 기억해냈다. 나는, 딸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맨 먼저 가고자 했던 곳이 이 길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약수터 입구라고 쓴 팻말에서부터는 길 양 옆이 밤나무 숲이었다. 하얀 밤꽃이 무성할 무렵, 냄새에 민감한 딸아이는 그 숲 아래에서는 말없이 코를 막곤 했었다. 얘는,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아내가 짐짓 둘러대면 아이는 더욱 힘껏 코를 틀어막았다. 아닌게 아니라, 이 지역부터는 퇴비장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요즘 아이들이 악취라고 느낄 만한 냄새가 언제나 짙게 포진해 있었다. 퇴비장 입구에서부터는 길이 험해져서 오토바이 소리가 더욱 요란스러워져야 했다. 나는 갑자기, 오토바이를 탄 나 자신이 낯설어졌다.
아버지는 내가 오토바이를 탄 모습을 한 번도 보신 적이 없었다. 아마도 내가 오토바이 회사에 다닌 것을 끝까지 믿지 않으셨는지도 몰랐다. 하기야 형들도 내가 오토바이 회사에 취직했다는 말을 처음에 듣고 자전거도 못 타서 끙끙대던 애가 오토바이 회사가 웬 말이냐는 듯이 번갈아가며 웃고 또 웃었다. 그 형들 회사에 오토바이 몇 대씩을 납품한 적이 있었지만, 형들한테도 내가 오토바이 탄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정작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달리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 그 회사에서 정리 해고된 뒤였으며, 그나마 아내와 별거를 시작한 뒤로는 형제간에 만날 일도 없었다.
나는 약수터에서 다시 물을 한 바가지나 떠 마신 다음 둔덕 아랫길로 오토바이를 끌고 내려갔다. 헬멧을 벗은 머리에서 한동안 김이 뿜어졌다. 산책객들의 휴식을 위해 마련된 작은 정자 아래를 지났다. 정자 위에 둘러앉은 남녀들은 화투판과 술판을 아우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굽는 고기 냄새 때문에 속이 뒤틀리면서 급격히 허기가 느껴졌다. 굴참나무가 군락을 이룬 숲을 지나며 만나는 슬래브 집 앞에서 길을 멈추었다. 감기를 몰고올 것 같은 싸늘한 기운이 이마에서 감돌았다. 반쯤 열린 대문 안을 들여다보다가 오토바이만 세워두었다. 대문 안에서 큰 개 짖는 소리가 났다. 누런 강아지 한 마리가 문을 밀고 나와 코를 벌름거렸다.
집담 옆으로 길게 이어진 싸리울 안으로 들어가는 싸리문을 밀쳤다. 아버지가 가꾸시던 다섯 마지기 되는 농장이 그곳에 펼쳐졌다. 밭이랑마다 잡초가 무성해서 구획이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십여 평 크기로 반듯하게 나뉘어진 밭뙈기마다 서너 가지씩의 채소가 잘 자라고 있는 모양은 명백했다. 밤나무 숲 그늘 쪽에 쌓인 퇴비 더미 곁이 내 식구가 가꾸던 밭이었다. 밭머리에 세워둔 여치네 집이라고 쓴 팻말이 가느다란 말뚝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이곳에서, 풍뎅이를 잡던 딸아이가 퇴비 냄새를 못 이기고 여러 번 토했었다. 상추와 열무와 배추와 파와 옥수수와 방울토마토와 고추 들을 함께 가꾸어 먹던 그 밭은, 위로 껑충하게 어린아이 키만큼 자라게 해놓은 적치마상추들로 메워져 있었다.
거긴 상추씨를 받을까 해요.
내가 온 걸 알고 나온 여주인의 음성이 뒤에서 났다. 나는 돌아서서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검게 탄 주름 굵은 얼굴이었지만 더욱 건강해진 혈색이었다. 누런 강아지가 여주인의 발 아래에서 나를 쳐다보았다.
잠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 해요.
내가 안으로 들어갈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주인은 앞장서서 안내하는 시늉을 했다.
혼자서 다 가꾸세요, 요즘?
제자분들 가족들이 계속 많이 늘었어요. 팻말을 새로 세운 데는 새 제자분들이 맡고 있는 밭이에요. 오늘 아침에도 몇 집 왔다 갔어요.
형들 식구들은 다녀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내 식구의 밭이었던 곳에만 팻말이 그대로인 걸 보고 짐작했던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 집에 여주인이 생긴 것을 알고도 마지막까지 살갑게 굴던 여동생마저도 내왕이 없지는 않을 듯싶은데, 묻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어머, 오늘은 아예 농사꾼이 되셨네.
여주인은 뒤를 돌아보며 반색을 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하면서 밭둑을 넘어온 사내는 허름한 작업복 차림이었다. 그 뒤에는 몸뻬 같은 바지를 입은 부인이 따라와 섰고, 그들보다 키가 훌쩍 큰 남자아이가 호미와 낫을 들고 그 뒤를 따라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밤나무 숲 쪽으로 고개를 돌려 하얗게 흐드러진 밤꽃을 쳐다보았다. 우두둑 떨어지는 밤송이들 아래 서서 따갑다고 비명을 질러대던 딸아이와 조카들이 생각났다. 다시 아랫배가 쓰라렸다. 내 눈이 절로 변소를 찾고 있었다.
잠시 들어갔다 가지요.
밭으로 들어서는 또다른 가족을 맞고 난 여주인이 다시 말했다.
빈손으로 왔는데…….
나는 중얼거리며 밭을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서 저녁 들고 가요.
아니에요. 가봐야 해요.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시선 둘 데를 찾았다. 다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다이어트 했나 봐. 살이 많이 빠지셨네.
흰 이를 드러내며 나를 보며 웃던 여주인이 마당 수돗가에서 씻은 참외를 들고 부엌에 들어가 있는 동안, 나는 방문 앞에 놓인 두루마리 휴지를 들고 손에다 옮겨 감기 시작했다. 내 자세가 이상해진 걸 보고 강아지가 캉캉 하고 가볍게 짖다가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집 안채를 끼고 돌아 걸었다. 어디선가부터 파리떼가 웽웽거리며 들러붙으며 따라왔다. 녹슨 농기구들이 늘어서 있는 뒤꼍을 통과해 구석진 곳에 두 칸짜리로 따로 지어진 변소 건물로 들어서다가 나는 주춤 멈춰 섰다. 그대로 설사가 쏟아져나올 것 같아서였지만, 그것보다는 변소 담에 기대어 서 있는 자전거 때문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이곳에서는 본 적이 없었는데, 자전거는 그 옛날 아버지가 타고 다니시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뒤에 짐을 실을 수 있는 그 옛날 구식 자전거가 틀림없었다. 핸들 부분이 반들반들한 것이, 손때는 묻어 있었지만 먼지는 끼여 있지 않아서 마치 누군가 금방 타다가 내린 것처럼 보였다.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을 앞두고 있던 여름,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 한 대를 번갈아 타고 남장사라는 절에 함께 간 적이 있었다. 음악을 전공하는 누나와 대학원과 대학에 다니는 형들 때문에 집안 사정이 어렵게 되었으니 복학을 한 학기 늦추면 어떻겠느냐는 가족들의 의견을 듣고 나는 잔뜩 불만에 싸여 있었다. 돈만 생기면 도심으로 나가 친구 집에서 지내다 며칠 만에 돌아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부자간에는 무척 의외적인 동행이었다. 남장사에서 내려오는 비탈길을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 내려가고 있었는데, 무엇 때문인지 아버지가 뒤에서 껄껄 소리내어 웃으셨다.
넌, 아직도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고 굴러가는 원리를 잘 모르는 것 같구나.
아버지는 그 마을의 초등학교 정문으로 걸어들어가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원리가 뭐 중요해요. 그냥 타면 되는 거지요 뭐, 하고 나는 볼멘 소리를 했었다. 학비 때문에 복학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은 꿈에도 한 적이 없는 나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래. 그냥 타면 되지. 그게 자전거의 원리다. 그렇지만, 그걸 좀 멋있게 말할 수는 없겠니?
타서 페달을 밟아 돌린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가 더욱 퉁명스럽게 말했다.
초등학교는 한여름이고 방학 기간 중이어서 그랬는지 텅 비어 있었다. 매미 우는 소리만 요란했다.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고 주행할 수 있는 최대의 이유는…….
아버지는 텅 빈 운동장을 휘둘러보고는 가볍게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자전거는, 자전거를 탄 사람이 넘어지지 않으려고 무의식중에 평형을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주행할 수 있는 거다.
학교는 뜻밖에도 교무실과 숙직실까지도 비어 있었다. 그날 밤에 그날 초등학교의 당직이었다는 교사가 아버지를 찾아왔었다. 아버지는 만나주지 않았다. 관사의 사랑에 그 교사가 들어와서 한 시간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모르셨다. 교사는 아버지에게 전해주라며 봉투를 놓고 돌아갔다.
아버지가 교육 공무원 숙정 기간 때 숙정 대상자가 되어 퇴임하신 것이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였다. 그해에 어머니가 쓰러져서 불편한 채로 오 년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그 이듬해 아버지는 이 집을 사서 이사를 오셨고, 내내 혼자 계시다가 삼 년 전에 교사 출신인 옛 제자를 여주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는 아들딸 가족들과 가까운 제자 가족들로부터 월 몇 만원씩의 돈을 거두면서 이 집 땅에다가 밭을 가꾸게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형제들의 식탁에는 언제나 무공해 채소가 풍성했었다.
자전거의 도시를 아십니까?
언젠가 작은형이, 우리가 성장했고 아버지가 오래 지위를 유지하며 지냈던 그 도시를 머릿기사에서 소개한 시사잡지를 들고 와 아버지께 내밀었다. 책 표지를, 그 도시의 중심가를 자전거 탄 사람들이 메우고 있는 사진이 장식해주고 있었다. 기사 내용은 별게 아니랄 수 있었다. 그 도시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시민 일 인당 자전거 한 대 수준이 된 것은, 평지가 넓고 학교나 공단이 도심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분산되어 있어서 등하교 때나 출퇴근 시에 다른 교통 수단보다 자전거가 훨씬 유효하기도 하고, 넓은 토양에서 얻어지는 풍성한 농산물로 지역 경제가 윤택한 편이어서 집집마다 자전거 몇 대씩 구입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아서이기도 하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돋보기 안경을 쓰고 그걸 꼼꼼히 읽고 나신 아버지는 오랜만에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셨다. 나는 얼핏, 퇴임 전에 그 도시 학교 전체를 대상으로 자전거 대회를 개최하려 하시던 아버지를 기억해내고 있었다. 그때 식구들의 시선은 신당 창당을 서둘고 있는 여당의 분위기를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를 향해 있다가, 무엇엔가 깜짝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여기는 밭을 가는 곳이다. 너희들, 내가 죽더라도 여기 와서 씨 뿌리고 밭 갈고 채소 뜯어 먹도록 해라. 다들 독만 퍼먹고 있으니 그걸 한쪽에서 계속 씻어내야지.
예상대로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어려운 처지가 된 가족들에게 아무 유산도 남기기 않고 떠나셨다. 그걸 뒤늦게 안 아내가 다시는 밭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 뒤로 부쩍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것을 나는 방임해버렸다. 나는 아직도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고 어떻게 굴러가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