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장관전서
조선조 영·정조 시대의 문인(文人)·학자(學者)인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 저서(著書)이다.
이덕무의 자(字)는 무관(懋官), 호(號)는 아정(雅亭)·형암(炯菴)·청장관(靑莊館) 등이며 종실 무림군[茂林君·정종(定宗)의 자(子)]의 10대손이다.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군서(群書)를 섭렵하고 학문 연마와 시문창작 그리고 유람(遊覽)으로 청년시절을 보낸 그는 39세 때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에 초선(抄選), 이로부터 각종 규장각 편찬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 함께 피선된 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와 교우관계를 맺고 서로 학문 강마에 진력하면서 여러가지 편찬사업에 관여하였으니,국조보감(國朝寶鑑)·갱장록(羹墻錄)·문원보불(文苑黼黻)·대전통편(大典通編)·송사전(宋史筌)·규장전운(奎章全韻) 등이다.
청장관은 서얼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벼슬은 주부(主簿)·찰방(察訪)·현감(縣監)에 그쳤다. 그러나 시(詩)·문(文)·서화(書畫)에 모두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뛰어난 재식(才識)으로 정조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받았다. 그래서 그가 졸(卒)한 뒤에 정조는 그의 아들을 검서관으로 채용하고, 유고(遺稿)를 선집(選集), 간행하게 하였다.
그의 유고(遺稿)는 아들 광규(光葵)가 편집하고 이완수(李腕秀)가 교정한 71권 33책이 남아있는데, 이 유고에는 박학다문(博學多聞)한 저자의 역량과 학문연구와 저술에 일관한 학자적 노력이 집적되어 있다. 또한 당시 영·정조시대는 우문정치(右文政治)로서 문예부흥을 이룬 시대이며, 청조(淸朝)의 전성기 문화와 서학(西學)의 조류에서 실사구시학풍(實事求是學風)이 성숙되어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저자는 이 시대에 대표적 학자의 한 사람인만큼 그의 방대한 저술은 당시의 문풍(文風)·학풍(學風)을 연구하는 데 광범위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본 국역서의 저본은 규장각(奎章閣) 소장 필사본(筆寫本)인데 8책이 결본되어 있다. 결본 가운데 <청비록(淸脾錄)>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으로, <편서잡고(編書雜稿)>는 서울대 부속도서관 소장 필사본으로, <청령국지(蜻蛉國誌)>는 일본 동양문고 소장 필사본으로 각각 보충하였고 <사소절(士小節)>은 최성환(崔瑆煥) 편저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고활자본으로 대치하였다. 또 간본(刊本) 「아정유고(雅亭遺稿)」는 대본에 수록되지 않은 것만 발췌하여 수록하였다. 이로써 본 국역서는 전 12책과 색인 1책을 추가하여 합 13책으로 국역·발간하였다. 본서의 편찬 서목과 내용을 대략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2.영처시고(嬰處詩稿)·영처문고(嬰處文稿)·영처잡고(嬰處雜稿)
저자 초년기에 저술한 시문(詩文)을 모은 것으로 '몸가짐·마음씀을 어린아이와 처녀같이 해야 한다.'는 뜻에서 제명(題名)한 것이라 한다. 이중 잡고(雜稿)는 23∼24세 때 작품으로 소설론(小說論), 역대저서 서평(書評) 및 고금의 자집(子集)·시문(詩文)을 읽고 터득한 바를 기록한 관독일기(觀讀日記) 등이 있다.
예기억(禮記臆)
「예기(禮記)」의 어려운 글자와 의심되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3. 아정유고(雅亭遺稿)
일명 청장관고(靑莊館稿)라고도 한다. 유고 3·4는 각체(各體)의 시(詩)가 있고, 7∼8, 11에는 서(書)로서 이광석(李光錫)·성대중(成大中)·유득공(柳得恭) 등에게 보낸 글이다.
4. 아정유고(雅亭遺稿)
응지(應旨)한 글로서 시(詩)·전(傳)·책(策) 등이다.
간본(刊本) 아정유고(雅亭遺稿)
저자의 유고(遺稿) 가운데 뽑은 서(序)·발(跋)·기(記)·제(祭)·문(文)·서(書) 등의 문(文)과 부록으로 저자에 대한 유사(遺事)·행장(行狀)·비지(碑誌) 등이 있다.
5. 편서잡고(編書雜稿)
편찬 관계의 문자(文字)를 수록한 것으로 정조의 명(命)으로 산정(刪定)한 「송사전(宋史筌)」에 저자가 유민의 열전(列傳) 및 고려·요·금·몽고의 전기를 보충한 보전(補傳)이 있고, 당·송·명대 시인(詩人)의 소전(小傳)인 시관소전(詩觀小傳)·규장전운범례(奎章全韻凡例) 등이 있다.
6. 사소절(士小節)
34세 때 작품으로 생활에 기본되는 예절들을 살펴 경계로 삼은 글이다. 사전(士典)·부의(婦儀)·동규(童規) 3편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총 924장(章)으로 되어 있다.
7. 청비록(淸脾錄)
시화집(詩話集)으로서, 우리나라·중국·일본·금(金)의 고금 명인들의 시구(詩句)에 변증(辨證)·소해(疏解)·품평(品評)·기사(記事)를 붙였다.
8.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25∼6때 작품으로 보고 들은 바 느낀 바를 적은, 신변잡기류의 글이다. 여러 서적에 실린 일화(逸話)를 취해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기도 하였다.
9. 앙엽기(盎葉記)
일종의 자료집(資料集)이다. 고사(故事) 용어(用語)의 풀이 또는 변설(辨說), 역사(歷史)·야사(野史) 중의 단편적 사실에 대한 해석 등이 실려있다.
10. 서해여언(西海旅言)
28세 때 황해도 장연(長淵)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지은 왕환일기(往還日記)이다.
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
밀납으로 만드는 윤회매(輪回梅)의 원리(原理)·주조법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꽃잎 모양 등 모형도 그려놓았다.
산해경보(山海經補)
박지원(朴趾源)과 나눈 해학적 필담(筆談) 한마디를 기술한 것이다.
열상방언(洌上方言)
경기 지방의 속담을 모아 풀이해 놓은 것이다.
11.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 연경(燕京)에 갔을 때 항주(杭州)의 명사(名士)들과 나눈 필담(筆談) 및 시문(詩文)을 초록한 것이다.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수필집 또는 수상록류이다.
병정표(丙丁表)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병(淸兵)이 의주(義州)에 이르른 날부터 이듬해 두 왕자가 볼모로서 북행(北行)하는 날까지를 기록한 글이다.
청령국지(蜻蛉國志)
일명 청정국지(蜻蜓國志)라고도 한다. 일본(日本)에 관한 기록으로, 세계도(世系圖)·성씨(姓氏)·직관(職官)·인물(人物)·예문(藝文)·여지(輿地)·풍속(風俗) 등이 기술되어 있다.
12.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저자가 경상도 함양군 사근역 찰방으로 부임하였을 때의 견문기(見聞記) 겸 만록(漫錄)이다. 영남지방의 명승(名勝)·고적(古蹟)과 고금인물(古今人物)·풍속(風俗) 등이 기술되어 있다.
부록(附錄)
아들 광규(光葵)가 편술한 연보(年譜)가 있다.
이외에도 전서(全書)에는 상고시대부터 명(明)·청(淸) 및 춘추시대 소국에 이르기까지 중화와 이적을 상세히 분별한 「기년아람(紀年兒覽)」이 있는데 이만운(李萬運)의 저술을 저자가 보정(補訂)한 것이다. 또 명(明) 말기의 유민전(遺民傳)을 편집한 「뇌뇌낙락서(磊磊落落書)」가 있는데 산정(刪定)하지 못하여 현재 결본이다. 이 두 편은 본 국역에서 제외하였다. 본 국역서는 1977년에 9, 11, 12권, 1978년에 1, 2권, 1979년에 3, 4권, 1980년에 5∼8권, 1981년에 10권, 1982년에 13권(색인)을 각각 국역·발간하였다. 번역은 신호열씨외 28명이 참가했고 교열은 오호영씨외 4명, 색인표제어 선정은 곽진씨가 맡았으며 해제(解題)는 이병도씨, 색인감수는 김성환씨가 맡았다.
【해제 참조, 정리 오세옥(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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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관전서】제64권 청령국지 6 / 예문 藝文
시문(詩文)과 유학(儒學)이 이 나라에서 행해진 것은 대개 왕인(王仁)과 지장(智藏)·홍법(弘法) 두 대사(大師)로부터 비롯되었다. 근자에 강남(江南)의 서적이 장기(長崎 ‘나가사끼’)에 모여들어, 집집이 글을 읽고 사람마다 문장을 쓰니, 오랑캐의 풍속이 점점 변하여 간다. 성무(聖武)의 천평(天平) 7년(735)에 당(唐) 나라 사람 진경(晋卿)이 와서야 비로소 《문선(文選)》·《이아(爾雅)》의 음을 통하였다. 효겸(孝謙)의 천평보자(天平寶字) 원년(757)에 명하기를,
“박사(博士)·의사(醫師) 중에 마땅한 재주가 아닌데 청탁으로 뽑힌 사람이 많으니, 정사(政事)를 손상할 뿐 아니라 백성에게 보탬도 없다. 경생(經生)에게 삼경(三經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을, 전생(傳生)에게 삼사(三史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를, 의생(醫生)에게 태소갑을맥경(太素甲乙脈經) ·《본초(本草)》를, 침생(針生)에게 소문침경(素問針經)·명당맥결(明堂脈訣)을, 천문생(天文生)에게 천관서(天官書)·한진천문지(漢晋天文志)·삼색박찬(三色薄讚)·한양요집(韓楊要集)을, 음양생(陰陽生)에게 주역(周易)·신찬음양서(新撰陰陽書)·황제금궤(黃帝金櫃)·오행대의(五行大義)를, 역산생(曆算生)에게 한진률력의(漢晉律曆議)·구장(九章)·육장(六章)·주비정천론(周?定天論)을 강(講 강독시험(講讀試驗))하여 모두 임용하라.” 하였다.
추고(推古) 10년(602)에 백제국의 중[僧] 관륵(觀勒)이 천문지리역본(天文地理曆本) 과 둔갑방술서(遁甲方術書)를 바쳤다. 흠명(欽命) 11년(550)에 백제국에서 약(藥)을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 왔는데, 이름은 왕유릉타(王有陵陀)였다. 추고 18년(610)에 고구려의 중 담징(曇徵)이 왔는데, 오경(五經 《역경(易經)》·《서경(書經)》·《시경(詩經)》·《예기(禮記)》·《춘추(春秋)》)에 통하고 단청(丹靑)에도 능하고 종이·먹과 방아를 만들 줄 알았다. 숭준(崇峻) 원년(588)에 백제국의 화공(?工) 백여(白如) 가 왔다. 문덕(文德) 때에 백제국의 하성(河成)이 일본에 와서 벼슬하여 좌근위(左近衛)가 되었는데, 인물과 초목을 잘 그렸으므로 후세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환무(桓武) 때에 홍법(弘法)·속세(速勢) 두 중이 당 나라에 들어갔는데, 홍법은 진언비밀(眞言비密 부처의 심오한 본지(本旨))을 전수(傳受)하고 속세는 필묘(筆妙 글씨를 쓰는 묘법(妙法))를 터득하였다.
시문서화 명인(詩文書화名人)
천무(天武)의 둘째 아들을 대우(大友 오오도모)라 하고 그 아우를 대진(大津 오오쓰)이라 하는데, 오언시(五言詩)는 대우에게서 비롯되고 칠언시(七言詩)는 대진에게서 비롯되었다. 오언십구(五言十句)는 기마려(紀麻呂 미상)에게서 비롯되고, 칠언장편(七言長篇)은 기고마려(紀古麻呂 미상)에게서 비롯되고, 칠언사구(七言四句)는 기남인(紀男人)에게서 비롯되었다. 임금의 시는 천무로부터 비롯되고, 석씨(釋氏 불가(佛家))의 시는 지장(智藏)으로부터 비롯되고, 여자의 시는 대반희(大伴姬 미상)로부터 비롯되었다. 등원숙(藤原肅)·임도춘(林道春) 부자·석천장산(石川丈山 ‘이시까와 죠오산’ 1583~1672)·심초원정(深草元政) 등은 재주와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대저 일본 사람은 총명하고 숙성하므로, 4~5세에 능히 붓을 잡고 10여 세에는 모두 능히 시를 지으며, 시를 잘 짓고 글씨를 잘 쓰는 여자가 매우 많다. 글씨를 잘 쓴 사람은 차아왜황(嵯峨倭皇)·홍법대사(弘法大師)·단마수(但馬守) 귤일세(橘逸勢 다찌바다 노 하야나리 ?~842)이고, 그림을 잘 그린 사람은 거세금강(巨勢金岡 고세 노 가나오까 9세기)·등원융능(藤原隆能 후지와라 노 다까요시 1140~1201)·택마위원(宅磨爲遠 다꾸마 다메도오 11~12세기)·토좌경륭(土佐經隆 미상)·여졸(如拙) ·주문(周文)·설주(雪舟 1420~1506)·소률종단(小栗宗丹 오구리 소오단 ?~1486)·장곡천등백(長谷川等伯 하세가와 도오하꾸 1539~1610)·수야정신(狩野正信 가노오 마사노부 1434~1530)·원신(元信 미상)이다.
성덕태자(聖德太子)
귤풍일(橘풍日 다찌바나 노도요히)의 아들인데, 귤풍일은 곧 용명왜황(用明倭皇)이다. 어머니 태중(胎中)에서 여덟 달 만에 능히 말을 하여 소리가 배 밖에 들렸고, 열두 달 만에 나서 넉 달 만에 말하였다. 여덟 사람이 일을 아뢰어도 한꺼번에 들을 수 있으므로 팔이황자(八耳皇子)라 불렀고, 예명(叡明)하고 인서(仁恕)하므로 성덕태자라 불렀다. 마자 대신(馬子大臣) 과 함께 불법(佛法)을 믿었고, 수옥대련(守屋大連) 을 죽였는데 그때 15세였다. 용명(用明)이 죽으니 아우 숭준(崇峻)이 즉위하였고, 숭준이 죽으니 누이 추고(推古)가 즉위하여 성덕을 태자로 삼고 섭정(攝政)하게 하였다. 섭정하는 동안에 17조의 헌법(憲法)과 12위계(位階)를 제정하였고, 매자 신(妹子臣) 을 수(隋) 나라에 보내고, 견상 어전조(犬上御田鋤 ‘이누가미 노미다스끼’)를 당(唐) 나라에 보냈고, 여러 경(經)의 소(疏) 를 짓고 마자 대신과 함께 일본의 전대사(前代史) 를 지었으며, 49세에 죽었다.
고구려의 중 혜자(慧慈)가 와서 태자사(太子師)가 되었는데, 태자가 일본에 큰 공(功)이 있으므로, 온갖 관원들이 혜자를 조사(祖師)라 하며, 그의 기일(忌日)에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중이나 일반 사람이나 다 같다.
중마려(仲麻呂 아베 노 나까마로[安部仲麻呂] 698~770)
중려(仲려) 라고도 하는데, 선수(船守)의 아들이다. 영귀(靈龜) 2년(716)에 당(唐) 나라에 들어갔는데 그때 16세였으며, 이름을 중만(仲滿)이라 고쳤다. 중화(中華)를 사모하여 돌아오려 하지 않았고, 이름을 조형(朝衡)이라 고쳤는데 조향(晁鄕)이라고도 한다. 이백(李白)·왕유(王維)·포길(包佶)과 서로 벗하였고, 좌보궐(左補闕)을 지내고서 본국으로 돌아가다가 풍파를 만나 안남(安南)에 표착하였다. 뒤에 다시 당 나라에 들어가 산기상시 안남도호(散騎常侍安南都護)로 발탁되었으며 당 나라에서 죽었다.
평실시(平實時 호오죠오 사네도끼[北條實時] 1224~1276)
천청이 서적을 매우 즐겼다. 금택(金澤 가네사와)에 서고(書庫)를 세워 왜서(倭書)·한서(漢書) 1만 권을 저장하고, 유서(儒書)는 묵인(墨印)으로, 불서(佛書)는 주인(朱印)으로 금택문고(金澤文庫)라는 넉 자를 찍었는데, 일본에서 첫째 가는 학교가 되었으므로 제국(諸國)의 학도들이 떼로 모였다.
자식부(紫式部 무라사끼 시끼부 978~1016)
월전수(越前守) 위시(爲時 후지와라 노 다메도끼[藤原爲時])의 딸이고, 초명(初名)은 등식부(藤式部)이며, 상동문원(上東門院 일조(一條)의 후(后)인 후지와라 노 아끼꼬[藤原彰子]의 칭호)을 곁에서 모셨다. 천성이 총민(聰敏)하여, 일본·중국의 사적(史籍)을 널리 보았고, 가영(歌詠)을 잘하고 불서(佛書)에 통하였으며, 천태(天台)의 일심삼관(一心三觀 천태종(天台宗)의 관심법(觀心法))의 혈맥(血脈 법통(法統)을 전하여 가는 계보(系譜))에 들었다. 《원씨물어(源氏物語 겐지모노 가다리)》를 지었는데, 그 이야기는 《장자(莊子)》의 우언(寓言)을 본떴다. 그 가운데서 약자(若紫 와까무라사끼) 편(篇)의 문장이 가장 절묘(絶妙)하므로 고쳐서 사명(賜名)하여 자식부라 하였다. 뒤에 좌위문좌(左衛門佐) 선효(宣孝)에게 출가하였다. 이 이야기는 본디 원광(源光 미나모도 노히까루) 공(公)의 일을 근거로 하여 지었으므로, 책이름을 《원씨물어》라 하였다.
사적(史籍) 일본 삼부본서(日本三部本書)라는 것이 있다.
《구사기(舊事記)》 : 추고(推古) 28년(620)에 구호황자(廐戶皇子)와 소아마자(蘇我馬子)가 지었는데, 모두 10권이며, 개벽(開闢)부터 당대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고사기(古事記)》 : 원명(元明)의 화동(和銅) 5년(712)에 안만려(安萬侶 야스마로)가 지었는데, 신대(神代)부터 추고 때까지 모두 3권으로 되어 있다.
《일본기(日本紀) 》 : 안마려(安麻呂)가 지었는데, 신대부터 지통(持統) 때까지의 일이다. 또 일본의 육국사(六國史)라는 것이 있다.
《일본기(日本紀 삼부본서(三部本書) 중의 일본기와 같은 책)》 : 30권이며 안마려가 지었는데, 신무(神武)부터 지통(持統) 11년(697)까지 9백 63년간의 일이다
《속일본기(續日本紀)》 : 40권이며 관야진도(菅野眞道 스가노 노 마미찌 741~781)·등원계승(藤原繼繩 후지와라 노 쓰구다다 727~796) 등이 지었는데, 문무(文武) 원년 정유(697)부터 환무(桓武)의 연력(延曆) 10년(791)까지 95년 간의 일이다.
《일본후기(日本後紀)》 : 등원서사(藤原緖嗣 후지와라 노 오쓰구 773~843)가 지었으며 환무의 연력 11년(792)부터 순화(淳和)의 천장(天長) 10년(833)까지 42년 간의 일인데, 전서(全書)는 지금 망실하고 20권을 초략(抄略)하여 아울러 1권으로 편찬한 것만이 있다.
《속일본후기(續日本後記)》 : 양방(良房 후지와라 노 요시후사[藤原良房] 804~872)·춘징선승(春澄善繩 미상) 등이 지었으며 인명(仁明)의 실록(實錄)인데, 천장 10년부터 가상(嘉祥) 3년(850)까지 18년 간의 일이다.
《문덕실록(文德實錄)》 : 10권이며 도양향(都良香 미야꼬 노 요시까 834~879)이 지었는데, 가상 3년부터 천안(天安) 2년(858)까지 9년간의 일이다.
《삼대실록(三代實錄)》 : 50권이며 대장선행(大藏善行 오오꾸라 요시유끼)이 지었는데, 천안 2년부터 인화(仁和) 3년(887)까지 30년 간의 일이다.
사서(史書)에 또 《오처경(吾妻鏡 아즈마 가가미)》라는 것이 있다.
기타 서적(其他書籍) 이루 다 적을 수 없으나, 보고 들은 대로 차서 없이 대강 싣는다.
《진겁기(塵劫記)》는 길전씨(吉田氏)가 지었다. 《신고금집(新古今集)》·《신칙찬집(新勅撰集)》은 등정가(藤正家)가 지었다. 《속고금집(續古今集)》·《속후찬집(續後撰集)》은 등위가(藤爲家)가 지었다. 《신속고금집(新續古今集)》은 등아세(藤雅世)가 지었다. 《만엽화가집(萬葉和歌集)》은 죽취옹(竹取翁)이 지었다. 《원씨물어(源氏物語)》는 자식부(紫式部)가 지었다. 《나산문집(羅山文集)》은 임도춘(林道春)이 지었다. 《태평기(太平記)》는 현혜(玄惠)가 지었다. 《원형석서(元亨釋書)》는 호관(虎關)이 지었다. 《도예편(桃?編)》은 도종(道宗)이 지었다. 《천하백(天下白)》은 칠통 거사(漆桶居士)가 지었다. 《경국집(經國集)》은 도봉안세(島峯安世)가 지었다. 《부상략기(扶桑略記)》는 황원(皇圓)이 지었다. 《오의초(奧儀抄)》는 청보(淸輔)가 지었다. 《낭영집(朗詠集)》은 공임 경(公任卿)이 지었다. 《제경요문(諸經要文)》은 친란(親鸞)이 지었다. 《선택집(選擇集)》은 원공(源空)이 지었다.《교행신증(敎行信證)》은 친란이 지었다.《모경집(慕京集)》은 원도관(源道灌)이 지었다. 《미타경주기(彌?經注記)》·《만타라초(曼?羅抄)》는 유예(酉譽)가 지었다. 《정훈(庭訓)》은 현혜(玄惠)가 지었다. 《안국론(安國論)》은 일련(日蓮)이 지었다. 《갑양군감(甲陽軍鑑)》은 고판탄정(高坂彈正)이 지었다. 《법화경주(法華經注)》는 최징(最澄)이 지었다. 《연심장(硏心章)》은 호명(護命)이 지었다.《십주심론(十住心論)》은 공해(空海)가 지었다. 《금광명경주(金光明經注)》·《인왕경주(仁王經注)》·《무량의경주(無量義經注)》는 최징이 지었다. 《천태의집(天台義集)》은 의진(義眞)이 지었다. 《일승요결(一乘要결)》·《아미타경소(阿彌?經疏)》·《대승대구사초(大乘對俱舍抄)》·《천태종이십칠의문(天台宗二十七疑問)》은 혜심(惠心)이 지었다. 《가문란기(嘉文亂記)》는 수수광신(垂水廣信)이 지었다.《도연초(徒然草)》는 겸호(兼好)가 지었다. 《광석류의(廣釋流義)》는 우다왜황(宇多倭皇)이 지었다. 《거백집(擧白集)》은 등준(?俊)이 지었다. 《대실담장(大悉曇章)》은 안연(安然)이 지었다. 《화전초(花傳抄)》는 혜자(惠慈)가 지었다. 《소권물대권물비전초(小卷物大卷物비傳抄)》는 혜호(惠好)가 지었다. 《보물집(寶物集)》은 평태뢰(平泰賴)가 지었다. 《광운집(狂雲集)》은 종순(宗純)이 지었다. 《귀명본원초(歸命本願抄)》·《서요초(西要抄)》·《왕생지요결(往生至要訣)》은 증현(證賢)이 지었다. 《관경소기(觀經疏記)》는 원공(圓空)이 지었다. 《우독초(愚禿抄)》·《문류취초(文類聚抄)》는 친란(親鸞)이 지었다. 《입정치국론(立正治國論)》은 일친(日親)이 지었다. 《삼국불법전통연기(三國佛法傳通緣起)》는 응연 법사(凝然法師)가 지었다. 《율령(律令)》은 담해 공(淡海公)이 지었다. 《정토원류장(淨土源流章)》은 응연 법사가 지었다. 《성필연기(聖筆緣起)》는 관 승상(菅丞相)이 지었다. 《제경주석(諸經注釋)》은 상등(常騰)이 지었다. 《무명초(無明抄)》는 장명(長明)이 지었다. 《보련화사연기(寶蓮華寺緣起)》는 의교(義敎)가 지었다. 《초견집(蕉堅集)》·《초견어록(蕉堅語錄)》은 중진(中津)이 지었다. 《민부성례(民部省禮)》는 청마려(淸麻呂)가 지었다. 《아초고(峨草稿)》는 월담 화상(月潭和尙)이 지었다. 《승보전(僧寶傳)》은 고천(高泉)이 지었다. 《사서소림(四書疏林)》은 죽 전성직(竹田誠直)이 지었다. 《동자문(童子問)》·《논맹고의(論孟古義)》·《논맹자의(論孟字義)》는 이등유정(伊藤維禎)이 지었다. 《조래집(?徠集)》·《논어징(論語徵)》은 물부쌍백(物部雙柏)이 지었다. 《화한명수(和漢名數)》는 패원독신(貝原篤信)이 지었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는 사도상순(寺島尙順)이 지었다.
찬서(纂書)한 사람을 알 수 없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변색립성(辨色立成)》·《평가물어(平家物語)》·《정류리저문집(淨琉璃著聞集)》·《공사근원(公事根源)》·《기이잡담(奇異雜談)》·《회풍조(懷風藻)》·《고금왜가집(古今倭歌集)》·《작자부? ?作者部類)》·《성씨록(姓氏錄)》·《이세물어(伊勢物語)》·《왜한군기(倭漢軍記)》·《서궁기(西宮記)》·《기파만병(耆婆萬病)》·《원천목집(圓天木集)》·《침쌍지(枕雙紙)》·《양재집(良材集)》·《청소납언 (淸少納言)》·《본조식감(本朝食鑑)》·《성황본기(聖皇本紀)》·《곡향집(谷響集)》·《세풍기(世風記)》·《세언물어(世彦物語)》·《청우재집(聽雨齋集)》·《강가차제(江家次第)》·《사계물어(四季物語)》·《적 막초(寂寞草)》·《군기제집(群忌際集)》·《보적사연기(寶積落寺?》·《방각초(方角抄)》·《신사계몽(神社啓蒙)》·《풍토기(風土記)》·《제왕편년기(帝王編年紀)》·《일궁기(一宮記)》·《벽암집(碧岩集)》·《& lt;B style="COLOR: black; BACKGROUND-COLOR: #ffff66">신선전(神仙傳)》·《직원초(職原抄)》·《대전대쌍지(大全大雙紙)》·《의초륙첩(義楚六帖)》·《오봉집(五鳳集)》·《유취국사(類聚國史)》·《본조문수(本朝文粹)》·《겸창지(鎌倉志)》·《육오화기( 陸奧話記)》·《인운어초(人雲御抄)》·
《북조구대기(北條九代記)》·《진총물어(塵塚物語)》·《회중집(懷中集)》·《원평성쇠기(源平盛衰記)》·《동감(東鑑 아즈미가가미[吾妻鏡]와 같은 책)》·《오주후삼년기(奧州後三年記)》·《신계도연기략(神系圖緣起略)》·《대화본기(大和本起)》·《애낭초(埃囊抄)》·《팔대동자궤(八大童子軌)》·《겸창대초자(鎌倉大草子)》·《법안정하전(法眼淨賀傳)》·《과아 집(瓜雅集)》·《방장기(方丈記)》·《지증대?》·《복부가설(卜部家說)》·《원응선사어록(圓應禪師語錄)》·《안락외기(安樂外記)》·《만대집(萬代集)》·《대신궁식(大神宮式)》·《신명략기(神名略記)》·《신명장(神 名帳)》·《의식장(儀式帳)》·《하해초(河海抄)》·《춘우집(春雨集)》·《송하집(松下集)》·《직원령(職員令)》·《왕년대기(王年代紀)》·《이수기(二水記)》·《준우회사(駿牛繪詞)》·《사세집(辭世集)》·《인군집(? 拮免?》·《기경(?經)》·《축파집(筑波集)》·《견축파집(犬筑波集)》·《과거장(過去帳)》·《신대권(神代卷)》·《성령집(性靈集)》·《죽취물어(竹取物語)》·《주길구기(住吉舊記)》·《구호광언(鉤狐狂言)》·《지명? ?持名抄)》·《웅야어행기(熊野御行記)》·《웅야왕자기(熊野王子記)》·《기관지집(紀貫之集)》·《속고사담(續古事談)》·《정사략(政事略)》·《봉상기(峯相記)》·《이십이사주식(二十二社注式)》·《금옥집(金玉集)》· 《옥엽집(玉葉集)》·《동재수필(東齋隨筆)》·《명옥집(明玉集)》·《찬집초(撰集抄)》·《십훈초(十訓抄)》·《사설하학집(社說下學集)》·《건원이년기(乾元二年記)》·《원씨옥갈권(源氏玉葛卷)》·《육장(六狀)》·《부상 문선(搏桑文選)》·《무인병술책(武刃兵術冊)》·《수중초(袖中抄)》·《훈열집(訓閱集)》·《제신기(諸神記)》·《명법요기(名法要記)》·《정통기(正統紀)》·《백련초(百練抄)》.
격식(格式)에 관한 서적은 홍인격(弘仁格)이니 홍인식(弘仁式)이니 정관격(貞觀格)이니 정관식(貞觀式)이니 연희격(延喜格)이니 연희식(延喜式)이니 한다. 21대의 화가집(和歌集)은 모두 21종(種)인데, 다 일본의 가사(歌詞)를 적은 것이다. 그 밖의 서적은 임진년 조선에 입구(入寇)하여 많이 약탈해다가 되박은 것들이다.
왜자(倭字)
길비(吉備) 가 스스로 왜자를 만들어서 통용하였는데, 새로 만든 것도 있고, 중국에서 쓰는 것인데 뜻이 다른 것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
이려파(以呂波 이로하) 47자
본디 가사(歌詞)이다. 이(以 : い)부터 오[遠 : を]까지 12자는 호명 승정(護命僧正) 이 지었고, 와[和 : わ]부터 스[寸 : す]까지 35자는 홍법 대사(弘法大師)가 이어 지었다. 대개 범자(梵字)의 12마다(十二摩多) 와 35체(體)의 문자를 근거하여 47자로 통합한 것인데, 읽기는 노래처럼 하며, 이 나라의 모든 언어와 음성의 반절(反切)이 다 여기에서 나온다. 공해(空海)가 지은 것이라고도 한다. 그 47자는 다음과 같다.
い : 이[以 以자의 초서체(草書體)를 간략하게 한 것. 이하 모두 같음]
ろ : 로[呂]
は : 하[波 음이 변하여 ‘와’로도 읽음]
に : 니[仁]
ほ : 호[保 ‘오’로도 읽음]
へ : 헤[部 ‘에’로도 읽음]
と : 도[止]
ち : 지[知]
り : 리[利]
ぬ : 누[奴]
る : 루[留]
を : 오[遠 본디 ‘워’와 비슷한 음이었음] わ : 와[和]
か : 가[加]
よ : 요[與]
た : 다[太]
れ : 레[禮]
そ : 소[曾 이 가사에서는 ‘조’에 가까운 음으로 읽음]
つ : 쓰[川]
ね : 네[네]
な : 나[奈]
ら : 라[良]
む : 무[武]
う : 우[宇]
ゐ : 이[爲 본디 ‘위’와 비슷한 음이었음]
の : 노[乃]
ぉ : 오[於]
く : 구[久]
や : 야[也]
ま : 마[末]
け : 게[計]
ふ : 후[不 ‘우’로도 읽음]
こ : 고[己]
に : 에[江]
て : 데[天]
あ : 아[安]
さ : 사[左]
き : 기[幾]
ゆ : 유[由]
め : 메[女]
み : 미[美]
し : 시[之 이 가사에서는 ‘지’로 읽음]
ゑ : 에[惠 본디 ‘예’와 비슷한 음이었음]
ひ : 히[比 ‘이’로도 읽음]
も : 모[毛]
せ : 세[世]
す : 스[寸 이 가사에서는 ‘즈’에 가까운 음으로 읽음]*
편가문(片假文 가다까나[片假名])
글자의 반쪽으로 만들었고, 만든 사람은 알 수 없는데, 길비(吉備)가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이려파(以呂波) 글자와 이 글자를 함께 써서 말을 하고 뜻을 통하는데, 나라 안의 남녀·상하가 모두 다 안다. 편가문은 다음과 같다.
イ : 이[伊]
ロ : 로[呂]
ハ : 하[半 원 글자를 팔(八)로 잡기도 함]
ニ : 니[仁]
ホ : 호[保]
ヘ : 헤[部 우부방의 초서 약체)
ト : 도[止]
チ : 지[千]
リ : 리[利]
ヌ : 누[奴]
ル : 루[流 마지막 두 획을 땀]
ヲ : 오[乎 처음의 세 획을 땀]
ワ : 와[和 口의 마지막 획을 제외한 두 획을 땀]
ヵ : 가[加]
ヨ : 요[與 오른쪽 위 모퉁이의 세 획을 땀]
タ : 다[多]
レ : 레[禮]
ン : 소[曾]
ツ : 쓰[川]
ネ : 네[子]
ナ : 나[奈]
ラ : 라[良 상단의 두 획을 땀]
ム : 무[牟]
ウ : 우[宇]
井 : 이[井]
ノ : 노[乃]
オ : 오[於]
ク : 구[久]
ヤ : 야[也]
マ : 마[末 위의 가로 그은 두 획을 흘려 붙인 것]
ヶ : 게[介]
フ : 후[不]
コ : 고[己]
エ : 에[江]
テ : 데[天]
ア : 아[阿]
サ : 사[薩 원 글자를 산(散)으로 잡기도 함]
キ : 기[幾 이 글자의 초서체에서 땀]
ユ : 유[弓 유(由)자의 초서체에서 딴 것으로 잡기도 함]
メ : 메[女]
ミ : 미[三]
シ : 시[之 초서체에서 땀]
ヱ : 에[慧 가운데의 초서 약체)
ヒ : 히[比]
モ : 모[毛]
セ : 세[世 초서의 약체]
ス : 스[須 오른쪽 ‘頁’의 초서 약체]
한자음(漢字音)
신대(神代)의 문자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대개 수인(垂仁)까지는 일본희명(日本姬命)에게 의탁하여 신칙(神勅)이 있으면 입으로 전하였으며, 응신(應神) 때에 이르러 백제의 문인(文人) 왕인(王仁)이 오고서야 비로소 한자(漢字)를 썼다. 오음(吳音)·한음(漢音)으로 말하면, 김예신(金禮信)이 대마도(對馬島)에 와서 머무르면서 오음을 전하였고, 표 신공(表信公)이 축전(筑前)에 와서 한음을 전하였는데, 이것을 당음(唐音) 이라 한다. 승화(承和 834~847) 말년에 정법사(正法師)가 오고 원경(元慶 877~884) 초년에 총법사(聰法師)가 왔는데, 모두 오음·한음을 가르쳤다. 유서(儒書)에서는 한음을 많이 쓰고, 불경(佛經)에서는 오음을 많이 쓴다. 대저 왜인의 어음은 웃니[上齒]와 위 입술에 엇걸려서 나오는데, 첫소리는 가볍고 맑으며 끝소리는 흩어지고 올라 간다.
이 자료의 출처는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의 고전국역총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