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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함양연암문화제 연암실학학술대회
연암 박지원의 실학정신과 문학
일시 : 2009년 8월 6일 목요일 오후 2시~5시
장소 : 함양 안의면사무소 3층
주최 : 함양연암문화제위원회
제6회 함양연암문화제 연암실학학술대회
<연암 박지원의 실학정신과 문학>
주최: 함양연암문화제위원회
인사: 김윤수(함양연암문화제 학술위원장, 사단법인 인산학연구원 이사장)
사회: 윤호진(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기조강연
연암 박지원과 안의 // 임형택(성균관대 명예교수, 한국고전번역원 이사장, 한국실학학회 회장)
주제발표1
열하일기에 대하여 // 김혈조(영남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주제발표2
연암 박지원의 자편고 - 연상각집과 그 계열본에 대하여 - // 김영진(계명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제6회 함양연암문화제 연암실학학술대회
연암 박지원의 실학정신과 문학
주제 : 연암 박지원의 실학정신과 문학
일시 : 2009년 8월 6일 목요일 오후 2시~5시
장소 : 함양 안의면사무소 3층
주최 : 함양연암문화제위원회
사회: 윤호진(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제1부 개회식(14:00 ~ 14:20)
대회사: 김윤수 함양연암문화제 학술위원장, 사단법인 인산학연구원 이사장
제2부 기조강연(14:30 ~ 15:20)
연암 박지원과 안의
임형택(성균관대 명예교수, 한국고전번역원 이사장, 한국실학학회 회장)
제3부 주제발표 1 (15:30 ~ 16:10)
열하일기에 대하여
김혈조(영남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제4부 주제발표 2 (16:10 ~ 17:00)
연암 박지원의 자편고 - 연상각집과 그 계열본에 대하여 -
김영진(계명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대회사
燕巖實學學術大會 연암실학학술대회
김윤수 작, 역
北學星微二百年 북학의 별이 희미한 지 200년
更新祝祭集奎賢 축제를 경신하여 학자들 모였네
安陰小學燕巖館 발표장소 안의초등학교 연암관
是昔吾侯善政宣 옛적 우리 원님 선정 편 곳이네
위 시는 2008년 8월 5일 안의초등학교에서 개최된 연암실학학술대회를 주관하면서 지은 졸작입니다. 벌써 1년의 세월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금년에는 다소의 사정으로 안의면사무소에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연암실학의 본고장 함양에 연암기념관이 없어 발표장소가 바뀌게 된 불편함이 있습니다만 해마다 꾸준히 연암실학에 대해 연구발표하는 소통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서 이에서 연암실학의 본고장 함양의 보람을 찾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금년에는 연암의 실학정신에 투철한 인식을 갖고 계시는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겸 한국고전번역원 이사장, 한국실학학회 회장)를 모시고 기조강연을 갖게 되어 연암실학학술대회가 한층 더 광채로와지리라 생각합니다. 발표해주시는 김혈조 영남대 교수도 연암의 열하일기에 대하여 뚜렷한 연구업적이 있고, 김영진 계명대 교수도 소장학자로 연암의 문헌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 연구역량이 깊은 분으로 앞으로 우리나라 학술계를 이끌어갈 동량지재입니다. 바쁘신 중에도 강연과 발표 및 사회를 위해 먼길 마다않고 함양을 찾아주신 교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는 연암실학학술대회를 함양연암문화제와 시간적 격차를 두고 일찍 앞당겨 따로 개최할 예정입니다. 예전 한국의 수필가들이 논의하여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일신수필을 기록한 날짜를 환산하여 7월 15일을 수필의날로 지정하고 해마다 기념식을 거행해왔습니다. 한국 수필가들의 대표기관인 (사)한국수필가협회 정목일 이사장은 경남문인으로 연암과 함양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으므로 정이사장과 협의하여 내년 7월 15일에 함양에서 연암수필문학에 대한 학술대회와 수필의날 기념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내년에도 변치 않는 관심과 성원을 앙망합니다. 무더운 여름철에 열리는 연암실학학술대회에 변함없는 애정과 지지를 보내주시는 함양군민 여러분에게 머리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무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8월 6일
함양연암문화제 학술위원장, 사단법인 인산학연구원 이사장 김윤수
2009, 8, 6.
燕巖 朴趾源과 安義(요지)
임형택
목 차
1.시작하는 말 : 연암 박지원은 어떤 존재인가?
2.연암의 생애에서 안의시절
3.안의에서 연암이 실행한 일들
4.맺는말
1.시작하는 말 : 연암 박지원은 어떤 인물인가?
◦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18세기 조선이 낳은 위대한 문학가이다.
*박지원의 문학적 탁월성은 당대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그에 필적할만한 작가는 아직 나오지 않았음.
◦ 연암은 문학가인 동시에 위대한 학자, 사상가
* 한국실학의 두 유파
성호학파 : 성호 이익–다산 정약용 (경세치용학을 위주로 함)
연암학파 : 연암 박지원 ― 초정 박제가 (이용후생학, 북학파라고 일컬어짐)
◦ 연암의 위대성은 연암집이 증명하고 있다.
연암집에는 그의 시문과 함께 열하일기 및 과농소초(課農小抄) 등 그의 전 저작물이 담겨 있음.
*「양반전」, 「허생전」 등 교과서에 실려 특히 널리 알려진 작품들도 연암집에 수록되어 있다.
※ 연암의 문학적 위대성과 학문적 위대성은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연암집 속에 통일되어 있는 사실이 주목할 점이다.
열하일기 : 연암의 대표적인 저술. 그가 40대에 중국을 다녀온 기록. 단순한 여행기에 그치지 않고 그의 중국을 통한 세계인식과 선진기술을 수용하려는 노력이 담겨진 실학의 노작, 동시에 산문의 걸작품.
2.연암의 생애에서 안의 시절
박지원의 생애
1737년(영조 13년) 1세 서울서 태어남.
朴趾源, 자 중미(仲美), 호 燕巖, 본관 반남(潘南)
1752년(영조 28년) 16세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
1757년(영조 33년) 21세 이 무렵에 양반전 등 방경각외전 소재의 한문단편 창작.
1765년(영조 41년) 29세 금강산 유람, 장시 「총석정관일출(叢石亭觀日出)」을 창작
1768년(영조 44년) 32세 백탑(白塔: 탑골공원) 부근으로 이사.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문학과 예술로 교우. *백탑청연(白塔淸緣) 시기
1778년(정조 2년) 42세 개성 인근의 연암협에 우거. 권신인 홍국영의 미움을 사서 위협을 느끼고 은둔(연암이란 호는 그 지명에서 따옴)
1780년(정조 4년) 44세 중국 북경을 다녀옴. 3종 형님인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신 축하사절로 가게 되어 동행함. *열하일기
1792년(정조 16년) 56세 안의현감으로 부임.
1793년(정조 17년) 57세 문체반정.
1796년(정조 20년) 60세 이해 3월 안의현감 임기를 마치고 귀경
1797년(정조 21년) 61세 면천군수 부임
1799년(정조 23년) 63세 과농소초(課農小抄) 저술.
1800년(정조 24년) 64세 양양부사 부임
1805년(순조 5년) 69세 서울 자택(계동, 현재 헌법재판소 부지)에서 서거
연암이 안의현에서 현감으로 임명받은 것은 정조 15년 말이며, 그 이듬해 1월에 부임해서 1796년 3월까지 현감으로 일을 보았음.
*1792년 1월~1796년 3월 만 4년 3개월 재임. (56~60세)
연암 69세의 전 생애에서 가장 득의기에 해당, 이 시기에 그 자신으로서도 여러 가지 뜻 깊은 일을 할 수 있었다.
3. 안의에서 연암이 실행한 일들
1)지방관으로서의 치적
◦ 관리들의 기강을 세운 점
◦ 환향곡(還餉穀)처리
안의 고을에 환향곡이 9만석이나 적치되어 있어 큰 두통거리였는데 다른 곳으로 이관하는 방식으로 해결.
(당시 흉년이 들어 미가가 등귀했기 때문에 매도, 작전(作錢)해서 중앙에 올리면 그 잉여금으로 큰 돈을 챙길 수 있었으나 끝내 거절하고 다른 방식으로 처리.)
◦ 흉년에 구휼을 성실하게 임하여 많은 백성을 구제함.
◦ 함양 쪽으로 흐르는 냇물의 뚝과 보를 잘 수축한 일.(백성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함)
※ 연암의 지방관으로서의 자세
◦ 위대한 실학자가 50대 말에 조그만 고을을 맡았다는 것은 “닭잡는 데 소잡는 칼을 쓴 격”
◦ “한편으로 사무인계를 준비하고(一邊修重記)
한편으로 나무를 심고 있다.(一邊種樹菓)“
◦ 생산기술을 중시하는 실학정신의 실천
풍구·수차, 방아 등 기구 제작
2)연암 자신의 창작 활동 및 문집의 정리 작업
◦ 안의와 직접 관련된 글들
安義縣社稷壇神宇記
安義縣厲壇神宇記
安義縣縣司祠郭侯記
百尺梧桐閣記
孔雀館記
荷風竹露堂記
洪範羽翼序
烈女咸陽朴氏傳
咸陽郡興學齋記 · 咸陽學士樓記
海印寺唱酬詩序
◦ 안의에서 쓴 글들
答南公直閣公轍書
賀金右相履素書 : 화폐문제를 논한 내용
賀三從姪宗岳拜相因論寺奴書 : 노예의 해방을 건의한 내용.
이밖에 옥사판결이나 지방행정에 관련된 내용의 글이 여러 편 있음
◦ 연암의 유고의 편찬 작업.
명칭도 안의 관아에 있는 건물명을 따서 편명을 붙임.
烟湘閣選本, 孔雀館文稿
3)안의의 관아를 정비하여 건물들을 신축하고 정원을 훌륭하게 조성함.
蓮池와 園林의 조성
신축한 건물
百尺梧桐閣
烟湘閣
孔雀館
荷風竹露堂
* 벽돌로 지은 중국식 건축 양식.
4. 맺는 말
1)연암의 안의시절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보람이 있었고 창작적 역량이 고도로 발휘된 시기.
2)안의 지역과 직접 관련된 글들 중에 문학적·사상적으로 중요한 작품이 많음.
3)연암은 안의현감으로서 치적이 훌륭했을 뿐 아니라, 이 지역을 두루 빛나게 했음.
4)그의 실학자로서의 포부와 재능을 실천한 기간.
5)안의 지역에 남긴 가시적 성과로서
사직단· 여단· 곽후사당의 보수
하풍죽로당·백척오동각·공작관·연상각을 신축한 사실을 중시할 필요가 있음.
*벽돌을 직접 만들어 새로운 양식으로 지은 건물은 당시 매우 특이한 것임.
안의의 연암 관련 유적을 복원하는 문제.
이는 바로 안의의 문화전통을 복원하는 일인데, 함양군 나아가서는 경남의 문화 유산이 될 것임.
자료편
연암의 관인으로서의 자세
1) 임자년(1792년)에 흉년이 들었다. 선군(先君, 아들이 아버지를 지칭하는 말로 연암을 가리킴)이 재해에 대처하는 문제로 고심했는데, 이재 상황을 철저히 조사해서 부풀리거나 숨기고 빠트리는 폐단이 없도록 했다. 감영에 보고함에 당해서 실상대로 올리고 추호도 증가하지 못하도록 했다. 여러 이속들이 달려와 줄지어 서 아뢰기를
“매양 재황(災況)을 감영에 보고하면 으레 삭감을 당합니다. 지금 만약 실상대로 감영에 보고했다가 감영에서 삭감해 버리면 나누어 줄 수가 없을 텐데 어떻게 합니까?”
선군께서 결연히 말씀하기를
“사대부로서 관인이 되었거늘 장사치나 거간꾼이 값을 높게 불러놓고 눈가림을 하는 그런 술수를 쓸 것이냐? 미리 삭감될 것으로 생각해서 부풀려 보고 했다가 만약 보고한 그대로 지급을 받는다면 부풀려 받은 부분을 장차 어떻게 할 것이냐? 삭감하는 것을 부풀린 것으로 의심을 한 때문이다. 먼저 상관에게 믿음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아전과 백성들 위에 떳떳한 얼굴로 설 것이냐? 나는 나의 거취를 놓고 다툴 것이다.”
하고 감영에 보고했는데, 과연 보고한 액수 전부가 내려왔다. (과정록(過庭錄) 권1)
연암이 이용후생의 실학을 실천한 사실
2)선군은 북경에 갔을 적에 농사와 방직에 관한 각종 기기(器機)들이 백성의 쓰임에 이로운 것을 목격하고 본떠 제조하여 국내에 통용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때문에 시행하지를 못했다. 안의고을에 부임하게 되자 눈썰미가 있고 기술이 좋은 장인들을 뽑아 기구를 제작하도록 지도했다. 풍구〔颺扇〕·베틀·수차(水車)·물레방아 등 여러 가지 기기들을 만들어 시험해 보았더니 다 노력이 절감되고 작업이 빨라서 1인이 10인 몫의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 후로 배워서 행하려는 사람이 나오지 않아 국내에 보급되지 못하게 되었다. (위와 같음)
연암이 벽돌로 관아의 부속 건물을 지음
3)안의는 본디 산수향(山水鄕)으로 알려진 곳으로 심진동(尋眞洞)·원학동(猿鶴洞) 같은 명승이 있다. 선군(先君, 연암을 가리킴)께서 늦게 벼슬하신 것은 가난을 면키 위한 일이었지만, 이 고을의 현감으로 나가심에, 이제 문주(文酒)의 즐거움과 함께 태평성대를 장식하며 몇 년을 보내겠다는 뜻이 있으셨다.
관아 안에 한 구역의 층고(層庫)가 있었는데 오래 퇴락해서 수리해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이 건물을 철거해서 널찍한 땅 수십 보(步)를 얻었다. 마침내 상하로 못을 파서 도랑을 끌어 물을 채우고 고기도 기르며 연을 심으니 운치가 살아났다. 연못의 주변으로 건물들을 여러 채 짓는데 직접 벽돌을 제조해서 대략 중국의 건축제도를 본뜬 양식이었다. 그리고 대(竹)와 수목이 보기 좋게 어우러지도록 했다. 건물에는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연상각(煙湘閣)·공작관(孔雀館)·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같은 명칭을 붙이고 그 각각에 기문(記文)을 지었는데 문집에 들어 있다. 그 승경은 이 기문들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과정록(過庭錄) 권1)
정조가 연암을 칭찬하고 박제가를 안의로 내려 보낸 사실
4)이때 임금(정조)께서 어느 각신(閣臣)에게 이르시길
“박지원은 평생 일묘(一畝)의 집도 없이 궁벽한 산골과 강가를 떠도는 처지에 지금 다 늙은 나이로 한 고을을 얻었으니 의당 농토를 마련하고 집을 구하는데 급급해야 할 일이거늘, 듣건대 정자를 짓는다 못을 판다 하고선 문학의 벗들을 천리 밖에서 불러와 마음껏 즐기고 있다니 문인의 처사란 참으로 속되지 않구나. 누구도 하기 어려운 일이로다.”
라고 했다. 그리고 치정을 극히 잘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 며칠 후에 박제가(朴齊家)를 불러 이렇게 하교하였다.
“박지원의 고을에 문인들이 많이 가서 놀고 왔다는데 너는 공무에 매여 가보지 못했다지. 아마도 혼자만 빠진 아쉬움이 있겠구나. 만사 제폐하고 우선 가서 놀다 오도록 해라.”
박제가는 드디어 왕명을 받고 내려왔으며, 이와 같은 사실도 전하여 알게 되었다. (위와 같음)
하풍죽로당기(荷風竹露堂記)
5)정당(正堂)의 서쪽 곁채는 다 무너져 가는 곳간에다 마구간, 목욕간이 이어져 있다. 거기서 몇 걸음 밖에는 오물과 재를 버려 쓰레기 더미가 처마만큼 쌓였다. 대개 관아의 구석진 땅으로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모이는 곳이다. …… 그래서 종복들에게 일과로 삼태기와 바지게에 담아 끌어내게 하여, 열흘 뒤에는 툭 트인 공지가 나타났다. 가로는 스물다섯 발에 이르고, 너비는 그 십분의 삼이었다. 이에 그 공지를 반으로 나누어, 남쪽에는 남지(南池)를 만들고 폐치(廢置)된 창고의 재목을 이용하여 북쪽에 북당(北堂)을 지었다.
당(堂)은 동향으로 잡아 가로는 기둥이 넷, 세로는 기둥이 셋, 서까래를 위로 모아 상투같이 만들고 꼭대기를 호로병처럼 만들었다. 가운데는 대청을 만들고 연하여 장방을 만들었으니, 전면은 왼쪽이 되고 협실은 오른쪽이 되며 빈 곳은 트인 마루, 높은 곳은 층루, 두른 것은 복도, 밖으로 트인 것은 창문, 둥근 것은 통풍창이다.
그리고 굽은 도랑을 끌어 푸른 울타리를 통과하게 하고, 이끼 낀 뜰에 구획을 나누어 흰 돌을 깔아 놓으니, 그 위를 덮어 흐르는 물이 어리비쳐서 졸졸 소리 낼 때는 그윽한 시내가 되고 부딪치며 흐를 때는 거친 폭포가 되어 남지로 들어간다. 그리고 벽돌을 쌓아 난간을 만들어 못의 둔덕을 보호하고, 앞에는 긴 담장을 만들어 바깥뜰과 경계를 짓고, 가운데는 일각문(一角門)을 만들어 정당과 통하게 했다. 남으로 더 나가 방향을 꺾어 못의 한 모서리에 붙여서 홍예문(虹蜺門)을 가운데 내고 연상각(煙湘閣)으로 통하게 했다.
대체로 이 당의 승경은 담장에 있다. 어깨 높이 위로는 다시 두 기왓장을 모아 엇물려서 여섯 모로 능화(菱花) 모양을 만들기도 하고 쌍고리처럼 하여 사슬 모양을 만들기도 하고, 하나씩 풀어 놓으면 돈꿰미 무늬가 되고 서로 잇대면 시전지처럼 되니, 모양이 영롱하고도 그윽하다. 이 담 아래는 한 그루 홍도(紅桃), 못가에는 두 그루 늙은 살구나무, 누대 앞에는 한 그루의 꽃 핀 배나무, 당 뒤에는 수만 줄기의 푸른 대, 연못 가운데는 수천 줄기의 연꽃, 뜰 가운데는 열한 뿌리의 파초, 약초밭에는 아홉 뿌리 인삼, 화분에는 한 그루 매화를 두니, 당을 나가지 않고도 사계절의 명물들을 두루 완상할 수 있다. (하략)
(연암집(燕巖集) 권1 연상각선본)
안의 사람들의 연암에 대한 평가
6) 선군(연암)이 안의 고을을 떠나고 나서 30년이 지난 갑신년(1824년) 여름에 한 할멈이 우연히 계산초당(桂山草堂, 연암이 살았던 집)을 들어와 보고서
“이상하다! 이 집의 제도가 우리 고을 관아의 정자와 비슷하다니.”
라고 말하여, 내가 마침 대청마루에 앉았다가 그 할멈을 불러 물어 보았더니, 과연 안의 사람인데 구경하려고 서울에 왔다는 것이었다. 내가 “당신 고을 관아의 정자는 누가 지은 것이요?”라고 물었더니, “박 등내(等內, 원님을 이르는 말이므로 여기서는 연암을 가리킴) 재임시에 지은 것이랍니다. 제도가 이 집과 마찬가집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다시 또 그 할멈에게 “당신네들 민간에서 박 등내에 대해 일컫는 말이 없소?”라고 물었더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무슨 특별히 일컫는 말이야 있겠소. 단지 신관이 도임할 즈음에는 꼭 서로 이르기를 어떻게 옛날 박 등내 같은 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고 한답니다. 민간에서 음식 추렴을 해서 모임을 가질 때면 으레 ‘박 등내 시절의 좋은 위의, 좋은 풍류를 말하는데, 일일마다 위엄을 세우고 은혜를 베푸는 것 같지 않는대도 읍내나 촌이나 아무 일이 없고 저절로 즐거웠다. 그런 호시절은 다시 볼 수 없구나.’ 라고 하지요.” (과정록(過庭錄) 권1)
열하일기(熱河日記)
김혈조(金血祚 영남대 한문교육과)
1.
미지의 세계로 길 떠나는 사람의 심경은 어떠할까. 그것도 남의 나라, 왕복 반년이나 걸리며 생사여부가 불투명한 장도에 오르는 심경은 어떠할까. 조선 후기 한양에서 중국 청나라 수도인 북경을 가는 도중 광활한 요동벌판을 지나며 연암 박지원은 통곡하기 좋은 장소이니 한바탕 울어 볼만하다며 이국의 땅을 밟는 심경을 토로했다. 남의 땅을 처음 밟으며 왜 하필이면 통곡하고 싶은 충동을 받았으며 목 놓아 울고 싶었을까. 그는 자신이 통곡하려는 이유를 갓난아기가 태어나며 우는 사정과 같다고 하며 중국기행문 열하일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 혹 누가 말하기를 인생은 잘나나 못나나 죽기는 일반이요, 그 중간에 허물 환란 근심 걱정을 백방으로 겪을 터이니 갓난아이는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울어서 자신을 조문하는 것이라 말한다면 이는 갓난아이의 본정이 아닐 것이다. 아이가 어미의 태 속에 자리잡고 있을 때는 어둡고 갑갑하고 얽매이고 비좁게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탁 트인 넓은 곳으로 빠져나오자 팔을 펴고 다리를 뻗어 정신이 시원하게 될 터이니, 어찌 한번 감정이 다하도록 참된 소리를 질러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본받아야 하리라. ”
갓난아이가 암흑의 태중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광명의 넓은 세상으로 나와 손발을 펴고 정신이 맑아지는 자유와 해방의 기쁨이 극에 달해 외치는 것이 그 울음이다. 연암이 중국에서 처음 느낀 심경은 갓난아이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 했다. 태중의 암흑에 갇혀 있는 세계란 다름 아닌 조선의 현실이었다. 자신의 팔다리를 펼 수 없이 억눌리고 답답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조선의 현실에서 탈출하여 이제 찬란한 문명세계를 향해 가는 길목에서 마주한 것은 드넓은 요동벌판이었다. 이제 연암은 마치 태중에서 세상으로 빠져나오는 갓난아이처럼 질곡으로부터 해방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 기쁨의 극치에서 연암은 갓난아이의 순수한 마음과 같이 마음껏 소리 질러 울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세계 문화 문명의 중심부인 중국 청나라를 불온한 지역으로, 적대적인 나라로 여기게 만들었던 사상적 질곡에서 벗어나 이제 그 땅을 밟게 되는 감회와 감동이 남달라 복받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을 적대적으로 규정하여 폐쇄시킴으로써 조국의 미개 낙후한 상태를 지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정권의 체제 연장책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그와 달리 문명세계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중국을 대면하는 순간 연암은 자신도 모르게 통곡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암흑세계 거짓세계에서 문명세계 참세계로 향하는 순수한 정신, 그것이 갓난아이의 울음이 갖는 상징적 의미이다.
2.
연암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년) 서울 서소문 밖 반송방 야동(冶洞)에서 박사유와 함평이씨 사이의 2난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씨족인 반남(潘南) 박씨가는 높은 벼슬을 배출한 명문거족의 노론계 집안이었다. 조부 박필균은 경기감사, 참판 등 고관을 지냈고 탕평책에 비판적인 노론계로 활약했으며, 그의 일족인 박명원이 영조의 총애를 받는 부마인 점 등 왕실과의 깊은 인척관계로 국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청렴한 관직생활로 사대부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이러한 조부와는 달리, 연암의 부친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부모 밑에서 평범하고 조용한 일생을 마쳤다. 연암의 정신적 성장은 부친보다 조부가 더 큰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열여섯 살 때 전주이씨와 결혼한 연암은 장인 이보천과 처숙 이양천으로부터 본격적인 학업을 받게 된다. 송시열에서 김창협으로 이어지는 노론의 학맥을 계승한 이보천은 산림처사로서 연암에게 사상과 처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사위인 연암이 과거시험에 응시했다는 것을 듣고 내심 못마땅하게 여기다가, 연암이 백지 답안을 내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단히 기뻐했을 정도로 꼿꼿한 선비였다. 홍문관 교리를 지낸 처숙 이양천은 시문에 뛰어나 특히 문장 방면에서 연암을 지도하였다.
20세를 전후한 시기부터 연암은 절친한 벗들과 산사를 찾아다니며 과거 시험공부에 전념했다. 그러나 이 시기 연암은 번뇌로 며칠씩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등 우울증 증세로 고생하였다. 혼탁한 정치 사회현실과 그에 따른 양반사회 특히 우도(友道)의 타락상을 경험하면서 현실사회에 비판적 견해를 가지게 되고, 밝은 미래사회를 전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래의 거취문제에 고뇌를 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 때 쓴 양반전 등의 소설적 작품은 당시의 심각한 정신적 고뇌에서 창작된 것이다. 이익과 명예를 좇아 위선적 행동을 일삼는 양반들의 행태를 풍자하고, 오히려 건전한 인간의 도리를 하층 민중에서 발견하고 이들과의 교유를 통해서 진정한 인간상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이 초기 소설적 작품들의 공통적 주제이다.
장래의 거취문제로 방황하던 연암은 1771년 35세의 나이에 드디어 과거를 포기하고 재야의 양심적 선비로 일생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문장에 대한 연암의 명성은 일세를 크게 울려 시관이 그를 기어이 합격시킴으로써 훌륭한 인재를 뽑았다는 명예를 낚으려 할 정도였으나 그는 끝내 응시하지 않았다. 주변의 강권에 못 이겨 응시는 하되 백지 답안을 내거나 혹 답지에 고송노석도(古松老石圖) 한 폭을 그려서 제출한 일도 있었다. 글하는 선비들이 그토록 소망하는 문과 급제, 그것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을 왜 굳이 회피하였던가. 어찌하여 가난한 선비로 일생을 보내기로 결심하였던가.
요컨대, 당시 이조국가의 체제는 더 이상 창조적 한 인간의 포부를 실현시킬 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통한 벼슬살이는 다만 개인적인 출세와 부귀의 수단이 될 뿐이며, 먹고살기 위해 구처없이 하는 노릇에 불과하였다. 뜻이 있는 선비들은 애초에 과거를 포기했던 것이 당시 실정이었다. 고시에 합격하여 권력의 주구가 되었던 시절, 고시 공부하는 놈 치고 인간 된 놈 없다는 말이 그 때도 통했던 모양이다. 연암은 자기 자신을 출세에 급급한 세속적인 삶에 순응시키지 않았으며, 속류에 나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곧 주체에 대한 깨달음에서 취한 결정이다.
더욱이 당시의 정국은 연암에게 더 이상 사회생활조차 포기하게 만들었다. 처숙이며 스승이었던 이양천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기에 이르렀고, 지기인 황승원, 유언호까지 정쟁에 휘말려 흑산도로 귀양 가는 현실을 체험하였다. 특히 절친한 벗이며 스승의 아들인 이희천이 왕실을 모독하는 기사가 실린 중국 서적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이 잘리는 처형을 당하였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시국에 깊은 혐오감을 품게 했을 뿐 아니라, 일체의 사회생활을 폐하게까지 했다고 연암은 말했다.
과거를 포기한 이후 연암은 울울한 심경으로 명산대천을 찾아 유람하였다. 북으로 송도 평양을 거쳐 묘향산에 이르고, 남으로 속리산 가야산 단양 등지를 두루 찾아다녔다. 무예에 뛰어난 백동수와 함께 황해도 금천군의 연암협을 답사한 후 장차 여기에 은거할 뜻을 정하고 자신의 호를 연암으로 지은 것은 이 시절이다. 연암(燕巖)이란 제비바위란 뜻으로, 문자 그대로 제비가 집을 짓는 깎아지른 바위가 있는 첩첩 산골이란 의미이다.
이후 연암은 현실에 좌절하거나 둔세유리(遁世遊離)하지 않고, 진정한 선비로서 거듭나게 된다. 곧 사의식(士意識)에 대한 주체적 자각이다. 선비는 곧 독서하는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한 선비가 독서를 하면 그 혜택이 세계에 미치고 공업이 영구히 드리워진다.”고 하였는데, 이제 그는 독서와 학문하는 선비로 자신의 일을 찾게 되었다. 식솔들을 처가로 보내고 서울의 셋집에 홀로 기거하면서 독서와 학문에 열중하였다. 당시 연암을 찾아와 학문적 토론을 했던 인물로 홍대용․이서구․ 이덕무․박제가․유득공․정철조 등이 있었다. 서얼들과 교류한다는 비방이 있었지만 연암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학문과 문학을 발전 심화시켜 나갔다. 연암의 주옥같은 작품과 참신한 문학이론은 바로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뿐 아니라 이 시기에 홍대용을 시작으로 이덕무 박제가 등 중국을 다녀온 인물들과 학문적 토론을 하며, 특히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타개하고 물질적으로 풍요한 문명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청나라의 발전상을 연구하였다. 당시 청나라를 여진족의 미개한 되놈의 나라라 하여 자못 멸시하고, 한편 청나라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을 반민족인 것으로 취급하는 정신적 풍토 속에서 연암은 오히려 그들의 앞선 문화를 배워야 함을 주장하였고, 자신도 중국의 발전상을 직접 체험하는 여행을 하게 되기를 기다렸다. 연암을 비롯한 이들을 우리는 실학파 중 북학파 혹은 이용후생학파라고 부르거니와, 이용후생학파의 학문이 여기서 나온 것인데 연암의 집은 바로 그 산실이 되었으며 연암은 그 좌장 노릇을 하였다.
1778년 연암은 돌연 전의감동(典醫監洞)의 학문적 생활을 접고 가족을 이끌고 연암동으로 은거하게 된다. 급박하게 돌아가던 당시 정국은 마침내 연암이 현실권 밖으로 은거하여야 목숨을 보장받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사도세자의 처벌을 찬성하고 정조의 왕위계승을 반대하던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는 한편, 세손(정조)의 보호와 그 즉위에 공을 세운 홍국영이 정국을 농단하게 되었다. 이러한 왕위 교체기에 연암은 당국자를 서슴없이 비판하는 언행과 문장을 지음으로써 숙청 대상인물로 지목되었다. 연암에게 시시각각 좁혀오는 위기를 감지한 친구 유언호는 그에게 도성을 벗어나 피신할 계책을 일러주었다.
당시 연암으로서는 장인이 별세하고, 가난한 살림을 혼자 된 몸으로 꾸려온 형수마저 병사한 상황이어서 더 이상 도성에 머물 처지도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연암은 서둘러 도성을 빠져나와 평소 은거지로 물색해 놓은 황해도 연암동으로 피신하였다. 이 산골에서의 생활은 대단히 빈한하여 손수 밭을 갈고 뽕나무를 심는 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한편 연암은 사물에 대한 관찰과 사색을 통해 자신의 인식론적 태도를 변화시키고 집필을 하며 장래 대저작을 창작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연암동에서의 생활이 2년이 지나 홍국영의 갑작스런 실각과 함께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연암은 다시 도성으로 올라왔다. 때마침 8촌형 박명원(국왕 정조의 고모부로 특별한 신임을 받음)이 중국 사행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연암은 숙원이었던 중국여행을 하게 될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 때가 1780년, 연암의 나이 44세 되던 해이다. 조정에서 파견한 사행의 주목적은 청 고종 건륭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관례상 정식 사행원은 아니어도 사신의 일가친척 중 한 명을 데려가 외국을 유람하고 문견을 넓히게 하였는데, 바로 여기에 연암은 끼게 된 것이다. 포의 신분인 연암은 박명원의 개인 수행원(伴當- 侍從兵卒) 자격으로 사행의 일행에 낄 수 있었던 것이다.
연암은 무슨 의도에서 당당하지도 않은 신분으로, 일행에 끼어 가는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중국 여행을 떠났는가? 주변 인물들이 너도나도 가니 그냥 유행처럼 여행한 것이 아님이 물론이다. 앞서 얘기한대로 중국의 선진 문화문물을 직접 눈으로 구경하고, 이를 배워(北學) 조선의 미개한 경제와 저급한 문화를 발전시키려는 목적의식에서 여행을 결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진정 외국 여행의 목적이었던가.
당시 중국은 동아시아 세계의 중심부였다. 서양을 인식하기 전에는 바로 중국을 세계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변부인 이조 사회는 중심부의 변화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을 터인데, 조선사회의 변화 나아가 역사적 전환은 이 중심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조선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할수록 세계, 즉 중국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한 주체적 인간으로서, 답답한 처지에 놓인 선비로서, 한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를 바라는 지식인으로서 세계의 중심을 직접 호흡하고 거기서 세계사적 진로를 눈으로 전망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행의 진정한 목적이 거기에 있었으며, 열하일기와 같은 위대한 저작이 나올 수 있었던 까닭이다.
3.
사행은 음력 5월 23일 한양을 출발하여 6월 24일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넌다. 열하일기는 압록강을 건너는 대목인 「도강록(渡江錄)」부터 시작된다. 책문(柵門)을 거쳐 요양․심양․북진․금주․산해관․통주 등 지정된 사행길을 따라 8월 1일 북경에 도착했다. 도중에 폭우를 만나 지체하기도 하고, 하루에도 몇 차례 위험한 급류를 건너기도 했고, 지정된 날에 도착하기 위해 무더위 속에서도 강행하는 고된 여정이었지만 연암은 색다른 경험을 하느라 그야말로 좌충우돌하였다. 말안장 양쪽에 주머니를 달아, 왼쪽에 벼루, 오른쪽에 거울, 붓 한 자루, 먹 하나, 공책 4권, 이정록 1권을 넣은 것이 행장의 전부이었지만, 연암이 대륙에 첫발을 내딛는 모습은 마치 적진에 뛰어드는 장수의 모습 그것이었다. 그는 평소 선배들이나 주변 인물들이 저술한 연행록이나 입소문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확인하고, 색다른 것에 대한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모습에 그치지 않고, 자못 전투적 자세로 임했다. 연행에 임하고 준비하는 자신의 모습과 각오를 이렇게 묘사했다.
“ 마상에서 혼자 생각하기를 ‘본래 학식이 없는 나로서는 맨손으로 중국에 들어갔다가 그곳의 대학자를 만나면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 하여 고민을 하였다. 드디어 전에 들은 지식 가운데 지전설 월세계 등의 이야기를 끌어내 안장 위에 앉아 매양 말고삐를 잡고 졸면서도 여러 십만 자의 글을 적어 「가슴에는 문자화하지 못한 글과 공중에는 소리 없는 문자」가 하루에 여러 권을 엮었다.”
여기 준비 과정에서 채 문자화하지 못한 책은 실제 중국인과의 필담으로 구체화되었고 그 내용은 열하일기 「鵠汀筆談」에 실려 있다. 이는 연암이 중국 여행과 중국지식인과의 만남을 얼마나 기대했으며, 또 이를 위해 얼마만큼 철저히 준비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북경에 도착한 사행은 뜻밖의 명령에 혼비백산하였다. 당시 청황제는 열하(熱河)의 별궁에 머물면서 조선의 사행을 만수절에 맞추어 열하로 오라고 한 것이다. 정사를 비롯한 사행의 일부가 황급히 그곳으로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연암 역시 따라가게 되었다. 사행원들조차 가기를 원하지 않는 곳이고, 가야할 의무도 없는 연암이었다. 그러나 연암은 이전의 어떤 조선의 사행도 가보지 못한 열하 지방의 여행을 기꺼이 자원하여 따라나섰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은 것인데, 그의 중국기행문의 제목을 열하일기라고 명명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전의 기행문이 북경을 다녀왔다는 의미에서 연행록 ․ 입연기 ․ 조천록 ․ 황화집 등과 같이 상투적 이름을 붙인 것과는 달리 연암은 전인미답의 경지를 밟고 경험했다는 뜻에서 특별히 열하를 강조했던 것이며, 바로 이 열하에서 천하대세를 전망했다는 점에서 특기했던 것이다.
열하( 현재의 명칭은 하북성 승덕(承德) )는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위치한 도시로서 북경과 4백리 떨어진 곳이다. 건륭황제는 이곳에 거대한 별궁을 건설하고 매년 여름 피서지로 활용하였는데, 그 규모와 화려함이 북경의 자금성에 못하지 않은 곳이었다.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건륭 치세 기간 중에 열하는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몽고․티베트․위구르의 사신들이 모여들어 일대 성시를 이루었고, 연암이 갔던 1780년은 티벳 불교의 지도자 판첸라마가 찾은 역사적인 해이었다.
촉박한 일정과 험난한 노정에 갖은 고생을 하며 8월 9일 열하에 도착한 연암은 공식 일정에 매인 몸이 아니었으므로 자유롭게 자신의 견문을 넓혀나갔다. 낮에는 행궁을 구경하기도 하고, 판첸라마와 티베트 불교 행사를 견문하는 기회도 가졌다. 밤으로는 청조의 학자, 특히 한족지식인 만주족지식인과의 인간적 교류와 학술적 토론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열하의 체류 중에 숙소인 태학관에서 만난 청나라의 지식인들과 거의 매일 만나 고금의 역사․정치․학술․시문학․천문․음악․풍속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필담으로 학술적 토론을 하였다. 여기서 그들의 필담과 필담을 하는 모습을 통해 청조학술의 동향, 한인지식인의 만주족 지배에 대한 저항의식, 중국 주변국가들의 동향, 청나라의 대외정책과 대내정책의 고심처 등을 꿰뚫어 보았다.
만수절(萬壽節)인 8월 13일 하례식에 참석한 사행은 이틀을 더 머물고 15일 열하를 떠나서 20일 북경에 돌아와 잔류인원과 합류한다. 이후 사행단은 약 한 달 동안 북경에 체류하다가, 9월 17일 북경을 출발하여 그 해 10월 27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4.
연암이 한국문학사에서 연암답게 될 수 있었던 문학예술이란 바로 열하일기를 두고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 5개월 동안의 중국 체험을 적은 일기 형식의 견문기와 지식인과의 필담, 문예적 산문, 소논문, 소설, 시화 등이 어우러진 방대한 분량의 여행기인 열하일기는 이전의 중국여행기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체제와 내용의 작품집이다. 연암은 귀국하는 즉시 여행 중에 써두었던 원고와 메모를 정리 편집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수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다듬은 뒤, 1783년에 일단 탈고하여 이를 열하일기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선보였다.
열하일기는 책을 완성하기도 전에 벌써 사람들이 그 일부분을 베껴서 읽었으며, 당시 독서계에 큰 관심과 흥미를 끌었다. 발표된 당시부터 문제의 저작으로 지목되어 파문을 일으키며, 급기야 열하일기의 문체를 모방할 만큼 보급되고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열하일기의 유행과는 달리 당시 독서계의 주된 관심은 열하일기의 진정한 가치와는 비켜 있었다. 청나라 연호인 건륭을 썼다는 이유로 되놈의 연호를 쓴 글이라는 뜻의 노호지고(虜號之稿)라는 비방이 있었는가 하면, 연암 주변의 학식 있는 인사까지 그 진정한 가치를 놓치고 있었다. 열하일기의 진정한 가치와 역사적 의의는 현재 우리로서도 곰곰 따져볼 사항이지만, 어쨌든 당시 독서계는 흥미위주로 취급했던 것이다.
열하일기에서 특히 관심을 끌었던 것은 문체상의 특이함이었다. 열하일기의 문체는 확실히 종래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고문(古文)의 문체와는 다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전기(傳奇)․우언(寓言)․해소(諧笑) 같은 소설식 문체는 시비의 초점이 되었다. 당시 독서계는 작가 연암의 진의와 고심처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표현상의 특이함에만 주목하여 열하일기를 패사소품(稗史小品)의 글로만 인식하고 이 문체를 모방하여 자신들의 글을 저작했다. 곧 열하일기의 문체는 당시의 문풍에 큰 영향을 주어 새로운 문체를 출현하게 하였다. 한 개인의 문체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며, 급기야 국왕에게까지 연암의 문체가 알려질 만큼 보급 확산되었다.
일파만파 퍼져나간 열하일기는 결정적으로 된서리를 맞게 된다. 정조 임금이 시행한 문체반정(文體反正)이 그것이다. 문체의 성쇠는 정치현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 정조는 자신이 통치하는 시대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체를 순정하게 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문체를 순정하게 하는 정책, 곧 문체반정책에 정통으로 걸려든 것이 열하일기였다. 열하일기를 통독한 정조는 문풍이 바뀌게 된 원인을 열하일기로 돌리고, 문풍을 바로잡을 모든 책임을 연암에게 추궁했다. 국왕이 열하일기를 거명하여 연암에게 견책을 가했던 만큼 연암의 신문예운동은 커다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열하일기의 확산은 주춤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조 죽음, 그리고 19세기 초 경직된 정치 분위기에서 열하일기는 마침내 불온한 서적으로 낙인찍혀 조선 체제가 끝날 때까지 일종의 금서로 취급받게 된다. 그리하여 수많은 이본의 필사본으로 전해지게 된다. 연암의 손자인 박규수가 우의정까지 지냈으나, 연암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할 정도로 사상적으로 경직되었으며, 열하일기는 문제의 서적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열하일기가 공간되어 햇빛을 보게 된 것은 근대계몽기인 1911년이다. 민족의 위대한 저작이 장기간 사장되었던 것에서 역사의 암흑이 길었음을 본다.
5.
열하일기의 내용과 주제사상은 무엇인가. 연암은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고 받아들어야 한다는 북학파에 속하며, 열하일기는 북학론을 대변하는 대표적 저서라고 말한다. 연암은 압록강을 건너는 그 순간부터 어느 것 하나 간과하지 않고, 이용후생의 정신으로 관찰한다. 압록강가의 수많은 갈대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 등 중국의 자연․지리적 환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국의 상업, 역참(驛站)과 성시, 민가의 규모, 교통의 발달, 각종 건축물, 각종 기계류, 벽돌의 사용법, 말을 다루는 법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보다 나은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며 보고 배울 것을 역설하고 있다.
확실히 열하일기는 제반 기술적인 측면 및 통상 등에 걸쳐 구체적이고 상세한 내용의 관찰의 보고 및 「중국을 배우자」는 명쾌한 논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열하일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관찰의 깊이와 폭의 차이는 있을망정 이전의 연행록에도 언급된 내용들이다. 예컨대 박제가의 북학의의 내용 역시 열하일기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 연암은 북학의의 서문에서 두 책은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저작된 것처럼 동일하다고 한 바 있다.
북학을 하자는 동일한 주제를 담은 저서임에도 하필 북학의는 문제가 되지 않고 열하일기만 문제가 된 까닭은 무엇인가. 다름 아니라 주제를 표현하는 형식과 기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북학의가 고문으로 표현한 것임에 비해, 열하일기 역시 고문투가 대부분이지만 그 형식과 기법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 연암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서사적 산문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설리적 산문을 적절히 운용하는 한편, 무엇보다 중국과 조선의 대비를 통해 조선의 낙후된 실정을 비판하는 형식을 취한다. 여기서 조선의 낙후된 실정의 책임은 부패무능한 위정자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고루한 양반에게 있음을 드러내었다.
이 경우 그의 표현은 극도의 흥분된 상황으로 몰아가는 데 유리한 반어법과 과장법 등을 구사한다. 예컨데 중국을 다녀온 양반들은 모두 일류선비로서 중국의 장관을 어디 어디라고 꼽지만, 자신은 삼등 선비이므로 어느 곳보다 깨진 기와 조각과 똥거름이 장관이라고 표현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표현수법이 북학을 주제로 한 여타의 연행록과 다른 점이며, 특히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다.
중국을 배우자는 열하일기의 북학론적 주제보다 연암이 더욱 고심한 주제는 무엇인가. 북학의의 서문에서 연암은 북학의나 열하일기의 내용 중 북학에 관련된 사항은 중국에 가지 않은 젊은 시절 이미 자신들의 토론을 거쳐 연구된 내용이라 말했다. 따라서 중국여행은 그 내용의 확인에 있었다 했지만 단순 확인을 위해 몇 개월의 고행을 감내했던가. 북학의 주제보다 더 진정한 주제가 있을 터인데, 이 점이 열하일기의 진정한 주제이며, 연암이 고심했던 곳이다.
연암 당시의 세계는 바로 동아시아다. 그 세계를 통치하는 나라는 바로 청나라다. 청나라는 중국 동북부의 오랑캐인 여진족의 나라이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듯,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민족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되놈」이라 경멸한 여진족이었다. 연암은 청의 선진문물을 배우자고 주장했으나, 그렇다고 청 황제의 지배에 있는 동아시아 현 체제를 정당하게 본 것은 아니었다.
연암은 청조의 눈부신 번영과 정치적 안정의 이면에는 한인의 민족적 저항과 주변 여러 민족을 통치하는 청의 기만 정책이 있음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의 동남부와 열하 지방에서 세계사의 변혁이 시작될 것을 전망하였다. 열하일기에서 드러내려 한 연암의 고심처와 대주제는 세계인식 즉 천하대세의 전망이다.
「심세편(審勢編)」 ․ 「곡정필담(鵠汀筆談)」 ․ 「망양록(忘洋錄)」등은 천하대세를 중국인들의 풍속과 노래에서 살핀 것이고, 「황교문답(黃敎問答)」 ․ 「반선시말(班禪始末)」 등에서는 시대 풍상의 오류를 관찰하고 대중여론의 향배를 살폈다.
주자학의 장려와 충효사상의 고취 이면에 깔린 정치적 저의와 고금도서집성 ․ 사고전서와 같은 대규모 도서편찬사업이 노리는 지식인 탄압 등에서 청나라의 교묘한 대내적 통치술을 엿보았으며, 중국 주변 민족인 몽고 ․ 위구르 ․ 티베트 ․ 조선인을 통치하는 고도의 대외정책을 예리하게 주시했다. 특히 「행재잡록(行在雜錄)」은 청과 조선의 외교 관계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분석한 내용이다.
당시 청나라가 조선의 조공과 사행인원을 감해주거나, 조선의 풍속을 장려하는 등의 호의적인 우대정책을 구사하는 것은 조선인을 문약하게 만들고 뒷날 군비에 필요한 막대한 희생을 요구하려는 고도의 외교술책임을 경고한 이 대목은 역사에 대한 지식인의 주체의식이 빛나는 부분이다.
천하대세의 전망이라는 주제 역시 그 표현하는 방법을 설리적 산문과 서사적 산문을 교차시키고 있다.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경우 대체로 설리적 산문을 주로 사용했고, 그 이론을 중국현실을 통해 보여줄 경우는 서사적 묘사문을 사용했다. 특히 중국의 시의에 꺼려지는 내용은 그들의 태도, 즉 답변을 기피한다든지, 필담한 내용을 지우고 찢고 태우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 주제를 드러냈다.
연암은 실제를 탐지하는 방법으로서 ‘지묵 바깥에서 그림자와 메아리를 얻는 수법’을 제시했는 바, 필담의 형식이 그것이다. 특히 태학관에서 한족 선비와 필담하는 장면에서 제시했듯 세태에 대한 분노와 사상통제의 실제를 드러내려는 주제에서 풍자와 우언의 방법이 쓰였다. 이 풍자와 우언은 다분히 소설적인 구기(口氣)로 된 것이므로 열하일기가 일종의 패관기서로 취급되었고, 이것이 문체상 논란이 되었던 점이다.
열하일기의 주제에서 무엇보다 당국자나 유학자들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은 국가의 이념체계와 국시에 관련된 부분이다. 조선의 지배적 이념체계는 주자학이다. 연암은 열하일기 곳곳에서 이미 비현실적이고 권위주의화한 주자학과 그것이 빚어낸 각종 폐해를 예리하게 풍자했다. 「상기(象記」에서는 주자학의 이념적 허구성과 궤변을 논리적으로 비판했고, 특히 유명한 「호질(虎叱)」에 이르러서는 극대화되었다.
우언적인 소설로 꾸며진 「호질」은 문체상에서도 소설로 경사되었거니와, 그 주제사상은 고루한 유학자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다. 음부인 동리자(東里子)와 놀아나다가 의인화된 범 앞에 굴욕적이고 비굴하게 삶을 구걸하는 북곽선생(北郭先生)은 인의도덕으로 곡학아세하는 전형적인 위선적 학자다. 조선조의 유명한 학자를 염두에 두고 그렸을 법한 이 작품은 주제의 강렬함이 작품 형식적인 면에서 우언이 거듭 우언화 됨으로써 우언의 본래적 속성인 의미의 다의성이 극대화되었다.
연암 당시 국시로 통했던 것은 반청(反淸) 곧 북벌론(北伐論)이었다. 북벌론은 애초부터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었으며, 단지 집권층의 정책적 구두선에 불과했다. 민족의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고 반대파를 제거하는 대내용 기만책이었다. 북벌론자들은 이 대의명분 밑에 권력을 잡아 국민을 기만하고 민족의 힘을 소진시켰던 것인데, 연암은 여기에 반발하여 신랄하게 풍자하였다. 「관내정사(關內程史)」에서 북벌론의 이념적 근거였던 백이․숙제의 존주론과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춘추론을 해학을 섞어 신랄하게 풍자했으며, 유명한 「허생전(許生傳)」에 이르러서는 그 절정에 달했다.
연암은 북벌을 부르짖으면서도 안일하게 허례의식과 자존자대에 빠진 조선 사대부들을 허생의 입을 통해 통렬하게 비판했다. 또 북벌의 총참모격인 이완(李浣) 대장의 목에 허생이 칼을 들이대게 했을 만큼 북벌론자들에게 분노의 감정을 퍼부었다.
「허생전」 역시 우언적 수법에서 소설적이지만 그 서사구조는 「호질」보다 더 완벽한 소설이며, 그 주제 또한 국시를 정면으로 건드렸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연암의 손자 박규수가 조부 문집 간행을 반대할 때 하필 「호질」과 「허생전」을 거론하면서 이 작품이 유림의 비방을 입었다고 말한 것은 그러한 역사적 사정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열하일기의 주제에서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들어 가는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연암의 시각이다. 열하일기에서 가장 비중 있고 정채를 발휘하는 부분은 각양각색의 인간군상에 대한 관찰과 그 묘사이다.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인간들에 대한 동태적 파악과 다양한 형상적 표현은 바로 연암 역사관의 문학적 표현이다.
특히 주목할 사실은 하층 인물묘사의 탁월함이다. 이는 열하일기 전편의 적재적소에 깔려있기도 한데 특히 서두인 도강록(渡江錄)에 집중돼 있다. 조선사행의 잡역부․ 마두배(馬頭輩들)이 중국인들과 대거리하는 장면에서 그들 특유의 언어․정감․행동을 살아 움직이도록 표현했다.
이 서민들의 삶과 행동양태를 묘사할 때 연암은 거의 고문체를 버리고 백화문을 사용하였고, 글의 성격 역시 익살과 기롱을 섞었다. 뿐 아니라 정통 고문에서 금기하는 조선식 한자어와 조선 고유의 속담을 한자화하여 섞어 썼다. 중국어 대화는 백화체로 표현하고 우리말 대화는 가급적 조선식 한자어를 섞어 씀으로써 사람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게 하였다.
이는 소설적 형상화다. 김택영(金澤榮)이 연암집을 간행할 때 열하일기의 일부를 발췌하여 수록하면서도 “ 머리의 7권까지 도강록은 오로지 패사체를 썼기 때문에 취할 것이 못된다. ”고 한 것은 이를 의미한다. 요컨대 소설적 형상화를 통해 서민 대중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대신 문체상의 반역을 범한 것이다. 이 문체상의 반역은 연암의 역사의식의 반영이다.
사대부의 고문이 폐기되고 서민대중의 언어인 백화체가 공식문장으로 채택되는 1910년대에 와서야 중국의 역사는 비로소 계급적 신분관계가 타파되고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되었다. 문학과 역사의 문제가 불가분의 관계로 맞물린 것이다. 조선조 사대부들이 숭상해 온 정통고문을 깨고 백화체 및 조선식 한자표기법을 등장시키고, 정적인 한시 체계에서 동적인 산문 및 소설로의 전환 등과 같은 문체 변화의 시도는 바로 중세사화에서 근대사회로 지향하려는 연암의 역사인식의 반영이 아닌가.
6.
청의 선진문물을 배워 국가의 물적 기반을 세우자는 북학사상, 청조 지배하의 동아시아 세계에 대한 역사전망, 고루한 이념과 기만적 국시에 대한 비판․폭로, 역사발전 과정상 서민 대중들의 활력 등과 같은 열하일기의 주제들이 바로 연암이 담아내려 했던 고심처다. 그것은 ‘있는 세계’ 또는 ‘실현된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통하여 ‘있어야 할 세계’ 또는 ‘실현해야 할 세계’로의 전망과 지향이다. 이것이 열하일기의 역사적 의의이다.
인쇄 : 2009년 8월 5일
발행 : 2009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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