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에서의 사상四相에 대하여
금강경을 이해 하는데
도움 되시도록 아래에 지묵 스님의
四相 에 대한 풀이를 올려 놓았습니다
지금까지 논서와 주해가 가장 많은 경이
금강경인 까닭에 오가해의 육조 대사부터
교학의 대 종장들과 선종의 여러 큰 스님들이
노바심절히 일러 놓으신 법문이
대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금강경의 삼십이분 전문이
종으로 횡으로 자자구구
모든것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 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많은 불자들이 금강경을 독송 하거나
사경 법회를 열고 아니면 강설 법회에 동참하여
금강경의 오의인 아공 법공 구공의
모든 상을 타파하는 감로 법문으로
수행의 큰 자량 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데 공부가 적은 산승도 늘 독송하고
설하면서도
들을 때는 이해가 되는듯 하다가
돌아 서면
오리무중 처럼 분명하지 않은 것이
사상 즉 아 인 중생 수자상입니다
물론 저만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교계의 격조 높은풀이에 대해서는
여러 강설을 참조 하시고 아래 올린
지묵 화상의 글도 보시면 좋을듯 한데
여기서는 산승이 설법 하는데
종종 사용 하는 예로써
한번 풀이 해 보겠습니다
잘못된 견해는 눈 밝은 이들의
지적 주시기를 바라고
그나마 도움이 될듯 하다 싶은
공부인은 참고 하여 보십시요
※
아상은 곧 나를 말 함이며
인상은 나 이외의 상대를
중생상은 무명으로 얼룩진
어리석은 생각들이며
수자상은 수명등 시간과 관련 하여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갑과 을이 감정 대립으로 다툼이 일어 나서
갑이 을을 주먹으로 한대 쳤다고 합시다
그러면 거기에는 때린 사람인 갑이
나 즉 아상이 되고 맞은 사람인 을이
상대가 되는 인상에 해당 합니다
갑은 을을 가격하면서
아마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좋을 바가 없는 것을 좋아 하는 것
이게 중생의 마음 중생상입니다
다시 갑은 승리감이나
승부욕에 도취하여 자연히
그마음을 오래 간직하고자
마음에 새길것이니
그것이 수자상입니다
반대로 맞은 을에게는
을이 아상이요
갑이 인상이며
맞아서 괴로움이 중생상이며
어디 두고 보자 언젠가는 갚겠다 하는
마음이 수자상입니다
결국 때리고 맞는 갑과 을 사이에는
사상의 관계 속에서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 됩니다
아주 간단 한 일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두 눈 크게 뜨고 잘 살펴야 합니다
때린다 함은 동시에 맞는 것이 됩니다
갑이 힘들인만큼 맞은 을도 똑 같은 힘으로
반대로 작용 하였기에 둘 사이에는 주고 받음이
동시에 같이 일어 났을 뿐 일방적인 때림이나
맞음은 없는 것입니다
준 빚도,받아야 할 채무도 없으므로
외손바닥의 손뼉 소리와도 같습니다
이게 물리학의자동 반자동의 법칙이요
우리 불교의 인과응보 입니다
그렇게 되니 갑도 승리감에 도취 될것 없고
을도 패배감에 절망 할것이 없는 것인데
둘 사이에는 어리석게도 자신에게 유리 혹은
불리한 쪽의 생각만 하고 있으므로 해서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우를 저지르니
중생의 마음 곧 중생상이 나타 납니다
이긴 자는 이긴 마음을 오래 간직하려 하고
진자는 지금은 힘이 없어 맞지만 두고 보자
내가 언젠가는 원수를 갚겠다 하고
마음에 길게 새기면
그것이 수자상이 되는 것입니다
눈 밝은 지혜 다이아몬드와 같은
부처님의 혜안으로 살펴 보면
거기에는 때린 나도, 맞은 너도
고락의 중생도 심의식에 새길
수자상도 본디 없는 것인데
단지
착각과 전도된 몽상이 그들을
영원한 원수로서의
시발점을 만들어 준것입니다
하면
여기에 이르러 폭력도 선행도 욕설도
칭찬도 좋음도 나쁨도 모든 것들이
서로 자기와 상대 인과의 법칙을
모른 무지에서 나온 것일 뿐으로
알면 쉽게 됩니다
팔정도의 첫머리가
正見 바른 견해인것은
이같은 모습을 바로 보라는 가르침이며
정견을 사유와 말과 업과 삶에서
정진의 삶 선정과 지혜를 성취하는
팔정도의 가르침으로
이어 가라는 부촉인 것입니다
여래가
늘 호념 하시고 부촉 하시는 보살들
본디 나도 남도 중생도 수자도 없음을
알아챈 눈 밝은 이에게는
참으로 순간 순간이 재미 있고 살만한 세상으로
펼쳐 지는 것입니다 이런 깨침 속에서
육바라밀의 육도만행을 실천 하게 되면
무주상 보시며
무주상 지계며
무주상 인욕이며
무주상 정진이며
무주상 선정 이며
무주상 지혜가
나타남이니
곧 무주상이 바라밀이요
바라밀이 무주상입니다
이렇게 하는 보시 하고
같이 나눔이 삼륜 청정이요
삼륜 공적이 되는 것입니다
무시겁 이래로 착각과
전도된 몽상으로 지어온 사상의 업산이
단박에 무너 지고 일시에 밝아 지는
마하 반야의 도리가
금강경에 있는 것입니다
아니 사상산
그대로가 열반산이요
중생신 그대로가 진법신 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스승과 제자 스님과 불자
부부 형제 부자 친척 친구들과 형성 되는
모든 관계 속에서 인과응보의 원칙이
터럭만큼의 오차도 없음을 알게 되고
남에게 손해를 끼침은
내가 손해를 자초 하는 일임을 알면
악업을 그치고 선업을 쌓는 길로 나아 갈 것이며
그것들이 모여 십악업을 그치고
십선업을 닦아 나가며 그 선업 조차도
깨달음의 바다에 회향하며 마음에 새길바 없는
무상의 깨달음 조차도 일체 중생과
제 불보살님 전에 회향하는 보살행이 나툴 것입니다
※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깨달음.
우리 불교 종단의 거의가
소의 경전을 금강경으로 할 정도로
금강경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가까운 경전입니다
금강경이 갖는 사상적 위치나
대장경 속에서의 위치를
논하지 않더라도 부처님의 사십구년
설법 교화 활동의 최고의 정점에서 벽력과 같이
떨쳐 내시어 중생들의 사상산을 일거에 타파 하시고
병통을 씻어 내신 경전이기도 합니다
아마 불자라면 천수경과 같이 금강경 몇권은
집에 모시고 있을 것이고 독송하는데
제일 먼저 떠 올리는 경일 것입니다
어제 경찰서 불자회
즉 경불회 불자들 법회에는
금강경을 중심으로 하여 설법 하였습니다
하면서 많이
독송 하고 늘 지니며 남을 위해 전하십시요 하니
한 불자가 스님 경의 내용을 잘 모르면서
독송 하여도 공덕이 되는지요 하더군요
산승은 물론입니다 하였구요
그러면서
저는 금강경은 부처님의 온전한 지혜와 자비가
한량 없이 넘쳐 나는 총지 다라니와 같은 것으로
뜻을 알면 더욱이 좋겠지만 몰라도 영혼의
양식이 되는데는 그 공덕이 다르지 않음을 말하였지요
예로 부인이나 어머니가 맛있게 요리 해 내온 음식등은
그 성분이나 재료를 따지지 않고 먹어도 영양분이
몸속에서 골고루 작용함과 다를바 없다고 말이지요
그러면 금강경의 대의는 무엇일까요
공
무상 무념 무주등으로 설명 하기에는
조금은 막연 합니다
경은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무상정등정각의 마음 즉
위 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을 낸
불자들이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떻게 힘써
나가면 되는가 하는데서 부처님과의 문답 형식으로
설해 집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답변을 보면
깨달음의 방법에 대한 세세한 가르침은 나타 나지 않고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깨달음을 성취하는 답이 되어 집니다
쉽게 말하면
경을 읽으라 염불 해라 주력을 하라
참선을 하라 등의 답이 아닌 것이지요
우리는 대부분 생각이 많은 시기 즉 사춘기에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등의
의문과 갈등을 느끼고 자라고 커 왔습니다
아마 수보리의 질문도 그에 다름이 아닐텐데
부처님은 그런 고민 하지 말라 하는식으로
이르신 말씀이 이러 합니다
훌륭한 불자들은 이 세상에 존재 하는
사생 구류의 중생들로 하여금 영원한 행복의 길로
인도 함을 목적 삼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 대답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는데 요긴한 답이 됩니다
달리 말해서
나 나 하는데 나는 생각할 바 아니고
일체 중생들을 생각 하라 그들로 하여금
위없는 행복의 길로 들게 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사람에게는 나는 이미 없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내가 없음으로
일체 중생을 위한 삶을 목적 삼으면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고 양육 하는데 자신의
곤고함과 어려움을 불고 하듯이 살아 가게 됩니다
거기에 마음을 어찌 쓰며 살아 갈 것인가는
쓸 마음도 없이 쓰는,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마음을 쓰는 마음의 쓰임이 나타납니다
그 머무는 바 없는 마음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육바라밀 실천 해 나가면 불현듯
무시겁을 두고
나라고 생각 해 왔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등이
본디 없음이 홀연히 드러 납니다
결국 육바라밀등의 대승 불자 덕목을 온전 하게
실천 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생명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 하는 삶을 살아 가면
깨달음은
저 스스로 모습을 드러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불교 그리고 불자들은
불교를 믿는다 하면서
시작하는 공부가 깨달음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삶 속에서의 실천이
먼저 선행되지 않는 까닭에n공허한 깨달음의
이상에 취해 세칭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다 하면
지나친 지적이 될까요
이 글은 불교도들의
수행 형태를 논 하는 글은 아니지만
깨달음도 병이 되면 아니 깨달음만 못할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피안에 이르는 길은
앞서 논 한것처럼 아주 쉽습니다
나나 내것이라는 관념이 틈을 타기 이전에
일체 중생을 무여 열반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의 행
즉 육도만행이 그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그리고 나를 주장함으로 생기는 아상과
나로 말미암아 생기는 상대 즉 인상
또 삶을 살아 가면서 저지르는 우매한 마음인
중생상과 오래 보존하고자 하는 수자상 역시
모든 것의 출발은 나로 말미암아 있기에
부처님은 사상산을
타파 함은 상의 산을 만들어 놓고서
타파함이 아니라 타파 해야할 상의 산이 없음을
적실하게 지적하심이
금강경의 대의가 되는 것입니다
타파 해야할 상의 산도 없거니와
역설적으로 말하면 올라야 할
반야의 봉우리도 없음이요
깨쳐야할 무명도 없음이며
이뤄야 할 부처 자리도 없음이요
벗어 나야 할 중생신도 없음입니다
그리 하여
필경에는 중생과 부처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이 본무차별인 대원경지 평등성지의
바다에 이름입니다
경에서는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즉시 여래를 본것이며 듣기에 그럴듯한 설법이나
외형적인 거룩한 모습으로 나를 보려 하면
참 나와 만나지 못하며
일체 모든 것은
꿈 거품 환영 그림자 아지랭이 번갯불이라 보라
어찌 설할 것인가 불취어상하고 여여 부동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