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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한 송이 붉은 꽃으로 다시 피어난 산 사람들
►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근처에 있는 박영석 대장외 2인의 추모비탑
► 홍일점 지현옥대장 등의 추모비
► 유난히 한국산악인들이 많이 조난당한 안나푸르나 설산
► 강원대학산악회 김여훈님의 하트형의 추모패
► 포카라의 국제산악박물관의 박영석 대장 부스
► 구성진 장송곡 “람~남~사떼헤~~”
► 산악인 고 정광식님의 장례풍경
► 마하 시바라트리(Maha Shivaratri)의 본 고향 빠슈빠띠나트의 화장터
► 드림팀 아이들이 그린 고 정광식님의 장송화(葬送畵)
► 서울 우이동의 고 정광식 기념비
히말라야 산맥 중서부 안나푸르나 설산 베이스켐프[A,B,C]에는 유난히 한국 산악인들의 추모 페넌트가 많다. 아직도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박영석대장을 비롯하여 신동민님, 강기석님, 그리고 김여훈님 그리고 홍일점 지현옥대장 등을 잊지 말자고 살아생전 그들과 인연 있는 선후배친지들이 세운 일종의 추모비(追慕碑) 또는 불망비(不忘碑) 들이다.
며칠 전 반가운 손님이 내가 머물고 있는 비레탄티 학교를 방문했다. 그는 나의 외아들의 춘천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고 또한 동년배였기에 내가 춘천에서 살 때 가끔 만나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사이였다. 그 유재형교장이 퇴직 후에 소일거리로 <길 따라 여행>이란 여행사를 차렸기에 이번에 몇 분과 같이 A.B.C트레킹을 가는 길에 학교를 방문하겠다고 연락이 오더니 며칠 뒤 정말로 내가 묵고 있는 롯지를 방문하였다.
유교장과는 내가 네팔로 들어온 뒤로는 소식이 끊겼다 이어졌다 반복하던 차에 안나푸르나 기슭에서 다시 만났으니 어찌 그냥 보낼 수 있을까?
불야불야 누구 집에서 술이 익어가는 지를 수소문해보니 마침 우리 드림팀 학생의 집에 알맞게 익은 술 한 동이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 비레탄티 마을은 거의 산악민족인 구룽족(Gulung)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집집마다 럭시(Roksi)라는 이름의 순곡주를 빚어서 마시는 습관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이 술의 원료는 밀렛(Millet)이란 잡곡인데(우리식의 피쌀) 만드는 방법은 우리식 소주와 비슷하지만 주정도수가 그리 높지 않고 순곡주이기에 가끔 반주삼아 마시는 편이지만. 그런데 이번은 그 럭시가 아니고 아주 귀한 ‘뚬바(Tum-ba)’라는 티베트식 술을 대접하고 싶었기에 좀 부산을 떨게 되었다. 술 자체보다도 부속적인 도구가 좀 필요한 술이었기 때문이었다.
강원대산악부의 원로인 유재형대장의 가슴 아픈 사연은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 비극적인 사건의 현장을 실로 오랜만에 찾아 온 그의 눈빛은 오히려 담담했다. 아마도 오랜 시간의 수레바퀴가 흐른 탓이리라….
그러나 그간 간간히 주고받은 메시지에서 그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의 흔적은 여전히 배어나왔다.
“꼴 나게 산에 다니면서 72년도에 인수 취나드 코스에서 한 명 떨기고, 97년에 안나푸르나 팡에서 하나 떨기고,.... 그랬습니다. (운운) A.B.C길목의 하트형 패에는 1997년 제가 안나푸르나 ‘팡 원정대’ 대장일 때 7,500m능선에서 떨어뜨려서, 아직도 능선에 있는 후배 김여훈의 추모패입니다. ”
그러니까 유대장은 1997년 안나푸르나 ‘팡 봉’ 원정대장으로 왔다가 대원 한 명을 떨어트리고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20년 만에 다시 그 악몽의 안나푸르나에 왔다는 이야기이다.
오랜만에 그것도 안나푸르나 길목에서, 귀한 ‘뚬바’ 술잔을 앞에 두고 있으니, 할 말이야 만리장성 정도는 되겠지만, 그러나 유교장과의 해후는 그들 일행들의 바쁜 일정으로 인해 간단히 끝내고 우리는 트레킹을 끝내고 하산한 뒤 귀국 전에 카트만두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각자 갈 길을 재촉하였다. 그들은 푼힐전망대로 올라가고, 나는 다음날 드림팀을 데리고 룸비니로 스케치를 떠났다.
물론 며칠 뒤 우리는 약속대로 타맬 거리의 <소풍>이란 한국식당에서 만나 김치두부와 그 비싼 소주를 앞에 놓고 앉았지만, 우리 둘 다 말을 잃은 상태였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할지 몰랐다는 게 더 솔직한 심정이었을 게다.
이야기의 두서가 바뀌기는 했지만, 사실 유교장은 네팔에 오자마자 오밤중에 만나야 했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공항면세점에서 좋은 양주를 사오라는 부탁을 할 정도로 가까운 대학산악연맹 후배였기도 했지만 워낙 술을 좋아 했기에 별명도 술자돌림으로 불리던 주당이기에 다음 날 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는 이유도 한 몫 했다고 한다.
그리고 둘은 오밤중에 타맬 거리에서 만나 양주전달식을 하고 맥주에 소주를 말아 한잔씩하고 헤어지면서 트레킹이 끝나고 돌아와서 제대로 한 잔 말자고 하면서 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한 명은 안나푸르나로, 한 명은 고르카로 떠났다. 그 나머지 한명이 다름 아닌, 우리 <엄홍길휴먼재단>의 네팔지부장이었던 정광식이었다. 이제는 그 이름 앞에 (故“late)자를 붙여야 되겠지만….
하여간 그 며칠 사이를 못 참고 한 사람이 유명을 달리하는 사고가 벌어졌는데, 유교장은 이미 산속으로 들어가 버린지라, 그 사실을 알려야 할 악역을 맡은 사람이 하필이면 바로 나였다.
그러나 나 역시 그 사고 당일 날, 드림팀을 데리고 짚 차를 대절하여 룸비니로 스케치여행에 나섰던 터라 룸비니 행 내내 카톡문자질에 바빴다. 유대장에게 정지부장의 고르카에서의 낙상소식과 카트만두 병원후송과 이어지는 의식불명 상태 그리고 끝내는 불길한 예감의 적중되어 유명을 달리 한 뒤 이어진 카트만두 외곽의 빠슈빠트나트 화장장에서의 일정 등등에 대하여 시시때때로 전달해야 하는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나와 우리 드림팀 아이들은 고 정지부장을 ‘캡틴 정(Captin Chong)’이라고 불렀다. 작년 9월 우리 드림팀의 한국전시회의 그 잡다한 초청업무를 총괄한 실무자였기에 아이들과는 여러 번 부딪치며 정이 들었기에, 아이들은 울먹거리면서도 캔틴 정의 명복을 비는 합동 조문화(弔問畵)라는 생소한 그림을 그려서 카트만두 화장터로 직행하려는 나에게 부탁하여 엄홍길 대장에게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디선가 “람(Ram)남~사떼헤~~”라는 힌두의 상여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정지부장은 빠슈빠티나트(Pashupatinath) 화장장에서 한 송이 불꽃으로 승화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며칠 전까지 같이 술을 마셨고, 며칠 전까지 문자를 주고받던 사람이 이제 불길에 싸여 한 줌의 재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건너편에서도 또 다른 ‘불질’이 시작되고 있었다. 시신 아래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 사이로, 네 사람이 동서남북으로 갈라서서 불을 붙이고 있다. 이윽고 누런 연기가 솟아오르고 바로 검붉은 불길이 솟아오른다.
이때 우리식 다비식(茶毗式)에서는 “불 들어 갑니다.” 라고 소리를 지른다. 이는 망자가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지만, 힌두식은 그저 "라마(Rama)의 이름은 진실하다" 이다. “람남~사떼헤~~”이다.
“아니차(Anicha)~~”
이런 느낌을 “덧없고 무상하구나~“ 라고 하는 것인가?
나도 『티베트 사자의 서』의 한 구절-<두려움을 막아 주는 바르도 기원문>을 나지막이 읊어본다.
제가 인생의 여행에서 그 끝에 도달하여
이 세상의 친지들은 아무도 나와 함께 하지 않고
홀로 바르도 상태에서 방황할 때
평화와 분노의 부처님들이시여,
자비의 힘을 보내주시어
빽빽한 무지의 어둠을 걷어 주소서.
사랑하는 친구들을 떠나 홀로 방황할 때
제 자신의 투영들의 텅 빈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부처님들이시여, 자비의 힘을 보내주시어
바르도의 공포가 나타나지 않게 하소서.
다섯 가지 지혜의 밝은 빛이 비칠 때
두려워하지 않고 제 자신을 알아차리게 하소서.
평화와 분노의 신들이 모습을 나타낼 때
두려움 없이 확신하며 바르도를
알아차리게 하소서.
한국의 산악조난사고는 세계산악사 차원에서 본다면 유난히 희생자가 많이 나왔다.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빨리빨리 정신을 발휘한 탓이 그 원인중의 하나라는 분석이다.
네팔의 나라꽃으로 지정된, 붉은 랄리구라스(Laliguras)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검붉은 핏빛으로 보인다고 한다. 아마도 선지피처럼 응어리진 한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뜻일 게다. 그렇기에 여러 가지 버전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한다.
그중 하나가 산악인들은 산에서 승화한 선배들의 못다 핀 붉은 피가 승화되어 한 무더기의 붉은 꽃, 랄리구라스로 피어난다고 믿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히말라야 정통파를 자처하는 산악인일수록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히말라야에 다시 와서 그 꽃을 보고는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하고자 했을 것이다.
정말 뭇 산악인들의 꿈인 8천m급의 설산을 정복하지 못하고 중간에 쓰러진 산악인들의 붉은 선혈이 한 송이 붉은 꽃으로 피어난다는 것인가?
유교장도 귀국하고 고 정지부장의 유해도 귀국한 뒤, 나도 한참 만에 한국에 잠시 돌아올 기회가 있었을 때, 하루 짬을 내어 우이동에 있다는 새로 조성되었다는 산악인묘비공원을 찾아 나섰다. 고 정광식은 거기에 한 조각 동판으로 붙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아마도 그는 히말라야를 사랑했기에 내년 봄 히말라야의 어느 양지바른 어느 능선에서 한 송이 붉은 랄리구라스로 피어날 것이라고…. 그 때 소주 한 병을 배낭 속에 숨겨가지고 가서 그를 위해 한잔 따르리라….
부록삼아 신문기사 한 편과 추모사 한 편을 사족으로 싣는다.
<'영광의 북벽' 집필 산악인 정광식씨 네팔서 별세>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김영인 월드옥타 명예기자(네팔) = '영광의 북벽' 저자이자 산악인인 정광식씨가 사고로 19일 오전(한국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로 <엄홍길휴먼재단> 네팔 주재원인 정 씨는 지난 15일 대지진 피해를 본 고르카 지역에 업무 차 갔다가 절벽에서 추락해 크게 다쳤으며, 수도 카트만두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숨을 거뒀다. 비보를 접한 엄홍길 대장과 가족들은 네팔 현지로 출국했다.
한국외대 산악회원으로 활동해온 고인은 1982년 아이거 북벽, 1984년 바룬체히말 북서벽, 1991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등반했다. 저서 '영광의 북벽'과 역서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 '등산:마운티니어링'이 있다.
아이거 북벽은 중부 알프스의 베르너 오버란트 산군에 속하는 봉우리로 정상표고 3천970m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가늠하기 힘들만큼 변덕스러운 날씨와 깎아지른 듯한 경사로 세계에서 등정하기 힘든 세 곳 중 하나로 꼽힌다. 클라이머는 아이거북벽을 오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뉠 정도라고 한다.
<정광술을 보내며>
글. 코오롱 등산학교 명예교장. 이용대
광술(酒)이란 별명으로 산악계를 풍미했던 정광식이 지난 3월 18일 우리 곁을 떠났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란 말처럼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불과 3일 전까지 카톡으로 소식을 주고받던 정광식의 비보를 접하는 순간 전기충격을 받은 듯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광술”은 술에 미쳤다는 뜻의 정광식의 별명이다. 생전에 그는 술을 무척이나 즐겼다. 1986년 동산토건 카이로현장에 근무 할 때 말짱한 정신으로 이집트 사막의 명봉 라밋을 등반한 적이 있다. 이후 그는 파라오 신의 저주를 받아서인지 시름시름 앓기도 했다. 그는 광적일 만치 클라이밍에 심취해있었지만 어떻게 피라미드를 오를 생각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산이 없는 사막의 나라이니 피라미드에라도 올라야 내면에서 분출하는 등반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등반의 동기야 어찌됐건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생전에 아이거북벽(1982년). 바룬체히말 북서벽(1984년). 에베레스트 남서벽(1991년)을 등반했고, 1989-1991년까지 네팔에서 빌라 에베레스트를 운영하면서 히말라야를 찾는 한국산악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정광식이라는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있어도《영광의 북벽. 1989년. 수문》.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1991년. 산악문화》. 《등산. 마운티니어링. 7판.8판 2006년. 2018년. 해냄》정도는 기억 할 것이다. 우리나라 산악인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 이 책들은 바로 정광식이 저술하거나 번역한 책들이다.
2012년 아이거 북벽에서 하강 중에 추락사한 정진현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정광식이 선물한 《영광의 북벽》을 읽고 아이거북벽의 꿈을 키워왔던 청년으로 그를 아이거로 유도했던 사람은 직장선배 정광식이다. 그러나 그 청년은 끝내 아이거 북벽에서 돌아오지 못한 채 죽음의 나락으로 사라졌다. 이일로 정광식은 그 청년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깊은 자책감에 빠진 그는 시중에 유포된 자신의 저서 《영광의 북벽》을 모두 회수하여 불살라 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나 했다. 그는 그토록 감정이 여린 사람이다.
그는 1982년 이 죽음의 벽을 남선우(한국등산학교교장). 김정원(한국대학산악연맹회장)과 함께 올랐고, 이벽과 맞섰던 극한의 체험을 《영광의 북벽》이라는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었기에 아이거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출발 전 정진현의 아이거 북벽등반을 강하게 만류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정광식의 아이거등반 기는 마땅히 읽을거리가 없던 시절 한국산악계의 많은 독자들에게 감명을 전해준 책이다. 1983년 <영광과 죽음의 벽 아이거/한국 대학산악 연맹)> 라는 제호로 보고서를 냈고, 1989년 <영광의 북벽/수문출판사>이란 제호를 달고 유가지로서 첫 선을 보인 후 2003년 <아이거 북벽/경당>으로 재 간행됐고, 2011년 이산미디어에서 <영광의 북벽>으로 복간 본을 펴낸다. 한권의 산서가 네 번씩이나 복간을 한 일은 한국산서 출판사상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이후 이 책은 아이거를 오르려는 산악인들에게 지침서이자 필독서가 되었다.
아이거 북벽은 성공한 사람에게는 ‘영광의 북벽’, 실패한 사람에게는 ‘죽음의 북벽’이 될 수 있는 곳이다. 북벽등반의 어려움은 죽음으로 가득한 무시무시한 북벽의 신화들을 극복해야 등반이 자유로울 수 있다. 공포는 등반가들의 내면의 평정을 무너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북벽은 수많은 등반가들에게 정복되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 책을 통해 아이거를 간접 경험한 산악인들에게 힌터슈토이서 트래버스. 아이스호스. 죽음의 비박. 신들의 트래버스. 하얀 거미와 같은 북벽의 지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독일의 한 등산잡지가 세계의 저명 산악인들에게 질문서를 보내 지구상에서 아름다운 산이 어디인가 물었다. 아이거라는 이름은 눈을 씻고 보아도 거론되지 않았다.
알파마요(5943m). K2(8610m). 마터호른. 피츠로이(3441m). 몽블랑(4807m). 그랑드 조라스. 시니올츄(6891m) 순으로 많이 거론된 산은 이것뿐이다. 그럼에도 가장 많은 화재를 뿌린 산은 어김없이 아이거 북벽이 거론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아이거 북벽은 다른 어떤 산보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 갔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도 아이거 북벽은 등산가들의 마음을 끌어드리는 절대적인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아이거 북벽등반에 성공한 사람 들 조차도 아이거는 다시 오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한 때 알프스 6대 북벽을 주릅 잡던 알프스의 별 레뷔파는 1952년 아이거 8등에 성공하면서 가장 공포를 자아내게 하는 혐오스런 곳이 아이거 북벽이라고 말했다. 적어도 아이거를 오르려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할 마음의 준비 없이는 아이거의 꿈을 이룰 수 없다.
정광식 또한 아이거 북벽에 출사표를 내면서 어쩌면 죽어서 돌아오지 못할 것에 대비해 사무실 책상까지 깨끗이 정돈하고 죽음의 준비를 한 뒤 북벽을 향해 떠났다. 그도 ‘무서운 계획이란 걸 알면서 성공의 가능성이 희박할수록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클라이머로 성장하기 위한 통과의례로 아이거 북벽을 택하며. 죽고 사는 문제는 오직 그들이 선택한 문제일 뿐이다. 이래서 그는 이 지옥의 벽에서 생환한 이후 필연적으로 《영광의 북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는 말은 곧 그를 두고 이른 말 같다. 그는 갔지만 그가 남긴 《영광의 북벽》.《친구의 자일을 끊어라》. 《등산 마운티니어링》은 그의 이름과 함께 한국등산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부록: 한국의 산악운동사>
*1931년: 조선산악회를 일본인이 최초로 창립(한국인 회원은 10%선)하고, 1937년에는 순수 한국인으로 구성된 백령회가 창립되면서 본격적인 근대 산악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백령회는 1941년 금강산 집선봉 정면벽을 초등했고, 삼화연료공업소 직원들을 주축으로 했는데 후에 한국산악회의 모태가 되었고 조선산악회와는 선의의 경쟁을 했다. 이 시기는 근대 산악운동의 초반기로 워킹 수준의 등산에서 암벽등반을 시도하는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1945년: 서울 YMCA 강당에서 한국산악회 창립총회(처음에는 조선산악회였다가 1948년에 개칭. 발기인 19명 중 11명이 백령회 회원)
*1962년: 대한산악연맹 창립
*1962년: 경희대학교 원정대(대장 박철암 외 3인)가 다울라기리 2봉(7,751m) 정찰 등반을 떠나면서 한국의 히말라야 등반 시대가 열린다.
*1971년: 한국대학산악연맹 창립. 초대 회장에 이영균
*1971년: 마나슬루 원정대(대장 김호섭)의 김기섭 대원 추락사로 한국 최초의 히말라야 조난 사고 기록.
*1974년: 한국등산학교, 도봉산 도봉산장에서 개교, 초대 교장에 권효섭.
*1977년: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김영도)의 고상돈 대원이 에베레스트(8,848m) 한국 초등(세계 8등)에 성공.
*1979년: 악우회는 아이거(3,970m) 북벽 한국 초등
*1982년: 5월 선경여자산악회 원정대(대장 정길순) 람중히말(6,986m) 등정. 한국 여성 최초의 히말라야 등정으로 기록.
*1982년: 정광식, 남선우, 김정원 아이거 북벽 등반
*1993년: 대한산악연맹 여성 원정대(대장 지현옥) 에베레스트 한국 여성 초등(등정자 지현옥․최오순․김순주)
*1993년: 허영호 에베레스트 한국인 최초로 횡단(티벳→네팔)
*1999년: 지현옥 안나푸르나 하산 중 실종
*2000년: 엄홍길 한국 최초이자 아시아인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거봉 14개 완등
*2001년: 박영석 히말라야 8000m 거봉 14개 완등
*2003년: 한왕룡 가셔브룸 2봉(8,035m)을 등정하면서 한국에서 세 번째로 8000m 거봉 14개 완등
*2001년: 안나 남벽 등정 중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함께 실종
박영석은 한국 제2의 14좌 완등자이자 남북극점 도달까지 이르다. 2009년 5월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신 루트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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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슬프네요~~ 흑흑
늘 새로운 사실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