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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마지막 구간 미시령에서 진부령까지 걸었다.
제 41 차 백두대간(마지막 산행)
(1) 언제 2018.5.20일(일) 맑음(4시~15시)
(2) 어디를 : 미시령~상봉~화암재~신선봉~대간령~마산봉~홀리~진부령..
.........19.44km.(누계 807.04km)
(3) 누구와 : 나와 강쌤
(4) 산행이야기 : 오늘은 백두대간 산행 마지막날이다.2014년 5월 28일 백두대간 산행을 처음 시작한지 꼭 4년만이다.오늘은 한계령에서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흘리 진부령까지 가는 길이며 거리는 지도상으로 16.44km로 짧은 구간이기도 하다.나의 백두대간 종주는 2014년 5월 28일 지리산 종주를 하고 내친김에 백두대간을 걸어 보겠다고 시작한 길이였고 그때는 대략 1년에 10회씩, 5년에 걸쳐 50회로 나누어 혼자 걷고 싶었다.그러다 지리산 성삼재에서 만복대를 넘어 남원시 여원재까지 걷고 나서 고향친구인 강원서와 동행하였다.나는 백두대간 산행중에 수 많은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산악회에서 단체로 종주하는 사람도 있었고, 다정하게 걷는 부부을 만나기도 했다,그리고 선생님과 제자가 걷는 중학생도 만났으며 또한 친구랑 둘이서 걷는 중년의 공직자도 만났다.그리고 엄청난 무게의 베낭을 메고 오롯이 혼자서 걷은 사람도 있었고,특히 아들과 딸의 이름을 걸고 단독 종주하는 아버지의 리본은 아름다웠다.모두들 각자의 사연과 걷는 계기는 다를 수 있다. 다만 백두대간 종주 목표는 같았다.그러나 느끼는 감정들은 사람마다 제각각 달랐을 것이다.산악회팀은 단체의 화합이 좋아졌을 것이고,부부팀은 부부간에 사랑하는 감정이 돈독해졌을 것이며 외로이 혼자서 감내하며 걸었던 사람은 더욱 단단해져서 직장이나 사회에서 힘차게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중 누군가는 다시 종주 산행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나는 오늘 진부령까지 걷고 이제는 백두대간을 내려 놓으려 한다.이렇게 다짐하고 글로 남기는것은 백두대간 종주를 다시 하지 않으려는 약속인 것이다.산행은 마약같은 중독성이 있어 훗날 나도 모르게 배낭을 들쳐 메고 떠날지 모르기 때문이다.여러번 남진(南進)을 생각한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다른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싶고 산에 대한 열정은 이것으로 내려 놓으며 한동안 찾지 않았던 집에서 가까운 지리산 자락을 자주 찾고 싶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현실세계의 모든것은 매 순간마다 변화하고 소멸하며 변화하지 않는것이 없다.산행중에 나의 마음도 늘 변화했다. 높은 산을 동경하면서도 실제로 걸으면 힘들어 했고 산마루에 오르면 모든것을 보상 받은듯 즐거워 했으며 때로는 높은산 하나 오르지 않으면 어떠리 하고 돌아가고도 싶었다.그러나 백두대간 종주는 달랐다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이였다.그래서 오늘 드디어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흘리 진부령에 도착한 것이다.백두대간 마지막 구간 진부령에 도착하면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나의 백두대간 산행 누계기록은 807km이다.(백두대간 도상거리 684km) 이 거리는 알바(길을 잘못 들어 헤메인것)를 했던 거리와 들머리와 날머리의 접근거리를 포함한 거리이고 2번의 지리산 종주가 포함된 거리이기도 하다.또한 백두대간을 종주한 4년동안 다른 산행를 포함한 산행일기 거리는 1,475km였다.전문 산악인도 아니며 직업(투잡)이 있고 농장을 운영하며 단체팀도 아닌 상태에서 적지 않게 걸은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나는 앞으로도 계속 걸을 것이다.
감사무지(感謝無地)였다, 모든것이 감사했다.우선 걸을 수 있는 건강한 두다리에 감사하고, 늘 산에 빼앗긴듯 하다는 아내와 가족에게도 미안하며 감사했다.그리고 지금까지 무탈하게 산행을 할 수 있었던 모든것이 감사했다.오늘은 설악산 산행 3일째 백두대간 마지막 산행이였다.3시50분 새벽의 어둠속에 시작하고 오후 3시 진부령에 도착하여 4년의 백두대간 종주를 끝냈다.진부령 돌탑 앞에 섰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을 올렸다. "백두대간 종주를 무탈하게 마치게 되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산행기를 쓴다.
어제 미시령에서 인제군 북면 용대리 택시를 이용하여 용대리에 있는 모텔에 들었다.
다음날 3시 눈 비비고 일어나 주섬주섬 산행준비을 하고 택시를 탄다.
지난 이틀전 한계령에서 시작한 설악산행은 중청대피소에서 하루를 자고
설악악의 대표적인 공룡능선과 황철봉의 너덜구간을 지나 미시령에 내려
인제군 용대리에서 2일째 자고 나오는 길이다.
어제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5시간 정도의 수면으로는 피곤이 풀리지 않았다.
어깨도 무거웠으며 허리도 온전치 않았다.
오늘은 백두대간 종주 마지막 날이다.
그래서 신선한 새벽 공기에 새로운 각오와 무사 종주를 다짐하며 출발하고 있었다.
(새벽 미시령에서 산행 출발전)
백담사 아래 마을 용대리 택시를 이용하여 20km쯤 떨어진 미시령(820m)에 도착한다.
미시령에서 대간령까지 10.44km구간은 비탐방구역이다.
우리는 3시 50분 마지막 산행을 시작한다.
택시기사님의 안내을 받아 뒤로 보이는 2m높이의 울타리 철망을 넘었다.
첫번째 상봉(1,242m)까지는 2.6km거리인데 표고 422m를 올려야 한다.
지난 4년 동안 수 없이 야간산행을 해 왔었고 오늘이 마지막 새벽 야간산행이다.
어두운 동해바다를 보고 남한의 최북단 도시 고성군 간성읍내 야경을 보며 걸었다.
밤하늘은 별하나 보이지 않았고 새벽숲은 더욱 고요했다.
이슬 내리지 않아 걷기 편했고 시원한 바람 불어 땀나지 않았다.
어제 힘들게 내려왔던 황철봉 너덜바위 구간을 보니 어둠속에 여러개의 불빛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 새벽에 하산하고 있는 백두대간 종주팀인 것이다. 그들은 몇명인지 모르나
밤새 걸었을 것이다. 중원무림에 고수 많다더니 밤새 걷고 있는 사람들을 멀리서 보았다.
세상에는 나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 많았다.
상봉 오르는 길 중간쯤에 샘터 1, 2가 있었는데 물은 음용수로 쓰지 못 할것 같았다.
한참후 5시 일출이 시작하고 있었고 아침해는 나무가지에 가려 어제처럼
아름다운 일출이 아니였고 차라리 어제의 일출을 상상하는 것이 더 좋았다.
일출이 시작되고 날이 밝으니 서서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 힘들게 내려 왔던 황철봉 너덜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 이렇게 멀리서 본 모습은 그리 힘든 구간이 아닌듯 평범하게 보였다.
그러나 어제 걸었던 저 바위구간은 힘들고 다리 휘청거렸으며 기억하기 싫었다.
(구비구비 미시령길)
간성 읍내로 내려가는 미시령이 도로가 미끄럽게 보이고 햇살 받은
숲은 단풍이 든것 처럼 붉어 보인다. 지금은 미시령 아래로 터널이 뚫려
저 고갯길은 구,도로가 되었고 아침에 우리를 테운 택시기사님은 인제군 북면에서
간성읍내가 많이 가까워졌다고 하셨다. 6시무렵 상봉(1,242m) 근처에 도착한다.
이곳은 육군 제 8군단에서 6.25전사자의 유해를 발굴 작전중인 지역이였다.
우측 상봉 봉우리 바위를 보지 못하고 이곳에서 우리는 알바을 시작했다.
족히 1시간 넘게 다른길로 가고 있었다.
상봉 아래 헬기장이 있었고 헬기장 우측으로 너덜바위가 있었으며
누군가 바위에 화살표 방향 표시를 해 놓았다.
(바위에 화살표시)
화살표시는 뚜렸했고 누구나 이 표시를 따라 갈만 했다.
그러나 이 표시는 아마도 유해발굴 작전중에 표시한 것일수 있었다.
아무튼 정확한 거리와 시간은 알 수 없으나 나는 1시간 가까이 화살표를 따라 좌측능선을
걷고 있었다. 길은 화살표 외에도 간간히 리본이 있었고 밧줄도 있었으며
군용 전신선(삐삐선)과 발자국이 선명한 등산로여서 헷갈리기 딱 좋았다.
우리는 그렇게 백두대간 길이 아닌 다른길을 가고 있었다.
상봉 근처는 1951년 5월 국군수도사단과 북한군 6군단과 12군단 간에 상봉전투가 있었던
곳이며 국방부와 육군 8군단은 2011년부터 지금까지 100여구의 국군 유해을 발굴하여
국립현충원에 유해를 모셨다고 한다.(현판글 참조)
(상봉 아래 유해 발굴지역에 있는 호미 두자루)
유해 발굴지역 돌위에 녹슨 호미가 두자루 있었는데 분위기가 숙연했다.
알바 구간에서 밧줄구간을 지나고 한참을 걸었지만 알바를 인정하기 싫어서 더 걸었다.
그러나 실수는 빨리 인정할수록 좋은것인데 알량한 자존심에 고생만 더 했다.
점저 멀어져가는 신선봉을 보고 다시 돌아가기로 한다.
인터넷 검색을 하여 상봉의 뽀족한 돌탑을 찾아 다시 되돌아 왔다.
(상봉의 돌탑)
1시간쯤 잘못 걷고 되돌아와서 오전 7시쯤 돌탑이 있는 상봉에 올랐다.
그렇게 상봉에 오르니 맥이 빠진다.
배낭을 내려 놓고 쵸코렛과 물을 보충하고 한참을 쉬었다.
백두대간 마지막날 산은 나에게 한번 더 교훈을 주는듯 하다.
사소한 일에도 정신을 집중 할 것이며 잘못은 빨리 뉘우치고 인정해야 할 일이다.
상봉 돌탑 바로 옆에 신선봉으로 향하는 밧줄이 내려져 있었고
노란리본도 메달려 있어 이곳이 백두대간 등산로 라고 말하는듯 했다.
한참 동안 알바를 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든다.
저 아래 화암재 바위군이 보이고 그 위로 보이는 신선봉과 대간령(큰새이령)까지의
내려 가는 방향을 기억에 입력하고 조심스레 암벽을 내려 간다.
화암재을 지나 신선봉 바로 아래에 이르는데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던 사람들이
일어나 부산하게 텐트를 게이고 있었다. 신선봉( 1,212m) 아래 해발 1,150m쯤 되는곳에서
야영을 한 것이다. 20~30대로 보이는 저들의 젊음이 부러웠다.
(신선봉 아래 젊은이들)
젊은이들이 야영을 한 그곳은 동해바다와 간성읍내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 야영장이였다.
북녁으로는 향로봉과 금강산을 바라보는 전망 좋은곳 이고
하늘이 가까운 높은곳이며 푸른동해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는 멋진곳이였다.
야영을 하는 산악인들에게 이곳은 북설악의 가장 좋은 명당자리인듯 했다.
이곳은 신선이 머문 신선봉(神仙峰 1,212m)이였다.
(신선봉(神仙峰 1,212m))
신선봉 바위위에 올랐다. 북설악의 화룡점정 마지막 아름다움이였다.
신선봉 정상은 바위가 겹겹이 포게져 있었고 그 위에 큰바위 하나가 내려앉아 있었다.
이제 대간령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어렴풋한 길은 한번 속고 나니 자꾸 의심이 간다.
야영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물었다. "대간령으로 하산하는 길이 맞나요?" 라고 묻고 확인하고 갔다.
신선봉 아래는 암릉이고 또 다시 너덜바위 구간이였다.
그러나 황철봉보다는 작은 바위들이였으며 걷기는 훨씬 수월했다.
관리가 잘 되고 있는 헬기장을 만난다.
군사적 목적이나 산림관리 목적 또는 119 긴급상황에 사용되는 헬기장 같았다.
잠시후 신선봉 바위구간을 다 내려 온듯 했다. 이제는 울창한 숲길과 부드러운 흙길이 있었다.
시간은 오전 10시가 지나며 햇빛 따가웠는데 숲길에 들어서니 다행이였다.
나도 모르게 부드러운 흙길에서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다가 흙길 낙옆위에 깊게 꼽은 스틱을
뽑아 들지 못해 스틱의 마지막 부분이 부러졌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고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4년동안 여기까지 오면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이였다. 나는 강쌤에게
조심해서 가자고 말했다.불길한 기분이지만 서로 공유하고 조심 하는게 좋을것 같았다.
그러나 산행이 끝날때까지 다행스럽게도 아무일이 없었다.
이제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서는데 흙길이였고 미끄러지듯 내려서니 어느덧 대간령(大間嶺)이다.
한자를 한글로 풀어보면 대간령은 "큰 사이고개"가 된다. 옛 이름이 "큰 새이령"이였단다.
이제 비탐방구간은 끝이고 정상적인 탐방구간만 남았다.
이곳에도 국립공원 직원은 없었다.큰 새이령 이정표에서 사진 한장 찍었다.
(큰새이령 이정표)
대간령에서 서쪽으로는 인제군 북면 마장터로 가는 길(2km)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고성군 토성면 도원리로 내려 가는 길(4km)이 있었다.
젊은 여성 2분과 중년 남성 한분이 휴식중이였고 남자분은 산행지식이 많았으며
우리와 한참 동안 백두대간 구간이야기를 한참동안 나누기도 했다.
그분은 젊은시절 대간산행을 많이 하셨다고 하셨다.
오전 10시, 친구야! 라면이라도 먹고 가자!
준비한 라면 2개를 끓여서 아침겸 점심인 라면을 먹었다.
오늘도 강쌤은 라면을 충분하게 먹지를 못한다.
결국 절반을 남기고 나뭇잎 속에 버리고 나뭇잎을 덮었다.
이제 대간령에서 진부령까지 남은 거리는 9.4km 5시간정도 걷는 구간이다.
중간에 마산봉(1,051m)을 하나 넘는데 완만한 육산이니 편안하게 넘을것 같았다.
병풍바위 아래에서 병풍바위 보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마산봉으로 향하고 간간히
진부령에서 대간령으로 산행하시는 분들을 만나니 반갑고 한마디씩 인사 나누며 지나간다.
(마산봉으로 가는 부드러운 흙길)
마산봉으로 가는길은 부드러운 산책로 같았서 지친 발걸음이
그나마 가벼웠고 콧노래 나왔다. 이제 마지막 봉우리 마산봉을 오른다.
등산로옆 참나무에 딱다구리가 파 놓은 구멍이 크고 또렸하다.
이제 마산봉(1,52m) 정상에 올랐다.마산봉 정상 바위옆에 잘 만들어진
커다란 마산봉 정상 표시석이 세워져 있었다. 마지막 숲길로 접어 들어간다.
(산나물을 채취하는 아주머니들)
자작나무 숲을 지나고 흘리마을 뒤길로 들어 가는데 산나물을 채취하는 아주머니들이
과일밭에서 휴식중이시다.우리도 쉬어갈겸 아주머니들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전라도 광주에서 여기까기 걸어 왔다고 하니 모두들 놀라신다.
그리고 아주머니들과 사진 한장 찍었다.이제 진부령이 눈앞이다.
걸어 내려 왔던 마산봉 능선을 올려다 보고 흘리 마을뒤길 따라 진부령으로 간다.
(백두대간 종주 기념공원)
(백두대간 기념 공원이 종주 기념탑)
백두대간 종주 기념공원에 도착했다.도로옆 넓지 않은 공터에 백두대간 종주 기념공원 있었다.
우리는 완주기념 현수막을 펼치고 번갈아 기념사진을 남겼다.
큰 돌탑 뒤에는 백두대간 종주 기념탑이 빽빽히 세워져 있었고 기분이 울컥했다.
나는 저곳에 돌탑을 세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자리라도 다른분들께 양보하고 싶었고 그리고 딱히 나의 돌탑을 남겨야 할
이유도 없는듯 했다.
내가 좋아서 걸었던 백두대간을 누구에게 기억하고 자랑할 일은 아닌듯 했고
인간사 공수래 공수거이니 요란할 필요 없을듯 했다..
2018년 5월 20일(일) 15시
나는 백두대간 진부령 돌탑 앞에 섰고 드디어 백두대간 종주를 완주했다.
나는 그렇게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807km를 걸었다.
가슴 벅차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것 같았다.
지난 4년동안 40여회의 산행 기억들이 파노라마 처럼 스쳐 지나간다.
"내 생애 하고 싶은 일 한가지 "
"백두대간 종주 그 길을 걸었다"
(백두대간 진부령 돌탑)
(돌탑에 무릎 꿇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동행한 나는 친구와 종주기념 현수막을 펼쳤다.
진부령 돌탑에 도착한지 10여분후에 서울에서 출발한 아내가 도착한다.
아내는 이틀전에 우리를 한계령에 내려주고 서울로 갔다가 우리를 테우러 온것이다.
진부령 돌탑에 무릎꿇어 기도했다.
그동안 무사하게 완주하게 된것을 감사했다.친구야! 수고 많았다!
이 친구와 나는 다리와 허리의 통증을 참고 걸었고, 배가 고픈 허기에도 참으며 걸었다.
어느날 다리에 쥐가 나서 넘어져서도 일어나 걸었고 그 다음날도 걸었다.
강쌤은 괘방령 과거급제 길에서 아들을 위해 기도를 하였고
수능을 보는 제자들의 성적을 위해서도 기도하며 걸었다.
백두대간은 종주는 어찌보면 기도하는 길 같았고 구도자의 순례길 같았다..
이 친구는 다시 해파랑길 걷기를 시작했는데 해파랑길이란 부산 오륙도 공원에서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까지 770km의 동해안 바닷가 갓길이다.
이친구는 그 길을 동서부부와 같이 가는 가족여행이라 했다.
강쌤의 해파랑길이 행복한 여행이 되길 바라고
동해안 생선회를 맛나게 먹으며 천천히 걷길 바란다.
나는 어느날 해파랑길 한코스를 동행하기로 약속했다. 그날은 소주를 많이 마실것 같다.
우리는 백두대간 종주를 50대 중반에 시작했고 58세에 백두대간을 완주했다.
적지 않는 나이, 더 늦지 않게 완주해서 다행이다.
(진부령돌탑아래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시간에 마쳐 도착한 아내는 오늘 사진사가 됐다.
그간 백두대간 산행중에 아내는 여러번 운전을 해 주었다.
처음 가까운 거리는 내가 차를 가지고 다닐만 했고 광주에서 경북 문경까지는 스스로 차를
운전하며 산행을 하였다.그러나 문경시 이화령 구간부터는 아내가 운전하러 동행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오늘 서울에서 광주까지 9시간 이상을 운전해야 하는일이니 여간 쉬운일이 아니다.
산행은 둘이서 했지만 내용은 셋이서 한 셈이다.
그동안 수고 해 준 아내가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나는 한번 더 머리 숙여 모든것들에 감사했다.
지금까지 살아 온 나의 삶은 오로지 올라가는 일이였다.
잘 살기 위해 집중했고,사회생활과 가정도 그랬다.
좋아하는 산을 가는것도 산을 오르기 위해 갔었고,
내가 배운 학문도 출세가기 위함 이였고,
나의 직업도 그랬고, 결국 윤택한 생활를 영위하기 위함이니
모두가 올라가는 일이였다.
그러나 오르고 나면 언젠가는 내려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내려가는 법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는 백두대간을 밤 낮으로 땀 흘리고 걸으며
나 자신과 나눈 수 많은 생각들이 쌓였다.
백두대간길을 걷는 것은 단순히 산길을 걷는것만은 아니였다.
나는 백두대간 산행중에 오르고 내려가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큰 산 뒤에 더 큰 산 있었으며 도저히 갈 수 없었던 거리도 어느덧 도달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려 왔고, 다시 출발점에 와 있었다.
그렇다 내려가는 것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내려 가는것 이였다.
나는 인생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백두대간에서 걸으며 터득했다.
인생에서 내려 가야 할 때가 있고 내려 가는것을 산에서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산은 제자를 가르치는 말없는 스승이였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영원한것은 없다, 때가 되면 내려 놓을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이제 백두대간 마루길은 내려간다.
이제 큰 산과 먼길을 내려 놓고 낮은산을 즐기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남은 생은 또 다른 백두대간을 만날것이다.
나는 다시 그일에 열정을 다할 것이며 열심히 살것이다.
(진부령 기념공원의 곰 한마리)
백두대간 기념 공원 돌탑 옆에 반달곰 한마리 의연하게 서 있었다.
이제 광주로 돌아가야 한다.우선 배가 고프다. 그래서 식당을 찾아간다.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는 황태덕장이 있는 마을이다.그런데 지금이 황태축제 기간이였다.
인공 폭포수가 힘차게 내리는 축제장 인근 식당에 들어갔다.
양반자세로 앉아야 하는데 앉기 힘들어 아이고~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그래도 제대로 된 오늘의 식사를 할 참이였다.
(황태요리 식당뒤에 인공 폭포수가 내리고)
황태구이가 나오고 술 한잔하려 강쌤과 건배잔 부딧치는데 뜨거운 눈물이 난다.
참지 않고 그대로 눈물을 흘렸다. 상기된 눈물은 부끄럽지 않은 남자의 눈물이였다.
지난 4년동안 백두대간은 언제나 머리속에 있었다.2014년 5월 28일 지리산 성삼재에서
시작한 산행이 2018년 5월 20일 오늘 백두대간을 완주 한것이다.
이제 백두대간 마루길을 내려 놓는다.
4년동안 늘 머리에 꽉차 있었던 백두대간 마룻길이 많이 그리울것 같다.
그러다 참기 힘들 만큼 그립고, 가슴 아프게 보고 싶으면 어떤코스는
다시 갈것이나 다만 계속 이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민족에게 산은 삶의 터전이였고 기도처였으며 피난처 이기도 했다.
또한 산은 마을을 품었고 물길를 만들었으며 한국인의 기운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산은 멀리 있는것이 아니라 사람과 가까이 있었으며
인간에게 말 없는 스승이였고 따뜻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산이 언제부턴가 도전하고 정복하는 목적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어떤이는 지리산 구간을 무박종주하여 하루에 40~50km씩 걷는다거나
또 어떤 산악 마라토너는 100~200km를 수일간에 걸쳐 내어 달린다.
그분들은 그분들만의 목적이 있겠지만 그것은 산행이 아니라 경쟁하고 순위를 정하는
스포츠인것이다. 나는 스포츠가 아닌 무언가을 사색하며 걷고
때론 나의 의지를 인내하며 적당히 땀도 나는 그런 산행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산에 갔었고 그 길이 백두대간 길을 따라 드디어 산마룻길 끝인 진부령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산에 가면 작은 디카에 풍경을 담았고 다녀오고 나서 산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매번 쓰는 산행기는 때로 걷는것 보다 힘든 고행이였다.
그러나 어느날은 재미있는 영화 한편 보듯 쉽게 써지기도 했다.
지난 4월29일 점봉산을 하산하면서 만났던
남난희 선생님께서 산행의 마무리는 산행기를 쓰는것이라 말씀하셨다.
나는 문학도 처럼 글쓴이가 아니며 글재주가 있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내가 걷다가 보고 느낀것만 간추려서 일기처럼 쓰고 그것을 남기고 싶었다.
나의 산행일기중에 잘못된 정보나 숫자가 인용됐을 수도 있다.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글을 쓰기 위해 공부를 많이 하지도 않았다.
다만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는 정도를 인용하고 썼으며 혹여 잘못한 정보가 있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봐주시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글을 본 사람은 어설프고 불편한 표현이 있더라도 편안하게 읽고
이해를 해 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이 글을 작은책으로 묶어 나의 딸에게
그리고 형제들과 몇몇의 친구와 선.후배님께 나누어 주고 싶다.
나는 이렇게 산을 사랑하며 걸었노라고...
그리고 끝까지 동행해 준 강원서 친구가 너무나 고맙다
그리고 친구의 백두대간 종주를 축하한다!
2018년 5월 20일 맑은날 걷고
2018년 6월 13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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