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제226회 정기답사 (홍완의님 후기)
-. 일 시 : 2020. 09. 17 (목)
-. 답사지 : 전북 고창 선운사
선운사 일원(일주문-백파율사비-천왕문-만세루-6층석탑
-대웅보전-금동지장보살 좌상-동백나무숲)
장사송, 진흥굴
도솔암(금동지장보살좌상-마애불)
참당암(대웅전-석조지장보살좌상)
석식(풍천장어+복분자주)
-. 참석자 : 회장님, 방장님, 정영림, 김미영, 윤수경, 조혜련,
김순화. 성경원, 김주연, 서현숙, 천동우, 윤화숙,
정상훈, 임창현, 서영규, 박종오, 임동호, 김현각,
한진택, 홍완의 (이상 20명)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
모처럼 가는 답사지는 선운사였습니다. 역병의 창궐로 기침소리 에도 예민해지고, 긴 장마와 태풍에 지칠대로 지친 올 여름. 위로
가 필요했던 것인지 아님 채 누려보지도 못한 여름이 서서히 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인지 답사 차량은 만석이었습니다.
이즈음 선운사는 꽃무릇이 한창입니다. 녹음 사이사이로 수줍게 불타오르는 꽃무릇은 지친 심신을 다독이기에 더없는 특효약이었
습니다. 게다가 고즈넉한 산사의 정취가 더해지니 가을을 재촉하
는 이슬비조차 감미롭게 느껴진 도솔암 가는 길이었습니다.
송악(천연기념물 제367호)
한산한 주차장을 지나 선운사 일주문 못미처서 송악이 있습니다.
절벽에 붙어 사시사철 푸름을 자랑하지만 도솔천 건너편에 있어 자칫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송악은 눈보라 치는 매서운 추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두릅나뭇
과에 속하는 늘 푸른 덩굴나무입니다. 이곳 송악은 자연상태로 자
랄 수 있는 북쪽 한계에서 가장 큰 송악입니다.
선운사
구름[雲] 속에서 참선[禪]한다는 뜻의 선운사는 선운산(또는 도솔
산)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입니다.
선운사는 천오백년 전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가 창건
했다는 설과 신라 진흥왕이 말년에 왕위를 내주고 선운산에 머물
면서 창건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흥왕 당시 이곳은 백제 의 확고한 영역이었으므로 신라의 왕이 창건하였다는 가능성은 희
박하다고 합니다. 굳이 진흥왕을 내세운 것은 통일신라 이후 백제
의 고찰이 전통을 잇기 어려워질까 싶어 신라 불교를 부흥시킨 진
흥왕과 연결시킴으로써 보호를 받고자 함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 생각하니 지금까지 버텨 온 선운사가 대견하고 기특
하게 느껴집니다.
<일주문 현판 글씨는 근현대 서예가 일중 김충현 작품입니다.>
추사의 백파율사 비문
매표소 오른쪽 전나무 숲 안쪽에 승탑들이 무리지어 있습니다. 잰
걸음으로 가다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그곳에 추사가 쓴 백파율
사의 비문이 있습니다. 앞면에는 굵고 힘찬 필치의 해서체이고, 뒷
면에는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행서체 글씨입니다. 추사 말년의 최
고 명작으로 평가되는 금석문입니다.
백파가 [선문수경]을 세상에 내놓자 반박논리를 편 분이 초의선사
였습니다. 이 논쟁에 초의의 벗이자 해동의 유마거사라고 칭송되
던 추사가 끼어들어 백파와 불꽃 튀는 논쟁을 벌입니다.
추사의 [백파망증 15조]를 보면 그 내용이나 어투가 안하무인격으
로 오만하고 방자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백파비문을
보면 그 글이 공손하고 백파에 대한 존경이 가히 심금을 울리는 내
용입니다. 제주도 9년 귀양살이 후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라
고 생각됩니다. 이런 변화는 대흥사에 있는 원교 이광사 글씨 평에
대한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만 방자했던 지난날의 과오
를 인정하고 반성할 줄 아는 추사의 인품이 속 좁게 세상을 사는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원교 글씨 정와(靜窩:조용한 작은 집)>
만세루(보물 제2065호)
원교의 유려한 천왕문 현판 글씨와 악귀들 대신 탐관오리와 음녀
(淫女)를 짓누르고 있는 사천왕을 지나면 너른 마당에 만세루가 있습니다. 정면 9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절 창건 당
시 건립되어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재도 700년 된 아름
드리 기둥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다른 건물들을 짓고 남은 목재로 지었다는 만세루는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지만 우직한 큰형님 같은 든든함이 묻어나는 건물입니다
<만세루 내부>
6층석탑
고려시대의 탑입니다. 사적기에는 조선 성종 때 행호선사가 쑥대
밭이 된 절터에 서 있는 9층석탑을 보고 중창을 도모하였다고 기
록되어 있습니다. 그 9층석탑이 지금은 6층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본래 9층석탑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행호선사가 기단부와
상륜부까지 층수에 넣어 9층석탑이라 했는지를 비롯해 탑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는 회원님들의 모습이 흐뭇했습니다.
대웅보전(보물 제290호)과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제1752호)
대웅보전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광해군 5년(1613)에 재건한 것
입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구조이며 맞배지붕 건물입니
다. 공포는 화려하지만 전체적으로 검소한 느낌의 법당입니다. 법
당 내부의 단청 벽화가 뛰어납니다.
삼존은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여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시면 노사나불
과 석가모니불을 좌우 협시로 모시고 전각명도 대명광전이나 대적
광전이라 합니다.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모시면 약사불과 아미타
불이 협시가 되어 대웅보전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
데 이곳은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면서도 전각명을 대웅보전이
라 칭한 것이 특이합니다.
<후불벽화 뒷면 관세음보살>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
넓적하고 통통하게 살찐 얼굴, 얼굴 한가운데로 모인 눈 코 입과
이중 턱이 풍만한 인상을 주는 금동지장보살좌상은 새로 조성한
지장보궁에 모셔져 있습니다. 떼를 써도 다 받아줄 것 같은 후덕
한 인상과는 달리 손모양은 섬세하고 부드럽습니다.
조선 초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일제강점기 때 도난당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38년에 되찾아 왔다고 합니다.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184호)
선운사 동백나무는 절 입구 서쪽 비탈에서 시작해 절 뒤쪽 산자락
으로 이어지는 넓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조선 성종 때 산불을 막기 위해 심었다고도 합니다. 잎이 두꺼운
늘푸른 넓은 잎나무는 불이 쉽게 옮겨 붙지 않아 방화수(防火樹)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선운사 동백나무의 장관은 역시 꽃피는 계절입니다. 대체로 4월
중순에서 4월 말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동백꽃 붉게 터지면 김용
택 시인처럼 '그까짓 여자 때문에'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어
보고도 싶습니다.
진흥굴, 장사송(천연기념물 제354호)
진흥굴은 도솔암 가는 숲길 오른쪽에 있는 천연 바위굴입니다. 불
교에 심취한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 중애공주와 함께
이 굴에서 수도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입니다.
진흥굴 근처에는 부채살처럼 퍼진 해묵은 소나무가 있습니다. 진
흥굴 옆에 있어서 '진흥송'이라고도 하고, 이 지역 옛이름이 장사현
이라서 '장사송'이라고도 부르는 반송(盤松)입니다.
지금은 일곱 갈래지만 원래 여덟 갈래였다고 합니다. 이는 조선
팔도를 상징했다고 합니다.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도솔암 금동지장보살 좌상(보물 제280호)
선운사 지장보궁에 있는 지장보살과 크기나 형식은 비슷하지만 훨
씬 세련됐습니다. '사대부적 이상미를 반영한듯 학자풍이고 똑똑
하게 생겨서 꼭 경기고등학교 나온 보살님 같다'고 한 유홍준 교수
의 표현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보살입니다.
왼손에 법륜을 들고 있는 이 지장보살은 도솔암 내원궁에 모셔져
있습니다. 미륵보살이 계셔야 하는 곳입니다. 아마도 미륵불이 오
기 전 무불시대(無佛時代)에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이 지장보살이
라 그런 것 같습니다.
도솔암 마애불(보물 1200호)
도솔암의 서편 암벽 칠송대(七松臺)에 새겨진 마애불입니다. 머리
부분은 암벽을 깊게 파서 새겼고, 내려오면서 점차 깊이가 얕아져
서 팔꿈치 아래부터는 선각으로 처리했습니다. 각진 얼굴에 도드
라진 눈은 양끝이 올라가 있고, 두툼한 입은 꽉 다물고 있어 부처
님다운 원만함과는 거리가 먼 인상입니다. 이런 위압감을 주는 얼
굴 표정과 대담한 선각 처리는 나말여초 지방 호족들이 발원해 조
성한 부처님상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호족들
의 자화상적 이미지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하는 이유는 불상의 배꼽(정확히는 명치)
에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어서 그 비결이 나오는 날 한양
이 망한다는 전설 때문입니다. 실제 동학농민전쟁 무렵에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
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새 세상을 바라는 세상이 오질 않길 마애불 앞에서 간절히 기원하
고 하산했습니다.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보물 제2031호)
하산 길에 들른 참당암의 지장전에 모셔져 있습니다. 머리에 두건
을 쓰고 이마에 테를 둘렀으며 두건의 아랫자락은 어깨를 덮고 있
습니다.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과 흡사합니다. 가슴에 늘어뜨린
영락 장식이나 두터운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수인이 다르고
조각 수법이 조금 처지는 듯합니다.
풍천장어와 복분자주
풍천장어의 풍미와 복분자주의 달콤함을 말해 뭐하겠습니까?
회장님이 양보해 준 장어꼬리를 복분자주와 함께 먹은 그날 밤
저는 '기운 센 천하장사'가 되었다는 후문이....!
꽃무릇 흐드러진 선운사를 보고 와서 내내 떠오르는 시구절이 있
습니다. 시인 김영남의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이라는 시의 첫구절
입니다. '만약 어느 여자에게 이처럼/아름다운 숲속 길이 있다면/
그녀와 살림을, 다시 차리겠네.'라는 구절입니다.
집 나온 보람을 오랜만에 느껴 본 답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