卽此大降의 聖殿 (靈臺·造化政府) 2월 초9일에 도주님께서 정사 앞의 판옥(板屋)들을 가리키시며, “저 판옥을 옮기고 임원들이 쓸 회관을 지을 만한 터를 닦도록 하라”하셨다.
임원들이 그 가옥의 주인 이종팔(李鍾八), 금복연(琴福淵)과 합의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주고 터를 고르기 시작하니 도주님께서 그 경역(境域)을 지정하여 주셨다.
그런데 그 안에는 원주민(原住民)인 오수일(吳秀一)의 논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임원들이 사실을 말하니 기꺼이 기증(寄贈)하므로 명령대로 터를 넓힐 수 있었다.
터를 넓힘에 있어 그곳이 원래 경사가 심한 언덕이므로 낮은 곳에 석축(石築)을 하고 높은 곳의 흙을 파서 메웠는데 이때 김천방면 도인 원갑선(元甲善)은 본래 농아(聾啞)로서 석수(石手)도 아니면서 자진하여 다른 석수들과 함께 지성으로 석축공사를 하므로 도주님께서 그의 노고를 치하하시며 농아를 연민(憐憫)하시더니 그 공사가 끝날 무렵 뜻밖에 그의 말문과 귀가 열려 정상인이 되므로 모두 신기하게 여기고 덕화에 감복하였다.
이 석축에는 옥녀봉의 바윗돌을 굴려 내려 썼는데 하루는 옥녀봉 아래 냇가에서 수10명의 부녀자가 빨래를 하고 있었으나 이건우 등은 이를 살피지 않고 그 위에서 바윗돌을 굴려내리니 부녀자들의 위험이 촉급하였다. 이 순간에 도주님께서 보시고 진노(震怒)하시며 손을 들어 굴러내리는 바윗돌을 직지(直指)하시자 신기하게도 그 돌이 갑자기 산 중턱에서 잠시 멎었다가 신경희(申景熙) 등 임원들이 고함을 쳐서 부녀자들을 대피시킨 후에야 내려앉아 모두 무사하였다.(이때 내려앉은 바윗돌 중의 하나는 그 후에 대강전 앞 영소(靈沼)를 공사하면서도 옮기지 않아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정지공사가 완료되자 도주님께서 영건비(營建費)를 내려주셔서 당일로 착공하게 하시니 임원들은 처음에 일반 회의실처럼 가건물로 신축하실 줄 알았으나 친히 현장에 임하셔서 기초작업부터 지휘하시는데 다른 회의실 건물과 달리 그 범위도 넓고 기초도 견고하게 하실 뿐더러 목재와 기와 등 자재를 다르게 준비시키시고 더구나 목재는 모두 강송(江松 : 강원도 소나무)으로 하되 특히 2층 바닥에 쓰일 목재는 침목(沈木 : 바다 밑 진흙 속 에 묻었던 나무)을 구하도록 하셨으나 구할 수 없으므로 염수(水)에 절였다가 불에 말려서 쓰도록 하시며, “이렇게 해도 족히 30년은 견디리라”하셨다.
임원들이 건물을 신축할 바에는 임원들의 회관보다도 정사를 먼저 지어 드림이 도리이며 급무(急務)라 생각하고 상신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시다가 임원들이 다시 2층으로 지어서 하층은 임원회관으로 쓰더라도 상층은 도주님께서 쓰시도록 할 것을 재삼 상신하니 3일만에 윤허하시고 27일 오시에 정초(定礎), 28일 묘시에 입주(入柱), 3월 1일 인시에 상량(上樑)하도록 명하셨다.
도주님께서 5년전 보수도정에서 친히 모종하여 분재(盆栽)하셨던 은행묘목(銀杏苗木) 몇 그루를 이해 2월 말경에 이건우로 하여금 도장내로 이식(移植)하게 하시며, “후일 큰 정자나무가 되어도 좋을 곳을 가려서 심고 잘 가꾸라”하시므로 건우가 마음 속으로 ‘이 나무 커서 정자나무가 될 때까지 도성덕립(道成德立)을 어떻게 기다릴까’하고 생각하는데 “너희는 때를 기다리기가 어려움이 아니라 마음 닦기가 어려움을 알라”하셨다.(이 나무가 지금 완전한 정자나무로 자라서 남문 안에 서 있는 은행나무다.)
3월 초하루 인시에 신축건물의 2층에서 도주님 집례로 상량치성을 올리셨다. 이때 갑자기 바람이 크게 일어 제단이 심히 요동하므로 진설(陳設)조차 곤란하였으나 도주님께서는, “천지대신명들이 운집(雲集)하는데 어찌 바람이 없으리요”하셨다.(치성 후에 임원들은 그 축문의 내용과 도주님께서 친히 집례하심으로 미루어 이 건물이 단순한 임원 회의실이 아님은 짐작되었으나 대강전(大降殿)임은 깨닫지 못하였다.)
상량축문은 며칠 전부터 임규오에게 발설하지 말고 짓도록 하셨으나 짓지 못하므로 치성 전야(前夜)에 몸소 지으셔서 규오에게 정서하게 하신 글인데 그 뜻은 대략 이러하다.(원문은 순한문이므로 생략하고 직역(直譯)하여 수록함)
“상량축문 모년 모월 모일에......태극도주 조정산은 엎드려 구천상제님 영전에 고하나이다. 하늘이 감추고 땅이 비밀스럽게 하여 천년 옛적부터 굳게 신비로운 영경(靈境)을 점지하셨고 큰 바닷물이 동남으로 모이니 만세에 청명하고 조화스런 큰 규범을 창립하였나이다. 풍화(風化)와 명성을 천지에 세웠고 관찰함과 우러름을 금신(襟神 : 가슴 속 마음)에서 솟아 오르게 하였습니다. 그윽히 생각하건데 태고적부터 남기신 자취이고 진실로 이것이 후학(後學)의 자랑스런 법식이옵니다. 대개 공경하고 사모하는 자가 깊이 이 지경에 들어와서 이 당에 오르면 누구인들 감복하고 흠탄(欽歎)하지 않겠나이까!
앞에서 인도하고 뒤에서 의탁함은 이것이 인간과 신명의 떳떳한 도리이고 위에서 펴고 아래서 이룸은 이것이 동천(洞天 : 신선이 사는 곳)의 진경(眞境 : 도통진경)이옵니다.
포량동(抛粱東 : 포량은 상량할 때 대들보를 동서남북상하로 흔들어 굴린다는 뜻의 용어로서 여기서는 동쪽에 해당한다)하니 천마산이 하늘을 찌를 듯이 푸른 공중에 꽂혔는데 큰 뜻은 어느 때 날아서 이에 도달하겠으며 바쁘게 끓어 오르는 세상 파도는 날려서 장차 형평(衡平)을 이루리이까? 포량서(西)하니 용담의 산 물은 긴 하늘과 더불어 때에 따라 유통(流通)해서 4해의 봄이니 이 가운데 잠겨서 쓸데없다고 마소서.
포량북(北)하니 구덕산이 거듭거듭 푸른 아지랑이처럼 둘렀으니 바라보는 속의 무리지은 봉우리가 그림처럼 벌여 있어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이 가운데의 바다이옵니다. 포량남(南)하니 안산 봉우리가 높이 나옴은 몇 때를 기다렸던고? 하늘의 한 방소에 미인(美人 : 여기서는 상제님)을 바라보니 옥경대 집 높은 곳에 공경함을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포량상(上)하니 흰 해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은 옥추(玉樞 : 옥으로 돌쩌귀를 한 옥경대를 뜻함)와 구천(九天 : 구천상제님 계신 곳)과 또 선경은 만명 천명 아이, 손자가 복된 수명을 바칩니다. 포량하(下)하니 산이 다하고 물이 돌아 음양이 교제하여 다함이 없고 가이없는 창창한 연원은 4해 용왕이 서로 상대하였나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상량한 후에 양은 순하고 음은 거슬러서 5행이 서로 생하고 조화의 도가 이룩되어 진법주 안의 15위차 신성의 위, 칠성주 안의 제위선관, 천하영웅 관운장 소솔제장, 28수·24절 제대신장, 개벽주 안의 15신문 제대신장은 곧 이에 대강하옵소서.”
이달 중순 어느 날 정사 내정에서 임원들에게 1, 2감쪽을 가리키시며, “저쪽은 테 밖이고 난간과 같아서 벗어나기 쉬우니 내려앉아야 하리라”히시고 다시 6감 아랫지역을 가리키시며, “너무 내려가면 떨어지기 쉬우니라” 또 옥녀봉 동쪽 기슭을 가리키시며, “저쪽은 생문방(生門方)이므로 인가를 지으면 좋지 않고 그 안골은 천옥(天獄)이니라”하시므로 도인들은 안골에 집을 짓지 않았다.
4월 초4일 아침에 임원들을 정사로 부르셔서 수라를 함께 드신 다음, “우리 도의 중대사는 모두 4월에 이루어지므로 음력이든 양력이든 4월은 내가 잊지 못할 달이니라. 봉천명과 득도가 그러하고 천보와 황극도수, 태인·회문·부산 3도장의 개시가 모두 그러하지마는 이는 이미 지난 도수이고 그보다 더 큰 도수는 돌아오는 4월이니라”하시더니, “거년 4월 하 4월고?, 운래청룡 시 4월이라”하고 읊으셨다.
또 이러한 하교도 하셨다. “구천상제께서 허도수를 짜 놓으셨으므로 내가 50평생을 허도수의 허공부에 시달렸으나 갑신년에 시지49년지비(始知四十九年之非)도수로서 인덕(人德)도수의 실(實)공부로 전환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제 13년이니라. 이 역시 상제께서 짜 놓으신 이윤(伊尹)의 도수였으며 또 공부종필(終畢)의 도수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대들은 명심할지어다”
“일불(一不 : 한 가지 잘못)이 살육통(殺六通 : 여섯 가지 잘한 것을 죽인다는 뜻으로서 옛날 과거 강경과{(講經科)에서 7서(4서 3경 즉 주역, 서전, 시전,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중에서 6서를 모두 잘하고도 1서만 잘못하면 급제가 안되는 데서 나온 말)}이라는 옛말이 있는데 나는 일불이 살백통(殺百通)의 도수를 쓰리니 일호(一毫)의 차착(差錯)도 없어야 하리라”하시므로 김용화가 그 뜻을 여쭈니, “사다리를 오를 때는 한 칸씩 오르되 떨어질 때는 단번에 떨어진다는 뜻이니라”하셨다. 하루는 임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용마{(龍馬 : 복희씨 때 황하에서 나온 말로서 그 등에 하도(河圖)가 그려졌다 한다)}와 신귀{(神龜 : 하우씨 때 낙수에서 나온 거북으로서 그 등에 낙서(洛書)가 그려졌다 한다)}는 모두 물에서 나왔고 또 하우씨의 9년 치수(治水)는 낙서에 유래함이나 나의 5만년 후천대운은 오강록(烏江錄 : 상제님께서 둔궤에 쓰신 글로서 초패왕의 해원을 뜻함)에 유래함이니라. 낙수와 오강은 강하(江河)의 중류(中流)이나 이곳 감천 용담은 황화와 낙수로 통하는 낙동강{(황지(黃地)에서 발원)과 동해의 수회처(水廻處)}니라”
“제 한 몸이 곧 소우주(小宇宙)며 도와 일체임을 자각하여야만 대도 진법의 진도인(眞道人)이니라” “도란 천·지·인 3계에 관영(貫盈)하니 너희들 도인은 이미 3계의 역군(役軍)이 되어 있으나 그로써 족하지 않고 후천 3계 개벽의 역군이 되어야 하느니라”
도주님께서 영건공사의 모든 부분을 한 가지라도 소홀함이 없게 하시고 설계상의 구조와 자재를 몸소 살피심은 물론, 목재는 모두 굽거나 찌게 하시되 수미(首尾)를 가려서 쓰게 하셨다. 심지어 외엮는 일까지 손수 시범하시며, “나무는 종횡(縱橫) 십자(十字) 또는 정자(井字)로 대어서 음양이 되고 새끼는 궁을형(弓乙形)으로 엮어 태극을 이루며 흙도 맞벽을 쳐서 합덕(合德)을 이루니 여기에도 진리가 있지 않느냐. 이처럼 만사를 모두 태극의 원리로 이루어야 하리라”하셨다.
신축건물의 영건공사는 영선부(營繕部)에서 담당하였는데 그 총책임자는 박해성(朴海成), 대목책임자는 최경구(崔敬求), 조동은(趙東殷), 소목책임자는 송인화(宋仁化), 박위서(朴渭緖), 철공책임자는 김봉준(金鳳俊)이었다. 공사기간 동안 도주님께서는 몸소 현장에 임하셔서 공사의 세부 내용 특히 창호의 문살, 문고리, 돌쩌귀 하나까지도 그 재료와 제작방법을 자상히 명교(命敎)하시므로 영선부 임원들은 물론, 모든 공인(工人)들이 온갖 기능과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일반도인들도 앞을 다투어 공사에 참여하여 흙 한 삽, 기와 한 장 나르는 일도 진심으로 자진하여 취역(就役)함으로써 공사가 불일성지(不日成之)로 추진되었다. 하루는 박해성 등이 상주(上奏)하기를, “이러한 자재로서는 판옥(板屋)을 겨우 면할 정도이오니 너무 초라하지 않나이까”하니, “이만하면 임시 쓸 것이니라”하셨다. 또 최경구가, “하층은 공굴(콘크리트)이나 벽돌로 짓고 상층은 한식으로 지어 단청도 했으면 좋겠사옵니다”하니, “후일에는 금을 올릴지언정 지금은 도인들이 이렇게 고생하는데 어찌 그리할 수 있으랴. 현실에 맞게 하느니라”하셨다.
이달 하순에 건물이 완공되자 도주님께서 임원들에게 하명하시기를, “그대들이 건물의 용도와 명칭도 모르면서 오직 내 지시대로 하여 완공한 노고를 치하하노라. 이 전각은 내가 장차 50년공부를 종필할 곳이며 그대들이 심령신대(心靈神臺)를 봉안하고 진법을 봉행하여 대강을 봉대(奉戴)할 오도(吾道) 유일의 지중한 성전이니 그런 뜻으로 명칭을 지어보라”하셨다.
임원들이 이 명령에 따라 ‘태을궁(太乙宮)’ ‘통천궁(統天宮)’ ‘봉강전(奉降殿)’ ‘요운전(曜雲殿)’ ‘봉령전(奉靈殿)’등의 명칭을 지어올리니, “모두 부적(不適)하다”하시고, “내 이 성전을 대강전(大降殿)으로 명명하노라”하시므로 일동이 황공복지(惶恐伏地)하며 감복하였다. 이어서 이렇게 하교하셨다.
“유가(儒家)에서는 공자를 모신 전우(殿宇)를 선성지도(先聖之道)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뜻에서 대성전(大成殿)이라 하고 불가에서는 부처의 덕호(德號)를 따라 대웅전(大雄殿)이라 하는데 오도에서는 원위대강(願爲大降)의 대강전으로 명명하느니 이로써 수운(水雲)이 기도주를 봉명(奉命)한지 양50년(兩五十年)만에 비로소 대강의 계대(繼臺)가 마련됨이니라. 건물은 비록 협소하나 우선 쓰는 데는 족할지니 내가 50년공부로써 찾은 곳이 감천이요 그대들이 기도하는 소원이 오직 대강이므로 이 바로 천기요 도수며 5만년에 유일하고 우주간에 무이(無二)한 진리의 성전이며 이곳을 새 서울이라 함도 바로 성전이 있는 연유니라”
도주님께서 대강전 내부의 명칭과 용도를 하명하시니 상층은 중궁(中宮), 중궁의 영위 봉안실(奉安室)은 영대(靈臺), 몸소 도수를 보실 공부실은 법단(法壇), 중궁의 동문(정문)은 대동문(大同門), 남문은 영불문(迎佛門), 8각 창문은 정갑문(丁甲門)이라 하시고 중궁의 서북측에 전수실(奠需室), 동남측의 서편에 봉심실(奉審室), 동편에 공부실(후일 시법실로 명명)을 두셨다.
그리고 대강전 하층의 명칭은 회관(會館), 그 북문은 승정문(承政門), 남문은 용화문(龍華門)이라 하시고 그 동북과 서남측에 상하층을 통하는 계단, 그 옆에는 남북으로 공부실 2개{후일 태을방(太乙房), 일관방(一貫房)으로 명명)}를 두셨다.
또 영선부원에게 명하셔서 영대의 봉안상(奉安床), 진영액(眞影額), 독(), 제기(祭器) 등을 원위(元位)로부터 4위까지 각각 만들게 하시며, “내 일을 내가 하다니......”하시고 일일이 그 장광척촌(長廣尺寸)과 옻칠에 이르기까지 세밀히 지시 감검(鑑檢)하셨다.
이달 26일에 봉축주와 진법주의 ‘통극신’을 ‘무극신’으로 환원토록 하명하시고 납폐지에도 그와 같이 하게 하시며, “내 이제 무극과 태극을 통한 황극(皇極)을 세웠노라”하셨다. 27일에 도주님께서 구천상제의 진영(眞影)과 서가여래, 관성 제군의 영위(影位)는 미리 준비하시고 옥황상제를 비롯한 다른 위지(位紙)는 채우식(蔡雨植)으로 하여금 법단 안에서 하명에 따라 봉서(奉書)하게 하셔서 몸소 진영액과 독에 붙이신 다음 이윤섭(전임 도전)과 오치국(지난 1월 25일에 임명된 도전)으로 하여금 순차대로 영대 봉안상 위에 옮겨 모시게 하셨다. 이에 앞서 봉안상 등의 제작에 있어 행자목판(杏子木板)으로 짜고 옻칠을 하게 하시며 옻을 타는 사람의 접근을 금하셨는데 이때 박중하는 옻을 심히 타는 체질임에도 두려움 없이 중궁에 올라가 윤섭, 치국과 함께 위패를 모셔 옮겼으나 옻이 오르지 않음을 보시고, “모든 병은 마음에 있느니라”하셨다. 28일에 봉천명일 치성을 겸하여 대강전 영건과 영대 봉안의 치성을 봉행하기로 정하시고 영대에 15신위를 봉안하셨다. 이러한 설비가 완료된 다음에야 임원들은 이 건물이 태극도의 핵심적 성전이라는 사실과 그야말로 원위대강의 신전(神殿)이라는 사실을 비로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성전에서 장차 태극진법의 공부법방이 시행되고 도주님께서 50년공부를 종필하셔서 옥황상제의 신격위에 임어(臨御)하시는 화천(化天)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함으로써 후일 대도운영의 큰 혼란을 야기시켰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아직 이 성전을 떠나서도 도주님의 덕화를 받들어 원위대강을 모실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자가 있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