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twkBfb8m8Vo?si=NjC9RQ_AZvacdSf_
3 정념 ④
부처님은 또 하나의 6계를 가르치셨다. 갈망, 갈망에서 벗어남, 분노, 분노가 사라짐, 해(害)와 불해(不害)가 그것이다. 갈망을 깊숙이 들여다본다면, 모든 것은 이미 그 밖의 것의 일부이므로,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통찰력을 얻게 되면 갈망의 영역에서 자유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 분노의 불길은 우리 안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타오르며 고통을 야기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분노의 대상이 되는 사람보다 훨씬 더한 고통을 받기도 한다. 분노가 사라질 때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짐을 느낀다. 무해의 영역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증오와 폭력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사랑과 자비를 키우려고 하는 여유를 갖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무해는 정말 중요한 수행이다.
더 나아가 욕계, 색계 그리고 무색계라고 하는 3계가 있다. 색계와 무색계는 명상의 어떤 단계를 설명하는 말이다. 색계에 있는 물질적 존재는 다소 미묘한 상태에 있다. 무색계에서 그것은 아주 미묘한 상태를 갖는다. 물질적인 존재는 욕계에서 완전한 형태를 갖는데, 인간은 그 상태에서 명상에 들 수 없다. 이 3계는 우리의 마음에 의해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갈망, 분노, 그리고 해치려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 사람은 불난 집과 같은 상태에 있게 된다. 갈망, 분노 그리고 해치려는 생각이 사라지면, 시원하고 깨끗한 연못과도 같은 상태가 된다. 정념을 수행할 때면 그 시원한 연못으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 되는 것이다. 서 있는 경우에는 다만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앉아 있는 경우에는 다만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 무엇도 더하거나 덜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2계, 즉 유위(有爲)의 영역과 무위(無爲)의 영역에 대한 명상을 가르치셨다. 유위의 영역에서는 생사, 전후, 내외(內外), 대소의 개념이 성립된다. 무위 세계에서는 더 이상 생사, 내왕(來往) 그리고 전후에 구애되는 일이 없다. 유위의 영역은 역사적 차원에 속한다. 그것은 파도와 같은 것이다. 무위의 영역은 궁극의 차원에 속한다. 그것은 바다 그 자체와 같은 것이다, 이 두 가지 영역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편견에서 벗어나고 두려움을 없애고 대자비심을 얻고자 한다면, 연기(緣起)와 무상(無常) 그리고 자비를 관(觀)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좌선을 할 때면 어떤 대상의 연기성緣起性)에 집중해 본다. 인식이 주체는 인식의 대상과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이다. 듣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듣는다는 것이다. 화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희망을 갖는 것이다.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인식의 대상이 없으면 인식의 주체도 있을 수 없다. 주체와 대상의 상즉성에 관해서 알아차려야 한다. 호흡에 전념하는 수행을 할 때면 호흡은 곧 마음이다. 신체에 전념하는 수행을 할 때면 신체는 곧 마음이다. 몸 바깥에 있는 대상에 전념하는 수행을 할 때면 그 대상들이 곧 마음이다. 따라서 주체와 대상의 상즉성을 관하는 것은 마음을 관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마음의 대상은 곧 마음 그 자체다. 불교에서 마음의 대상은 법(法)이라고 부른다.
연기성을 관한다고 하는 것은 일체법의 본성을 간파하고, 그것들을 실재라고 하는 거대한 몸통의 일부분으로 보고, 실제라고 하는 거대한 몸통을 분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자 일체법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이다. 실제는 각각 분리되어 존재하는 조각으로 쪼개질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대상은 산, 장미, 만월 혹은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분리된 실체로 우리 바깥에 존재한다고 믿지만, 그러한 지각의 대상은 곧 우리 그 자체다. 우리의 느낌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싫어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싫어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념의 대상은 실은 전 우주다. 전념은 신체, 느낌, 지각 그리고 정신의 형성, 즉 심행의 모든 것 그리고 의식 속에 있는 씨앗에 대해 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전념의 네 가지 확립에는 우주의 모든 것들이 들어간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지각의 대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다만 우리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무 싹을 깊숙이 들여다본다면, 그것의 본성을 알게 된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일 수도 있지만, 땅과 같은 것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싹 속에 들어 있는 잎은 땅의 일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 안에 있는 어떤 한 사물이 진리를 알게 되면, 우주의 본성을 알게 된다. 전념, 즉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으로 인해 우주의 본성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본성에 대해 이러저러한 우리의 생각을 늘어놓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앉아서 호흡을 지켜보는 것은 훌륭한 수행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전환이 일어나게 하려면, 좌선용 방석 위에서만이 아니라 온종일 전념을 수행해야 한다. 전념이 곧 부처님이다. 바로 식물이 햇빛에 민감하듯이, 정신의 형성, 즉 심행은 전념에 민감한 법이다. 전념은 우리 모든 심행을 감싸 안고 전환시키는 힘이다. 전념은 ‘전도된 지각’을 떨쳐 버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깨닫는데 도움을 준다. 틱 쾅 중 스님이 분신했을 때, 전 세계인들은 베트남이 불타오르고 있으니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전념을 수행하면 생명과 접촉할 수 있기에 고통을 줄이고 기쁨과 행복을 불러 일으키고자 하는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바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미래에 매몰되어서도 안 된다. 분노, 걱정 혹은 두려움에서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서 생명과 긴밀하게 접촉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념이다. 동시에 모든 것에 마음을 집중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전념의 대상이 될 만한 것으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푸른 하늘은 멋지고, 아이의 귀여운 얼굴 또한 멋지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접할 수 있는 삶의 모든 경이로움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부처님은 여러 가지 설법을 통해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말씀하셨다. 계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정념을 수행하는 것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정념을 수행한다고 할 수는 없다. 계를 지키지 않고서도 명상 수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는 선도(禪徒)들이 일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생각이다. 불교 명상의 핵심은 전념 수행이고, 전념은 계를 지키는, 즉 지계(持戒)인 것이다. 지계 없이는 명상도 할 수 없는 법이다.
전념을 수행하면, 우리 안팎에 있는 불성의 힘을 발현시킬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힘이다. 부처는 온종일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다만 이따금씩 부처가 될 뿐이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전념의 힘을 가지고 불안(佛眼)을 통해 사물을 보아야 한다. 불이(佛耳)를 통해 듣게 되면, 의사소통이 다시 원활해질 수 있고 많은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다. 전념의 힘을 손에 모으면, 불수(佛手)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전무사 하게 지켜 줄 것이다.
자신의 손을 깊숙히 들여다보고는 불안(佛眼)이 그 안에 있는 것처럼 생각해 보라. 티베트, 중국, 한국, 베트남 그리고 일본의 절에는 다른 이들을 돕는 수많은 팔을 의미하는 천수(千手)를 가진 보살상이 있는데, 그 각각의 손바닥에는 눈이 그려져 있다. 손은 행동을 나타내고 눈은 지혜와 깨달음을 상징한다. 깨달음이 없으면 우리의 행동은 남에게 고통을 야기 시킬지도 모른다. 설사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바람을 갖는다 해도 깨달음이 없는 이상 행동하면 할수록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사랑이 깨달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전념은 우리 손에 불안을 낳게 하는 힘이다. 전념을 통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일상생활의 매 순간마다 전념의 힘을 발현시키는 것은 그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