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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8.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묵상글. 1차(0707. 23:55), 2차(05:05), 3차(07:20)
7월 8일 묵상글, 7일 23시 55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 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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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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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8.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0,1-7 주님께서는 열두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어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십니다. 그 명단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놀랍습니다. 어부 베드로와 세리 마태오, 로마에 맞서던 열혈당원 시몬이 한자리에 있습니다. 심지어 훗날 배신할 유다까지 그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어울리지 않는 이들을 한 사명으로 묶어 한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십니다.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신학자’라 불릴 만큼 삼위일체의 신비를 깊이 묵상한 교부입니다. 그는 세 위격이 한 하느님이신 그 ‘일치’ 안에서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할 모범을 보았습니다. 그에게 일치란 차이를 지우는 획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들이 한 사랑 안에 ‘친교’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삼위일체가 그러하듯, 교회의 일치도 다름 속의 사랑입니다.
그레고리오 자신이 이 일치를 위해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분열과 다툼이 거세지자, 그는 평화를 위하여 자기 자리를 내려놓으며,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 바다에 던져진 요나처럼 나를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일치를 위해 자기를 비운 그 모습은, 열두 사도를 한 몸으로 부르신 주님의 마음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첫 권한이 ‘병을 고치고 악을 쫓는’ 돌봄의 권한이었음도 뜻깊습니다. 그들은 ‘길 잃은 양’에게 보내집니다. 일치는 끼리끼리 모이는 안락이 아니라, 함께 길 잃은 이를 찾아 나서는 사명입니다. 하나 되어 보내질 때, 그 돌봄은 비로소 멀리까지 닿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나와 다른 이를 한 형제로 받아들이는가? 나는 일치를 ‘획일’이 아니라 ‘다름 속의 사랑’으로 보는가? 나는 일치를 위해 내 자리를 조금 비울 수 있는가? 나는 하나 되어 ‘길 잃은 양’에게 함께 나아가는가?
주님, 서로 다른 저희를 한 사명으로 부르시니 감사합니다. 삼위일체의 친교를 닮아 다름 속에서도 한 사랑을 이루게 하시고, 일치를 위해 기꺼이 저를 비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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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8.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네 가지 과정이 있다고 합니다. “이해, 해석, 비판, 전망‘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은 이해와 해석에 머물게 된다고 합니다. 이해와 해석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키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예전에 ‘보도지침’이 있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정부가 언론을 길들이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보도지침을 어기고 비판과 전망을 제시하는 언론에 대해서 광고를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비판 기사를 낸 기자들을 해직하기도 했습니다. 비판은 자칫 다툼의 여지가 있습니다. 전망은 자칫 책임의 문제가 있습니다. 경제 지표를 전망하거나, 선거 결과를 예측하는 경우 맞으면 좋지만, 틀리면 책임이 따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는 대부분 이해와 해석을 통해서 판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비판과 전망을 함께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눈으로 시대를 바라보며, 백성의 죄와 권력의 불의를 비판하였고, 동시에 회개하면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의 전망을 제시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성전과 예루살렘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거짓 안보를 비판하며 회개를 촉구했지만, 그 때문에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으며 구덩이에 던져지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아모스는 가난한 이를 짓밟고 정의를 외면하는 북이스라엘의 부패를 꾸짖으며 “공정을 물처럼,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외쳤지만,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숭배와 아합왕의 불의를 비판하며 참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선포했지만, 이제벨의 위협을 피해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처럼 예언자는 단순히 사건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시대를 비판하고, 회개의 길과 구원의 희망을 함께 보여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의 길은 언제나 고난의 길이었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열어 주시는 미래를 증언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건과 율법과 전통을 단순히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당시의 종교적 형식주의와 배타성을 비판하셨고, 동시에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전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율법이 사람을 억압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은총의 길이여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새 술과 새 부대의 비유에서는 낡은 생각과 굳어진 제도 안에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은총과 복음을 담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시며, 세상의 권력과 성공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가난한 이가 위로받고, 죄인이 용서받고, 병든 이가 치유되며, 잃어버린 이가 다시 하느님 품으로 돌아오는 나라를 전망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는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며, 참된 신앙은 판단과 정죄가 아니라 섬김과 희생으로 드러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비판과 전망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라 부활로 이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문이 되었고, 예수님의 비판과 전망은 인류에게 새로운 구원의 길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새로운 전망을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예수님의 전망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전망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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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8.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어제까지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능을 드러내준 기적 이야기들을 들어왔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듣게 되는 말씀은 제 10장의 “파견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르심 받은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또 다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로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당신의 일을 하는데 합당한 권위와 힘을 부여하십니다.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이는 제자들의 사도적 권위를 확증해 주시는 동시에, 그 권위와 능력이 그들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일깨워줍니다. 이처럼, “사도”란 “파견 받은 자”이기에 자신의 주장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한 분의 뜻을 전파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파견 받은 자의 재능이 아니라, 누구에게서 파견 받았는지가 중요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러 가야할 곳을 말씀해주십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마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마태 10,5-6)
이러한 전도의 대상 지역을 이스라엘로 제한시키는 것은 민족적 편견이나 영원히 지켜져야 할 지침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가 하느님의 경륜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곧 아직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된 것은 스테파노가 순교한 후라 할 수 있습니다(사도 11,19-20).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의 우선순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당신의 제자들을 사도로 뽑으시면서 “먼저” 사도에 합당한 당신의 권위와 힘을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이미 이곳에 모여 살기에 합당한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직무나 소임을 받았다면, 이미 그에 합당한 힘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를 수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힘이나 재능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능력임을 말해줍니다. <또 하나>는 사도로 파견하시면서 “먼저” 그 복음전파의 대상을 정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부터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먼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선포되고, “우리 안에” 하늘나라가 흘러넘쳐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분의 나라, 그분의 지배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의 제자요 사도임을 드러냅니다. 이는 동시에, 우선순위를 분별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우선순위를 결정하시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를 파견하신 예수님이요, 우리는 그분의 제자요,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어 주시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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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8.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함께 짊어지고 갈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구마와 치유의 권한을 주십니다. 이들은 ‘사도’라고도 불리는데, 제자의 정체성이 ‘따름’에 있다면 사도의 정체성은 ‘파견’에 있습니다. 이 열두 사람은 여느 제자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지위를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이는 단순히 그분께서 가시는 곳을 함께 다닌다는 의미를 넘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곧 십자가 죽음의 길을 함께 간다는 뜻입니다. 물론 열두 제자도 그분의 공생활 여정에 따라나설 때에는 그 사실을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한 많은 제자가 그분의 곁을 떠나갔습니다(요한 6,66 참조). 그때 곁을 지키던 열두 제자라고 해서 특별히 더 강인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그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며, 베드로 사도조차 스승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를 길러 내시는 데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또한 ‘배우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나약하고 부족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하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이나 기술을 익히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승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분의 눈빛과 손길에서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과 자비, 연민과 공감을 배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힘으로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하나씩 떠올리며, 마침내 목숨을 바쳐 그분을 증언하는 사도로 거듭납니다. 이처럼 나약하였던 제자들이 결국 세상에 복음의 승리를 알리는 중심인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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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8.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복되어라, 슬퍼하는 이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복되어라, 슬퍼하는 이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진복팔단: 제1주간 복되어라, 슬퍼하는 이들! 2026년 7월 7일 화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우리가 슬퍼할 수 있는 능력, 곧 개인의 고통과 세상의 상처를 함께 끌어안는 그 성스러운 본질을 성찰합니다: 진복팔단의 이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물 흘리는 이들, 곧 슬퍼할 이유가 있는 이들의 상태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세상의 고통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할 줄 알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이들이야말로 하느님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참된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 흘리는 이들을 찬미하십니다. 곧 세상의 고통과 하나 되어 그 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연대할 줄 아는 이들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죄와 세상의 죄를 애통해 하는 것은 자기혐오나 타인에 대한 증오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길입니다. 애통의 길이라 부를 수 있는 이 길은,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되 가해자와 피해자를 찾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양쪽 모두가 비극적 현실 속에 갇혀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눈물은 언제나 모든 이를 위한 것이며, 우리가 보금자리에서 멀어진 보편적 유배의 처지를 함께 느끼게 하십니다. [1] 신약 성서 학자 에이미-질 레빈(Amy-Jill Levine) 교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이들이 히브리 예언자 이사야가 전한 위로의 메시지를 떠올렸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진복팔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특별한 울림을 지니며, 이는 유다 전통에서도 이어집니다. 루카 복음 4장에서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부분적으로 인용하신 구절은, 이사야 예언자가 전한 위로의 메시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시온에서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시며, 그들의 세대가 마지막이 아님을 알려 주십니다. 비록 그들이 결실을 보지 못할지라도, 그들의 자녀와 후손들이 그 열매를 보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서 슬퍼한다는 것은 우리가 홀로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곁에는 친구와 친족뿐 아니라 앞선 세대와 다가올 세대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실 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2] 리처드 로어 신부는 슬퍼함을 십계명과 진복팔단을 이어주는 영적 덕목으로 인식합니다: 슬퍼함은 예언자들이 말하는 "눈물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방어를 내려놓는 행위로, 흔히 강조되는 영웅적 의지나 계명 준수, 복종, 힘, 분노, 그리고 정당화된 폭력과는 뚜렷이 대조됩니다. 처음에는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상처 입음')을 받아들여야 우리의 에고를 꺾고 온전한 의식으로 열릴 수 있습니다. 그 온전한 의식은 두려운 무의식까지도 포함해야 합니다. 이는 곧 십계명에서 진복팔단으로 옮겨가는 여정입니다. 예언자들은 이미 이 여정을 이천오백 년 전에 보여 주으며, 오늘날 우리도 갈망과 절박함 속에서 이 길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예수님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측면은,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체험하시고 표현하실 수 있는 그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슬픔을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 그리고 상처 입은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거룩한 애통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와 함께 슬픔과 상실을 온전히 느끼시고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신성하신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슬퍼함을 서둘러 지나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류의 고통 속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심오한 순간은 예수님께서 고통을 신적 초월로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안에 서 계시며, 느끼시고, 눈물 흘리는 이들과 함께 우셨음을 드러냅니다. —Malika C.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Jesus’ Alternative Plan: The Sermon on the Mount (Franciscan Media, 2022), 140–141. [2] Amy-Jill Levine, Sermon on the Mount: A Beginner’s Guide to the Kingdom of Heaven (Abingdon Press, 2020), 13–14. [3] Richard Rohr, The Tears of Things: Prophetic Wisdom for an Age of Outrage (Convergent Books, 2025), xxviii.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nh Trí,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잎 위에 맺힌 빗방울처럼, 진복팔은 하느님의 나라를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 방울씩 이루어 가는 처방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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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8.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나를 찾아 떠나는 관계의 여행
나를 찾아 떠나는 관계의 여행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그의 삶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산이 더 푸르게 된 것도 아니었고, 하늘이 더 높아진 것도 아니었으며, 사람들의 얼굴이 더 아름다워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변한 것은 오직 한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자기 두려움과 자기 욕망과 자기 영광이라는 좁은 방 안에 갇혀 살던 한 인간의 마음속으로 하느님의 숨결이 조용히 스며들기 시작했고, 그 숨결은 메마른 흙에 스며드는 새벽의 이슬처럼 아무 소리 없이 그의 존재를 적셔 갔으며, 그때부터 세상은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전혀 다른 얼굴로 그 앞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회개란 죄책감에 짓눌려 눈물을 흘리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숨 쉬실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여는 일이라는 것을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삶으로 배웠습니다. 하느님은 그의 삶을 억지로 바꾸지 않으셨고,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고 강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사랑으로 기다리셨고, 기다림 속에서 그의 굳게 닫힌 마음을 조금씩 녹이셨으며, 마침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생애를 붙들고 있던 거짓 자아의 성벽을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비로소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도가 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는 입술이 하는 일이 아니라 존재가 하는 일입니다. 말이 많아질수록 하느님께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투명해질수록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더욱 자유롭게 숨 쉬십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침묵은 기도였고, 그의 눈물도 기도였으며, 그의 걸음과 나환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끝마저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느님을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심장 안에서 살아 움직이셨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그의 몸을 떨게 만들었던 나환자의 얼굴이 어느 날 문득 그리스도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코를 막고 외면하고 싶었던 상처가 하느님의 상처가 되었고, 가까이 가기조차 싫었던 냄새가 자비의 향기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이 바뀌었고, 나환자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달라졌으며, 그 마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새로운 시력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쓰디쓴 것은 달콤함이 되었고, 혐오는 포옹이 되었으며, 두려움은 형제애가 되었고, 죽음처럼 보이던 곳에서 생명의 샘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은총은 사람을 세상 밖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향하여 더 깊이 걸어가게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 머문 사람은 반드시 상처 입은 사람들 곁으로 걸어갑니다. 침묵 안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들은 사람은 반드시 세상의 신음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외면하는 길은 프란치스코에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언제나 사람의 얼굴을 향했고, 그의 관상은 언제나 형제를 향해 열려 있었으며, 그의 찬미는 들꽃과 새와 바람과 태양과 달과 가난한 이들의 눈동자 안에서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는 마침내 자기 자신도 혼자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는 너를 통하여 비로소 내가 되고, 너는 나를 통하여 너 자신을 발견하며,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참된 이름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그는 온몸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밀어내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밀어내는 일이었고,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 존재의 잃어버린 조각을 다시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나환자를 끌어안던 그 순간 프란치스코는 사실 자기 안의 가장 깊은 나병을 끌어안고 있었고, 가난한 이를 사랑하던 순간 그는 자신의 가난을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병자의 눈물을 닦아 주던 순간 그는 자신의 상처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무엇을 얻어 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숨 쉬실 수 있도록 우리의 존재를 열어 드리는 일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기도가 되었다는 말은 그가 기도를 많이 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하느님의 호흡이 머무는 공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그의 심장을 통과하자 그의 판단은 연민으로 변하고, 그의 두려움은 신뢰로 변하며, 그의 욕망은 사랑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살아가지 않았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거짓 자아가 무너질수록 참된 자아가 드러났고, 그 참된 자아 안에서 그는 비로소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발견한 가장 놀라운 진실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서로 다른 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났기 때문에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흘린 눈물은 나환자의 상처를 만지는 손으로 이어졌고, 침묵의 기도는 가난한 형제와 빵을 나누는 식탁으로 이어졌으며, 하느님께 드린 찬미는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라 부르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셨고, 프란치스코는 그 관계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갈수록 더욱 깊이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자기 자신도 타인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섬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자기 자신이 되는 존재입니다. 나는 너를 통하여 나를 만나고, 너는 나를 통하여 너 자신을 발견하며,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안에서 비로소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순간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서도 멀어지고, 다른 사람을 품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참모습에 가까워집니다. 프란치스코는 나환자의 얼굴에서 자신의 나병을 보았고, 가난한 사람의 굶주림 속에서 자신의 가난을 보았으며, 병자의 상처 속에서 자신의 상처를 보았습니다. 그 만남은 동정심이 아니라 존재의 일치였고, 자선이 아니라 형제애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관계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바람만으로 숲을 이루지 않으시고, 물방울 하나만으로 강을 이루지 않으시며, 사람 하나만으로 당신 나라를 세우지 않으십니다. 서로 내어주는 관계 안에서, 서로를 살려 내는 사랑 안에서, 서로의 부족함을 품어 주는 형제성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 바로 그러하듯이, 존재는 홀로 완성되지 않고 사랑을 통하여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그는 높은 산으로 올라갔지만 결국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왔고,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결국 가장 낮은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십자가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세상의 고통을 끌어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참된 관상이었습니다. 눈을 감아 세상을 잊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세상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이 짧은 한마디는 그의 생애 전체를 담고 있는 끝없는 강물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전부가 되실 때 비로소 나는 더 이상 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느님이 전부가 되실 때 비교는 조용히 사라지고, 경쟁은 힘을 잃으며, 소유는 무의미해지고, 명예는 먼지처럼 흩어집니다. 오직 사랑만이 남고, 내어줌만이 남으며, 형제라는 이름만이 남습니다. 하느님이 전부가 되시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잃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하나의 나병을 품고 살아갑니다. 인정받고 싶은 갈망, 비교하려는 습관,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어, 용서하지 못하는 기억, 끝없이 자신을 증명하려는 두려움, 사랑받기 전에 먼저 사랑하려 하지 않는 인색함, 이것들이 우리 존재를 조금씩 병들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그 나병을 숨기지 않습니다. 햇빛 아래로 데려오고, 사랑 안으로 데려오며, 형제의 품 안으로 데려옵니다. 상처를 감추는 동안에는 치유가 시작되지 않지만, 상처를 사랑 안으로 가져오는 순간부터 은총은 조용히 숨 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외치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 창조되도록 허락하는 일입니다. 기도는 사람들을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사랑에 움직여지는 자유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내 삶 안으로 모셔 오는 일이 아니라, 언제나 내 안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하느님께 내 삶을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마침내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한 가지를 배워 갔습니다. 사람이 하느님께 가까이 갈수록 더 인간다워진다는 것, 하느님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수록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 사랑할수록 더 많이 내어주게 된다는 것, 내어줄수록 더 많이 자유로워진다는 것, 그리고 자유로워질수록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가 자신의 삶을 통하여 세상에 울려 퍼지게 된다는 것.
그때 비로소 한 사람의 생애는 한 편의 기도가 됩니다. 한 사람의 침묵은 복음이 되고, 한 사람의 미소는 성체가 되며, 한 사람의 눈물은 세상을 적시는 축복이 되고, 그의 존재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육화하시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숨결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하여 오늘도 조용히 세상을 사랑하시며, 상처 입은 형제들의 얼굴을 어루만지시고, 가난한 이들의 손을 붙드시며, 모든 피조물과 함께 끝없이 말씀하십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당신이 나의 전부가 되실 때, 비로소 나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관계였습니다. 하느님과 나, 너와 나, 그리고 피조물과 나 사이에서 창조 때부터 시작된 나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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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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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8.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7.08 04:59
- 가야 할 이유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행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제자들 중에 열둘을 부르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뽑으신 그들을 파견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셨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제일 중요한 말이 ‘가서’라는 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르셨다는 말도 중요하지만 부르신 것도 실은 파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찾아가지 않으면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지 않는 사람 가운데 싫어서 오지 않는 사람 곧 배부른 사람도 있지만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사람 곧 어제 복음에서 얘기하는 그 기가 꺾인 사람들, 그래서 주님께서 가엾이 여긴 사람도 있는데 찾아갈 사람은 바로 그들인 겁니다.
저는 서울역을 자주 가지 않지만, 가끔 갈 때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서울역에서 복음을 선포한다며 확성기를 크게 틀어놓는 이들 때문에도 그렇지만 노숙자들을 모아놓고 먹을 것을 주며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 마음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을 그들이 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하는 걸 우리가 하지 않기 때문이며, 더 정확히 얘기하면 제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희 한사랑 공동체 형제들이 서울역 근처에서 아주 훌륭하게, 개신교 방식과는 다르게 그들을 찾아가는 복음 선포를 하고 있지요.
어쨌거나 그들의 가난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외면 때문에 스스로 찾아오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은 불편한 진실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불편한 진실에 눈감지 말아야 하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가 배척하는 그들, 이러저러한 이유로 스스로 찾아오지 못하는 그들을 우리는 찾아가야 하고, 그 밖에도 교회 안에 설 자리가 없어 찾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찾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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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8.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의 주님은 변화와 변모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상할 정도 참 신비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분은 낯설고 이상한 일을 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오늘날 직장이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자주 들려오는 "다르게 살아갈 용기를 갖자!"는 모토가 있지요?!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모토의 모범이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낯설고 대담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며, 그분의 "다름을 두려워하지 않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세상 기준으로는 어딘가 어색하고 이상해 보이는 열두 사람을 당신의 대담한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을 묘사할 수 "형용사"들을 나열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나오지 않을까요?! '평범한', '소심한', '건망증 많은', '내성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위축된', '사회로부터 미움받는', '권력을 탐하는', '성급하고 정열적인', '회의적인', '불안한', '냉소적인', '변덕이 심한', 등등... 이렇게 나열해 본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묘사할 수 있는 더 많은 형용사가 나올 겁니다. 그런데 이런 묘사가 '나'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나'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제자들을 뽑으신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변화와 변모를 사랑하시기 때문일 겁니다! 그분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고, 빵과 물고기를 수많은 이들의 양식으로 변모시키셨습니다. 거친 바다를 평화와 평온으로 바꾸셨고, 병든 이를 건강과 활력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율법의 경직되고 비인간적인 시각을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한 시각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변화와 변모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열두 제자들과 함께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 열두 명은 각기 다른 성격과 기질을 지녔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사절"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온 세상에 빛을 비추는 등불이 되었던 거고, 자신들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하느님의 빛으로 살아가며 자기들의 삶으로 그 하느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있지 않습니까?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상태 안에서, 우리도 하느님 나라의 사절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격이나 기질, 약점 때문에 걱정하지 맙시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본 모습을 되찾아 주기를 바라십니다.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우리의 동의와 열린 마음뿐입니다. 호세아 예언자가 말한 것처럼(호세 10,1), 풍요와 부요에 자만하지 않고, 마음이 둘로 갈라지지 않도록, 새 땅을 갈아 주님을 찾읍시다. 하느님 나라는 포도밭이며, 일꾼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물이며, 어부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이며, 씨 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양 떼이며, 목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이 "부재중 전화"로 남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낯설고 특별한 길을 걸으시는 주님과 함께, 우리도 용기 있게 "다르게" 살아갑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이 여정에 함께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함께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고 부족하며 합당하지 못한 '나'를 변모시켜 주는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면서 함께해 주신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면서 세상이 부화뇌동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방향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우리는 오늘 특별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시는 말씀, 즉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 외에 다른 민족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지 말라는 배타적인 말로 이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먼저 '나' 자신부터 변화를 위한 대담하고 과감한 부르심에 응답하라는 분부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 삶으로 다른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변모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쩌면 이러한 변화와 변모는 본래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애초에 모든 것, 특히 우리를 창조해 주실 때부터 주어져 있던 모습을 되찾게 되는 변화와 변모일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1장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축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5). 그러니 우리 믿음의 여정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는 주님과 더불어 우리의 본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이요 변모와 변화의 여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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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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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8.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눈이 시리도록 맑은 몽골 대초원 하늘 아래서!
몽골 자연 순례 피정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무한반복되는 일에서 벗어나 끝도 없이 계속되는 대평원과 눈이 시리도록 맑은 하늘을 마주하니, 이렇게 호사를 누려도 되나 하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어리둥절합니다. 작년부터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에서 몽골 지부 전반에 대한 운영을 책임지게 되었고, 지부장 신부님을 포함해서 총 네 분의 한국 살레시안들을 포함해 여러 다국적 형제들이 몽골 청소년들을 위해 불철주야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지 상황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몽골 복음화를 위해 초석을 놓기 시작한 지 벌써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철저한 통제로 인해 복음화 진척은 미미합니다. 전체 가톨릭 신자 수는 아직도 2천명 미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복음화를 위한 우리 형제들의 노력은 눈물겹습니다. 일단 입교, 세례를 염두에 두기보다는, 교육과 친교, 나눔을 통한 인격적 관계를 맺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복음화의 열매가 맺고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언젠가 주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실 그 날을 기다리며, 묵묵히 머나먼 타국에서 사랑의 현존을 계속하고 있는 형제들의 의연함에서 참 사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선택하시는데, 그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먼저 가까이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이 지니고 계신 능력과 힘을 부여하십니다. 그로 인해 제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악령을 추방시키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게 됩니다. 자신의 손을 통해 앓고 있던 사람들이 벌떡 벌떡 일어서니 제자들 스스로 생각해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사도들을 선발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윽고 그들을 양들에게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본질적이고 최종적인 임무를 아래와 같이 부여하십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도들, 제자들, 사목자들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임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사도 본인의 삶, 교회 공동체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 교회인 우리는 과연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세파에 시달리고 지친 세상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갈팡질팡하는 양들에게 확신갖고 초대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여기 오시면 꿈에 그리던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여기 이 공동체가 바로 미래 하늘 나라를 가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예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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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708.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 두 사도를 뽑으시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1-7)> 1) 복음서 저자들이 복음서에 열두 사도의 명단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사도들의 이름으로 압축해서 기록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열두 사도의 명단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들이 한 말들과 일들을 생각하고, 그 말들과 일들에 연결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들과 일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그들을 주춧돌로 삼아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당신이 승천하신 뒤에, 또 재림하실 때까지, 신앙인들이 스스로 일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 사업’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이면서 동시에 사람들 자신들의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들과 해야 하는 일들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합니다. 2)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과 능력을 위임받아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계속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명단에 배반자 유다의 이름도 들어 있는 것은, 복음서 저자들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 어떤 왜곡이나 조작을 하지 않고, 실제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정직하게 기록했음을 나타냅니다.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유다의 이름을 지우고 마티아 사도의 이름만 기록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는 어떤 흠도, 티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런 조작이 들어갔다면, 복음서 전체가 신뢰를 잃게 되고, 성경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2티모 3,14-17).” <이 말은, 실제로는 모든 신앙인에게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오로 사도의 편지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바오로 형제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지혜에 따라 여러분에게 써 보낸 바와 같습니다. 사실 그는 모든 편지에서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자들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곡해하듯이 그것들도 곡해하여 스스로 멸망을 불러옵니다(2베드 3,15-16).” <이 말은, 당시에 바오로 사도의 편지들이 성경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이고, 아무나 함부로 성경을 곡해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3)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이라는 말에 근거해서, 복음서의 열두 사도 명단에 배반자 유다의 이름이 들어 있는 것도, 더욱이 ‘예수님을 팔아넘긴’이라는 말까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도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유다를 사도로 뽑으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 문제는 세상 끝 날까지 수수께끼로(신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사도들의 명단은, 묵시록에 언급되어 있는 ‘생명의 책’에 연결됩니다.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12.15).” 열두 사도의 명단은 하나의 명단이지만, 배반자 유다를 제외한 열한 사도의 명단은 ‘생명의 책’이고, 유다의 이름이 기록된 부분만 ‘행실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사 대장의 보존 기간은 ‘영원히’입니다. 한 번 세례를 받으면, 그 이름은 영원히 세례대장에 남아 있습니다. 냉담을 하든,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하든 상관없이... 한 번 서품을 받으면 그 이름은 영원히 서품대장에 남아 있는데,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환속하는 경우에도, 그 사실도 그대로 기록해서 영구 보존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생명의 책’에 이름을 기록하거나 지우는 것은 각 개인이 스스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내 이름은 어떤 책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나중에 하느님 앞에서 어떤 이름으로 기억될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