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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미학> 2011 가을 창간호 Zoom spot - 마경덕
*신작
구름의 효능
고리
*발표작
바람의 성별性別
한때 적막이란 말에 잡중한 적 있다
프로의 힘
썼다 지우며 다시 새기는 살아남은 자의 형벌
-박선경 시인
시인에게 ‘찰나’의 의미는 곧 ‘기록의 순간’이다. 주체와 대상간의 새로운 발견이 감각에 새겨지는 순간에 일어나는 감정을 시인은 글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록임에 동시에 발견이다. 벗어날 수 없는 시작과 끝의 순환 고리처럼 그것은 괴로운 ‘찰나(순간)’이다.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는 시는 서로 만날 수 없는 경험과 직관의 시차(時差)를 끊임없이 환상으로 채워야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대상과 주체의 만남은 결코 서사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어느 날의 사고처럼, 때론 이미 존재해 있던 기원을 찾아가는 일처럼, 어쩌면 기억은 현재의 시간을 위해 매순간 환기되어야 하는 판타지 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대상)은 들여다볼수록 두렵다.
도달할 수 없다는 상실감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의 시간으로 재현해내며 때론 불완전한 모습으로, 때론 찰나적이면서 영원한 순간으로서 현존하기 때문이다. 대상은 인식하는 동시에 주체로부터 분리되는 타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시인은 늘 대상(타자)과의 합일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운명적일 수밖에 없는 주체와 대상간의 벌어진 시간, 그 틈에 마경덕 시인의 직관은 두 발을 거느리고 있다. 언제나 한발 뒤늦게 도착 할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시인은 스스로 몸에 새기며 나아간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람이 너울너울 밀고 간 모래물결, 맨발로 사막을 건너간 암컷의 흔적이다. 치맛자락 끌고 조신하게 걸어갔다. 수천 년 모래알을 세며 사막을 걸을 수 있는 자는 몸을 찢은 어미만이 가능한 일, 피 냄새를 기억하는 바람은 어디론가 흘러간 제 새끼를 보려고 족적(足跡)을 기록해 두었다.
하지만, 기록이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낙타의 행렬이 그녀의 발자국에 겹쳐지고 바람이 묻힌 자리에 또 바람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니,
이곳에서 이별이란 그저 사소한 일. 평생을 떠돌다가 우연히 마주쳐도 늙어버린 어미를 기억할 바람은 없다. 새끼를 낳은 것들의 형벌은 떠난 자식을 끝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바람의 性別」부분
『시와정신』(2011. 봄호)에 발표되었던 「바람의 性別」에서 ‘바람’은 모든 얽혀있는 것들의 기준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경계와 구분선이 없는 ‘사막’에 비유되는 공간에서 유일한 흔적은 ‘암컷’의 흔적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서 “몸을 찢”어 이 무한한 공간을 고통으로서 뛰어넘은 자는 암컷이자, “피 냄새를 기억하는 바람”인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순환의 의미를 강조하는 시인은 이 자연의 섭리를 경이로움으로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어디론가 흘러간 새끼”를 보기위해 족적(足跡)을 남기는 어미의 운명을 통해 어미란 존재 자체가 비애이자 신비로움인 것을 강조한다. 이 과정을 시인은 ‘기록’에 비유한다. 몸을 찢고 나아간 제 새끼를 찾아 떠나는 낙타의 행렬을 허망하고도 처연한 기록의 의미와 일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운명이자, 특히나 마경덕 시인이 바라보는 사물(대상)에 대한 인식의 과정인 것이다.
족적(足跡)을 남긴 자의 비애는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생에 짊어지고 갈 형벌이며, 존재의 비애인 것이다. 다시 말해 기록의 비애이다. 그것은 만날 수 없는 것들을 쫓아 행군하는 낙타의 수행과도 닮았으며, “바람이 묻힌 자리에 또 바람의 나라가 세워지는”일처럼 비애의 순환을 예고하는 사막의 풍경인 것이다. 결말이 없는 사막의 비유적 풍경을 통해 시인은 ‘족적(足跡)/ 피 냄새를 기억하는 바람/ 어디론가 흘러간 제 새끼/ 이별/ 떠난 자식/ 별들의 장지(葬地)/ 짝 잃은 수컷’ 등 존재하는 것들의 모든 불완전함을 보여준다. 시인이 표현한 시어들은 이미 불완전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는 현재의 시간들인 것이다. 이것은 기록의 의미, 즉 시인에게 있어 대상과 주체가 만나는 시간의 불일치성처럼 흔적으로만 존재하는 현재의 시간들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곧 사라지지만 또 다시 시작될 ‘시간의 운명’인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현실의 모순을 포착해내던 마경덕 시인의 사유는 어느덧 무심히 양 극단의 풍경을 한 곳에 오롯이 담아내는 ‘바람의 족적(足跡)’을 만들어 낸다. 그녀의 시세계에서 ‘바람’은 곧 사라질 현실의 풍경을 새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곧 다가올 현실을 예감하게도 한다. 이러한 시선은 허망하면서도 처연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마경덕 시인만의 장점이다. 이 아이러니한 현실 속에서 경계가 없는 시선이야 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 ‘시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현실적인 풍경들에게서 사실감마저 느끼게 한다. 그녀는 전작들에서처럼 일상 현실의 모순적 상황이 그려내는 새로운 의미들에 집착한다. 그녀의 시속에 드러난 현실은 일상적이지만 일상적이지 않다. 현실은 우리에게 익숙하나 그녀가 그려낸 현실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인식의 틈, 갈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적막을 오래 쓰다듬은 손바닥에 푸른 물이 들었다. 내 오른쪽 어금니처럼 한쪽이 닳아버린, 부르면 혀가 서늘한 적막. 소란한 틈으로 잠깐 뒤태를 보이고 사라진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불쑥 내 몸을 치고 사라지는 그 짧은 1초의 정전(停電)…내 몸의 플러그가 뽑힌, 그 1초.
떠밀리고 발등을 밟히는 사이, 방심한 내 어깨를 치는 순간, 울컥 혀끝에 닿는 찰나의 암전(暗轉). 그는 인파 속에 나를 홀로 세워두고 길을 끌고 흘러간다. 세상과 불통이 되는 그 시간,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타전할 수 없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그 1초는 적막이 나를 다녀간 시간.
(후략)
-「한때 적막이란 말에 집중한 적 있다」부분
저 사내는 프로다
배고파도 목말라도 발 저려도 종일 그 자세로
한 번도 졸지 않고 싸늘한 바닥에 앉아
악취를 참고 배뇨를 참고 가려움을 참고 추위를 참고 소음을 참고
매캐한 먼지를 참고 치미는 화를 참고
지하계단에 무릎 꿇고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저 늙은 사내,
이십 년 한자리에 눌러앉은 그 게으름이
사내를 먹여 살린다
(중략)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
걸인(乞人)이 되려면 이 모든 것을 통과해야한다
-「프로의 힘」부분
『시에』(2010. 봄호)에 발표 되었던「한때 적막이란 말에 집중한 적 있다」에서 ‘적막’과 ‘현실’ 은 서로 상반된 의미로서 묘사되지만, 시의 후반부를 통해 소음 속의 현실은 적막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떠밀리고 발등을 밟히는” 소란한 현실 속에서 주체는 “인파” 속에 서 혼자가 되는 순간이 있다. 이것은 “적막이 나를 다녀간 시간”인 것이다. 시인은 이제 적막의 순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 자신을 잠시 스쳐가는 순간이라고 묘사하며, 시인은 ‘현실’과 ‘적막’의 순간을 마주하게 한다. 이러한 시인의 의도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적막’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소란하지만 외롭고 고독한 현실을 그려냄으로써 상반된 의미들이 공존하는 시간을 만들어 낸다.
‘적막’과 ‘현실’ 은 서로 상반된 의미로서 서로의 명제를 교환한다. 즉 외롭고 쓸쓸한 ‘적막’의 순간은 현실 속에서 집중하려고 해도 만날 수 없는 세계이고, 소란한 현실은 ‘나’를 혼자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소음 속의 현실은 적막하고, 소통의 의지는 적막을 향한 채,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그려낸다. 이런 시적 효과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소란한 현실은 적막하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제시한다.
함께 발표된「프로의 힘」에서 “걸인(乞人)”과 “프로”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상반된 두 의미가 불러오는 모순적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반적 의미의 심층에서는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걸인에게서 부지런함이란 ‘악취, 배뇨, 가려움, 화’를 참아내는 일이다. 두 손을 공손히 내밀고, 연신 머리를 조아려야하는 “이십 년 한자리에 눌러앉은 그 게으름”이 걸인에게는 “프로”다운 모습인 것이다. 이 ‘게으른 프로 의식’이 이십 년 사내를 먹여 살린 힘이라는 표현을 통해 우린 인식의 한계와 동시에 상반된 이미지의 결합과 재구성을 경험하게 된다. 시인은 적막과 현실, 걸인과 프로의 상반되면서도 동일한 새로운 이미지를 일상적 풍경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녀가 보여주는 것은 경험의 풍경으로서만이 아닌 인식의 풍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마경덕 시인의 비유적 상상은 익숙한 인식의 풍경을 향해 항상 문제제기를 한다. 그리고 모순적 상황을 향해 던져진 의문들은 묘사에 그치지 않고 역동적인 의미들을 생산해 낸다.
전철 1호선, 한 남자가 고리가 달라붙은 나무판을 쳐들고
목청을 높인다 뒷면 스티커를 떼고 아무 데나
붙이면 쫙 달라붙는다고, 못 하나 없이
주방 욕실 타일 벽에 무엇이든 걸 수 있는 만능고리라고
벽돌 한 장을 선전용 고리에 척 걸었다
플라스틱 고리가 벽돌의 무게에도 끄떡없다
그렇다면 저 힘은 만능인데,
누군가는 집으로 가서 벽에 거울을 걸고 사진을 걸다가
깨달을 것이다 제 몸에 상처를 내지 않고
받아줄 벽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사내는 가족의 생계를 고리에 걸었으니
졸음을 깨워 걸어야 하고 흔들리는 속도마저 걸어야한다
돌아앉아 헐거운 틈을 메우고 끝내 쇳덩이까지 매달아야 하리라
샘플용 고리는 강력본드로 붙였을 거라고
옆자리 여자가 소곤거리고 나는 대뜸 여자가 내민 말에
내 말을 포개어 걸었다
출근길, 지하철 손잡이가 뚝 떨어지듯
모든 고리는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환승역, 전철 손잡이에 매달린 졸음이 우르르 떨어져 나가고
흔들리던 손잡이 고리에 쩍쩍 사람들이 달라붙는다
-「고리」전문
지상으로 귀향하는 저것들
추락하는 순간, 제가 태어난 곳을 알게 된다
까마득한 하늘로 유학을 떠난 것은
모두 되돌아오기 위함이었다
도시에 거주한 구름들은 호기심이 많은 십대나 이십대
놀이공원 지붕에 걸터앉아 거울을 보고 있다면 사춘기가 분명하다
이때부터 인증샷 셀카를 찍고 강과 바다에 대한 질문이 많아지고
제 몸 구석구석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다
잘록하게 허리를 조이고 키높이 깔창을 깔고
저녁노을에 머리를 염색하러 우르르 몰려간다
양떼 조개 새털로 카드놀이를 시작하면
성인이 되었다는 2차 성징, 먼 하늘을 훔쳐보거나
층운이 다른 구름에게 접근했다가 따귀를 맞고 돌아와
미모의 인어구름을 들여오자고 익명으로 댓글을 단다
점심시간에 떠돌이 바람과 접속하고 번번이 자리를 이탈한다
이것들은 모두 설문지에 기록된 일상적인 통계
간혹, 별종도 있어 여우비와 교제를 하다가 하늘 학적부에서 제명되기도 하는데,
천 길 낭떠러지에서 점프를 하는 것은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 같은 것,
번개 천둥 돌풍을 다룰 수 있으면 조기졸업도 가능하다 체류기간이 짧은
구름의 손바닥을 펴보면 번개에 감전된 흔적이 있다
스미거나 박살나거나 흘러가거나, 그것은 개인의 취향이다
-「구름의 취향」전문
마경덕 시인의 신작 「고리」에서 ‘고리’는 ‘걸다’의 동사와 함께 한다. “아무 데나”, “척”하고, “무엇이든 걸 수 있는”, “만능”의 이미지는 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한다. 다음 연에서 알 수 있듯이 “받아줄 벽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우리의 삶에는 스티커로는 버틸 수 없는 무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제 몸에 상처”이다. 시인은 지하철 스티커 고리를 팔고 있는 상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의미를 분석해 보면 고리는 ‘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로 버티어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에서 자신의 상처에 걸어야하는 고리는 고통과도 같다. “졸음을 깨워 걸어야 하고”, “돌아앉아 헐거운 틈을 메”워야 하는 고통인 것이다. 무거울수록 깊게 파이는 상처를 알기에 시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걸다’의 동사는 곧 아픔으로 각인된다. 수없이 샘플용으로 보여주는 고리의 힘은 기대와 희망, 믿음으로 간절해지지만 “모든 고리는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마치 퇴근 길, 전철 손잡이에 기대어 있다가 우르르 몰려가는 군중들처럼 어쩌면 우리의 삶도 샘플용 벽에 기대어 교체되는 일회용 고리인지도 모른다.
마경덕 시인은 이러한 시적 정황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통찰을 일상적 묘사를 통해 정확하게 보여준다. 또한 “무엇이든 걸 수 있는 만능고리”의 부정을 통해 인간의 상처, 고통은 나약할 수밖에 없다는 따뜻한 시선 또한 잃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만능’이라는 허술한 희망에 기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그녀의 시적 의미들은 여러 모순적 상황들의 묘사를 통해 스스로 다양한 삶의 이면을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그녀는 획일화된 하나의 논리나 깨달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의 모순적 상황을 제시하여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사고를 경험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또 다른 신작「구름의 취향」에서처럼 현실은 다양한 시간들이 공존하는 취향의 문제인 것이다. 이 시에서 ‘귀향’은 ‘추락’과 동일어로 쓰이고 있다. ‘되돌아오는’ 인간 본연의 모습은 어쩌면 상승의 이미지가 아닌 추락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지붕 위에 걸터앉아 거울을 보”는 사춘기, 질문이 늘어나고 키높이 깔창을 대보는 구름의 성장기는 변화무쌍한 시각적 효과를 통해 상승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양떼, 조개, 새털, 인어 등의 다양한 구름 모양은 “훔쳐보거나”, “떠돌이 바람”, “자리를 이탈”하는 구름의 역동적인 묘사로 “지상으로 귀향하는 저것들/ 추락하는 순간, 제가 태어난 곳을 알게 된다”는 1연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상승하는 이미지 묘사는 추락하는 순간, 비로소 알게 되는 1연의 의미와 대조를 이루며 자연의 섭리 같기도 하며, 삶의 이중적 구조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시인은 이 모든 것을 ‘취향’의 문제로 마무리 짓는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취향’이란 삶의 다양한 존재방식들에 대한 애정이 아닐까. 어느 날, 한 순간 내 머리 위에 만들어진 구름모양, 그리고 흩어져 흘러가는 다양한 구름의 모습들처럼 “스미거나 박살나거나 흘러가거나”하는 우리들 삶의 방식처럼 말이다. 우리는 결국 모두 나 자신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인이 말하는 취향은 ‘다양성’이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강조한다. 그녀는 모든 시에서 결과론적이며 획일화된 결론을 부정한다. 그녀의 시는 항상 단언하지만 열려 있으며, 열려 있는 듯 하지만 구속된 다층적 구조이다. 시인은 이러한 구조를 ‘기록’의 순간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이 말하는 기록의 운명은 썼다 지웠다 다시 새기는 살아남은 자의 형벌과도 같은 것이지만, 시인의 말처럼 무엇으로든 스미거나, 박살나거나, 흘러가기 위한 절대적인 ‘시간’인 것이다. 다시 말해 마경덕 시인이 말하는 ‘시간’의 이미지는 바람의 족적(足跡)이며, 시인이란 이것을 쫓는 바람의 목소리이다. 그녀는 이것을 빼어난 묘사로 보여주고 있다.
뼈를 묻으며 살아가는 것은 사막의 오랜 관습. 별들의 장지(葬地)가 된 이곳에서 떠돌이 바람도 수없이 뒤꿈치를 물렸을 것이다. 그때 물결 같은 발자국이 찍혔을 것이다.
사구(砂丘)를 넘어온 회오리바람이 모래밭을 헤집는다.
짝을 잃은 수컷들이다.
-「바람의 性別」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