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전서(弘齋全書) 정조(正祖)생년1752년(영조 28)몰년1800년(정조 24)휘산(祘)자형운(亨運)호홍재(弘齋), 홍우일인재(弘于一人齋),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본관전주(全州)시호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능호건릉(健陵)묘호정종(正宗)
弘齋全書卷十二 / 序引五 / 翼靖公奏藁財賦類叙
蔘引
人者。萬物之靈。蔘者。百草之靈。以草象人。宜其曰靈。本名薓而改今名者非傳訛。以其上應參星也。中國則河東諸州太行諸山幷出。而最尙上黨。我國則徧產於三韓諸地。中國數遼蔘。我國數羅蔘。而羅蔘產於嶺南。而嶺南卽古之新羅。故曰羅蔘。關東中山江界關北次之。家植之法盛。而江界之採於山獨多。故近反屈拇於江界矣。羅蔘關東蔘。封進御供。江界蔘則自度支卜定。納于內局。仍又遍及於宗親,議政,中樞三府。而事大交隣。亦皆用蔘。事大免貢。充包代銀。交隣則駸駸然濫觴。莫可止遏。而信使外。全責江界。此是國家產蔘用蔘之槩略也。採之則少。用之則衆。四方蔘椏。歲益踊貴。幾乎什倍而售。至有度支貿來燕蔘之議。惟我先朝。以至仁大德。洞察蔘弊。隨聞隨救於關東。而蔘布則定式較正。蔘貢則分作京契。蔘價則後先添給於江界。而身役蔘之變通。禮單蔘之給代。潛商蔘之禁斷。萊府蔘之捄弊。倭蔘之付諸譯舌。尾蔘之區劃店稅。戶蔘貿蔘信蔘之添價減納。殆不可勝數。而辛未以後。己丑以前。皆是公導達矯捄者也。予在春邸。每當奉進建功之時。輒承曲軫蔘政之敎。欽仰感歎。書紳服膺。御極之初。先從江界蔘祛瘼。旋又不減三府納。而減內局納者再。卄斤尾蔘。五斤體蔘。移付倭譯。而使之兩便。價本則隨時而增。官貿則設令而禁。關東蔘厚其直。移作營底之貢。而杆城一邑。則添付京貢。安集流民。特復蔘包。流貨泉而廣家植。京鄕互爲生理。窮閻皆得藥用。行之悠久。遍之中外。則庶幾無弊否耶。恨不得一質於公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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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팔포(八包)무역과 한중 FTA
한국일보2014. 11. 11. 21:06
조선은 사신을 따라가는 통역관인 역관(譯官)들에게 따로 경비를 주는 대신 인삼(人蔘) 여덟꾸러미를 매매할 권리를 주었는데, 이를 팔포(八包)라고 했다. 보통 인삼 80근을 뜻하는데, 인삼은 중국의 지배층들이 가장 선호하는 품목이기 때문에 이를 팔아 경비로 쓰라는 뜻이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서 중의 하나가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인데, 작자는 알 수 없지만 진ㆍ한(秦漢) 무렵 완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농본초경은 인삼에 대해서, "오장(五臟)을 보호하고, 정신을 안정시키며, 혼백(魂魄)을 일정하게 하며, 경계(驚悸ㆍ잘 놀라는 증세)를 정지시키며, 나쁜 기운(邪氣)을 제거하고, 눈을 맑게 하며, 마음을 열어주고(開心), 지혜를 늘리며(益智), 오래 복용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수명이 연장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히 만병통치약 수준이다. 정조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삼인(蔘引)'조에서 "사람은 만물의 영물(靈物)이고 삼은 백초(百草)의 영물"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인삼의 가치를 높이 쳤다. 흔히 인삼은 '개경'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조선 순조 24년(1824) 김이재(金履載)와 철종 6년(1855) 조병기(趙秉?) 등이 간행한 읍지가 개경의 읍지인 중경지(中京誌)에는 개경인삼의 유래가 실려 있다. 중경이란 남경(南京)이었던 서울과 서경(西京)이었던 평양과 함께 자신들이 중경(中京)이라는 개경인들의 강한 자부심이 담겨 있는 표현인데, 중경지에는 "원래 인삼은 개경의 토산물이 아니지만 중간에 개성인이 남쪽에서 그 종자를 얻어 삼포로 만들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최씨라는 개성상인이 남쪽에서 종자를 얻어 재배했다는 설명이다. 그 남쪽이 어디일까? 임원경제지는 '인삼'조에서 인삼을 지역별로 구분하면서, "우리나라 풍속에 영ㆍ호남에서 나는 삼을 나삼(羅蔘), 관서(關西ㆍ평안도)의 강계(江界)와 강원도의 여러 군에서 나는 삼을 홍삼(紅蔘), 관북(關北ㆍ함경도)에서 나는 삼을 북삼(北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조는 위의 '삼인(蔘引)'조에서 "나삼(羅衫)은 영남에서 출토되는데 영남은 옛날 신라 옛땅이기 때문에 나삼이라고 했다. 관동(關東ㆍ강원도)ㆍ중산(中山)ㆍ강계ㆍ관북 것을 다음으로 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조 때만 해도 영남에서 생산되는 나삼을 제일로 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개성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어느 순간엔가 '개성인삼'이 대명사가 된 것이다. 필자는 영남 출신의 한 학자에게 분단 이후 인삼 재배술을 가진 개성사람들이 경상도 풍기로 남하해서 인삼을 재배했는데, 양반가 자제들이 그 농장에 머슴으로 들어가 인삼재배술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풍기에서도 인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인데, 충청도 금산 인삼도 마찬가지 경로를 거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정조 때만 해도 인삼의 대명사로 불렸던 영남의 나삼 재배술이 사라지면서 자존심 세기로 유명했던 영남의 양반가 자제들이 머슴으로 들어가 인삼 재배술을 배워야 했던 것이다. 위의 중경지에는 "청나라의 아편 중독자들은 인삼을 약으로 삼는다"는 구절이 있고, 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 5월조에 "일본 풍속에 모든 병(每病)에 문득 인삼의 약효를 보았기 때문에 값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사려고 싸운다"라는 구절도 있다. 인삼은 한ㆍ중ㆍ일 모두에서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되었는데 어느덧 조선 인삼을 제일로 쳤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인삼의 이런 인기를 이용해 역관들에게 출장비 대신 인삼 8포의 무역권을 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역관들이 모두 인삼무역으로 거부가 된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 상인들을 대상으로 이익을 남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 상인들은 귀국 날짜가 정해져 있는 조선 역관들의 약점을 이용해 서로 담합해서 질질 시일을 끌면 판매처를 구하지 못한 조선 역관들은 손해를 본 채 떠넘기고 가기 일쑤였다. 홍대용의 연행 기록인 연기(燕記) '포상(鋪商)'조에는 조선 역관들이 북경 상인 정세태(鄭世泰) 집안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등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유명한 거상(巨商) 임상옥(林尙沃)은 달랐다. 의주읍지에 따르면 그가 북경에 갔을 때도 중국 상인들은 서로 담합한 채 그의 귀국 날짜만 기다리며 동정만 살폈다. 이를 눈치 챈 임상옥이 인삼 포대를 꺼내 불을 지르자 동정을 살피던 중국 상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불을 껐다. 임상옥이 "영약(靈藥)을 천대하는 사람들에게 파는 것은 조선의 영토(靈土)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며 꾸짖으면서 다시 불을 붙이려 하자 그 자리에서 값이 열 배나 뛰었다고 전한다.
한중 FTA가 체결되면서 기대 반 우려 반의 시각이 교차하고 있다. 모든 개방은 위기이자 기회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임상옥 같은 지혜와 배포로 한중 FTA를 잘 활용한다면 정체에 빠진 한국 경제에 재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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