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손석희를 닮은 남자 .10
처음 시작은,
22살인지 23살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부산 서면 내가 살던 앞 건물에
희고 긴 손가락 사이로 끼운 담배 개피가
참 근사해 보이는 사나이가 있었다
고급스런 셔츠, 훤칠한 키, 함박꽃 같은 웃음
꼭 아나운서 손석희를 닮았었다
오월의 햇살 아래 핀 장미꽃만큼이나 눈부셔
그만 주눅이 들어서 말도 걸어 보지 못했다
물밑으로 흘러 다니는 말들을 낚아보면
부산 동래 부잣집 둘째 도령이라고
또 미술대학을 졸업했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눈에 보이는 것마다 세련미가 줄줄 흘렀다
그렇게 혼자 4년을 지켜보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 그곳을 떠났다
찔레꽃 내음이 구름처럼 번지는 계절이 오면
어쩌다 입가에 미소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혹시 그때도 지금 같은 배짱이 있어
한번 말이라도 걸어 보았다면
그 사나이도 나를 장미로 보는 행운이 있었을까?
재수를 하고도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큰 오빠의 어명을 거역하지 못 해 미용학원에 등록을 하고 취미에도 맞지 않고 하고 싶지도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격증시험은 이론과 실기가 한 번에 합격을 하는 기현상이 일어나서 그 자격증으로 취업을 하였다.
예전에 미용을 배울 적에는 숙식제공이 가능하여 부모님께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그냥 ‘울며 겨자 먹기.’로 내 운명을 맡겼다.
하지만 유전적으로 청결하게 하고 성실한 것이 미용실원장님 마음에 쏙 들렀는지 원장님이 나를 신뢰했고 철석같이 믿었다. 하여 한 곳에서 5년 정도 일을 하게 되었다. 또 달리 보면 나 자신 가방에 짐을 싸 어디론가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이 쑥스럽고 자존심 상해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한 집에 5년 있는 동안 더러 다른 아가씨들은 왔다가 떠났고 오래 같이 일하는 아가씨가 드물었다. 또 그런 아가씨들은 일이 끝나면 친구를 만나거나, 사귀는 사람이 있어 밖에서 자고 오는 경우도 많았다. 지각을 하거나 결석하는 경우도 있고 그곳으로 남자친구가 찾아오기도 했었다.
그곳에서 일한 지 한 삼년이 지났을까? 어느 날 원장님이,
“심아, 니는 남자친구도 없나 어찌 찾아오는 사람도 없노? 아가씨가 연애도 안 하고 무슨 재미로 사냐?”
하면서 은근히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 오기로,
“ 사실 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데요. 말은 한 번도 안 해 봤지만...”
“누구? 말해라 내가 소개시켜 줄게.”
“그럼 좀 있다가 지나가면 알려 줄게요.”
하고는 앞 서 詩에서 표현하듯이 손석희 아나운서처럼 깔끔하고 샤프한 청년이 골목에 나타나기를 기다리다가,
“ 저 사람입니다. 맨날 저 건물로 드나들던데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못 생긴 게 눈은 높아 가지고 그런데 나는 저런 총각이 이 골목에 지나가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아가씨라 다르긴 다르다.” 하면서 놀리더니만
그 건물에 청소하는 아주머니를 불러서 아까 지나가던 그 청년이 무어하는 사람이냐고 물었고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말로는 그 총각은 건물주 아들이며 맨 위층에서 실내장식 하는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부잣집아들인데 부산 사직동에도 아버지가 빌딩이 있고 집은 광안리에 있는 부산에서 제일 고급인 롯데 아파트인지 그곳에 산다면서 부잣집둘째 아들이라 귀티가 줄줄 나지요? 하면서 듣고 있을수록 아득하기만 한 이야기들만 쏟아 내는 것이다.
그 아주머니를 보내고 나서 원장님은,
“ 심아, 마음 접어라. 인물은 좋아도 집이 가난하면 또 가능성이 있을까 부잣집에 인물까지 좋으니 어디 명함이나 내 보이겠나.”
하는 말에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살아보니,
참 잘생긴 남자도 별스레 미인이 아닌 여성과 사랑을 하는 예도 보았고,
억만장자의 아들이나 딸도 재력과는 거리가 먼 집안의 자식과 연을 맺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때 지금처럼 용기가 있었다면 적극적으로 접근을 했을 텐데 그때는 왜 그런 용기가 없었을까...’ 혼자 읊조리기도 한다.
세월이 많이 지나 부산에 간 김에 들려서
아직도 미용실을 하고 있는 칠순이 넘은 원장님께,
“언니 민원기 총각은 아직도 그곳에 있던가요?” 하고 물었더니
“심아 니는 아직도 그 이름도 기억하나 그 집 호주로 이민 갔다.”
순간 ‘만약 그 사람과 연이 닿았다면 이 나이에 내가 좋아하는 우리남해에서
이렇게 신나게 살지 못 했겠지...‘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나는 사람이든, 자연이든, 문학이든 짝사랑만 하는 달인 같다.
마음 같아서는 호주로 날아가서 아직도 손석희 아나운서처럼 근사하게 나이 들어가고 있는 지 확인 해 보고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