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변의 시기에는 중간지대는 설 자리가 없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공히 적용되는 법칙이다...이동섭 '파리 미술관. 역사로 걷다 中'@@
종식은 그렇게 해설위원실에서 근무하게 됐다.2007년 후반기이다. 해설위원실은 신문사 논설위원실과 비슷했다. 방송국 보도본부 기자들 가운데 최고참들이 근무하는 곳이다.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기자나 특별히 갈 곳없는 고참 기자들이 주로 발령을 받는 곳이기도 했다. 그날 있었던 가장 중요한 뉴스가운데 하나를 골라 그 뉴스가 갖는 의미와 어떻게 봐야하는 지를 설명해 주는 것은 물론 자기 나름대로의 논평까지 포함해 뉴스해설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개인의 성향에 따라 그 결과물은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의견은 배제한 채 오로지 그 뉴스를 자세히 풀이해 주는가 하면 어떤 이는 뉴스 풀이는 최소화하고 자신의 의견을 주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곳에 발령난 해설위원의 성향은 일반 기자들보다는 보수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부장출신 국장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현 정권과 시각을 달리하는 경우도 많았고 특히 현재 사장에 대한 불만이 많은 것도 해설위원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전체가 한꺼번에 어울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각자 자력갱생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끼리 끼리 어울려 골프도 치고 술도 마시곤 했다. 종식은 해설위원 가운데 가장 어린 축에 속했다. 회의는 하루 한번 실시했다. 오전에 모두 모여 그날 뉴스해설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논의한다. 성향이 각각 이어서 해설거리를 채택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보수적인 시각과 약간의 진보적인 시각이 충돌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앙숙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이 부딪힐 경우 격한 말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허다했다. 해설위원실에 온 뒤 모 선배가 종식에게 해 준 말이 생각난다. 여기서 나서지 말라고. 자신이 해설을 하겠다고 나서면 그 앞에서는 그래 그렇게 하지라고 말하지만 뒤에서는 건방진 자식이 어디서 나서고 지랄이야. 그러니 자기 동기들에게 밀려 여기 와 있는 것이지 하면서 욕한다는 것이다. 종식은 당분간 자신의 말을 드러내 놓고 하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해설위원실에는 종식의 고교 선배가 한사람 있었다. 그 선배와는 인연도 참으로 진하고 묘했다.
종식이 다녔던 대학의 고교 동문들은 모 대학 고교 동문들과 일년에 한 번 체육대회를 열었다. 종식이 대학교 3학년때로 기억한다. 1978년도 가을이었을 것이다. 모교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열었다. 종식은 그런 모임에 참석을 잘 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날은 어떻게 참석하게 됐다. 경기가 끝나고 뒤풀이가 있었다. 종식의 앞에 앉은 사람은 종식의 2년 선배였다. 그 선배는 학교 앞에 있는 음식점에서 일차를 한 뒤 이차로는 북한산 기슭의 아는 집으로 가자고 한다. 그 형을 따라 후배 3명이 북한산 개울옆에 있는 음식점으로 이동했다. 당시 대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주머니에 있는 푼돈을 모아 술값으로 내고 헤어져야 하는데 그 선배가 말한다. 자기 집에 가서 한 잔 더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형집으로 가서 한잔 더 하고 잠을 잔 뒤 다음날 낮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이 좀 흘렀다. 그 형의 얼굴은 잊혀졌다.
그리고 종식은 취업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지냈다. 그리고 브라보 방송국에 입사했다. 입사하고 연수를 받은 뒤 처음 보도국 사회부에서 근무하던 첫 날이었다. 일선 선배들의 전화받고 기사 받아 적고 그러다보니 저녁이 됐다. 출입처에서 일하던 선배들이 하나둘씩 회사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종식은 선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끝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낮이 익은 사람이 있었다. 그 분도 종식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다. 맞다. 그때 북한산 음식점에서 술을 같이 마셨던 그 선배 아니던가. 그 선배도 알아보는 듯 했다. 그 선배는 매우 반가워하며 일 끝내고 퇴근후 같이 나가자고 한다. 그렇게 그 선배와의 또 다른 인연이 맺어진다. 그 선배의 이름은 태평이다. 이름처럼 세상만사 걱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먹고 놀기 좋아하는 것은 종식과 흡사했다. 노래도 가수급 실력이다. 남과 갈등일으키기 싫어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안하는 그런 무골호인이었다. 그리고 종식은 그 형을 다시 조우한 그 순간 저 형 성격에 어떻게 기자가 됐을까 그렇게 생각됐다. 그 형과의 남은 방송국 생활이 인연도 악연도 아닌 요상한 관계가 될 줄이야 그때 종식도 태평선배도 몰랐을 것이다.
사실 종식은 지연이나 혈연 그리고 학연에 대해 그다지 좋은 생각을 갖진 못했다. 아니 그런 것을 한번도 공개적으로 밝힌 적도 없었다. 거저 숨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태어남에 대한 서글픔 그리고 어린시절 겪었던 트라우마같은 생활 그리고 이어진 학교진학에 대한 실패 등으로 그는 친한 친구가 없었다. 고등학교도 마지못해 다녔고 대학은 더욱 더 그랬다.종식에게 학교란 족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워낙 어릴적부터 내성적인 성격에다 신체적인 결함으로 인해 그는 타인이 접근해 오는 것을 매우 꺼리는 그런 성격이었다. 하지만 고교이후 인위적인 명랑함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효과를 보였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상당히 외향적인 인물로 판단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연 혈연 학연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태평형과도 마찬가지였다. 종식은 전에 우연히 만났던 형을 정말 우연히 방송국 그것도 보도국 사건기자팀에서 만났다는 그 사실이 놀라울 뿐 그와의 학연, 그리고 그것을 악용한 어떤 댓가도 생각해 본 적도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날 저녁 태평형은 방송국앞에서 택시를 잡더니 서울 강남으로 가자는 것이다. 1981년 12월 초 이야기이다. 택시안에서 그의 옆모습을 보니 많이 수척해 보인다. 기자생활이 힘들어서 일까.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택시는 서울 강남의 어떤 일식집 앞에서 멈춘다. 당시 강남은 서울의 신흥 유흥가가 밀집된 그런 곳 아닌가. 종식은 태평형이 왜 이곳으로 온 이유를 몰랐다. 일단 맥주로 입가심을 한 뒤 형이 말을 꺼냈다. " 야 종식아. 너 어쩌자고 기자가 됐냐. 아이구 이사람. 이런 힘든 직업을 왜 택했어. 미련한 사람 같은이라고." 형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늘도 뭔가 스트레스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였다. 주로 듣는 편이었다고 종식은 3년전 북한산 기슭 음식점을 기억해 낸다. " 그래 종식아. 너 거의 3년만이네. 그런데 왜 그동안 연락 한 번 안했니. 우리집 전화번호는 알고 있잖아." " 네 형. 저도 이런 저런 일로 바빴어요. 그런데 형은 어찌해 기자가 됐나요?" 태평형은 긴 숨을 내쉰 뒤 말한다. " 너나 나나 대학 별볼일 없잖아. 그래도 공개채용하는데는 기자밖에 없더라. 그래서 지원했는데 내가 시험 내공이 좀 있거든. 그래서 합격해 다니는데 이것 내 적성에 안맞는 것 같애." 종식도 같은 심정이었다. 기자하면 그당시 듣기 좋기로 무관의 제왕이라고 했지만 개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당시는 그 무지막지한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이 아니던가. 무관의 제왕이 아니라 하루 생활에 찌든 볼품없는 직업인처럼 느껴졌다. 사건기자도 힘든데 엄청난 압박으로 누르는 그 군부독재시절이 당시 기자들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태평형은 종식이 처음 만났던 그 때보다 수척해지고 얼굴에 핏기가 없어 보였다. 하긴 기자가운데 최고로 힘들고 정신이 없다는 그런 사건기자 아닌가. 태평형은 경찰서 중부 다시말해 바이스캡의 휘하에 있는 강남 경찰서와 강동 경찰서 그리고 성동경찰서를 맡고 있는 사건사고 기자였던 것이다.
태평형과 오랫동안 술을 마신뒤 형은 내일 새벽 4시에 경찰서로 나가야하니 강남 경찰서 근처에서 자자고 한다. 종식도 이제 기자사회에 들어섰으니 먹고 자는 것에 신경쓸 그런 상황이 아니였다. 아니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시행돼던 때이다. 맥주 몇병을 사서 근처 여관에 투숙한다. 형이 방에 들어서더니 종식에게 말한다. "종식아. 여기가 어딘지 아니. 여기가 그 유명한 박상은양 살해 현장에서 가장 근처인 삼정장여관이야. 박상은이 살해되지 몇시간 전 이곳에서 남녀 성관계를 한 곳이지." 갑자기 종식은 술이 확 깼다. 그 당시 엄청나게 유명한 박상은양 살해사건이 있었던 그 여관에서 잠을 잔다. 와 대단한 스프라이저 아닌가. 태평형은 "종식아. 요즘 이 강남경찰서 출입기자 사이에서는 박상은 살해사건이 최대의 기사거리지. 유력한 용의자가 나타났는데 결정적 증거가 없어. 그래서 얼마전 풀어줬는데 경찰들은 백퍼센트 그놈이 범인이래.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여기서 머물 생각이야." 아니 태평형에게 이런 근성이 있었다니. 그냥 무골호인인줄 알았는데. 당시 한국은 경제사정이 좀 나아지자 해외 여행 그리고 해외 연수가 많이 늘어났다. 그런가운데 어울려 다니던 젊은 남녀의 그렇고 그런 부작용으로 젊은 여대생이 강남의 모 모텔에서 어느 누군가와 성관계후 근처에서 무참히 살해된 그런 사건이 바로 박상은 살해 사건아니든가. 그렇게 힘든 밤이 지나고 종식이 아침에 일어나니 태평형은 벌써 경찰서로 출근하고 없었다. 그렇게 그의 유일한 고교 선배인 태평형과의 재회의 첫 만남은 이뤄졌다.
그 이후 종식과 태평형은 모 아파트 같은 단지에서 살았다. 그리고 종식이 기자협회 분회장을 하던 경제부 시절에도 형과 함께 출퇴근을 함께 했다. 종식은 그때 포니2 차량을 구입해 타고 다니던 시절이다. 옆동에 사는 태평형을 픽업해 회사로 가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퇴근 하면서 부근 술집에서 한잔하는 것이 일상화됐다. 리조트 회사에 다니는 규철형을 처음 만난 것도 그때였다. 태평형과 규철형은 고교 동기였다. 규철형은 참으로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아직 젊은 시절 혈기 방탕한 시절아니던가. 규철형은 모 그룹 홍부실 부장을 맡고 있어 죄송하지만 그형이 물주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 그렇게 했다. 태평형과 규철형 그리고 종식의 가족들은 여러번 서울 근교로 놀러가곤 했다. 아이들도 당연히 데리고 갔다. 우리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그때 아무도 몰랐다. 그저 편한 사람들과 편하게 지내는 것이 최고의 낙인줄 알고 살았던 그 시절이었다. 규철형은 그 이후 착하고 법없이 살 사람이란 죄로 일찍 회사에서 내쫒기는 처지가 됐다. 종식은 그 이후 그 형 상황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이 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2007년 말에 태평형과 다시 해설위원실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경제부 이후 15년 만이다. 이젠 나이가 들어 종식은 52살 그리고 태평형은 55살이 됐다. 태평형의 경우엔 이젠 퇴직후의 삶을 심각하게 생각해야하는 그런 나이가 됐다. 해설위원실에서 퇴근할 때 가볍게 그러나 발동이 걸리면 결코 가볍지 않게 마시곤 했다. 그럴때마다 종식은 태평형의 얼굴에서 기자의 피곤함을 느낀다. 세상에 어느 직업이 피곤하지 않겠냐 마는 이 기자라는 직업은 자신도 그리고 그런 뉴스를 듣는 시청자들을 의식하고 그들에게 뭔가 제대로 된 정보를 줘야하는 마지막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웃어도 그냥 웃는 것이 아닌 것이 아니겠는가. 늙었다고 그런 마음이 없어질까. 그래도 아직 태평형이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종식의 마음과는 달리 정국은 험난하게 회오리치고 있었다. 노무현 정권 언제는 그렇지 않았겠는가. 뭔가 새로운 것을 이뤄내려는 사람에게는 저항이 급격하게 몰아 닥치는 것이 일상사가 아니겠는가. 노무현. 종식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자신과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막내이고 종식도 막내이다. 그리고 자신이 겪는 심정 상황을 삭이는 법이 없다. 특히 자신이 부당하게 평가 받고 이른바 가짜 뉴스에 휘말릴 때는 특히 그랬다. 직설적인 화법도 종식과 비슷했다. 노통이 친구가 많지 않았듯 종식은 친구가 정말 별로 없었다. 그래서 종식은 인간적인 노무현이 자신과 성격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치권이 그런데가 아니지 않는가. 정치권은 당리당략에 따라 움직이는 집단이다. 의리는 개뿔. 의리를 내세우는 순간 순진하다는 꼬리표가 붙는 그런 집단 아니던가. 그리고 약해지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약점을 노리고 생명까지 빼앗는 그런 집단이었다는 것을 그는 몰랐을까. 아니면 그런 세태속에 그냥 그의 몸과 정신을 던졌을까...종식이 해설위원실에 있던 2007년 후반기...한때 여대야소를 이뤘던 그 찬란했던 정치기상도는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나라에 또 한차례의 엄청난 대 격변기가 도래할 것임을 암시하듯 그날도 종식이 근무하던 그 방송국 주변에는 먹구름이 가득하고 천둥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격변의 시기에는 중간지대는 설 자리가 없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공히 적용되는 법칙이다...이동섭 '파리 미술관. 역사로 걷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