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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불교가 도입되어 왕과 왕실을 대단히 신성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줄 수가 있거나, 왕이 귀족들과는 다른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존재라는 것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해주게 될 수 있다면, 어느왕이던지 불교를 적극 수용하고 장려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는 왕권 강화에 불만을 갖고 있던 귀족세력들이 불교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된 이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가정은 침류왕의 신변의 변화와도 연결되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병이 들었다는 기록도 전혀 없는데, #한산 에 #불교사원 을 세운 지 불과 9개월 만에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 #왕위 가 그의 아들이 아닌 동생 #진사 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물론 침류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정변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할 만한 명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13대 #근초고왕 대에 왕이 강력한 권한으로 #중앙집권체제 를 구축하였기 때문에 귀족들은 반대로 이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쌓여가고 있었을 것이 뻔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침류왕이 불교를 공인하고 #불교전파 를 강력하게 밀고 나가자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불만이 폭발할 만한 시점에 그가 갑자기 죽은 것이기에, 일각에서는 왕권 강화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이 침류왕을 #시해 하고 #진사왕 을 #옹립 한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해 볼 따름입니다.
침류왕의 가족관계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으며, 슬하에 이복형제들이 있는 것으로 봐서 부인은 여러 명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자식으로는 맏아들 #아신왕 (제17대)과 #홍 , #훈해 등이 있는데, 아신왕은 #아신왕실록 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홍과 훈해에 대해서만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1) #부여홍 (생몰년 미상)
부여 홍은 침류왕의 둘째 아들로 아신왕 3년에 #내신좌평 에 임명되어 정사를 보좌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으나, 그 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396년에 아신왕이 #광개토왕 에 패배하여 왕족과 중신 10명이 #고구려 로 붙잡혀가는데, 아마도 홍은 그 일행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2) #부여훈해 (?~405년)
훈해는 침류왕의 셋째 아들입니다. 405년 9월에 형 아신왕이 죽자, 정사를 대리하면서 왜에 입조해 있던 조카 #전지왕 (제18대)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막내 조카 #혈례 가 역심을 품고 훈해를 죽여 버립니다. #삼국사기 는 훈해에대해서 아신왕의 #중제 (仲弟)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둘째 동생이라는 뜻이므로 마찬가지로 침류왕에게는 셋째 아들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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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bsoonhw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