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윗과 밧세바에게 여디디야(솔로몬)를
2015년 12월 13일 / 대예배 / 삼하 12:24-25
삼하 12:24-25 / [다시 낳은 아들 솔로몬] 다윗이 자기의 아내 밧세바를 찾아가 잠자리를 같이하고 지나간 슬픔을 위로해 주었다. 밧세바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다윗은 새 아이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도 이 아이를 사랑해 주셨다. 25) 여호와께서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어 이 사실을 알려 주셨다. 나단은 다윗을 찾아가 여호와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그 아이의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지어 불렀다.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아이' 라는 뜻이다.
1. 들어가는 글
먼저 이 말씀이 기록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다윗과의 동침
이스라엘이 암몬과 대적하여 전쟁을 하고 있을 때 다윗은 요압에게 전투 지휘를 맡기고 궁정에 남아 있었습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는 충성스런 군대 장관으로서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다윗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 시원한 저녁 바람을 쐬려고 왕궁의 평평한 옥상으로 올라가서 거닐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울 안에서 목욕하는 한 여인을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엘리암의 딸로,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다윗은 그녀의 남편 우리아가 이스라엘의 용장으로 암몬 전선에 나아가 싸우는 기간을 이용하여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들였고 잠자리를 같이 하였습니다. 밧세바는 이렇게 다윗과 동침한 뒤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자신이 임신하게 된 것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밧세바는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렸습니다.
2. 죄를 은폐하기 위한 거짓과 살인을 한 다윗
다윗은 밧세바가 임신을 하여 자신의 간음죄가 밝혀질 위기를 당하게 되자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내어 휴가를 주었습니다. 우리아로 하여금 밧세바와 동침케 하여 자신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우리아의 아이로 바꾸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전우들을 생각하여 아내와 동침하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시키려고 술을 많이 마시우는 방법까지 동원하였으나 충직한 우리아는 끝까지 집에 가지 않음으로써 다윗의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아의 자세는 다윗의 자세와 대조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명을 받아 전쟁터에 나아가 생명을 걸고 싸우는 충성된 신하의 아내를 범하여 임신을 시켰지만 우리아는 자신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조차 거부함으로써 전우들과의 의리를 지켰던 것입니다. 다윗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속여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고 하였지만 결국엔 그의 거짓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에 다윗은 거짓으로 죄를 은폐하려는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우리아를 죽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 전투 중에 우리아를 적의 손에 죽게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지시대로 하여 우리아를 적의 손에 죽게 하였습니다. 우리아의 죽음의 비밀은 오직 다윗과 요압만이 알고 있었고 모든 사람이 알지 못함으로 영영히 묻힐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악행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고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실수로 범죄한 다윗의 죄가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의인에 대한 살인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다윗의 심령이 더욱 완악하고 잔인하여짐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와 같이 악해진 것은 왕으로서의 자신의 체면과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우리아를 죽이지 않고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모르게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악행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아가 죽자 다윗은 그의 아내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는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과의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율법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외적으로 볼 때 떳떳한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전쟁에서 죽은 신하의 아내를 왕비로 맞이한 것은 겉으로 볼 때 긍휼을 베푼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윗의 소위가 악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다윗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다윗은 모든 상황이 자신의 계획대로 종료되었다고 안심하고 있었겠지만 그의 악행에 대한 심판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밧세바가 낳은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가심으로부터 시작하여 후에 아들 압살롬의 반역 사건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죄악을 감추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소위대로 보응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다윗이 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목숨만은 건졌지만 악행에 대한 보응을 받게 되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기억하여 범죄하는 일을 두려워하여야 하겠습니다. 순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오랫동안 무서운 고통을 받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3. 다윗을 책망하는 나단 선지자(삼하 12:1-14)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거의 1년 동안 죄 가운데 그냥 버려두셨습니다. 14-15절에 보면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 임신기간 동안에 그의 죄를 문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확인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만 아는 죄를 범했으나 전혀 반응이 없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까지 속였다고 고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마 그때는 죄가 피곤하여 자고 있을 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죄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켠다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만홀(漫忽: 소홀함)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십니다(갈 6:7).
1) 나단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1절)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셨을 때는 이미 아이가 태어났을 때입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고 회개치 않은 상태에 머무른 기간이 9개월 정도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다윗의 마음은 평안했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남몰래 애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죄가 탄로날 것을 짐작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눈치만 살피느니라고 죽을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아이가 태어나고 보니 그들의 비행은 세상에 다 알려지고 화제 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죄를 범했으니 자연 연기가 나왔으므로 사람들의 입방아가 대단했을 것입니다. 요즈음은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나는 세상이니 사람들 말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고백 받도록 나단 선지자를 보내었습니다. 사실 자신의 죄를 숨기고 가슴 조이며 살고 있을 때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의 역사는 유예되었고 사실상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죄의 얽매임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주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때는 다윗의 신앙생활의 암흑기라고 볼 수 있으니, 시편도 쓰지 않았으며 그의 수금은 곡조가 맞지 않았고 그의 영혼은 뿌리에만 생명이 남아있는 겨울나무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단이 찾아온 뒤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하여 죄를 지적하시자 엎드려 회개하는 그의 모습은 죄인들에게 회개하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본보기와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회개하는 모습을 봅니다.
시편 51편을 살펴보는 것은 다윗이 얼마나 뼈아프게 회개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여디디야(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아이)’라는 자식을 주셨을까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시 51:3-17 / 이 몸이 지은 허물 내 어찌 모를까요? 내가 지은 죄 늘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4) 내가 정녕 주님 앞에서 죄를 저지르며 주께서 번연히 보고 계시는 줄 알면서도 못된 짓을 저질렀으니 주께서 이것의 잘잘못을 가리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에게 벌 내리시는 것은 백 번 옳으신 일입니다. 5) 이 몸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업고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죄를 지고 있었습니다. 6) 주님은 마음이 진실한 것을 기뻐하시오니 슬기로 이것의 마음을 가득 채우소서. 7) 이것이 지은 죄 우슬초로 씻어 주소서. 그리하면 이것이 깨끗해지리이다. 이 몸을 닦아 주소서. 그리하면 눈보다도 더 희어지리이다. 8) 이 몸이 기뻐 어쩔 줄 몰라 펄펄 뛸 그 소리 듣게 하소서. 비록 주께서 이 몸을 꺾으시고 뼈 부러뜨리셨어도 또 다시 이 몸이 기뻐하게 하소서. 9) 설령 죄 지었어도 주께서 못본체 마소서. 하고 많은 이 허물 씻어 주소서. 10) 하나님, 나에게 깨끗한 마음 지니게 하소서. 나의 속마음이 심지 굳게 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11) 주님 계신 곳에서 이 몸 밀어내지 마소서. 주님의 거룩한 숨결, 이 몸에게서 거두어 가지 마소서. 12) 주께서 구원하시어 이 몸 또 다시 기뻐하게 하소서. 기꺼이 주님의 말씀 따르게 해주소서. 13) 그러면 못된 짓만 일삼는 것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리니 허물 많은 저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 피 흘리는 일밖에 몰랐사오니 이것을 구해 주소서. 건져 주소서. 주께서 바르시다는 것 입으로 외치리이다. 15) 주님!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으로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16) 주께서 제사를 즐기지 않는 줄 아오나 나는 바치리이다. 내가 드리는 번제를 마다하지 마소서. 17)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제물은 찢어진 이 마음, 갈기갈기 찢어지고 터진 이 마음뿐이오니 업신여기지 마소서.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긴 동안 다윗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죄가 죄인 줄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으니 사실상 영혼이 사형선고를 받은 암병환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예수 믿지 않고 사는 사람이 가장 불쌍함을 아시고 그들에게 열심히 하나님을 알립시다.
하나님은 다윗의 고통을 다 아시고 적절할 때 그렇게 나단 선지자들 보내셨습니다. 가장 아플 때 수술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죄를 지적해 주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적 의사인 것을 믿으시고 그럴 때 거부하지 말고 수술을 받으시면 평생 건강한 영적생활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영적 의사를 문전박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또 하나님이 보내실 때 망설여서도 안 됩니다. 나단은 ‘다윗이 왕이므로 나는 감히 그를 책망하지 못한다’고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2) 죄를 고백한 다윗(13-15절)
나단 선지자를 통해 이러한 하나님의 지엄한 뜻을 전달받자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13절) 하나님은 다윗의 이 고백을 듣고 신속히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13절하).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 자비를 얻을 수 있느니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시 32:5절 참조). 이 일로 다윗은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을 한 샘입니다. 여호와의 원수에게 크게 훼방거리를 얻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다윗의 선례를 들어 하나님을 비난하며 완악한 죄를 짓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엄히 징계하여 죄를 미워하심을 확실히 보여주십니다. 결국 태어난 아이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정당성을 입증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비의 죄를 자손에게 갚겠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허물로 남을 욕먹게 해서는 안 됩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명예에 욕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2. 용서는 하시되 징계하시는 하나님
사무엘하 12장을 보면 때로는 우리를 당혹케 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자신의 범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했고,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너무나 분명하게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삼하 12:13-14 / [죄를 사면해 주시는 여호와] 그러자 다윗이 나단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여호와 앞에 죄인입니다.” 나단이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셨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용서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님이 죽지 않을 것입니다. 14) 그러나 임금님께서 간음과 살인죄로 여호와를 모욕하였기 때문에, 이번에 밧세바가 낳은 임금님의 아들은 틀림없이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로는 용서하시고 벌은 벌대로 주시는 하나님이신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죄에 대해서 언제나 형벌을 면치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 하나님을 선하다 말할 수 있으며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섬길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기보다는 무서운 하나님이기도 하며, 때론 선하심과 무서움이 교차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로 말미암아 혼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의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거기에는 신앙의 성장도 성숙도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왜 인생의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 좋던 신앙이 무너지게 되는가? 바로 이런 문제,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혼란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지식과 그 지식으로 인한 확신을 더하시기를 구합니다.
1.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신다.
히 12:5-8 / 하나님께서 마치 자녀들에게 말씀하시듯이 여러분에게 격려의 말씀을 주신 것을 여러분은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들아, 주께서 네게 징계를 내리실 때 너는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주께서 네 잘못을 책망하실 때 너는 좌절해서는 안 된다. 6) 주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것은 너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너를 채찍으로 때리시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참 자녀이기 때문이다.” 7) 하나님께서 내리는 시련을 참아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당연히 자녀에게 하실 일을 하고 계십니다. 아버지로서 자기 자식을 단련시키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8) 만일 여러분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자녀가 부모에게 꾸지람을 듣듯 하나님의 질책을 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도 가족도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먼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① 우리야의 가정을 칼로써 망가뜨렸으니 공의의 하나님께서도 칼이 다윗의 집을 영영히 떠나지 않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② 다윗의 집에 재난이 일으키시고 다윗의 처들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백주에 그와 동침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듣기만 해도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합니까? 이것을 굳이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구절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성경 전체가 주는 일관성 있는 메시지의 큰 틀을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일종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변덕스러움을 보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징계는 일차적으로 치료책, 고치는 약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징계는 우리의 잘못과 죄와 악을 고치는 역할, 교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대원리입니다.
2.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 죄 용서는 죄의 결과들로부터의 구원을 보증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품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그냥 ‘용서한다’는 말 한 마디로 싸구려 용서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벌하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선포하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신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먼저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게 하심으로써 영적으로 죽음을 경험하게 하셨고, 후에는 육신의 죽음으로 그 결과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징계의 차원을 조금 더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의 삯이 사망임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시고 그 벌을 다 주고 나서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차원을 오해하거나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 ‘죄를 용서해 주셨다면 모든 영적, 육체적 죄의 결과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지 않는가?’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가르침은 죄 용서가 죄의 결과들로부터의 구원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는 분명히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은 은혜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인정했을 때, 그리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자복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구한대로, 구원의 즐거움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죽지 않은 것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입니다. 왜냐하면 다윗 자신이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미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가 감당해야 할 죄의 결과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죄의 결과라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한 값, 형벌과는 다릅니다. 그 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 용서와 더불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죄의 결과는 형벌은 아니지만, 죄의 결과로서 우리가 짊어짐으로써 우리로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하는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인생을 사는 동안에 이루어가는 성결은 결코 영광 그 자체는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바라보는 하늘의 소망도 여전히 영생 자체와는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용서받았지만, 죄로 말미암아 짊어져야 하는 땀 흘리는 삶은 감당해야 했습니다.
▶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은혜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분하기 싫어하는 부분입니다. 은혜는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다 면제해준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은 그런 은혜는 결코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순진한 낙관주의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현실적인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도가 누구인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성도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성도가 어떻게 거룩해지는지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성도는 성공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성도의 거룩한 삶을 원하십니다. 다윗은 더 이상 이런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식으로 살아갈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의 범죄의 결과로서 가장 합당한 것을 징계로 주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바라고 은혜를 사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 57:15 / 영원히 보좌에 앉아서 통치하시는 지극히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사는 곳은 지극히 높고 어느 누구도 접근할 수 없도록 거룩한 곳이지만 기죽은 사람들에게 살길을 열어 주고 마음이 상해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새 용기를 넣어 주려고 그들과 내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회개를 한 성도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지 않으면서 본문을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3. 하나님은 당신의 영예를 반드시 드러내신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징계를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데려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 아이, 자신의 행동과 무관하게 일찍 하나님의 데려가심을 입은 이 아이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생명을 데려가시겠다고 하시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회개도 있었고 죄 용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아이를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 사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 그들의 나라가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성전은 무너져 훼파되고 백성들은 다 제국의 여러 곳으로 사로잡혀갔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은 뭐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은 이런 방식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자기 백성을 심판하여 망하게 하심으로써 공의의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움직이지 못하는 목석우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범죄하는 자기 백성을 때리시고 고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열심으로 다루어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반드시 이루고야 마십니다.
본문도 바로 똑 같은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밧세바의 사이에 죄로 말미암아 태어난 아들을 치심으로써 당신께서는 죄를 다루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윗 자신과 그의 주변에 그리고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 회개하기만 하면 되니까’라고 겁 없이 말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다윗이 범죄하고 이런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들을 대할 때에 어떻게 그런 어리석고 무지한 말 따위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배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나, 우리로 죄에 머물러 살지 않도록 죄의 결과와 관련한 징계로 우리를 다루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범죄하지 마십시오. 죄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죄는 그 결과를 남기는 법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예가 세상 사람들의 목전에서 무시를 당하도록 허용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4. 다윗의 범죄를 성경에 기록하신 이유 :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드러내심
다윗의 범죄를 성경에 기록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다윗 같은 사람이 범죄했습니다. 그것도 추악하고 더러운 성격의 죄였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척하고 살지라도 누구나 다 이렇게 넘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은 이로 말미암아 조금도 손상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죄로 다루심으로써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를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이의 죽음이었습니다.
5.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히 12:5-11).
히브리서 12:9-12 / 비록 우리를 낳아 준 아버지가 우리를 꾸짖고 야단치는 일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를 따르고 존경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참되게 사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시련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10)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는 우리의 앞날을 위해 그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우리를 훈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나누어 주려고 언제나 바르게 견책하시는 것입니다. 11) 무슨 벌이든 벌 받을 때는 즐겁기보다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그것이 유익한 결과를 낳아 믿음이나 성격이 다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느슨해진 주먹을 힘껏 쥐고 떨리는 무릎을 굳게 일으켜 세우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이런 하나님,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심으로써 당신의 자녀로 손색없게 길러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품을 생각할 때, 징계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게 됩니다.
1) 주의 행하신 일은 선하십니다(20)
다윗은 아이를 데려가시겠다는 말씀이 떨어지자 엎드렸습니다. 그는 금식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밤새도록 간절히 아이를 살려주시기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7일 만에 아이를 데려가셨습니다. 아이가 죽자 신하들은 그 소식을 금식하며 기도하는 다윗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아이가 살아있을 때에도 힘들어했는데, 죽었다는 것을 알면 왕이 견딜 수 없어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곁의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 아이가 죽은 것을 눈치를 챈 다윗은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뜻밖에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베풀게 하는 것입니다. 신하들에게 이 모습은 의아하게 비춰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혹시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아이를 살려주실까 하여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아이를 데려가셨으니 이제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 놀라운 대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대목에서 넘어지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다윗은 아이를 살려주시기를 원해서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램과 달리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때 어떻게 하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기도하는대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 때가 종종, 아니 많이 있습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달랐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때가 중요합니다. 이때 다윗이 보여준 행동은 ‘주의 뜻은 선하십니다. 주께서 하신 일은 옳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범죄했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비록 내 뜻과 달라도, 비록 나를 아프게 해도, 비록 마음이 상하는 것이더라도 선하시고 옳은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수준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이런 신앙 수준이며, 이토록 신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그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런 신뢰를 받으시기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신앙의 자리로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2) 징계를 통해 임하는 은혜(24-25)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밧세바를 통하여 한 아이를 주셨는데, 그가 솔로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그에게 ‘여디디야(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란 이름까지 주셨습니다.
여기서도 할 말이 있습니다. 이전의 그 아이를 안 데려가시면 되지, 왜 데려가시고 나서 새 아이를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만족스런 대답을 드릴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징계는 비록 당시에는 아프고 힘들지라도 그 징계를 잘 받으면 ‘징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래의 은혜를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는 징계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모든 징계는 자녀들이 징계를 잘 받을 때, 피하지 않을 때, 반드시 장래의 은혜를 낳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께서 베푸실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선포했습니다.
시 30:4-5 / 주님의 성도들아, 여호와께 노래 불러라.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 거룩하신 이께서 하신 일마다마다 기억하여라. 고마워라, 주께 감사하여라. 5) 화를 내시는 것은 잠시뿐 평생토록 어여삐 감싸주신다. 저녁에 슬퍼 눈물 흘릴지라도 아침이 되면 눈물을 닦아주신다. 기뻐 소리치게 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백의 의미를 이제는 아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이 고백을 하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 깊은 의미의 고백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어떤 자리에 처해 있든지 우리로 이런 고백을 가지고 선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 다윗은 병든 아이를 위해 금식을 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이러한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이를 살려주시지 않겠는가?’라는 기대를 갖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이 몰랐던 것이 무엇입니까? 죄는 인간의 어떠한 정성과 간절함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은 다윗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칙으로만 해결되어짐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사하셨지만 아이를 죽이심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깊이 보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보게 될 때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인간의 정성과 간절함을 동원해서 불쌍히 여김을 받아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악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윗처럼 자기 정성과 간절함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가지고 상대하시는데, 우리는 자기 정성을 동원해서 막아보겠다고 나서는 것이 공의의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다윗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삼하 12:13). 그렇지만 다윗을 대신하여 아이가 죽었습니다. 다윗은 아이의 죽음을 보면서 죄의 삯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자기의 아내 밧세바를 찾아가 잠자리를 같이하고 지나간 슬픔을 위로해 주었다. 밧세바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다윗은 새 아이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도 이 아이를 사랑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 새 아들을 주심 / 이것은 죄인이었던 다윗이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 51:12-13 / 주께서 구원하시어 이 몸 또 다시 기뻐하게 하소서. 기꺼이 주님의 말씀 따르게 해주소서. 그러면 못된 짓만 일삼는 것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리니 허물 많은 저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위로하고 / '후회하다, 애석해 하다, 위로하다'라는 동사 <!j'n: ; 나함>은 슬픔, 동정 위로 등 인간의 감정을 나타낸 것입니다. 다윗이 아이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밧세바를 위로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죄를 후회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다윗의 위로는 단순히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의 동침을 함으로써 실질적인 행동까지 한 것입니다.
동침하였더니<HM;[i bK'v]YIw" ; 와이쉬카브 임마> / 성관계를 나타내는 행동에 언급되는데, 특히 성 관계를 나타낼 때는 주로 불법적인 관계를 나타내지만 본문에서는 ‘그 처 밧세바’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이 이제는 밧세바를 다윗의 처로 인정했음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이라<hmolv] ; 쉘로모> / '완성하다, 완전하다, 평화롭다'라는 <molv ; 솰람>에서 유래된 인명으로 '평화의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윗이 아이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한 것은 작게는 다윗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된 상태를 의미하며, 크게는 지금까지 피 흘리는 전쟁 시대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평화의 시대가 임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하사</bhea} ; 아헤보> / '사랑하다, 좋아하다'라는 <bh'a' ; 아하브>는 음식에 대한 선호뿐 아니라 대인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솔로몬이 잉태되었을 뿐 아니라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더 깊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 라는 의미의 '여디디야' 이름을 받게 되었다.
▶ 만약 세상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솔로몬’이라는 이 아이는 다윗이 승승장구하던 그 때에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세력이 확장되어가던 그 시절이야 말로 누가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때 여호와께서 다윗을 사랑하시는 증거로 솔로몬을 태어나게 하신다면 세상이 생각하는 사랑의 기준에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작정 좋은 일만 있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기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솔로몬을 잘 나가던 다윗이 범죄를 하고 아이가 죽은 뒤에 주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심을 인하여 솔로몬을 주신 것으로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이 생각하는 상식,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지요.
다윗에게 솔로몬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증표입니다. 여디디야란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란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솔로몬을 다윗에게 주셨다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솔로몬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평강’이라는 뜻의 솔로몬을 주시고 여호와가 사랑하신다는 ‘여디디야’란 이름을 주시는 이 얘기들은 분명 어둡고 무거운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하는 밝고 희망이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은 다윗의 죄를 바탕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인간의 죄가 있기에 은혜와 사랑이 증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하지 않습니까?
▶ 그래서 이러한 흔적을 기반으로 하여 마태복음 1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 1:6 / …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라고 표현해야 할 것을 굳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라는 표현을 한 것은 이러한 깊은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을 사랑하사 징계도 하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용서를 보여주십니다.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보여주십니다. 다윗에게는 아이의 죽음과 솔로몬의 탄생으로 증거 되었고,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증거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예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삶의 힘이고 원동력이고 희망이고 비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일 것 같습니다. 다만 멸망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시기에 예수님의 의로우심 안에서 의인으로 불리며 영원한 생명이라는 기적을 안고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제 회개하는 우리들에게도 ‘여디디야’라는 은혜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