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23-02)
하나님께서 발락에게 저주를 못하게 하심
민수기 23장 13-26절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서 현실이 왜곡돼 보입니다. 사람이 가득 찬 사람은 부끄러움과 아픔도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은 좋은 환경에도 미움과 두려움에 마음으로 바라보면 마음속에 불평하며 염려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의 삶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백성은 분명히 복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는 모압 왕 발락의 노력은 그치지 않습니다. 발람이 축복을 선언했는데도 저주 신탁을 이끌어 내기 위해 장소를 옮겨서 두 번째 시도를 합니다. 발람에게 처음 보여준 곳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이스라엘 진영만을 볼 수 있는 비스가 산 꼭대기로 데려가지만, 하나님의 축복 의지는 바람을 통해 더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전달됩니다.
발락의 두 번째 신탁 시도(13-17)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약속을 어기고, 거짓말도 하고, 후회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십니다. 변하지 않으십니다. 후회하지도 않으십니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상황이 변해도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13발락이 말하되 나와 함께 그들을 달리 볼 곳으로 가자 거기서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끝만 보리니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하고 14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 15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나뵐 동안에 여기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하니라 16여호와께서 발람에게 임하사 그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로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17발람이 가서 본즉 발락이 번제물 곁에 섰고 모압 고관들이 함께 있더라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13-17)
앞에서는 바알의 산당 그 높은 곳에 올라가서 이스라엘 진영을 바라보며 저주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발락의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싶은 발락의 시도는 계속됩니다. 이야기는 세 번의 시도를 유사한 패턴으로 전개하면서 그 보상의 내용을 발전시켜가는 전략을 씁니다. 발락은 발람에게 여전히 많은 유혹의 재물과 인위적 조작으로 제안하면서, 하나님의 저주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미신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발락은 처음에는 ‘진영의 일부’를 보여주고 두 번째 시도에서는 발람이 ‘진영의 끝’만 볼 수 있게 합니다. 본문도 이를 강조합니다. 발락이 선택한 장소는 소빔 들인데, 그곳으로 간 이유를 “거기서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끝만 보리니”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어순도 도치되는데, ‘오직 끝만’ 볼 수 있는 곳을 찾은 것입니다. 이 해석이 어떤 식으로든 이스라엘의 세력을 약해 보이게 함으로써 저주의 선포를 이끌어 내려한 발락의 심리를 고려해 볼 때 옳아 보입니다. 발락은 여전히 발람에게 이스라엘의 실체를 감추려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더 적게 보여주어서 저주를 선포하는 데 마음의 부담이 없도록 해주려는 것입니다. 발락과 함께 간곳은 비스가 산 근처에 있는 소빔 들입니다. 후일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모세가 비스가 지역에 있는 느보 산꼭대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죽음에 이릅니다(신 34장).
발람은 소빔 들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신탁을 받기 위해 다시 유사한 절차를 따릅니다. 그곳에서 일곱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각각 드립니다. 발락은 번제물 곁에 고관들과 함께 서 있고, 발람은 신탁을 받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첫 번째 시도에서와 같이,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발람이 발락에게 말할 때까지 감춰져 있습니다. 발람이 신탁의 말씀을 가지고 발락에게 왔을 때, 발락은 모압의 고관들과 함께 여전히 번제물 곁에 서 있었습니다. 발락은 급한 마음으로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라고 묻습니다. 모압의 왕이니 당연히 그모스에게 신탁을 구해야 했지만,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신인 여호와의 권위를 얻는 것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부르는 ‘여호와’라는 신명이 참 아이러니하게 들립니다. 여호와를 따르지도 않는 이가 외치는 ‘여호와’의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발람의 두 번째 예언(18-24)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죄 사함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언제나 은혜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18발람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내게 자세히 들으라 19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20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21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22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의 힘이 들소와 같도다 23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 24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하매(18-24)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알려주신 신탁의 내용이 소개됩니다. 적극적으로 저주의 메시지를 기대했던 발락의 기대와 달리 발람이 선포한 내용은 앞서 선포했던 내용과 다름없습니다. 총 열한 개의 대구로 이루어진 시의 형태로 전달됩니다.
선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에 실수하거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발락은 첫 번째 예언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는 바꾸어 보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처음 뜻한 바를 바꾸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발락이 얼마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며 후회하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으로는 발락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게 할 수 없다는 선포입니다. 발람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받았기에, 발람 역시 축복의 말씀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십니다. 이 말씀은 상당한 해석상의 어려움을 가져왔습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반역해 왔으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되었음을 지속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허물과 반역은 무엇입니까? 실제 육체적으로 행한 죄와 영적이거나 도덕적인 죄를 각각 의미합니까? 두 가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현재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자라난 새로운 세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록 11-19장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심판의 역사가 계속되지만, 이들은 민수기 20장에서 모두 죽고 새로운 세대로 전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적어도 현재 이스라엘 백성은 육체적이거나 도덕적 혹은 영적인 의미에서의 죄악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둘째, 관점의 차이일 수 있는데, 20장 이전에 나타나는 불순종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영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내부자의 시선이고, 본문은 이방인들이 밖에서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 둘을 고려할 때,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허물과 반역을 보지 아니하신다는 말은 외부인 발람의 시선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해야 할 만큼의 죄악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화할 뿐이지, 이스라엘 백성이 죄가 없는 존재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반역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시며 그들과 함께하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21). 백성들은 그들 중에 왕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기쁨 가운데 환호하고 왕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크신 능력으로 애굽에서 인도해 올리셨습니다. 본문 22절에서 ‘인도해 내셨다’는 단어는 분사형입니다. 이 말의 뉘앙스는 과거에 이스라엘을 인도해내셨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도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이 함께하기에 그 누구도 그들을 해할 점술이나 복술을 시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발람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복술자였는데도 그 발람의 복술이나 점으로도 들소의 뿔과 같은 하나님의 능력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정확하게 모압 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에게 요구하고 있던 것이 무위에 그칠 것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신실하게 이끄시며 모든 대적으로부터 지키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라고 감탄하며 외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셨을 때, 열방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감탄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발람의 예언은 마지막으로 단순히 광야에서 진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치 수사자와 암사자와 같이 움킨 것을 먹고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결코 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결국엔 그들이 목적하는 가나안 땅까지도 차지하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24).
발락의 두 번째 불평(25-26)
하나님께서 성도를 향해 가지신 계획은 오직 북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세상의 어떤 악한 세력도 우리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니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25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축복하지도 말라 26발람이 발락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25-26)
발람의 예언을 들은 발락은 다시 한 번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이나 저주를 요청했으나 이스라엘을 향한 발람의 축복은 오히려 더 확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축복에서 발람이 이스라엘의 독특성과 번성을 강조했다면, 두 번째에서는 이스라엘의 승리와 가나안 땅 정복까지 예언하고 있습니다. 발락은 원치 않는 예언을 듣고 발람에게 축복이든 저주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서술하고 있지만, 당시 상황을 짐작하면 발락이 큰 소리로 ‘입 닥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상당히 기분 나쁜 모습입니다. 이에 발람도 지지 않고 발락에게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만을 전할 뿐이라고 항변합니다. 여전히 모호하게 남아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주신 말씀만을 선포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발람의 진심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발람은 여전히 발락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발람 역시 탐욕에서 헤어나지 못한 인물임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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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복 주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복을 반드시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시기에 변하지도 않으시고, 거짓말을 하지도 않으십니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은혜로 바라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믿음에 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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