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삼장면
#덕산사
#석남사
#비로자나불
#관음암
#석남사
석남암사지의 비로자나불은 8세기(766년)에 조성되었으며 삼층석탑은 9세기의 양식이라고한다.
비로자나불은 광명의 부처로 동향을 보는게 보편적인데 통일신라의 초기에는 방향을 더 중시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지도상 관음암불상터는 많은 의문점이 생긴다.
석남사 가운데 있는 큰 바위가 있고 그 바위아래 용도를 알수없는 110cm의 장대석이 있는데 비로자나불의 좌대 바닥이 103cm인 것으로 보아 불상이 있었던 관음암(觀音巖)이 여기가 아닐까란 추정을 해본다.
그리고 예전에(1980년대말에) 석남사에 있던 불상좌대가 헬기로 덕산사로 옮겼다는 이야기길 들었다.
일반적으로 절의 제일 윗쪽에 탑이 있는건 비보의 의미로 설치하는데, 9세기는 그런 용도로 설치한 사례가 없다고 한다.계단식으로 조성된 터 제일 윗쪽에 탑을 왜 설치했는지 의문이다.
2,3층 몸돌을 제외한 나머지 부재들을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이번 답사에 노반과 복발을 확인했으며 상부기단갑석(상대갑석) 아래에 절수구도 새로이 확인되었다.
●석남사지
●관음암 불상터
● 덕산사
1478년 추강 남효온이 덕산사에서 머문다(중략)
1564년 여름, 남명 조식을 비롯한 각재 하항, 덕계 오건 등 당대의 지식인들의 회합이 덕산사에서 이루어졌고, 진주 유생 성여신(1546~1632)도 1567년 지리산 유람에 나서며 덕산사에 들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https://naver.me/5teST5Iu
비로자나불이 어떻게 장당골쪽에 설치 되었는지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만 나름 소설을 쓰보면~
가야의 마지막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의 영향으로 화랑들이 영랑대,청이당 일대에서 호연지기를 키우며 훈련을 했다. 두온애랑도 화랑의 일원으로 이유는 알수없으나 사망하게 되어 석남마을과 연결된 깊은 산속(석남암수)에 있는 관음암(觀音巖) 비로자나불(766년)에 유해를 모시고 명복을 빌었다.
이후 삼장사에서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부속암자인 석남사를 짓고 삼층석탑(9세기 초)을 세웠다.(석남사 절이 유지될수 있을려면 큰절이 필요함)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관음바위가 어딜 지칭하는지 캘수록 의문이 생긴다. 때론 뚜렸했던 것도 아지랭이가 피어 오르면 흐릿하게 보일때도 있는 법이다.
길이 아닐때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이번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했더니 새로운 길이 보인다.
토론은 즐겁고 퍼즐을 맞추듯 즐기면 얻는게 많다.
https://youtu.be/pXZtNGsDhts?si=0EtbxabNqBDx2glz
첫댓글 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 8월 18일 (음력 7월 1일))은 신라의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며 태대각간(太大角干)이었고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하고 당나라도 격퇴시켜 삼국 통일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藪가 꼭 寺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寺는 원래 관청입니다. 초기의 절은 관청을 빌어 절로 삼아습니다. 그래서 寺는 관청의 의미로 쓰일 때는 '시'로 읽고 절의 의미로 읽을 때는 '사'로 읽습니다. 즉 홍로시를 백마사로 바꾼 것이 중국에서 절의 시작입니다"
-선과선생님 생각-
그런 의미에서 중대석은
제짝이 아닌 것 같다는 의심
향로.사자.연.등 다양한 문양을 새기거든요
하대석도
개인적으로는 의심이 듭니다
선과선생님 생각
日+寺=時 절이나 관청에서 시간(時)을 알려준 것 같습니다.寺가 내시시의 의미도 있습니다.
도솔산인 선생님 생각
장당골과 석남사터 구경 잘하였네
관음암 불상터에 약사여래불이~~~, 예전에 갔을 때는 없었는데 ~~~
설치한 불매골님을 만났습니다.
불상은 석재상에서 무상으로 찬조를 해주셨다고 하네요.
원래 관음암에 비로자나불이 있었으니 약사여래불을 놓아도 흉은 안되겠습니다~^^
비로자나불 1990.03.02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16.01.07. 국보 233-1호로 승격 헬기 작업은 80년대 말에 한 것 같습니다.
가람배치로 봤을땐 제일 높은곳이 관음암, 석남사는 비보탑으로 설명하면 이해할수 있을듯 한데 잡힐듯 잡힐듯 아득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