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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겨자씨만 한 믿음
20241103 / 마 17:19-20
마 17:19-20 /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물었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까?’ 2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만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을 향하여 ‘옮겨지라’고 하여도 옮겨질 것이다. 그런 믿음만 있다면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어느날,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간청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마 17:15-16). 그리고 아이를 데려왔을 때,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그 아이에게서 나갔다(18).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께 조용히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19)라고.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20). 그리고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20b)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무엇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일까? 겨자씨 한 알은 비록 작을지라도 살아 있는 씨앗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땅에 심어질 때 큰 나무로 자라나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시면서 겨자씨의 생명력을 말씀하셨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라고.
또한 예수님께서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20)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 비유의 의미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산을 옮긴다’라는 뜻은 문제를 극복하거나 가장 힘든 장애물을 제거함을 말하고자 할 때 사용된 표현이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빠져 있지만, 마가는 ‘왜 우리는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였다. 이것이 어떻게 살아있는 믿음 곧 ‘한 알의 겨자씨의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열쇠가 되는 말씀이다.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적은 믿음’과 ‘한 알의 겨자씨 믿음’의 차이를 본다.
‘적은 믿음’은 하나님께서 곧바로 응답하지 않으면 의심하지만, 겨자씨의 믿음은 기도로 인내하며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다. 적은 믿음은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포기하지만, 겨자씨의 믿음은 인생의 먹구름과 고난의 안개를 뚫고 하나님을 바라본다.
우리는 잘 안다. 크리스천은 어떠한 행위에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 주신다는 것을 말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구원받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귀한 열매 맺고 승리하게 하는 중심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과연 믿음은 무엇인지?’라고 하는 자문을 할 때가 종종 있다. ‘과연 나의 믿음은 문제없는 것인지? 나의 믿음은 주께서 칭찬하는 믿음인지?’ 하는 것이 때로는 궁금하고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만일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으면!?’이라고 하시는 믿음은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이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반석 위에 견고히 서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한다.
● 마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그의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더불어 산에 오르셔서 그 얼굴과 옷이 해같이 희게 변하게 된 사건에서 출발한다. 소위 ‘변화산 사건’이다.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높은 산에 오르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하셨다. 이 장면을 본 베드로는 얼마나 황홀했던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 이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고 구름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5)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체험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같이 빛나는 형상으로 변하시고,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네들이 모시는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라고 선언하시는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왔을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이렇게 간청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5-16). 예수님이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른 사이에 남아 있는 9명의 제자에게 이 아이의 아버지는 그 자기 아들을 고쳐줄 것을 구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고쳐주지 못했다.
이 사실을 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오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17) 그리고 그를 데려왔을 때,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18)고 마태는 기록하였다.
1. 왜 이 아홉 명의 제자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가?
이 소년의 경우는 결코 간단한 케이스가 아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다른 복음서에서 보면, 마가는 ‘벙어리 귀신에 들린 내 아들’(막 9:17)이라고 아이의 상태를 아버지가 말하면서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막 9:18)고 예수님께 아이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말씀드렸다. 그리고 마태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실 때 나갔다고만 묘사되어 있지만, 누가는 ‘귀신이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눅 9:42)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그 상황을 설명하였는데, 이 아이를 사로잡았던 귀신이 매우 악하고 강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이 악한 귀신은 보통의 영적 능력을 가지고는 결코 쉽게 쫓아낼 수 없는 강력한 귀신이란 사실이다. 제자들이 상대하기에는 매우 힘든 귀신임은 분명하다.
초등학교 학생이 치르는 시험이 있는가하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이 치르는 시험이 있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은 고등학교 수준의 시험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고 결코 이 시험이 쉬운 것은 아니다.
2. 12제자에게는 이미 어느 정도 구별된 영적 훈련과 권세가 주어져 있었다.
마태는 본문보다 앞선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1, 8)라고 기록한 바 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 12제자를 사도라고까지 표현하면서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만큼 성장해 있는 제자들이었다. 마가도 제자들이 예수님이 주신 권능을 통하여 능력 행했음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막 6:12-13)고.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복음의 증거자들로 세우셔서 마귀의 능력을 제어하고 마귀의 머리를 밟을 권세와 능력을 주셨으며, 그들도 귀신들이 자신들에게 항복한 것을 직접 경험하고 돌아와서 보고까지 했다. 그런데, 왜 이날 9명의 제자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
여기에 9명의 제자의 문제점이 나타난다. 그들의 문제점은 바로 ‘믿음’에 있었다. 사실 그동안 그들은 늘 주님과 동고동락했기에, 문제가 생기면 예수님께서 곧바로 그것을 해결해 주셨다. 그런데, 이번 상황은 달랐다. 예수님께서 자기네 곁에 계시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갑작스럽게 귀신에 들린 소년의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와서 귀신을 쫓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앞서도 살펴봤듯이 그 아들을 사로잡은 귀신은 매우 강력하고 사나운 악령임을 알 수 있다. 그 아버지의 설명대로 ‘귀신이 아들을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막 9:22)라고 말이다. 처음에는 제자들도 그렇게 시도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라고. 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은 반복했을 것이다.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자 제자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귀신은 쫓겨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에게는 이 강력한 악한 귀신을 제어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사단 앞에서 주눅 들고, 창피를 톡톡히 당했다. 제자들은 기가 죽고 믿음이 흔들렸다. 그런데 선생님이신 예수님은 언제나 그러하듯 놀라운 능력으로 그 악한 귀신을 쫓아내셨다.
얼마 후 제자들과 예수님만 남았다. 제자들은 이렇게 예수님께 조용히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19).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20a)고. 여기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말 그대로 ‘제자 훈련’을 하고 계시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없는 사이에 제자들 스스로 하나의 과제를 해결하도록 기회를 주셨으나, 그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이에 제자들은 실망했고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러나, 모든 배움이라는 것이 그러하듯 중요한 것은 한 번의 과제를 잘 수행했느냐? 아니냐? 보다도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를 가르쳐주셨다. 그것은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믿음이 적다고 지적하신 것이다. 물론 전혀 할 수 없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말씀을 주셨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20b) 예수님께서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이 너희에게 있느냐?!’는 도전은 충격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의 ‘겨자씨 한 일’의 비유는 그동안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대표적으로 오해된 말씀의 하나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많은 크리스천은 이것을 ‘아주 작은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은 그런 뜻이 아니다.
흔히 이해하듯 마치 ‘아주 작은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의미는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뜻이다. 겨자씨나 밀알처럼 그 믿음이 아무리 작다고 할지라도 살아 있다면 그 믿음은 자라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겨자씨 한 알은 눈에도 금방 띄지 않을 만큼 작은 알갱이지만, 그 씨앗이 땅에 심기어져 싹이 나고 자라날 때 많은 새가 날아와 보금자리를 삼고, 여러 짐승의 쉼터가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 믿음이 죽거나 식지 않고 계속 성장해 나간다면 말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겨자씨의 생명력을 이렇게 설명하셨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처음엔 비록 겨자씨처럼 작다 할지라도, 살아있는 믿음은 반드시 장성한 믿음으로 크게 자란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문자 그대로 ‘산을 들어 옮긴다’라는 뜻이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산을 옮긴다는 의미는 ‘문제를 극복하거나 어려움을 제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자 할 때 주로 사용된 표현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만약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살아 있는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고 놀라운 변화를 불러오게 될 것이니 화이팅하라’는 권면이었다.
■ 이 말씀을 돕기 위해 열왕기상 18:36-39과 41-46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한 모습을 보자.
왕상 18:36-40 / 저녁 제물을 바치는 시간이 되자 엘리야가 제단 앞으로 나아가 주께 호소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께서 시키시는 대로 제가 오늘 이 모든 일을 수행한 것인 줄 이제 모든 사람이 알게 하소서. 37) 주님, 나의 호소를 들으시고 응답하소서. 주께서 하나님이심을 이 백성이 알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올바로 길을 걷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그들이 오늘 체험하게 하소서.’ 38) 바로 이때에 여호와께서 불을 내려보내셨다. 그 불길은 제물과 장작을 모조리 태우고, 제단의 돌과 각 주위의 흙과 도랑의 물마저 모두 태웠다. 39)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광경을 보고 모두 땅에 엎드려 고백하였다. ‘참 하나님은 여호와이십니다. 참 하나님은 여호와이십니다.’ 40) 이때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조리 붙잡아라. 한 사람도 놓치지 말아라.’ 엘리야는 백성들이 사를 잡아 온 예언자들을 산밑의 기손 시냇가로 끌고 가 거기서 죽이게 하였다. 거룩한 갈멜산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시냇가로 끌어다가 짐승처럼 잡아 죽이고, 시냇물로 그 피를 씻어 내게 한 것이다.
위의 말씀을 볼 때 엘리야는 기도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물과 제단까지 모조리 태웠다. 그런데 18:41-46에서는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하여 엘리야는 7번이나 기도했고, 그것도 바다 끝에서 손바닥만 한 구름 한 조각이 떠올랐을 뿐이다. 물론 뒤이어서는 세찬 소나기가 내렸지만 ….
41-46절을 보면 3년 6개월동안 비가 오지않던 것을 비가 내리게 하기 위해서 7번이나 간절히 믿음의 기도를 드렸다. 나아만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왜 7번까지 기도를 하게 하셨는지에 대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여하튼 응답받기까지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오늘날 기도의 응답을 받아야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교훈이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마가복음에서 ‘왜 우리는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눅 10:19)하신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넉넉히 얻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계속해서 영적으로 자랄 뿐 아니라 제자로서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사도로서의 길을 가야 하는 저들처럼 마태복음에는 빠져 있지만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엘리야와 같은 기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모두 마음에 심겨진 말씀이 한 알의 겨자씨처럼 자라 큰 나무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를 져야하는 마음가짐도 매우 필요하다.
3. 하나님께 여쭈어보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만일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와서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만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을 향하여 ‘옮겨지라’라고 하여도 옮겨질 것이다. 그런 믿음만 있다면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 재미있는 예화가 있다. 어떤 사람이 나이아가라폭포에서 목이 말라 물을 마셨다고 한다. 물을 마시고 일어나 보니 바로 그 옆에 Poison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독물을 마셨다는 두려움이 들자,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즉시 병원에 달려갔다. 의사가 진찰해 보니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자기는 지금 독물을 마셨는데 금방 창자가 썩어 들어갈 텐데 빨리 수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의사가 웃으면서 그것은 독극물이 아니라 불어인 데 ‘낚시 금지’라는 뜻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곳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낚시질을 많이 해서 프랑스 사람들 보라고 써 붙여 놓은 표지판이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인가? 설명이 필요하다.
마 17:17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오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이 완고하고 믿음이 없는 백성들아,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냐? 그 아이를 내게로 데려오너라')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인하여 몹시 마음이 아프셨다. 여기 믿음이 없는 세대란 제자들, 바리새인들, 병자의 아버지, 무리를 다 포함한다. 예수님이 거의 3년 동안 사역하셨지만, 아직도 그들의 믿음이 없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패역(悖逆 - 도리에 어긋나고 順理를 거스름) 곧 구부러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오’라는 그 말씀은 ‘3년 동안 내가 너희 중에 있으면서 천국의 원리를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고 너희를 축복하며 일했다. 그런데 너희가 믿음을 갖는데 얼마나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는 말이냐? 어떤 증거를 더 보여 주어야 너희가 믿겠느냐?’는 뜻이다.
‘패역한 세대여’라는 말은 단순히 그 세대가 하나님께 반역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세대가 비틀리고 왜곡되고 정도에서 벗어 나 있고 생각과 감정과 행동이 그릇 되고 무자비하고 부정직하고 전적으로 잘못된 것을 의미한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이란 표현은 믿음을 잃어버린 세대는 당연히 비뚤어지고 악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것들만 의자하고 사는 사람들은 진리를 알지 못한다. 그들의 생각은 비뚤어져 있고, 그들의 감정은 옳은 것을 옳은 것으로 느끼지 못하며, 그들의 행위는 사악하고 부정직하다. 사도 바울은 이런 세대를 지적하면서 믿음의 식구들에게 이렇게 권면을 했다.
딤후 3:1-5 /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 시대는 물론이고 가장 많은 기적을 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많이 받은 제자들까지 믿음이 없어 간질병 환자 하나 고치지 못한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몹시 아프게 여기신 것이다. 그러나 곧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은 그 간질병 환자를 불러 고쳐주셨다. 지금 이 시대는 그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조용히 나가서 예수님께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여기서 제자들은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그들의 실패의 원인을 예수님께 물었다. 그들의 실패의 원인을 알고자 정직한 질문을 했다. 우리는 어떤 일에 실패하면 두 번 다시 그 일을 거론조차 하기 싫어한다. 이것은 비겁한 일이요 용기가 있는 자세가 아니다. 실패 없이 성공이 없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다. 우리는 실패할 때 솔직히 나의 실패를 인정하고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철저히 조사하여 그 잘못을 고칠 수 있다면 오히려 그 실패야말로 오히려 값진 교훈이 된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나와서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물은 것은 정말 용기 있는 질문이요, 지혜로운 질문이며, 꼭 필요한 질문이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질문들이 많음에도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구하지 못하는 것은 교만한 신앙이요, 죽은 신앙이기 때문이므로 그렇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와서 진지한 질문을 할 적이 있었는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만에 젖어있어서 자신들의 연약함에 대하여 남에게 말하는 것조차 싫어했다.
‘왜 나는 영적인 무력감에 빠져 있는가? 나는 왜 새벽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가? 나는 왜 성경 공부가 하기 싫은가? 나는 왜 기도가 그렇게 힘든가?’ 몇 군데 말씀을 찾아보자.
요 1:11-12 /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요 2:1-5 / [가나의 결혼잔치] 이틀 후 갈릴리 가나 동네에 결혼잔치가 있었다. 그 잔칫집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2) 예수도 제자들과 함께 초대받아 와 계셨다. 3) 그런데 잔치하는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가 이 문제를 예수께 의논하였다. 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은 하는 수 없습니다. 아직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5) 그러나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게' 하고 일렀다.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순종하지 않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은 하인들의 수고가 그만큼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실패도 있다. 그럴지라도 순종하고 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탁구를 하는 분들은 알 것이다. ‘왜 나는 커트 볼을 받을 수 없는가?’ 진지하게 물을 때 아주 쉬운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커트는 커트로 받으면 아주 쉽다. 커트 볼을 무조건 때리려고만 하니까 계속 실패하는 것이다. ‘왜 나는 아니 요즈음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고민을 가지고 하나님께 반문하면서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겠는가?
야고보 사도의 권면도 이러했다.
약 1:5-8 /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바라시는가 알고 싶거든 하나님께 여쭈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후하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결코 여러분을 꾸짖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6) 그러나 하나님께 구할 때는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구하십시오. 의심하는 마음은 바람에 밀려 파도치는 물결과 같아서 침착성이 없습니다. 7) 그런 상태에서 정한 결단은 처음에는 이랬다가 나중에는 저랬다가 하여 매우 불안정한 것입니다. 8) 만일 여러분이 믿음으로 구하지 않는다면 주께 어떤 것을 기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어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힐책성 권면도 했다.
약 4:1-3 / [세상의 친구] 여러분은 무엇때문에 그렇게 싸움을 벌이고 분쟁을 일으킵니까? 그것은 여러분 속에 숨어 있는 악한 욕망 때문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사람을 죽여서라도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빼앗아 가지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시기심에 못 이겨 싸움을 벌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여러분이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그 목적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자신의 쾌락을 구하는 데만 급급해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하는 질문은 예수님의 제자 자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솔직한 질문이야말로 제자들의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갖는 제자의 자세이다.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자세요. 건설적인 자세다.
▶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과거 다윗이 하나님께 여쭤보았던 사건을 너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윗이 사무엘상 23:1-4에서 위태로울 때 어떻게 했는가를 배워서 알 것이다.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한(삼상 23:1-14) 사건을 요약하면 이렇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쳐서 그들의 타작한 곡식을 마구 강탈해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호와께 블레셋과 싸워도 되는지를 물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시자 다윗이 블레셋을 쳐서 크게 물리치고 그일라 주민들을 구한다. 그때 사울은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일라 성읍을 포위하여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다윗이 다시 사울이 그일라 성에 올 것인지, 그일라 사람들이 자기들을 사울에게 넘겨줄 것인지를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시자 곧 그일라 성을 피하여 광야의 요새와 십 황무지로 갔다.
다윗의 형편을 살펴보면 그동안 숨어다니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모처럼 블레셋 군사들을 이기고 아주 크게 승리했다. 그러므로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은 그날 밤에는 다른 데 가지 말고 전쟁에도 이겼으니 그일라 성에서 좀 먹고 마시며 쉬자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께 여쭌 결과대로 즉시 그곳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묻기만 하고 자기 뜻대로 행한다. 만일 오늘날에도 우림과 둠밈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면 자기 생각과 같은 답이 나오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그 결과대로 행하지만, 자기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나온다면 ‘에이! 이게 뭐야?’ 하며 그 결과대로 하려 하지 않고 본래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조금 전에 자신이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질문을 분명히 들으셨으며, 지금 내가 뽑은 흰 돌(우림)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통해 뽑게 하신 것이니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사람들을 설득하여 곧바로 나간 것이다. 그래서 그날 그들은 생명을 건졌다.
하나님께 물었으면 그 결과에 순종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에는 즉시 움직이고, 말씀이 없을 때는 말씀을 주시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바로 살아 있는 참된 믿음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광야 40년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따르는 훈련을 하였던 것이다. 그 후에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뜻을 보이셨으면 다윗처럼 즉시 믿고 순종하는 자가 돼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기만 하라(삼상 23:13-14). 다윗은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십 광야의 산간 지역에도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사울이 날마다 다윗을 찾아다녔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주시지 않았다(14절). 사울이 아무리 왕의 권력을 가졌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보다 더 크시다. 사울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 지혜로우시다. 그러므로 사울이 아무리 힘쓰고 애쓴다고 하더라도 결단코 다윗을 죽이지도 사로잡지도 못한 것이다.
다윗을 도우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그의 일꾼과 백성을 도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기만 하자.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러다 영 망하고 말 것처럼 보일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섬기는 일에만 힘쓰자. 그러면 다윗을 도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도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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