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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열왕기하 5:1-15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20241110)
영상 설교 - https://www.youtube.com/watch?v=r7sOOoVa-4w&t=903s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집 여종으로부터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면 나병이 치료 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에 순종해서 나병이 치료 받았습니다.
오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좀 더 중요한 일들에 관하여 말씀드립니다. 세상에는 중요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1. 겉보다 속이 더 중요하다.
삼상 16:6입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들 중 한 명에게 기름을 부어서 새로운 왕을 세우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갔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실수를 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장남 엘리압을 보니 그의 외모가 왕감으로 보였습니다. 사무엘은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을 삼으려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상 16: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용모와 키를 보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중심을 보지 못하고 외모를 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좋겠지만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흔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모도 중요합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회사 입사 면접에서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뽑습니다. 두 사람의 스펙이 비슷합니다. 같은 학교 같은 과를 비슷한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경력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천사처럼 인상이 좋고 한 사람은 괴물처럼 인상이 나쁩니다. 누가 합격할까요? 100% 장담은 할 수 없지만 당연히 인상이 좋은 사람이죠. 사람들은 그들의 중심을 모르니 당연히 외모를 보고 판단할 것입니다.
사람은 외모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속이 더 중요합니다. 나아만을 보십시오. 그는 외적으로는 존귀했습니다. 1절에 보니 나아만은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아람의 영웅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왕 앞에서 크고 존귀했습니다. 아마도 그의 군복에는 화려한 훈장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옷 속에는 썩어 문들어진 살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모든 세상적인 조건도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나병에 걸린 사람은 하나님 징계를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무조건 마을을 떠나서 외딴 곳에서 살아야 했고, 옷을 찢어 나병환자인 것을 표시하였으며, 사람들과 마주치면 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아람은 이스라엘처럼 율법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나아만은 몸이 썩는 병 때문에 힘든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나아만과 비슷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성공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장점도 많고,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장래도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영적인 나병에 걸려서 영원한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육신적인 성공, 사회적인 인정도 인간에게 필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영혼의 구원입니다. 나아만처럼 세상적인 자랑거리가 많아도 영혼이 죽어 있다면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부자는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고, 거지 나사로는 완전히 실패한 인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였습니다. 부자는 사회적인 성공은 거뒀을지 몰라도 영적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는 살아서는 호의호식 했으나 죽어서는 영원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나사로는 실패한 인생 같았으나 죽어서는 영원한 낙원에 들어가는 행복한 존재였습니다.
사람들은 내면보다 외모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외모보다 내면, 중심을 더 보십니다. 영혼을 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복장을 하고 철저하게 율법을 준행하는 것 같았으나 올바른 중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는 촌뜨기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의 중심을 보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별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는 별 볼일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구원 받은 복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외모는 적당하게 가꾸고 믿음으로 내면을 잘 가꾸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나아만이 아람에만 있었다면 그는 나병을 안고 살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엘리사를 찾아 이스라엘에 갔고, 이스라엘에서 엘리사를 만나 나병이 치료되었습니다. 아람에서는 그의 나병을 고칠 수 없었는데 이스라엘에 갔기 때문에 고친 것입니다.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유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이건 엄청난 축복입니다.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낮춰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세상을 너무나 모르거나 부정적인 사상에 물들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북한에 있다면 우리는 김정은 한 사람을 위한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북한은 표현의 자유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북한 주민 두 사람이 김여정을 보고 “여자가 뭘 안다고...”라고 말했다가 체포 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 부인을 보고 “건희, 건희”해도 처벌 받지 않으니 얼마나 자유가 보장 된 나라입니까?
북한에는 집회 결사의 자유가 없습니다. 북한에는 데모가 없습니다. 북한에서 데모했다가는 끝장납니다. 며칠 전에 민주당은 숭례문과 서울역 사이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를 했습니다. 어제는 43개 친야단체로 구성된 윤퇴진본부에서 서울도심 5만 규모 집회를 한다고 했는데, 얼마나 모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맞서 광화문 애국운동 세력은 ‘맞불’로 10배인 50만 동원령을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10월 27일에 광화문에서 시청 앞과 숭례문을 지나 서울역까지 그리고 을지로와 청계광장, 서서문과 안국동 그리고 여의도에 모여서 포괄적차별금지법 반대 집회를 했습니다. 집회 인원은 주최 측 추산 110만 명, 경찰 추산 23만 명이었습니다. 인터넷신문 ‘코람데오닷컴’은 인공지능 쳇지피티(AI Chat GPT)로 당일 집회 상황의 드론 영상을 참고해 ‘1인당 차지 면적’과 ‘집회 허가 공간’ 등 관련 변수들을 최대한 반영해 인원을 분석한 결과, 현장 참여자는 약 101만 명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보장 되어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주민들의 종교의 자유가 엄청나게 침해를 받고 있습니다. 북한은 기독교 박해지수가 22년째 세계 1위입니다. 성경책을 소유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사형을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유대한민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 집이 내일 이사합니다. 저는 결혼 후 성내동에 살다가 오금동으로 이사했고, 또 마천동과 거여동에서도 몇 년 살았습니다. 내일은 감북동으로 이사합니다. 저는 이사를 하는데 어떤 방해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제 의사에 의해서 자유롭게 이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 주민들은 당국의 허가 없이는 이사가 아니라 이동도 자유롭게 못합니다. 타지역으로 이동하려면 반드시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해외로의 자유로운 출입국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고 자유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는 것이 엄청난 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위치가 중요합니다. 특별히 구원과 심판은 위치가 결정적입니다. 노아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하셨습니다. 세상이 멸망 받던 그 날,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은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방주 밖에 있던 사람들은 멸망당했습니다. 출애굽 할 때 마지막 유월절 재앙은 장자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날 구원과 심판은 당사자의 위치에 의하여 절정 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집 안에 있던 장자들은 죽음의 천사로부터 보호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집 밖에 있던 모든 장자들은 심판 받아 죽었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던 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 줄이 걸린 라합의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라합의 집 밖에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멸망당했습니다. 사람이 구원 받느냐 멸망당하느냐는 그 사람의 위치가가 중요했습니다.
우리들은 위치적으로는 가능하면 자주 오랫동안 교회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며,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입니다.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영적으로는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고후5:17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십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과 능력과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3.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범하기 쉬운 실수 중에 하나가 사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사람들은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나아만은 아람의 왕 앞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아람의 왕도 이스라엘의 왕도 나아만의 치료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나아만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었던 존재들이 있습니다. 나아만에게 진정한 도움을 준 존재들은 누구일까요?
①복된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2절입니다. 나아만에게 엘리사 선지자를 소개해준 사람은 전쟁 중에 잡혀온 작은 계집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는 나아만에게 엘리사를 만나면 나병도 고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그 소식을 듣고 엘리사를 찾아가서 치료받았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나아만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면 나아만은 나병환자로 계속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아만의 집에서 일하는 계집종처럼 복된 소식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 때문에 교회에 오게 되었고, 믿음을 갖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천국에 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복된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합니다. 롬 10:15입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인은 아름다운 소식을 세상에 전하라고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 얻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나아만처럼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나오게 됩니다.
②하나님의 종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라는 하나님의 종을 만났습니다. 그 만남이 나아만에게는 복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저를 만난 것이 큰 복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목회자와의 만남은 중요합니다.
목회자는 복음 위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영원한 천국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마 15:14입니다.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주님께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겨냥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에게 그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 걸림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 엄청 세련된 자들이었지만 주님이 보실 때 그들은 영적으로 맹인들이었습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집니다.
맹인 된 인도자인 신천지 이만희를 따르는 자들은 영원한 구덩이인 지옥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작년 12월에 JMS 정명석은 여신도들을 성폭행하고 강제추행한 혐의로 징역 2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작년에 그의 나이가 78세였으니 100살은 되어야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정명석 같은 영적인 맹인을 만난 신도들은 참으로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여러분은 저를 위하여 기도해주셔야 합니다. 제가 영적인 맹인이 되지 않도록, 제가 영안이 열려서 복음의 빛 가운데서 행하며, 여러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셔야 합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의 인생에 진정한 도움이 된 것처럼 저도 여러분의 인생에 진정한 도움과 축복의 통로가 돼야 합니다.
③조언자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 때문에 맘이 상했습니다. 요단강은 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합니다. 물도 흙탕물입니다. 우리 동네 성내천이 훨씬 더 아름답고 물도 맑습니다. 나아만은 분노했습니다. 자기 나라에 가면 요단강보다 훨씬 나은 강들도 있는데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하니 화가 났습니다. 나아만은 맘이 상해서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13절에 보니 그때 나아만의 종들이 나아만에게 조언을 했습니다.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했다면 행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물며 씻어 깨끗하게 하라는 말인데 못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나아만은 종들의 조언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에 들어가서 일곱 번 씻고 나병이 치료 되었습니다. 나아만이 종들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살다가 비참하게 죽었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쓴 소리를 잘 못합니다. 저는 감동이 오면 할 소리는 하지만 하고나서 후회합니다. ‘좀 더 강하게 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표현해서 죄송한데요. ‘성도들의 잘못된 버르장머리를 확 뜯어고치도록 말해야 했었는데...’ 여러분! 저를 위하여 기도해주세요. 제가 책망할 때는 강하게 책망하는 목사가 되도록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여러분에게 조언을 잘하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책망하는 설교를 해도, 조언하는 설교를 해도 여러분은 절대 시험에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딤후 3:16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의 기능 네 가지가 나옵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입니다. 이 중에 하나가 책망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교훈과 책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를 바르게 하며 의로 교육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책망의 설교도 잘해야 합니다.
④하나님입니다. 15절에 보면 나아만이 나병이 치료된 후에 엘리사에게 가서 엘리사에게 하나님에 관한 고백을 합니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나아만은 나병이 치료되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나아만은 치료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큰 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면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임금을 만나고, 대통령을 만나고, 위대한 인물을 만나는 것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영생이 달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교회에 오십니까? 목사 만나로 오십니까? 마목사는 별 볼일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쓰시니 목회라는 귀한 사역을 하는 것이지 인간적으로는 보통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오셔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4. 내 생각보다 말씀이 더 중요하다.
일국의 국방장관이 선지자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가보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서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말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과 태도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11,12절에서 나아만은 자기 생각을 말합니다. 자기 생각에는 엘리사가 맨발로 달려와서 힘을 다하여 안수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자기 나라의 강이 요단강보다 더 나으니 그곳에서 씻는 것이 더 좋겠답니다. 그 생각은 자신을 죽이는 생각이었습니다. 만약 나아만이 자신의 생각대로 했다면 나병은 치료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엘리사의 말에 능력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아만이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엘리사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니 나병이 치료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세상의 상식이나 자기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말씀이 하라고 하면 하는 것이고 말씀이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의 기준입니다.
제 아들 모세가 40일 금식 마지막 날 꿈을 꾸었습니다. 큰 뱀이 모세를 삼키려고 하는데 천사가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아라”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으니 뱀이 죽었습니다. 성경의 모세도 부르심을 받을 때 그런 체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으니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뱀은 상식적으로 머리를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꼬리를 잡으라고 하셨고 모세는 상식과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뱀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우리는 상식이나 자기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5. 말씀을 받는 것보다 순종이 더 중요하다.
나아만이 처음에는 엘리사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4절에 보면 그가 종들의 조언을 듣고 마음을 고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만약 나아만이 불순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냥 나병으로 살다가 끝났을 것입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나병이 치료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음성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이 들은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자기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당사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한다면 당연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기도 중에 혹은 설교를 듣다가 혹은 생활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기독교는 감동이 중요합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 되었잖아요. 우리는 기도 중에 혹은 설교를 듣다가 혹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받습니다. 감동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강력한 성령의 감동을 받았어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매를 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아말렉과 전쟁할 때 모든 것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불순종하여 심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읽고 감동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6. 체험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15절에 보면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나아만은 나병이 치료되는 놀라운 체험으로 모든 것을 끝낸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몸의 치료만 받은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았습니다.
체험은 목적이 아닙니다. 체험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신앙적인 체험이 목적이고 자랑거리입니다. 체험도 중요하지만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체험은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 받거나 기도응답을 받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다가 신비한 경험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이 단지 우리의 생활에 힘이 되고 문제를 푸는 열쇠만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변화 되어야 합니다. 나아만은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요 2:11입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보여주신 표적이었습니다. 주님의 사역 초창기에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주님을 잘 몰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특별한 랍비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남들과 좀 다른 특별한 선생님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사건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주님이 보여주셨던 표적은 제자들을 신자로 만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체험을 통해서 주님을 더 알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은 주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점점 자라야 합니다. 요 17:3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헬라어로 ‘γινώσκω’ 기노스코입니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제가 생각할 때 가장 합당한 해석은 '인격적으로 알다'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친밀함을 통해서 인격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알면 영생이 없습니다. 믿음이 동반된 앎이어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 속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며 주님의 존재와 능력과 성품과 공로를 알게 되고 그것이 나에게 적용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진짜 주님을 아는 사람은 머리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예쁘게 생긴 아가씨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그 아가씨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이름, 생년월일, 고향, 출신학교, 키와 몸무게, 혈액형, MBTI, 좋아하는 음식, 취미생활, 종교와 직업, 가족관계와 주변 친구들의 이름 등 온갖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와 만나지 못했고 말 한 마디 못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자매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 자매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가 자매를 만났습니다. 많은 대화를 나누다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뜨겁게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대화하며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그 젊은이는 자매를 아는 것입니다.
저는 1988년에 제 아내를 만났습니다. 뜨겁게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후에 저희 부부는 거의 24시간 붙어살았습니다. 애인처럼 친구처럼 살았습니다. 둘이 많은 대화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 상의합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서로를 너무나 잘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이렇게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며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교회에 와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세상에서도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과 사랑하며 주님과 상의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살 때 진짜 주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나병환자 나아만이 엘리사를 통해서 나병이 치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 사건을 통해서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1. 겉보다 속이 더 중요하다.
2.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3.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①복된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②하나님의 종입니다. ③조언자입니다. ④하나님입니다.
4. 내 생각보다 말씀이 더 중요하다.
5. 말씀을 받는 것보다 순종이 더 중요하다.
6. 체험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첫댓글 존경하는 목사님 저는 이본문으로 설교 많이 했는데
새롭습니다. 저절로 탐복 됨니다 귀한생명 말씀 참으로 고맙습니다
편안밤 되십시요